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8화 〉 228 정말 초조하면 정신을 놓고는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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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 보면, 과거의 나는 남의 시선에 둔감한 편이었다.
아니, 조금은 뉘앙스가 다를까. 그보다는 주목을 받을 일이 별로 없었다고 말하는 쪽이 더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누군가 자신을 뚫어지게 바라본다는 건 의외로 쉽게 경험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나도 그런 경험을 떠올리기 위해선 발표를 위해 사람들 앞에 나섰던 학창 시절을 떠올려야 할 지경이었던 것이다. 성인이 되고 나서는, 글쎄. 건수를 찾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나를 주시하던 선임이나 직장 상사의 눈초리만 아른거릴 뿐. 많은 사람들에게 주목받던 기억은 잘 떠오르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다. 애초에 주목받을만한 포지션에 서있던 적이 별로 없었던 사람이었으니.
제 입으로 평범하다는 소리를 내뱉는 사람이 우습게 느껴질지라도, 실제로 세상은 평범한 다수의 사람들로 구성된 법이었다. 어느 집단이나 사람이 모인 무리는 주목을 받는 소수와 그렇지 않은 다수로 구성된다. 나는 대체로 다수에 포함된 편이었다. 주목을 받기보다, 주목을 받는 사람에게 시선을 보내는 쪽. 그건 썩 괜찮은 포지션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딱히 혼자 뭔가를 열심히 할 필요도 없이, 주변을 보고 따라 하기만 하면 그만인 위치. 함께 손뼉을 치거나 손가락질하는 일에 지성은 필요하지 않았으니까. 부담이나 책임감 따위의 짐을 짊어질 이유도 없었다.
나는 모든 사람이 제 삶에서 주인공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는 다소 과장된 희망 문구를 그다지 신뢰하지 않았다. 사회에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수 있는 무대는 한정되어 있었으며, 어딜 가나 극의 주인공이 될 수 있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했다. 거기에 다소 불만을 느꼈던 시절이 있었을지언정, 나는 굳이 무대 가운데에 서기 위해 노력하지는 않았다.
관심을 받을 때 느낄 수 있는 즐거움보다 그로 인해 찾아올 부담감이 더 무거울 거라고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던 때였다. 그런 내 생각이 어디서 기원했을지는 나도 확신할 수 없었다. 단순히 주목받을 능력이 부족한 제 자신에 대한 비겁한 변명이었는지, 아니면 진심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받는 일을 꺼리고 있던 건지. 어쩌면 둘 다 맞을지도 모르겠다. 생각은 똑 부러지게 정리하기 힘든 영역이지 않은가.
그러니까 혜진이 된 이후로 경험한 모든 일들이 더 극적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천성이나 태생적이라는 말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부정할 수 없는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는 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세상에는 티를 내거나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아도 주목을 받는 사람이 존재한다고. 중력이 땅을 밟게 하듯, 자연스럽게 이목을 집중시키는 그런 사람.
그래, 이쯤되면 인정할 수밖에.
"자세부터가 섹스 어필이네, 이 년."
"... 말을 좀."
"뭐요."
"... 아니. 내가 미안하다."
성현의 집 거실 테이블 앞이었다.
테이블 위, 어디서 가져왔는지 잔금이 가득한 원형의 탁상 거울 속에서 창백한 얼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옅은 화장기를 머금고 있는, 하얗게 질린 갸름한 얼굴. 뭐라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 그건 나였다. 천장에서 내리쬐는 형광등을 제대로 받고 있는 탓에 더 하얗게 보이는 얼굴이, 지금 내 심정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것 같았다. 백지가 되어버린 머리통. 생각이란 걸 다 던져버리고 싶은 심정.
방송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 이 파격적인 코스프레를 완성시키고자 화장품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나. 상황 자체가 괴이하기 짝이 없었다.
의식을 하지 않으려고 해도 맨 다리에 착 달라붙는 스타킹의 감촉, 목을 감싼 초커의 압박감, 훤히 드러난 팔뚝에서 느껴지는 불쾌한 서늘함을 외면하기 힘들었다. 드레스의 어깨 끈은 왜 이리 고정되지 않고 움직이는 건지. 조금만 끈이 움직여도, 그 밑에 감춰둔 속옷 끈이 밖으로 드러나는 터라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앙다문 입술과 찌푸려진 미간에서 내면의 짜증이 대놓고 새어 나왔다.
'릴리스'라고 했던가. 참고를 위해 인터넷을 서칭해서 띄워둔 캐릭터가 핸드폰 액정 속에서 제 존재감을 내비쳤다. 이름부터 캐릭터의 성격이 묻어 나오는 요망한 년. 내가 입고 있는 옷과 동일한 옷을 차려입고는, 화면 밖으로 노골적인 눈웃음을 흘리는 꼴이 인상적이다. 똑같은 옷을 입고 있는 나와 차이가 있다면 이 년은 드레스의 어깨 끈을 고의적으로 반쯤 내리고 있다는 점이겠지. 소년 만화라더니, 소년 만화에서 허용할 수 있는 최대치로 섹스 어필을 하고 있는 상태. 왜 인기가 있는지 알만도 했다.
화장을 어떻게 해야 할지 참고하기 위해 찾은 건데, 별로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캐릭터의 화장이라는 건 애매하기 짝이 없었다. 사실상 그림을 그리는 일과 비슷한 것 같기도 하고. 성현이 코스프레한다는 캐릭터의 눈 화장처럼 특징적인 부분이라도 있으면 그걸 살려볼 텐데, 내 캐릭터에는 그런 것도 없더라. 결국 나는 그나마 개성적인 눈꼬리 부분이나 재현하고자 아이라이너를 들어 올렸다. 눈 다음은, 쥐라도 뜯어먹은 것처럼 새빨간 입술 정도일까.
얼굴에 그림을 칠하는 꽤나 섬세한 작업을 하고 있자니, 그나마 머릿속의 잡념이 사라지는 기분이 들었다. 역시 사람은 뭔가에 집중하고 있어야 정신을 차리지. 잠깐 머릿속에서 컴퓨터 책상에 앉아 열심히 나이트폴을 플레이하는 내 모습이 떠올랐다. 일종의 현실도피라는 걸 깨닫고 금방 흩어내버린 상상이지만.
"... 오."
그리고, 아무리 화장에 집중을 한다고 해봤자 저 은근한 시선을 완전히 무시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뭘 봐, 요?"
"아, 미안. 누가 화장하고 있는 걸 처음 봐서."
"염병하지 마세요. 저번에 대회장에서 메이크업했을 때 봤을 거 아니야."
"그건 조금 경우가 다르지. 근데 너 자꾸 입이 거칠어진다?"
"캐릭터 시뮬레이션하고 있는 거예요. 더 완벽한 코스프레를 위해. 메소드 연기."
"... 너 그 만화도 모르잖아?"
평소 같으면 아무렇지 않게 생각했을 대화의 핑퐁조차 뭔가 미묘하게 다가왔다. 말을 나누는 중에도 얼굴을 마주하기가 쉽지 않았다. 어느샌가 나도 모르게 손끝으로 책상을 두드리고 있다거나, 발끝을 문지르고 있다거나. 가슴도 근질근질 거리는 게... 아무리 봐도 이건 수치심에 가까웠다.
생전 경험할 일 없던 노출이라는 게 불러일으킨 수치심. 길거리에서 과감하게 살갗을 드러내고 다니는 사람들에게 약간이나마 존경심을 느낄 정도였다. 대체 어떤 정신으로 아무런 부끄럼 없이 몸을 드러내놓고 다니는지.
"옷, 바꿔 입을래요?"
"... 이제 안 볼 테니까 그런 끔찍한 말 좀 하지 마라."
반쯤 진심이 담긴 내 제안을 듣고 나서야 쓸데없이 부끄러움을 유발하는 인남캐가 고개를 돌렸다.
화장을 얼추 끝냈을 때, 거울 앞에는 다소 낯선 인상의 여성이 앉아있었다.
화장을 어떻게 하냐에 따라 사람의 인상이 천차만별로 변한다는 건 옛 저녁부터 깨달은 사실이었다. 맨 얼굴이 예쁘다고 하는 사람도, 얼굴에 분을 바르면 그것보다 더 예뻐지는 법이니까. 화장법은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무궁무진해서, 나중에는 괜히 메이크업 분야에 전문가가 존재하는 게 아니라고 깨닫게 될 정도였다. 거기에 비하면 아직도 화장품 종류를 제대로 구분하지도 못하는 내 수준은 얼마나 밑바닥에 있는 건지. 사실 아직도 익숙해지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서툰 지식을 커버할 수 있는 손재주가 있는 덕인지, 아니면 본판이 워낙 잘 받쳐주는 덕인지. 내가 거의 최초로 시도한 짙은 메이크업은 의외로 그럴싸하게 느껴졌다. 일상적인 메이크업이 아닌 조금 특수한 경우라 어색한 느낌이 덜한 걸까. 안 그래도 날카롭던 눈동자에 짙은 선과 아이섀도를 더하니 다소 퇴폐적인 느낌이 맴도는 것도 같았다. 뭔가, 이 낯짝을 하고서 밖을 돌아다니면 안 될 거 같은 그런 느낌. 캄캄한 밤이 어울리는 얼굴이다.
거기에 확신을 담을 수 없는 건 아무래도 거울에 비추고 있는 게 내 얼굴이기 때문이다. 내가 보는 내 얼굴과 타인이 보는 내 얼굴은 다르게 다가올 수밖에. 나는 그럴싸하다고 느끼는 이 면상이, 타인에게는 어떻게 비칠지 확신할 수 없었다. 이상한 것 같지는 않지만... 누군가는 어색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내가 화장을 못하는 건 사실이고.
"... 음. 지금 몇 시예요? 나름 빨리한다고는 했는데."
"..."
"성현쿤?"
"... 아. 뭐라고?"
혹시 졸았나? 망할 놈.
알 수 없는 억울함에 성현을 쳐다보면, 의외로 졸았던 기색은 찾아볼 수 없었다. 멍하니 내가 앉은 곳을 주시하고 있는 모습. 화장을 끝내가는 내 모습을 보고 뒤이어 찾아올 자신의 운명에 회의감이라도 느끼고 있던 건지. 그렇게 생각하면 동병상련인 처지에 동정심이 꿈틀거리며 일어났다. 너무 몰아세우는 건 그만둘까.
"몇 시냐고요."
"음, 아. 십 분, 십 분 남았는데..."
"진짜로? 지각 확정인데요, 이거."
"아니, 괜찮아. 어차피... 아니다. 그냥 마음 편하게 먹어. 늦어도 되니까."
평소 방송 시간은 철저하게 지키는 사람이 답지 않은 소리를 내뱉는 게 두려울 지경이다. 나처럼 반쯤 정신을 놓기라도 한 걸까.
십 분. 내 화장에 걸린 시간을 고려하면, 제시간에 맞춰 방송을 켜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시간이다. 어중간하게 남았으면 초조함이라도 생겼을 텐데. 아예 불가능하다는 판결이 떨어지고 나니 별로 급하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어차피 벌칙 방송인데 조금 불타는 것 정도야 감당할 수 있는 일 아닌가. 거기에 내가 하고 있는 꼴을 보면, 될 대로 되라는 마음은 더 깊어져만 갔다. 어차피 노르드 닉네임으로 방송을 하는 것도 아닌데. 뒷감당은 칼고가 알아서 하겠지.
"나는 몰라. 그럼 여기 앉으세요. 칼고쿤도 화장해 줄 테니까. 아, 불태우겠다는 거 아님. 하하"
"... 너 진짜 정신 나갔구나. 정색하고 웃는 소리 내지 마. 그거 무섭다고."
뭐라 투덜대는 성현을 잡아끌어 내가 앉았던 의자에 앉혔다. 거울은 필요 없으니 치우고, 앉은 채로 정확히 나를 바라보는 자세. 남한테 화장을 해준다는 사실이 이렇게 어색할 수 있는 건지. 멀쩡한 남자 얼굴을 가까이에서 마주하는 건 꽤나 곤욕스러운 일이었다. 나도 모르게 손을 뻗어 성현의 두 눈을 가려버렸다.
"해 줄 테니까 눈 감고 있어봐요. 머리 자를 때처럼. 그게 예의야."
"나는 머리 자를 때 눈 안 감는데?"
"또라이셨네요?
"뭐?"
"됐고 눈 감아요, 그냥. 눈 뜰 때마다 아이라이너로 동공 칠해줄 테니까."
"너는 니 말이 얼마나 농담 같지 않은지 느껴봐야 돼."
"당연히 농담 같지 않지. 진담이니까."
"..."
성현은 그제서야 재갈이라도 문 것처럼 입을 다물었다. 더불어서 눈도 함께. 콧구멍을 제외하고 얼굴에 있는 구멍이 전부 닫힌 걸 보고 나서야, 조금 마음이 편해졌다. 머리 자를 때 눈을 부릅뜨고 있는 손님을 보면 이발사도 그렇게 부담스러울 수 없을 거다. 가위로 위협을 해서라도 눈을 감게 하고 말지.
눈을 감은 성현을 뒤로하고, 성현이 코스프레하는 캐릭터를 검색했다. 언제 봐도 화려한 기모노 복장. 검색하자마자 처음으로 뜨는 이미지는 기다란 검 두 자루를 멋들어지게 꼬나 쥔 모습이었다. 진정한 코스프레를 지향한다면, 저렇게 검까지 들고 나와야 하는 게 아닌지. 거기까지 생각했다가 내 처지를 확인하고 쓰잘데기 없는 생각을 다 지워버렸다. 고증을 파고들수록 불리해지는 건 내 쪽이겠지. 굳이 직접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캐릭터성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기모노와 어울리는, 선홍빛에 가까운 색조의 눈 화장. 손에 잡히는 대로 긁어온 화장품 더미를 뒤적거리다, 그나마 붉은빛이 감도는 걸 찾아냈다. 붉다기보다 적갈색에 더 가까운 느낌이지만, 특별히 준비하는 게 아니고서야 빨간 아이라이너가 있을 리가 없지. 내 마음대로 타협을 하고선 화장품을 들어 올렸다. 남의 얼굴에 마음껏 색칠을 할 수 있다는 게 여간 신기한 경험이 아니었다. 이번 벌칙으로 그나마 건진 게 있다면 지금 이 순간이겠지.
"자, 긴장 푸시고... 들어갑니다."
"큽, 쓸 데 없는 말 하지마. 내가 웃으면 화장 망가질 거 아니야."
"그건 어차피 내 손해가 아니잖아요."
"한마디를 안 져요."
흘끗, 한 번 시계를 확인하고 다시 성현의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방송 약속 시간... 약 5분 전. 이 꼴로 방송한다는 사실을, 아직 제대로 실감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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