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9화 〉 229 개봉 박두
* * *
[칼고님 문열어주세요 ]
[벌칙받기싫어서 튀었노?]
[]
[감히노르드랑합방?감히노르드랑합방?감히노르드랑합방?감히노르드랑합방?감히노르드랑합방?감히노르드랑합방?감히노르드랑합방?]
[채팅창 온도가 뜨겁네요;;]
[노르드 릴리스 코스프레하는거 ㄹㅇ임? 상상이 안되는데]
[방송 시작도 안했는데 몇명이나...]
[노르드내놔노르드내놔노르드내놔노르드내놔노르드내놔]
[노르드님 소식에 어그로가 ㅋㅋ]
[코스프레 너무 기대된당]
[칼고는노르드를뿌려라칼고는노르드를뿌려라칼고는노르드를뿌려라칼고는노르드를뿌려라칼고는노르드를뿌려라]
[채팅창 어지럽네]
시계 분침이 똑바로 섰다가 다시 땅을 가리킬 즈음. 이미 정각은 넘어선지 오래였다.
평균 시청자가 몇천 명을 넘어서는 스트리머의 경우, 방송에 일종의 팬덤이 만들어지기 마련이다. 방송이 시작할 시간이 되면 알람이 울리지 않아도 채팅창에 찾아와 대기하고 있는 애청자 무리들. 그런 시청자는 스트리머가 방송을 하지 않을 때도, 팬카페와 같은 커뮤니티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경우가 많았다. 전날 있었던 방송이나 오늘 방송에 대한 추측을 떠들어대며 좋아하는 스트리머의 방송이 켜지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그건 칼고의 방송도 마찬가지였다. 몇 년 차 경력을 가진 인터넷 방송인이자, 저스틴 팔로워와 엘튜브 구독자 몇십만 명을 보유한 대기업 스트리머. 시청자 규모가 너무 커졌다 싶었을 때 창설한 팬카페도 꾸준한 성장세를 보이며 순항하고 있었다.
스벅과 같이 특별한 컨텐츠를 만들어온다거나, 시청자들의 폭소를 자아낼 정도로 끼가 넘쳐흐르지는 않았으나 뛰어난 게임 실력과 자연스러운 텐션이 장점으로 평가받는 방송. 그런 특성 때문인지 칼고의 방송은 소위 콘크리트라 말하는 고정 시청자 층이 확고했다. 특별한 일이 없다면 방송을 할 때마다 꾸준히 찾아오는 시청자가 그만큼 많은 것이다.
칼고의 애청자 중 일부는, 방송의 장점으로 꾸준함과 성실성을 손꼽기도 했다. 매주 정기적인 휴방 일을 제외하면 예외 없이 정해진 시간에 정확히 시작되는 방송. 칼고의 방송은 불규칙적인 방송 패턴으로 시청자들의 골머리를 썩게 만드는 특정 스트리머의 방송과는 달랐다. 혜진이 성현의 빼곡한 방송 캘린더를 보고 감탄했던 것도, 분명 납득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만큼 철저하게 방송을 준비하는 사람도 드물었으니.
그러니까, 삼십 분 지각은 칼고의 방송에서 꽤나 이례적인 경우였다는 말이다. 비록 오늘이 칼고의 벌칙 수행 날이라는, 드물디 드문 '특별한' 날이라는 걸 고려하더라도.
벌칙수행방송 (feat. Nord)
예정보다 늦어진 방송에 채팅창 온도가 실시간으로 상승하고 있을 무렵, 칼고의 방송은 그제서야 생방송의 붉은빛을 밝혔다.
시작은 여느 때와 같은 대기 화면이었다. 애청자에게서 받은, 쌍검을 들어 올린 성현의 모습이 담긴 팬아트. 성현의 취향을 반영한 잔잔한 발라드가 깔리는 와중에, 유독 빠른 속도로 올라가는 채팅창만이 평소 칼고의 방송과는 다른 유일한 포인트였다. 그러나 그 사소한 차이 하나가 어찌나 극명한 차이를 만들어내는지. 메인 화면에 나타난 채팅창은 방송이 켜짐과 동시에 일을 시작한 관리 봇이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광기에 가득 찬 상태였다. 방송 시작도 전에 대기하고 있던 시청자가 대체 몇 명이었던 건지 의문이 들 정도로 속도가 심상치 않았다.
이미 일상적으로 방송을 진행하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이는 광경이었다. 평소 성현은 어떻게 방송을 시작했던가. 천천히 인사가 올라오는 채팅창을 느긋하게 바라보면서, 노래를 감상하며 본격적인 방송을 준비하고는 하지 않았나. 더 여유가 있는 날에는 팬카페나 나이트폴 전적 사이트에 들어가 신규 패치나 정보글을 읽어내리고는 했다. 그러다 보면 금방 고정 시청자 몇천 명이 모여들고, 자연스럽게 게임을 시작하게 되는 그림이 완성된다. 몇 년간 방송을 하면서 만들어진 성현의 루틴이었다.
오늘은 도저히 그 루틴을 따라갈 수 없을 것 같았다.
"아, 아. 안녕하세요, 칼고입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저희가 코스프레가 처음이라, 준비하는데 이렇게 시간이 많이 걸릴 줄은 몰랐네요."
[칼하]
[노르드는?노르드는?노르드는?노르드는?노르드는?]
[저희는 괜찮아요~]
[됐으니까 캠켜]
[뭔 시작부터 만명이 넘었노ㅋㅋㅋㅋㅋㅋ]
[네가 뭔데 괜찮음? 난 안괜찮으니까 당장 노르드내놔]
[어우 도배좀 작작해]
[와 대체 얼마나 고퀄로 준비를 했길래 칼고님이 지각을 다 하셨지 ㄷㄷㄷㄷ]
[노르드 목소리도 들려줘]
방송 시작과 동시에 업무를 시작한 관리자가 아무리 칼을 휘둘러도, 채팅창은 쉽게 정리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후, 하는 한숨 같은 숨소리가 마이크를 타고 흘러들었다.
"벌칙은 약속한 대로 저랑 노르드가 같이 받기로 했고요. 카페 투표 결과로 나온 캐릭터로 준비했습니다. 저는 키리고 노르드는 릴... 아니, 그냥 보면 알 겁니다. 오래 기다리신 거 같으니까 뜸 안 들이고 바로 캠 켤게요."
성현이 내뱉은 한마디에 채팅창이 한순간 환호성으로 뒤덮이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클라이맥스로 향해 가던 노래가 뚝 끊기는 게 첫 번째였다. 곧이어 메인으로 사용된 팬아트가 사라지고 캄캄한 대기 화면이 자리를 대신했다. 바로 캠을 키겠다는 선언과는 달리,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검정 화면은 몇 분 동안 지속됐다. 그새 마이크도 꺼버린 건지, 보이는 것도 없고 들리는 것도 없는 방송은 시청자들의 인내심을 채찍질했다.
그러면서도 늘어나고 있는 시청자 수는 이미 벌칙 방송의 소문이 퍼질 대로 퍼졌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듯했다.
"하. 진짜 맨정신으로 하기 힘드네."
"그러니까 내가 술 한잔 걸치고 키자고 했잖아요."
"또 무슨 사고를 치게. 아니, 넌 일단 밖에 있으라니까 또 왜 들어왔어."
"저도 매는 먼저 맞는 걸 선호한다고요. 아, 나갈 테니까 노려보지 마세요. 캠이나 빨리 켜. 밖에 가만히 서있는 게 얼마나 뻘쭘한데. 기껏 화장도 열심히 해놨구만."
"... 너무 열심히 한 게 문제지."
탁
일부러 들리게끔 한 건지, 나지막하게 주고받는 대화 소리가 방송의 정적을 깨부쉈다.
바로 다음 순간이다. 검은 화면 한복판, 작은 창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칼고의 손짓에 따라 금방 크게 확대된 캠 화면은 무슨 효과라도 넣어둔 건지 뿌옇게 떠서 사물을 알아보기 힘들 지경이었다. 시력이 아주 나쁜 사람이 안경을 벗고 보는 것처럼 초점을 잃어버린 화면. 분간되는 건 오로지 번지듯이 일어난 분홍빛뿐이었다.
이윽고 어지러운 창 하나가 방송 화면 전체를 가득 채웠다. 도통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광경에 채팅창의 불만이 폭주했다.
"자, 이제 진짜 필터 끕니다."
낮게 깔린 성현의 목소리가 귀를 자극한 다음. 딸깍하는 마우스 소리와 함께 뿌옇던 화면이 한순간에 선명함을 되찾았다.
성현은 선명해진 화면 속에서 카메라를 정면에 두고 서있었다. 전신이 훤히 보이는 구도. 어떤 포즈를 취할지 몰라 허리춤에서 헤매는 손에서 어정쩡한 느낌이 묻어 나왔다. 전혀 자연스럽지 않은, 어깨춤까지 내려오는 분홍빛 가발. 방 내부 조명을 받아 빛나는 분홍색은 인위적이다 못해 부담스러웠다. 눈을 치켜뜨고 렌즈를 똑바로 바라보는데, 눈살까지 찌푸린 험악한 표정에도 불구하고 눈가에 번지듯 퍼진 붉은색 눈 화장 때문에 그 모습이 다소 우스꽝스럽게 느껴졌다.
어색한 가발과 눈 화장 다음으로 눈에 들어오는 건, 단번에 시선을 잡아끄는 화려한 분홍빛 기모노였다. 곳곳에 꽃을 가득 품은 옷자락은 도무지 실용성을 찾아보기 힘들 만큼 품이 넓고 길었다. 큰 소매가 길쭉한 성현의 팔을 모두 가리고도 모자라 큼직한 손의 절반쯤을 덮어 내렸다. 옷의 기장도 아주 길어서, 분홍색 옷자락이 키가 제법 큰 편에 속하는 성현의 발목까지 내려올 정도였다. 성현이 못마땅한 듯 몸을 좌우로 움직일 때마다 기다란 옷자락이 스륵 거리며 따라붙었다.
"... 칼은 못 구해서 나이트폴 컬렉션으로 대체."
초성 도배로 뒤집어진 채팅창을 못 보고 지나간 건지, 아니면 고의적으로 무시하고 있는 건지. 굳은 얼굴로 말한 성현은 곧장 뒤쪽 벽에 비스듬히 세워둔 투박한 형태의 검을 집어 들었다. 나이트폴에서 사용되는 표준적인 형태의 아밍 소드. 표면에 거친 광택이 흐르는 게, 퀄리티가 썩 훌륭했다.
주저하지 않고 칼을 잡아챈 성현은 방 안에서 검을 이리저리 휘둘렀다. 모양새가 잡히지는 않았으나, 얼굴을 잔뜩 굳히고 휘두르는 터라 기세가 흉흉했다. 느닷없이 시작된 칼춤. 몸을 크게 움직일 때마다 허공에서 출렁이는 분홍빛 기모노에서 위화감이 넘쳐흘렀다.
"씨발, 진짜 못 해먹겠네."
칼을 반쯤 던지듯 밀어낸 성현이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회의감 가득한 표정으로 머리로 손을 뻗은 성현은, 이내 가발을 움켜쥐고는 땅으로 내팽개쳤다. 그새 눌린 머리에서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급격한 현타on]
[ ㅜㅑ 칼리눈나 박력미쵸]
[이제 노르드줘]
[와 사람 칼로 패죽이는줄]
[ㅋㅋㅋㅋㅋ칼고님ㅋㅋㅋㅋ]
[노르드는ㅇㄷ노르드는ㅇㄷ노르드는ㅇㄷ노르드는ㅇㄷ노르드는ㅇㄷ노르드는ㅇㄷ]
[칼고급으로 생겨도 여장은 개에바구낰ㅋㅋㅋㅋㅋ]
[칼춤 최고였다]
생수 한 모금으로 목을 축인 성현은 곧장 시간을 확인했다.
코스프레를 공개하고, 준비한 칼춤 퍼포먼스를 수행하기까지. 이제 고작해야 십 분 정도되는 시간이 흘렀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몸과 정신은 이미 열 시간이 넘게 방송을 한 것처럼 피로한 상태라니. 고작 시작점에 불과한 지점에서 남은 거리가 절망적으로 느껴질 지경이었다.
성현의 벌칙으로 선정된 코스프레 방송은, 단순히 코스프레를 하는 것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그 상태로 평소처럼 방송을 완주하는 벌칙이었다. 당시에는 노르드를 엿 먹이려는 마음에 별로 신경 쓰지 않았던 사항인데... 그게 이렇게 커다란 반동으로 다가올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방송 시간이 정해진 건 아니었으나, 어중간하게 한두 시간만 하고 방송을 종료하면 민심이 어떻게 변할지는 뻔했다. 채팅창 여론이 바뀌는 건 한순간에 일어나는 법. 지금 성현의 퍼포먼스로 잔뜩 신이 난 사람들도, 급방종을 해버리면 돌변해서 돌을 던질 게 분명했다. 그럼 벌칙을 수행한 보람도 없이 욕을 처먹게 되는 셈이다. 자신은 물론이고, 아마 함께 벌칙을 수행하는 노르드도...
아니. 노르드는 아마 욕을 먹을 일이 없지 않을까. 자신이 봤던 모습 그대로, 캠을 타고 방송으로 송출되는 즉시. 성현은 확신할 수 있었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적어도 당분간은 노르드에 대한 여론이 극락으로 치솟을 거라고.
이미 한바탕 거사를 치른 성현의 마음은 더없이 후련했다. 추한 꼴을 보이고 아마 박제됐으되, 숨 막히는 순간은 어찌어찌 잘 넘길 수 있었으니까.
잠깐 숨을 고르고 채팅창을 바라보면, 그새를 못 참고 노르드를 보여달라고 떼쓰듯 채팅을 밀어올리는 시청자가 적지 않았다. 성현은 흘끗 방문이 있는 방향을 확인했다. 자신은 속이 시원한 반면, 혜진은 지금 어떤 심정으로 기다리고 있을지. 좀처럼 감정 표현을 하지 않는 혜진이 초조해하는 모습은 보기 드문 것이었다. 성현이 같이 초조해하는 와중에도, 뭔가 이 순간을 놓치면 안 될 거 같다는 생각을 들게 했을 정도로.
마음 한편으로는 자신이 잘못된 선택을 했나 하는 뒤늦은 후회가 피어올랐다. 혜진의 코스프레가 불러올 여파가 심상치 않을 거라는 사실은 진작부터 깨닫고 있던 것이다. 혜진이 옷을 갈아입기 이전부터 했던 생각은, 그 모습을 보고 난 다음에는 확신으로 변했다. 이건 단순히 ' ㅜㅑ' 같은 채팅 도배 따위에서 그칠 리가 없을 거라고.
그러나 이미 되돌릴 수는 없었다.
"들어와!"
성현은 바깥에 들리게끔 크게 소리쳤다.
끼익
혜진은 천천히 방 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짧은 거리를 이동하는데도 실내화를 질질 끌면서 걷는 꼴이, 방송에 노출되는 게 어지간히 꺼려지는 것 같았다.
성현의 외침, 뒤이어 들리는 문 열리는 소리와 발을 끄는 기척. 시청자들도 혜진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는 사실을 인식했다. 지금까지의 채팅은 약과였다는 것처럼, 노르드의 닉네임을 섞은 도배로 채팅이 한순간에 마비될 지경에 이르렀다.
혜진은 곧장 렌즈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머뭇거렸다. 멀찍이서 고개를 빼꼼 들어 올려 모니터를 바라보는 모습. 생소한 태도에 성현의 입꼬리가 자동으로 올라갔다. 어디까지가 캠 화면에 포함되는지 확인한 혜진은, 이내 천천히 실내화를 끌면서 움직였다. 점차 성현이 앉아있는 곳으로 가까이. 모니터 위 렌즈가 포착할 수 있는 시야각 안으로.
이윽고 혜진이 발을 성큼 내디뎠다. 성현이 처음으로 코스프레를 공개했던 자리. 사람의 전신이 드러나는 렌즈의 정면이었다. 단번에 그 중심을 차지한 혜진은, 이내 방송 송출 화면에 자신이 온전히 나타난 것을 확인하고 몸을 움츠렸다. 드레스 치맛자락을 부여잡은 손이 주춤거렸다.
"아, 안녕하세요."
답지 않게 머뭇거리며 내뱉은 말 한마디에, 채팅창이 터져나갔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