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3화 〉 233 과보호가 아닐 수도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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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로는 이해했다. 게임에서 공포를 느낄 이유는 전혀 없다고.
다 만들어진 그래픽 쪼가리에 불과한데 왜 겁을 먹는 거냐는 내면의 윽박은 게임을 시작하자마자 급속도로 쪼그라들더니, 금세 들리지 않을 지경에 이르렀다. 이래서 이름에 '공포'가 들어가는 분야에는 발을 들이지 않았던 것이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퇴치할 수 없는 괴물이라니, 이런 불합리한 구조의 내용물에서 대체 무슨 재미를 느낀다고. 생각해 보면 게임은커녕 공포 영화를 본 것도 아주 오래전의 일인 것 같았다. 자발적으로 공포를 체험하는 멍청한 짓을 이렇게 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잔뜩 긴장하고 있던 탓에 경직된 팔에서 오는 뻐근함, 목덜미에 남은 식은땀의 흔적. 탈력감 때문인지 아릿한 두통까지 찾아왔다. 정신이 육체를 온전히 컨트롤할 수 있다는 말은 허상이다. 속으로 아무리 무서워할 이유가 없다고 지껄여봤자, 출처 모를 두려움에 푹 절어버린 나는 화면 귀퉁이에 희미하게 비추는 빛무리만 봐도 움찔거리는 몸이 되어버리고 말았으니. 이젠 뭐가 창피하다고 느낄 힘마저 상실해버리고 만 것이다.
사실 지금 뒤에서 성현의 플레이를 지켜보는 것도 꺼려졌다. 적어도 오늘에 한해서는, 이 여운이 사라질 일이 없지 않을지. 나는 힘없는 몸을 의자에 기댄 채로 생각했다.
[노르드보여줘]
[비교체험 극과극임?]
[칼고가 하니까 장르가 다르네]
[칼고언냐 너무 예뻐요~]
[노르드 구석에 쭈그러든거 개웃김ㅋㅋㅋㅋ]
[겁이 너무 없어;; ㄵ]
[어두워서 노르드 잘 안보이자나..]
채팅창의 말마따나 성현의 플레이에는 막힘이 없었다.
지금도 그랬다. 화면 우상단에서 흐릿하게 나타나는 희끄무레한 형체. 괴물이 등장하는 전조를 봐도 마우스가 흔들리지 않았다. 당당히 에임을 돌려 형체가 얼마나 가까워졌는지를 확인하더니, 가슴이 철렁할 만큼 아슬아슬한 지점에 도달하고 나서야 몸을 숨기는 플레이.
지켜보는 나뿐만 아니라 채팅창에서도 난리가 날 지경이다. 조작이 어렵다기보다, 순수하게 높은 담력을 요구하기 때문에 하기 어려운 플레이를 저렇게 쉽게 소화하고 있으니. 겁도 없이 능숙하게 게임을 풀어나가는 걸 보고 있으면 공포 게임 전문 스트리머로 칭호를 바꿔 달아도 위화감이 없을 것 같았다. 이쯤 되면 나이트폴보다 이런 게임에 더 능숙하다고 말할 수 있지 않나. 나이트폴 플레이에 비하면 전혀 허점이 보이지 않는 아주 능숙한 솜씨인데.
그래놓고 얼굴에 일말의 뿌듯함도 보이지 않는 것이, 되려 얄밉다는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이게 대체 뭐가 무서워서 그 난리를 떨었냐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게 자격지심에서 비롯된 망상이라는 건 잘 알고 있었지만... 어쩌겠나. 원래부터 글러먹은 걸 고치는 건 힘든 법인데.
괴물과 합세해 타이밍에 맞게 볼따구라도 찔러볼까 고민하다가, 그것도 다 업보로 돌아오리라는 예감이 들어 실천으로 옮기지는 않았다. 아무튼 방송에서 허튼수작을 부리는 건 위험한 일이었다. 언행이 기록된다는 게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는 직접 겪어봐야만 깨달을 수 있다. 지금 내가 당하고 있는 것처럼.
"여기는 이벤트씬이라 어쩔 수 없이 마주칠 거 같은데? 스킵이 안 되네."
"저 잠깐 화장실 좀."
"어, 갔다 와."
바람이라도 쐬고 올까 하고 운을 떼면, 살짝 뒤를 돌아본 성현과 눈이 마주친 것도 같았다. 무슨 표정을 하고 있는지는, 글쎄. 공포심을 부추긴답시고 실내 빛을 전부 꺼버린 덕분에 모니터를 등진 성현의 얼굴은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다. 설마 뒤에서 지켜보는 것도 무서워서 도망치는 겁쟁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왠지 아까부터 지나친 억측만 계속하고 있는 걸 보니 내가 지금 제정신은 아닌 듯싶었다. 어느샌가 어깨를 타고 흘러내리기 직전인 카디건을 다시 추스르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자에서 일어난 순간 강조되는 허벅다리 사이의 휑한 허전함이, 정말로. 다른 일에 신경 쓸 겨를을 모조리 날려버리는 특출난 효과를 가지고 있었다.
거듭해서 말하지만, 이건 정말 하루아침에 익숙해질 수 있는 감각이 아니었다.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살금살금 부스 밖으로 걸어 나오면, 해방감인지 허탈함인지 모를 알 수 없는 감각이 전신을 훑고 지나갔다. 뭐라고 해야 할까. 몰입도가 엄청난 스릴러 영화를 보다가, 영화가 한창 진행되는 도중 영화관 밖으로 빠져나온 기분. 알게 모르게 긴장하고 있던 몸에서 힘이 풀렸을지도 모르겠다. 적잖은 노곤함이 느껴지는 걸 보면 아마 그게 정확한 추측이겠지.
왠지 이대로 밖에 나가 담배라도 한 대 빼어 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흡연자에게 따라붙는 끈덕진 중독성 때문이 아니라, 순수하게 이 정신적인 탈력감을 위로하기 위한 차원에서. 사실 정말 담배맛을 모르면 담배를 떠올릴 일도 없었겠지. 괜히 미나에게 뺏어 피웠던 담배 향이 떠올랐다.
지이잉
방문 너머로 희미하게 흘러나오는 성현의 목소리를 제외하면 조용한 실내. 거실 테이블 위에서 울려대는 진동 소리는 평소보다 요란했다. 마치 내가 나오기를 기다렸다는 듯 울려대는 소리에, 바로 몇몇 사람의 얼굴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방송을 지켜보다가 이때다 싶어 전화를 걸어올 만큼 나와 가까운 사람. 내 좁은 인맥 안에서 그런 사람이 많을 리가 없었다.
...역시, 보고 있었나.
힘없는 걸음으로 테이블 앞까지 걸어가 시끄럽게 울고 있는 핸드폰을 주워 든다. 아니나 다를까, 액정에는 내가 예상한 이름이 그대로 표시된 상태. 통화 버튼을 터치하기 전 숨을 돌리는 마음으로 한숨을 토해냈다.
외면하고 전화를 꺼버리지 않은 건, 아무리 애써도 피할 수 없는 뒷감당을 고려한 탓이다. 작정하고 전화를 던져온 상대방한테 무슨 변명을 뇌까려봤자 제대로 통할 것 같지는 않았다. 애초에 내 원룸 비밀번호까지 알고 있는 상대에게 어떻게 도망칠 수 있을까.
"여보"
<"언니!"/>
핸드폰 저편을 뚫고 들어오는 목소리는 톤이 높았다. 미리 알맞게 낮춰둔 볼륨 덕에 그렇게 시끄럽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높아진 억양에서 묻어 나오는 저 앙칼진 맛은... 평소 혜민의 조곤조곤한 말투를 생각하면, 이게 어떤 상황인지 알만도 했다.
"듣고 있어. 그렇게 소리치지 말고."
<"그럴 수="" 있겠어?="" 왜="" 나한텐="" 아무="" 말도="" 안="" 하고...="" 어떻게="" 그런="" 야,="" 야한="" 옷을="" 입고="" 아니,="" 언니="" 지금="" 단둘이="" 있는="" 거="" 아니야?="" 빨리="" 거기서,="" 돼.="" 옷부터="" 갈아입어야"=""/>
정리되지 않고 쏟아지는 말. 문장을 제대로 끝맺기도 전에 다른 말을 내뱉는 광경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급박함마저 느껴질 지경이다. 혜민이 털어놓는 말을 천천히 듣고 있던 나는, 오히려 조금씩 마음이 가라앉고 있었다. 다른 사람이 흥분한 모습을 보고 있으면 되려 마음이 차분함을 되찾는 것이다.
일단 동생이 제정신이 아닌 건 확실해 보였다.
여동생의 과보호 성향에 대해선 할 말이 많지 않았다. 지금에서야 어련히 잘 달래고 넘어가자는 생각이 먼저 들지만, 불과 몇 개월 전만 하더라도 저 과한 걱정이 얼마나 낯 뜨겁게 느껴지던지. 형제자매 관계의 다양성을 인정할지라도 제 언니를 이토록 걱정하는 동생을 찾기란 힘들어 보였다. 오히려 그 반대의 경우는 꽤 많을 것 같은데. 동생 된 입장에서 손윗사람을 걱정하는 그림은 쉽게 떠올리기 쉽지 않았으니까.
어쩌면 전 히키코모리, 현 유명 스트리머라는 제 언니의 괴상한 정체성이 혜민의 과보호 성향이 만들어지는데 크게 기여했을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묘한 거리감이 느껴지던 가족관계에서 그게 비롯되었을지도 모르고. 뭐가 됐든 그게 애정의 발현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었으니 내가 그걸 억지로 밀어내거나 쳐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아무튼 얼마간 고마움을 느끼고 있는 것도 사실이었고.
다만, 그게 너무 과하다고 생각할 때도 분명히 존재했다. 다 큰 성인인 언니가 이런저런 일을 할 수도 있지, 뭘 저렇게 걱정한다는 말인가. 모두 본인이 책임질 문제일 터인데. 조금 무리해서 술을 마실 수도, 이성 스트리머의 집에서 단둘이 합방을 진행할 수도, 인터넷 방송에서 옷을 좀 느슨하게 입을 수도... 아니.
나열해 보니까 걱정할 만한 것 같기도 하고.
"진정해, 혜민아. 그렇게 심각하고 긴급한 상황이 아니니까."
<"내가 지금="" 진정하게="" 생겼어?"=""/>
...어, 진정해야지 어쩌겠나. 이미 벌어진 일인데.
날카로운 어투로 제 언니의 경솔한 행동에 대해 지적하던 동생은, 이내 흥분이 가라앉았는지 천천히 목소리를 줄였다. 사실 스스로 흥분을 죽였는지도 확실하지 않다. 왜냐면 중간 즈음부터 옆에서 동생을 만류하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거든. 정황을 고려하면 주호가 분명했다. 조만간 용돈을 주든가 해야겠는데.
흥분한 여성의 말에 반박을 하기 시작하면 일이 어떻게 망가지는지 잘 알고 있는 나는, 최대한 경청하는 척 입을 다물고 가만히 있었다. 핸드폰으로 듣는 잔소리는... 적어도 표정 관리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서는 편안했다. 가만히 핸드폰을 귀에 가져다 대고 있으면 묘하게 마음이 진정되는 게, 공포 게임을 하는 것보다야 배는 낫겠다 싶었다.
"알겠어. 그래도 이게 다 언니 일이잖아."
<"... 그래도."=""/>
제 입으로 내뱉는 소린데도 뻔뻔스럽기 그지없었다. 내가 언제부터 그런 프로의식을 가졌던가. 아니, 굳이 따지고 들어가면 민심을 생각해서 입은 건 맞으니까... 어떻게 잘 포장하면 프로의식과도 연결할 수 있겠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자기합리화란 이렇듯 말도 안 되는 논리의 비약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래도 이 입에 발린 말이 듣기에는 제법 그럴싸하게 느껴졌는지, 적당히 진정된 동생은 내 말을 듣고 생각에 잠긴 듯 입을 다물었다.
나는 그쯤에서야 시간을 확인했다. 방송에서 탈출한지, 어언 이십 분 정도가 지난 시간. 이쯤 되면 방송 시청자들이 뭐라고 떠들어대고 있을지도 궁금했다. 아마 담탐이라도 부르짖고 있지 않을까.
...공포 게임이 끝났다면 더할 나위가 없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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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짜 담배 피우러 갔나?"
[노르드 ㄹㅇ 담배핌?]
[이걸 엔딩 못보네]
[헉 기밀유출]
[노르드보고싶어]
[진짜 실망이네요... 칼고님 구독 해제하겠습니다.]
[노르드면 담배펴도 ㅇㅈ이지]
[혹시?]
[공포게임 무서워서 튄거아니냐? ㄷㄷㄷ]
[그냥 변비겠죠; 다들 음해하지 말아주세요]
[노르드한테 담배빵 당하고 싶다]
[나가서 찾아보자]
[괘씸한데 나간 시점부터 다시 플레이 ㄱㄱ]
채팅창에서 선타는 채팅 몇 개를 잘라낸 다음에야, 성현은 실내 형광등을 다시 켰다. 한순간에 밝아진 방 안. 좀처럼 익숙해질 수 없는 거창한 분홍색 옷자락이 눈에 밟혔다.
혜진이 자리를 비운 이래, 공포 게임으로 더 재미를 볼 수 없을 거라고 판단한 성현은 최대한 빠른 속도로 엔딩을 향해 직행했다. 방송적인 재미야 혜진이 플레이한 한 시간가량의 분량에서 충분히 확보하고도 남았던 것이다. 성현이 바톤을 넘겨받은 순간 그 이상의 재미를 뽑아내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성현의 진행 속도가 빨랐던 덕인지, 아니면 혜진이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은 진도를 빼둔 덕인지. 성현은 예상한 것보다 빨리 게임을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그로써도 화장실을 간다는 혜진이 돌아오기도 전에 게임을 끝낼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물론, 간단한 화장실이 20분을 넘어갈 거라고는 더욱더 생각하지 못했다. 이쯤 되면 정말로 담배를 피우러 떠났나 의심의 꽃이 피어오르기 시작할 지경이다.
게임이 끝나고 밝아진 실내. 수치심을 나눠 가질 동료가 사라진 지금, 성현은 캠 화면에 비친 제 모습을 보고 자괴감을 느끼기 직전이었다. 혜진이 있을 때는 노르드에 대해서만 언급되던 채팅창에서, 제 이름이 올라오기 시작하는 기분이란. 다시 칼춤이라도 춰야 되나 싶을 정도였다.
성현이 잠깐 캠을 꺼야 되나 고민할 즈음에야 혜진이 문을 열고 돌아왔다. 공포 게임을 할 때 잔뜩 경직되었던 얼굴이 편안하게 풀어진 걸 제외하면, 바뀐 건 없는 것 같았다. 혜진이 옆자리에 앉을 때 무심코 코를 훌쩍였던 성현은 나지막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담배는 안 피우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