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0화 〉 230 현타가 오더라도 어쩔 수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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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퍄]
[노르드사랑해]
[릴리스너무좋아]
[와... 진짜 미쳤다ㅋㅋㅋㅋ]
[우리 선생님 돌려주세요]
[허리 얇은거봐]
[근데 왜 뒷짐지고 있어ㅋㅋㅋㅋㅋㅋ]
[어깨라인 미쳤다]
[예쁘긴 존나 예쁘네]
[누추한 곳에 어떻게 이런분이]
[ㄴㄷㅆ이 아닌데?]
[릴리스 처음 추천한새끼 누구냐... 고 맙 다!]
한바탕 난리를 치른 채팅창은 쉽게 진정되지 않았다.
혜진이 렌즈가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까딱거리며 인사를 건넨 다음이다. 방송 화면에 전신을 드러낸 혜진은, 성현이 했던 것처럼 칼춤을 추는 것 따위의 특별한 퍼포먼스는 보여주지 않았다. 그저 자리에 선 상태로 가만히 있다가, 방황하던 손이 신경 쓰였는지 뒷짐을 지듯 두 손을 뒤로 모은 게 전부였다. 그럼에도 반응은 여전히 뜨거웠다.
얇은 옷감으로 만들어진 붉은 드레스는 착용자의 몸 선을 고스란히 밖으로 드러냈다. 슬렌더한 체형의 몸매. 흉부에서부터 이어진 가느다란 선은, 허리춤에서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떨어졌다. 방황하듯 두리번거리던 혜진이 반쯤 고개를 숙일 때마다 기다란 머리카락이 어깨선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녀는 그걸 정리하지도 않았다.
한동안 다소 경직된 자세로 서있던 혜진은, 얇은 허리 앞에서 팔을 맞대고는 몸을 좌우로 흔들었다. 시선을 한군데 고정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움직이는 꼴이, 지금 상황을 몹시 견디기 힘들어하는 것 같았다.
그 모습을 직관하고 있던 성현이 입을 열었다.
"됐으니까 이제 앉아. 왜 계속 그러고 서있어. 칼춤이라도 추려고?"
"죽고 싶어요."
"...... 참아."
어느새 왼쪽 팔뚝까지 올라간 오른손은 바깥으로 드러난 하얀 팔뚝을 쓸어내리듯 문지르고 있는 상태였다.
"추워? 온도 좀 높여줄까?"
"아니, 그게 아니고... 걸칠 거. 외투 없어요? 깔깔이라도 좋으니까."
"... 저기 스탠드 뒤쪽에 가디건 있으니까 그거라도 입던가."
성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혜진은 화면 밖으로 달아나듯 벗어났다. 한 손에 검은색 카디건을 들고 나타나서는, 빠른 속도로 양팔을 카디건에 끼워 넣는 손놀림에서 다급함이 느껴졌다. 바깥으로 훤히 드러났던 혜진의 어깨와 팔이 커다란 카디건에 대강 가려지기 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기다란 옷 끝자락이 골반을 넘어 허벅지 춤으로 내려왔다.
사이즈가 큰 남성 카디건은 혜진의 손을 다 가릴 정도로 넉넉해서, 혜진은 연거푸 소맷자락을 걷어 올려서 손을 꺼내야만 했다. 그럼에도 혜진의 얼굴은 뭐가 좋은지 이전보다 훨씬 안정된 상태였다.
그제서야 혜진은 조금 안정된 표정으로 의자에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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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팅창을 최대한 주시하지 않으려 발악하는 게 대체 얼마 만인지.
안타깝게도 성현의 방송 세팅은 채팅창을 보기가 너무 편했다. 모니터링을 위한 왼쪽 모니터에서, 방송 화면 우측으로 길게 자리한 채팅창은 외면하고 싶어도 쉽게 외면할 수 없었다. 체감상 모니터의 절반 정도는 채팅창이 차지하고 있는 것 같은데. 크기가 크기인지라, 고개를 돌려 성현이 앉아있는 곳을 바라봐도 채팅창을 무시하기는 힘들었다. 시야 귀퉁이에서 채팅이 일시에 주르륵하고 밀려 올라가는 모습이라도 비치면, 나도 모르게 그쪽으로 관심이 쏠리기 마련이다. 외면하려고 하면 할수록 더욱 그랬다.
의식해서 밀어내 봤자 되려 반발심을 가지고 더 깊게 침투해오는 꼴이다. 결국 나는 어느 시점부터 체념을 하고 인정하기로 했다. 내가 무슨 말만 하면 ' ㅜㅑ' 따위의 채팅을 가득 써올리는 저 채팅창을. 아마, 캠방을 처음 했던 그날 다음으로 보기 힘든 채팅창이었으나... 그래도 그간 조금이나마 면역력이 생긴 모양이다. 그날에 비하면 못 버틸 수준은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괜한 반발심에 익숙한 닉네임 몇 개를 찾아 밴이라도 할까 하고 쳐다보다가, 진정될 기미를 보이지 않는 채팅창을 보고 그것도 금방 포기했다. 채팅은 도대체 왜 저렇게 빠른 걸까. 성현의 방송은 기본적으로 채팅에 팔로우 제한이 걸려있을 텐데.
나는 고개를 돌려 성현이 건네준 커피를 한 모금 흘려넘겼다. 냉장고에서 꺼낸 지 얼마 안 된 편의점 커피는 차갑고 썼다. 향이 어떤지는 제대로 느낄 수 없었다. 그럴 겨를이 없다고 표현하는 게 맞을까.
그래, 정확히 말하자면 이건 적응보다는 순응에 가까웠다.
내가 방송에 제대로 집중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과는 별개로, 성현의 방송용 방은 아주 쾌적했다.
깔끔하게 정리된 청결한 방 상태나, 조잡하고 쓸데없는 물건 하나 없이 널찍하고 여유로운 내부 공간만을 일컬어 말하는 게 아니다. 팔을 다 드러내고 있음에도 전혀 쌀쌀하지 않은 실내 온도와 건조하지도 습하지도 않은 적당한 수준의 습도. 사소하지만 신경 쓰지 않을 수 없는 것들이 모두 적절히 유지되고 있는 공간이었다.
방 한편에서 조용히 가동하고 있는 가습기나 앉은 자리와 가까운 곳에 위치한 음료용 냉장고 따위를 보고 있으면, 이 방의 주인이 얼마나 쾌적한 방송 환경에 집착하는지를 쉽게 깨달을 수 있었다. 무슨 전문 업체라도 불러서 세팅했나 싶을 정도로 완벽히 구성된 환경. 추우면 스탠드에 대충 걸쳐둔 외투나 주워 입는 나와는 차원이 달랐다.
그래도 앉은 자리가 가시 방석처럼 느껴지는 건... 역시 몸이 편한 게 전부가 아니라는 걸 말해주고 있는 것 같았다.
의자에 앉아 조금 말려 올라간 드레스 자락을 의식해서 내리고 나면, 애써 밀어내고 있던 성가신 것들이 하나 둘 고개를 빼꼼하고 내밀기 시작했다. 허벅지 위에서 어물쩍거리며 배회하고 있는 손, 좀처럼 익숙해질 수 없는 스타킹, 고개를 살짝만 내려도 화악 하고 존재감을 발하는 붉은 드레스. 카디건이 있던 건 참 다행이었다. 여기에 어깨와 팔까지 노출하고 있었으면 그걸 의식하느라 아무것도 못하고 있었겠지. 평소라면 그렇게 거슬릴 수도 없을 텐데, 지금은 손까지 흘러 내려오는 소매의 감촉도 불쾌하게 다가오지 않았다.
모니터 하나를 크게 차지하고 있는 내 모습을 확인했다. 카메라에 잡힌 나는 흘러내리는 카디건 소맷자락을 끌어올리고 있었다.
"의자는 안 불편해?"
"적당해요. 아."
"왜 그래?"
"스타킹이 너무 몸에 달라붙어."
"... 나보고 어쩌라는 거야?"
성현은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어색한 공기가 흘렀다. 코스프레 공개라는, 거창한 오프닝으로 방송을 시작한 이후. 지금은 공기가 붕 떠버린 느낌이다.
사실 벌칙 방송을 합방으로 진행하기로 결정한 다음에도, 나와 성현은 구체적인 방송 내용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없었다. 방송을 키고 같이 뭘 할지는 성현이 전적으로 맡겨달라고 했으니까. 예컨대 나는 이번 합방에서 컨텐츠적인 부분은 별로 고려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둘이 함께 무슨 방송을 진행할지. 도움을 주겠답시고 막연하게 던져댄 소재 몇 가지를 제외하면 떠오르는 것도 마땅히 없었다.
방송 날이 다가올 즈음에는, 성현도 뭐라 언질을 줬던 것 같기는 한데. 드레스에 한눈이 팔려 거기에 신경을 쓸 여력이 없었다. 나는 애초부터 방송 컨텐츠에 대해 별로 고민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혼자서도 어떻게든 방송을 진행하는데, 사람이 둘이나 있으면 뭔들 할 일이 없겠냐는 생각이 있었다는 걸 부정할 수 없겠다. 합방을 몇 번인가 경험한 다음에는 서로 대화를 하는 것만으로도 시청자들이 재밌어한다는 걸 알아버렸으니까. 성현이 뭘 준비했든 나는 평소처럼 무의미한 대화나 나누면 될 줄 알았지.
막상 방송이 시작되고 카메라 앞에 나오면, 내가 잘못된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걸 단박에 깨달을 수 있었다. 의상 공개 이후 밀려오는 이 감정의 파도를 뭐라고 말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처음에 찾아왔던 수치심이 가라앉은 곳에는 자리에 대한 불편함과 어색함, 이유 모를 무기력함이 남아있었다.
방송에 내가 어떻게 비치고 있는지, 채팅창은 또 거기에 어떻게 반응하고 있는지 따위를 의식하고 있으면, 방송을 위해 뭔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싹 증발하고 마는 것이다. 모니터로 나오는 내 모습을 바라보면서, 내 정신은 현실과 방송 사이의 그 어딘가에서 어정쩡하게 부유하고 있었다.
아, 방금 내 상태를 설명할 적절한 표현을 찾아냈다. 현자 타임. 이건 실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현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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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래서 술 먹고 키자고 했잖아요."
"... 갑자기 뭔 개소리야."
"칼고 씨도 솔직히 지금 현타오잖아요. 아, 칼춤은 잘 봤어요. 생각보다 잘 추던데."
"상관없어. 어차피 오늘 방송 끝나면 니 클립밖에 안 남을걸."
값비싼 마이크는 두 사람이 작은 목소리로 나눈 대화도 선명하게 포착해서 송출했다. 의자 팔걸이를 치면서 입을 연 혜진의 소곤대는 목소리부터, 확신에 찬 성현의 나지막한 목소리까지. 작게 웅웅대는 컴퓨터 사운드를 제외하면 적막한 실내. 두 사람이 흘리는 목소리는 크기와 상관없이 주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ㅇㅈ]
[대체 술을 얼마나 좋아하는거임]
[와 진짜 이쁘시다...]
[나]
[현타 워딩 뭐야]
[눈나ㅏㅏㅏㅏ 나죽어ㅓㅓㅓㅓ]
[가디건 좀 벗어라 ㅡㅡ]
[락]
[가디건 벗을 때까지 부계파서 도배함]
[벌써 노게에 클립 도배되는중ㅋㅋㅋ]
[릴리스 눈나...]
[노르드사랑해]
[꼴알못들 수준ㅉㅉ 가디건 사이로 얼핏 비치는 쇄골라인이 더 꼴리는건데 ㅉㅉ]
[겜창 주제에 피부 존나좋네]
[오늘 레전드다]
평소 잔잔한 편에 속하는 칼고의 채팅창이, 오늘은 궤를 달리할 만큼 번잡스럽고 정신이 없었다. 채팅창을 주시하는 관리자들에 의해 조금이라도 길게 도배를 했던 시청자가 실시간으로 차단 당하고 있는 와중이다. 전략을 바꿨는지, 짧은 채팅이 주를 이룬 채팅창은 내용이 간결한 만큼 빠른 속도로 갱신됐다. 미처 만나지 못한 외마디 채팅이 두서없이 어지러움을 더하고 있었다.
채팅창을 확인하는지 좌측으로 고개를 돌렸던 혜진은, 이내 굳은 얼굴로 성현의 옷소매를 잡아당겼다. 의자 밑으로 길게 떨어진 분홍색 기모노의 기다란 옷자락은 혜진이 끌어당긴 방향으로 힘없이 축 처졌다. 그걸 느꼈는지 모니터를 바라보던 성현이 혜진을 쳐다봤다.
"무슨 게임이라도 키죠. 나이트폴도 좋으니까."
"게임은 조금 있다가 할 거야. 일단 다른 거부터."
"다른 거. 그럼 숨겨놨던 방송 계획이라도 빨리 풀어봐요."
"아까 말했던 거. 뭔 게임할지 같이 고른 다음에 그걸로 넘어간다고 했잖아. 못 들었어?"
"... 그런 적이 있었나?"
"미친. 진짜 알만 하다."
작게 읊조린 성현이 다시 마우스를 붙잡았다. 딸깍하는 소리가 몇 번 들린 순간, 방송을 가득 채웠던 캠 화면이 모니터 좌측 하단부의 구석으로 작게 축소됐다. 갑작스러운 화면 전환에 채팅창이 아우성쳤다. 대부분은 다시 캠을 확대하라는 내용이었다. 노르드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짖으며.
"이상형 월드컵? 아, 말했던 거 같기도 하고."
"이거 내가 몇 번 반복해서 물어보지 않았냐? 니가 협조 안 해서 내가 이걸로 고른다고 했었잖아."
"심란해서 칼고 씨 말이 잘 안 들어왔던 게 아닐까요. 음... 그래도 투표보다는 이게 차라리 낫겠네요. 코스프레도 차라리 내 손으로 정할걸."
"...... 왜. 잘 어울리는데."
침묵에 잠긴 방송과는 달리, 채팅창은 이전보다 훨씬 더 시끄러웠다.
캠을 대신해 방송 화면을 차지한 건 인터넷 창이었다. 이상형 월드컵이라는 창 이름 아래로, 유명 연예인의 얼굴이나 만화 캐릭터 따위의 다양한 사진들이 죽 나열되기 시작했다.
화면 상단에서 잠시 방황하던 마우스 커서가 검색창으로 이동했다.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성현은 바로 원하는 단어를 완성했다. '공포 게임'. 검색을 누름과 동시에 키워드에 합치하는 기괴한 사진들이 나타났다.
의자에 등을 기대고 앉아있던 혜진이 자리에서 반쯤 일어난 건 그쯤이었다.
"잠깐, 잠깐만요. 게임 고른다던 게 공포 게임이었어? 그런 얘기는 못 들었는데?"
"당연히 못 들었겠지. 내가 말을 안 했으니까."
"왜 벌칙을 또 받아야 돼. 이미 수행하고 있잖아요, 실시간으로."
"뭐가 벌칙이야. 이것도 그냥 게임인데. 같이 할만한 게임으로 공포 게임만 한 게 더 있어?"
카디건 소맷자락을 끌어올리면서 모니터에 삿대질하기를 반복했던 혜진이 다시 털썩 주저앉았다. 주저앉은 상태에서 팔 한쪽을 들어 올려 허공에다 흔들어대는 꼴이, 자포자기한 기색이 역력했다. 삐뚜름히 벌어진 입술에서 작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칼고 언젠간 내가 죽인다."
"... 다 들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