〈 227화 〉 227 저 그런 사람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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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상황이 지독히도 현실감 없게 느껴지는 건 대체 무슨 이유 때문일까.
"옷은 저쪽에서 갈아입으면 돼. 창고로 쓰는 방이라 먼지가 좀 쌓였을 수도 있긴 한데."
"집에 창고용 방도 있어요? 이야, 성현 씨 성공했네."
"... 꼭 그런 표정으로 말해야겠어?"
"표정이 뭐가 어때서요."
"입꼬리를 좀 올려봐."
그렇게 말하면, 혜찐은 양손 검지로 자기 입꼬리를 밀어올렸다.
겉보기에도 부드러운 볼살은 별로 힘을 준 것 같지도 않은 손가락에 잘도 밀려 올라갔다. 삽시간에 혜진의 얼굴에 인공적인 웃음이 만들어졌다. 입은 웃고 있는데, 눈은 여전히 멀뚱히 성현을 쳐다보고 있는. 그 속내에 숨겨진 뻔뻔함을 알면서도 성현은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아무튼, 그에게 있어서는 조화도 훌륭한 꽃이었다.
"올렸는데 왜 눈을 피해요."
"... 니 뻔뻔한 얼굴 보기 싫어서."
"아하. 그래도 웃기 힘든 걸 어떡해요? 억지로 웃는 것도 이상하잖아."
마음에도 없는 변명이 통한 건 다행이었다.
성현은 외투를 벗어 옷걸이에 걸쳤다.
누군가를 집에 초대하는 일은 성현이 가장 꺼리는 일 중 하나였다. 집을 어지럽히는 걸 떠나서, 단순히 지극히 개인적인 공간에 타인을 들인다는 발상 자체가 꺼림칙하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그건 상대가 누구든 간에 마찬가지였다. 친분이 별로 없는 동료 스트리머나 관계자는 물론이요, 중학교 시절부터 절친했던 친구들까지. 집에 누군가를 초대한 기억이 까마득하게 느껴지는 건 단순한 기분 탓이 아니었다.
집을 마련한지 일 년. 이삿짐센터 직원을 제외하면 집에 드나든 사람이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 흔한 집들이도 하지 않았으니. 그건 누가 초대하는 상대가 누구냐의 문제가 아니라 성현의 바꿀 수 없는 성향에 가까웠다.
그러니까 지금 성현의 집에 혜진이 서있는 광경은 쉽게 상상할 수 있는 순간이 아니었다. 아니, 상상은 했을까. 혜진이 나타났던 꿈을 헤아리면 한 번쯤은 비슷한 장면이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성현은 복잡한 심정으로 이미 잊어버린 꿈을 되새김질했다.
"방송 몇 시에 키기로 했어요? 미리 준비해 될 거 아니야."
"한 시간 반 정도 남았어. 아직 충분해."
"생각보다 오래 걸릴걸요? 화장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라니까."
"그렇게 오래 걸려? 그냥 대충 해. 솔직히 나한텐 퀄리티 기대하는 것도 아니잖아. 포인트만 잡아서 해줘."
"무슨 소리예요?"
혜진이 성현을 바라보는 얼굴에서 의구심이 엿보였다.
"해줘? 애도 아니고 누가 누구한테 뭘 해줘요. 화장도 스스로 해야지. 화장품은 빌려드릴게."
"아니... 내가 화장을 어떻게 해? 태어나서 만져본 화장품이 스킨로션밖에 없는데."
"저랑 비슷하네요. 저도 화장품 만진지 얼마 안 됐어요."
저건 또 무슨 개소리를.
성현은 테이블에 펼쳐둔 분홍색 기모노를 재차 확인했다. 남자인 자신이 입어도 품이 넘쳐날 것 같은 거창한 복장은, 겉으로 드러나는 화려한 무늬부터 보는 사람을 압도했다. 꽃밭이 떠오를 정도로 다소 과한 꽃무늬. 캐릭터 이름이 '키리'라고 했었나. 애니를 보는 취미를 가지지 않은 성현으로써는 저걸 입고 등장하는 캐릭터에 대해서 일말의 친밀감도 품을 수 없었다.
제정신인 상태에서 저걸 입고 사람들 앞에 나서지는 못하겠지. 하물며 거기에 분장까지 더한다면...
머리가 아픈 문제였다. 자기 손으로 서툴게 분장을 하는 쪽이나, 훌륭한 실력으로 캐릭터와 똑같은 화장을 하고 등장하는 쪽이나. 뭐가 더 좋다고 확신할 수도 없었다. 어차피 캠 앞에서 광대 노릇을 하는 건 어느 쪽이나 마찬가지이지 않은가. 사실 제대로 화장을 했다고 해서 굴욕감이 줄어드는 건 아닐 텐데.
"지금이라도 화장 잘 하는 지인 한 명 부르는 건 어때요? 왜, 꽃닢님이 뷰티 관련 컨텐츠 하시는 거 같던데"
"씹... 그건 진짜 아니야."
"뭘 그렇게 싫어해. 그럼 알아서 해야죠."
단번에 선택지를 좁혀버린 혜진은 태연한 얼굴로 쇼핑백에서 자신의 코스튬 의상을 꺼내들었다. 빨간 드레스를 자기 눈높이까지 들어 올리고 묘하게 주춤거리는 꼴이, 혜진도 이 상황을 아무 스스럼없이 수용하고 있지는 않는 듯했다.
기쁨은 나눌 수 없지만, 고통은 나눠 가질 수 있다고 했다. 주섬 거리며 드레스나 스타킹 따위를 정리하는 혜진을 보고 있으면 그나마 가슴이 편하게 가라앉았다.
미니 드레스. 성현은 지금껏 혜진이 저렇게 과감한 복장을 입은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처음 만났을 때도, 그다음부터도. 떠올려보면 혜진은 언제나 단정한 옷차림을 입은 채로 나왔던 것이다. 그건 드물게 캠 방송을 할 때도 크게 다르지 않았고.
시청자 투표 결과로 선정한 벌칙 복장이 이렇게 결정된 것도 납득하지 못할 바는 아니었다. 이 투표를 위해 자신의 팬카페 회원 수가 하룻밤 사이에 몇 천명 가량 늘어난 것도. 지난 며칠간, 방송을 켜기만 하면 벌칙 방송과 관련된 이야기로 채팅창이 시끌벅적했던 것도. 그래서인지 평소보다 시청자가 훨씬 늘어났던 것도... 모두 다.
반쯤 홧김에 일을 저지른 성현도, 당연히 여기까지 예상하지는 못했다. 벌칙 방송이 코스프레 방송으로 흘러갈 거라고 누가 알았겠나. 사실, 혜진의 존재가 아니었다면 분명 그는 지금쯤 다른 벌칙을 수행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남자의 코스프레 방송 따위를 누가 기대하겠는가. 노르드가 여기 포함된 순간 모든 게 뒤바뀐 것이다. 성현 자신이 시청자의 입장이었어도, 아마...
성현은 고개를 좌우로 세차게 저었다.
"... 한 번만 도와주라. 화장은 진짜 못하겠다."
스타킹을 눈앞에 두고는 아무렇게나 잡아당기는 괴이한 짓거리를 반복하던 혜진은 그제서야 성현이 있는 곳을 바라봤다. 아무런 무늬 없는 회색 후드 티와 진청바지. 역시 너무나도 편한 복장이다. 패션의 완성은 얼굴이라고 하던가. 혜진은 어떤 옷을 입고 있어도 모델 같은 느낌을 선사하고는 했다. 그럼, 저 미니 드레스는 대체 어떨지. 성현은 마음 한편에서 자꾸만 고개를 내미는 기대감을 차마 완전히 부정할 수 없었다.
"뭘 그렇게까지... 알았어요. 그럼 이따가 해드릴게. 준비 시간 생각하면 옷은 미리 입어놔야 될 거 아니야."
"그래, 고마워."
아무래도, 찬물이 많이 필요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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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발."
생각보다 더한 고역이었다.
성현의 집, 집주인이 창고라고 설명한 방 안이다. 먼지가 많을 수도 있다는 당부와는 달리, 방 내부는 제법 깔끔하고 정돈된 상태였다. 구석자리부터 차근차근 쌓아올린 종이 상자들. 그 옆으로는 내부가 비치는 투명한 플라스틱 상자 안에 스피커 따위의 전자기기들이 가지런히 나열되어 있었다. 뜯지 않은 키보드, 마우스... 당장이라도 뜯어서 사용할 수 있게 준비해둔 상비품일까. 오와 열을 맞춰 정렬된 상태만 봐도 집주인의 성품을 알 수 있겠다 싶은 창고. 사실 창고라는 표현도 어울리지 않았다.
방 측면부에는, 제법 연식이 느껴지는 오래된 소파 하나가 자리 잡고 있었다. 이게 창고 방에서 가장 큰 가구였다. 크기 때문에 쉽게 버리지 못하고 보관하고 있는 건지, 아니면 간혹 찾아올 손님을 대비해 침대 구실로 남겨둔 가구인지. 접근하면 오래된 가죽 특유의 쾌쾌한 냄새를 풍기는데, 그것도 기분이 나쁜 수준은 아니었다. 등받이나 팔걸이 부위에 먼지가 쌓여있지도 않고. 이 정도면 주기적으로 청소를 하는 게 분명했다. 창고 방도 매번 청소를 한다고 생각하면, 성현에 대한 존경심이 생겨날 지경인데.
나는 지금 그 가죽 소파에 앉아있는 상태였다. 양 무릎에 팔꿈치를 올려두고, 깍지 낀 손에 턱을 괴고서. 겉에서 보면 마치 심각한 고민에라도 잠긴 모습으로... 그리고 그건 사실이었다. 아무튼 내가 지금 심각한 건 확실했으니까.
내가 앉은 자리 바로 옆, 고이 모셔둔 드레스의 존재가 그 원흉이었다.
엄밀히 생각하면, 이건 자기 객관화가 부족한 탓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내용물 따위는 고려하지 않고 봤을 때. 혜진의 곱상한 외모와 슬렌더 형의 몸매는 놀랍게도 대부분의 패션을 훌륭히 소화하고는 했는데 그건 당연히 여성스럽고 과감한 의상에도 적용될 게 분명했다. 아직 직접 입어보지는 않았지만, 어림짐작할 수 있는 것들이 있지 않나. 혜민이 선물이라며 가져오는 옷가지들 사이에는 당연히 그렇고 그런 의상도 포함되어 있던 것이다. 제 언니를 끔찍하게도 생각하는 동생은, 매번 언니에게 잘 어울리는 옷만 챙겨오고는 했으니... 나풀거리는 치마나 원피스도 어울리지 않을 리는 없으리라.
그리고 그건 지나치게 과감하고 급진적으로 보이는 이 빨간 드레스에도 똑같이 적용되는 말이었다. 색깔이 너무 튀는 감이 없지는 않지만, 입었을 때 어울리지는 않을지언정 이상할 정도로 흉측하지도 않겠지. 그러니 내가 당장 드레스를 입고 밖으로 나가도 사회적 평판에 큰 해를 입는다거나 하는 대참사가 일어날 일은 없다는 말인데.
왜 이렇게 망설이게 되는 건지. 노출이라는 것도 엄청난 용기를 필요로 하는 행위였다. 아니, 이런 곳에 용기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게 옳다고 인정해 준다면.
스마트폰을 확인한다. 약속된 방송 시간까지는, 약 사십 분 정도의 시간이 남은 시점. 화장을 해달라고 징징대던 성현을 고려하면 지금 당장 옷을 갈아입고 나가는 게 맞았다. 나만 생각하더라도 단순히 옷을 차려입는 선에서 모든 준비가 끝나는 게 아니었으니. 화장도 그렇고, 저 새빨간 컬러 렌즈도 그렇고... 남은 소품들만 헤아려도 숨이 턱 막힐 지경이다.
시간만큼 사람을 가혹하게 채찍질하는 것도 없는 법이다. 소파에서 일어나 잠깐을 멍청하게 서있던 나는, 이를 악물고 입고 있던 옷가지부터 깡그리 벗어던졌다. 한순간 서늘한 감각이 전신을 에워쌌다. 보일러와 가장 멀리 떨어진 탓일까. 창고 방의 공기는 유난히 싸늘했다.
그래, 사람이 살면서 이런 옷도 저런 옷도 입어볼 수 있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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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러니까, 지금은 입보다 키보드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성현은 생각했다.
구석에 박혀있던 원형 거울을 찾아놓고 거실 테이블 앞에 앉아, 혜진을 기다리기를 몇 분. 성현은 방문을 열고 나온 혜진과 정확히 눈이 마주쳤다.
평소와는 인상부터가 달랐다. 아직 화장을 고치지도 않았을 터인데.
무릎 위를 덮을 듯 말 듯 내려오는 미니 드레스와 검정 스타킹. 목뒤로 넘긴 장발 때문인지 목에서 쇄골, 어깨에서 팔로 이어지는 라인이 그대로 드러났다. 살색보다는 하얀색에 가깝게 느껴지는 피부색. 도드라진 쇄골에 잠깐 시선을 뺏긴 성현이 황급히 고개를 올렸다. 목에는 검은색 초커를 착용했는데, 성현은 그 노골적인 디자인이 현실로 구현된 모습을 보고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새빨간 드레스는 혜진의 하얀 피부와 보색 관계를 이루는 듯했다. 드레스에 화려한 무늬가 새겨진 것도 아닐 텐데, 서로가 서로를 더 강렬하게 만드는 것 같은 색 배합이 시선을 잡아끌었다. 잘록한 허리선. 상반신에서 하반신으로 이어지는 옷매무새가 날렵하고 잘 빠져서, 드레스가 마치 맞춤 제작으로 완성된 옷처럼 느껴졌다.
드레스 치맛자락에서 뻗어 나온 다리는 가늘고 길었다. 빨간 드레스와 대비되는 검은색 스타킹도 매끄러운 다리선을 감출 수는 없었다. 자세히 보면, 혜진의 다리는 반쯤 겹쳐져 있었는데 뭐가 불편한지 맞닿은 무릎을 조금씩 비비고 있었다.
혜진은 양손으로 허리춤의 치맛자락을 아래로 내려 누르는 것처럼 붙들고 있었다. 성현과 눈을 마주친 즉시 내리깐 고개는 다시 올라올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 상태로 가만히 서있기를 몇 초. 성현이 마침내 혜진의 얼굴에서 옅은 홍조를 발견했을 무렵.
성현은 허벅지를 강하게 꼬집은 다음, 연거푸 찬물을 목구멍으로 들이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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