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6화 〉 236 전통을 준수하세요
* * *
일반적인 옷감에서 절대 찾아볼 수 없는 강렬한 빛깔의 붉은색은, 한 번 물을 먹은 정도로는 조금도 옅어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나는 옷걸이에 걸려 펄럭거리는 드레스를 가만히 서서 주시했다. 방금 막 샤워를 끝내고 나와 티셔츠만 걸친 상태로, 탈수기에 돌아가 축 처진 화려한 드레스를 들어 올리고 있는 꼴이란. 누군가 옆에 있다면 퍽이나 인상적인 장면이 아닐까 싶었다. 원룸이라는 공간까지 포함해서 괴리감이 철철 넘쳐흐르는 게, 잠깐 사진을 찍어 남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정도였다.
물론 실천으로 옮기지는 않았다. 내가 바지를 안 입고 있었거든.
너풀거리는 드레스를 건조대에다 대충 걸어두고선 물러났다. 붉은 드레스는 한 벌 옷임에도 불구하고 그다지 길지 않았다. 원룸에 들어갈 정도로 작은 건조대에 걸쳐놔도 바닥에 끌리지 않는다는 건 아주 훌륭한 장점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막 빨아 깨끗한 옷감이 방바닥 먼지를 흡수하고 있는 광경을 보는 건 끔찍한 일일 테니까.
엉성하게 걸어둔 수건이나 속옷들 사이에 화려한 디자인의 미니 드레스가 섞여있는 게 참 잘 어울렸다. 기어코 이걸 빨았다니. 저걸 다시 입을 일이 있을까도 싶었는데... 그렇다고 한 번 입었을 뿐인 옷을 그대로 버릴 수도 없었다. 쓸데없이 좋은 재질로 만들어진 코스튬은 가격도 낮은 편이 아니었고. 경험해 보고 난 다음에야 왜 코스프레에 의상 대여가 많은지 알 것 같았다. 이렇게 특이한 의상을 여러 날 계속 입을 일은 거의 없을 테니까, 코스트를 생각하면 당연히 직접 구매하기보다 빌려 입는 게 맞겠지. 입었던 의상을 돌려주러 가는 귀찮은 과정을 생략하기 위해 꽤 많은 비용을 지불한 셈이다.
고민 끝에 세탁기에 들어갔다 나온 드레스는, 변색 하나 없이 영롱한 색깔을 뽐내며 추레한 빨랫감 사이에서 신나게 자기주장을 해댔다. 아무튼, 드레스라는 건 그냥 옷걸이에 걸어두고 봤을 때는 참 예쁘게도 생겼더랬다. 난 건조대에 걸린 옷자락을 살살 문질렀다.
옷장으로 들어가기 전 마지막 인사라고 생각하면 이것도 못 봐줄 광경은 아니었다.
귀찮은 빨래는 대강 끝을 낸 다음이다. 난 덜 마른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문대면서 컴퓨터 앞에 주저앉았다.
하루도 쉬는 날 없이 돌아가던 컴퓨터에서 냉기가 감도는 것도 제법 새로운 일이었다. 한 번 싸늘함을 인식하고 나면, 편하다고 팬티 하나만 대충 걸쳐 입은 하반신으로부터 서늘한 추위가 느껴졌다. 분명 샤워를 하기 전에 보일러를 틀어두었건만. 창가와 인접한 컴퓨터 자리는 낮게 틀어둔 보일러가 감당하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였다.
침대에 대충 던져둔 추리닝 바지를 집어 들고 발부터 밀어 넣는다. 고무줄이 달렸음에도 뭔가 헐렁거리는 바지춤을 적당히 끌어올리고 나면, 그새 부팅을 마친 컴퓨터가 바탕화면을 비추기 시작했다. 전원이 켜짐과 동시에 들려왔던 웅웅거리는 소리가 백색소음처럼 원룸 안을 채웠다. 발밑이 서늘한 정도를 생각하면 컴퓨터가 예열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았다. 이럴 때 가장 빠른 길은 적당히 무거운 게임을 실행하는 일일 텐데. 그전에 확인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게 안타까웠다.
팬카페. 제 이름이 달린 팬 사이트에 들어가는 건 아직까지 낯선 일이었다.
만든지 일주일도 채 지나지 않은 카페는, 내가 보기에도 확실히 엉성한 면이 있었다.
포털 사이트에서 제공하는 기능만 이용해 내가 직접 개설한 카페다. 편리한 툴이 있는데 굳이 남에게 맡길 필요가 있나 하는 안일함과, 기왕 시작하는 거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내 손으로 제작하고 싶다는 욕심이 더해진 결과물. 허전한 배경에 'Nord'라는 타이틀만 덜렁거리는 카페 배너에서 조잡함이 넘쳐흘렀다.
보고 구경하는 건 가능하되, 직접 디자인을 하라 그러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첫걸음부터 난관인 법이다. 저것도 나름 잘나가는 카페를 보고 참고해서 만든 건데... 며칠이 지난 지금에서야 아무리 봐도 영 아니다 싶더라. 그냥 주연이 도와준다고 할 때 믿고 맡길걸. 괜히 만들다 말아 허전한 대문에 드래그를 반복했다. 그래도 B급 감성에 맞춰 제작했다고 변명할 수준 정도는 될 것도 같은데.
카페에 들어가자마자 관리자 탭으로 들어간 나는, 당장 눈앞에 나타난 현황판만 보고 잠시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현황판에 드러난 회원 수가 내가 익히 기억하고 있는 수치와는 전혀 다른 숫자를 드러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릿수가 바뀐 숫자를 보고 있으면 절로 입이 벌어졌다.
하루. 갓 만든 카페에 신경을 쓰느냐고 매일같이 접속했던 내가 자리를 비운 시간이 고작 하루였다. 그렇게 짧은 시간에 눈을 뗐을 뿐인데, 어떻게 이렇게 극적인 변화가 일어날 수 있는지. 애지중지 기르고 있던 난초가 하룻밤 사이에 눈높이까지 자라난 광경을 목격한 기분이었다. 아니, 잘 자라는 건 좋은데... 이 정도로 과하면 뭔가 기겁을 하게 된다고 해야 하나. 뭔가 이상하잖아.
상세 정보를 확인하기 위해 탭을 바꿔 들어갔다. 카페 성장 추세 따위를 나타내는 그래프를 찾고 나면, 역시 그래프 선이 아주 기형적으로 치솟는 광경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정확히 어제저녁, 성현과 함께 방송을 시작하고 난 다음일까. 가시성을 위함인지 붉은 선으로 표현된 그래프는 그 부분을 기점으로 파멸적으로 치솟고 있었다. 이게 무슨 특이점도 아니고.
어안이 벙벙한 상태로 카페 탐색을 이어나간다. 다른 카페를 참고해 어찌저찌 만들어둔 게시판 탭 전부에 '뉴'가 붙어있는 광경이란. 몇 번인가 방송에서 언급만 했을 뿐 아직 제대로 홍보하지도 않은 팬카페가 나도 모르는 새 활성화되고 있었다. 원래 좀 더 구실을 갖춘 다음 말하려고 했는데, 이럼 부실한 카페 대문이며 배너 따위가 더 초라해지지 않나.
게시판 하나를 콕 집어 살펴보는 것도 애매해서, 나는 바로 전체글부터 확인하기로 했다. 공지라고는 카페 개설 시에 작성했던 짧은 인사글 하나 뿐. 제대로 된 규칙도 만들어두지 않은 카페에 이만큼이나 신규 유입이 급증한 상태다. 마음 한 편에 불안감이 슬슬 고개를 들이미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겠지. 아무튼 내 카페에 유입될 사람들이라고 해봤자 저컴 게시판에서 신나게 깽판을 치던 그치들이 대부분일 테니까.
<유입들 캠방이다="" 나이트폴이다="" ㅇㅈㄹ하지말고="" 얌전히="" 피셔맨이나="" 쳐먹자^^=""/>
아니나 다를까, 카페 전체 글의 최상단을 차지하는 신규 게시글의 제목이 저 모양이다.
첫 페이지의 말머리를 훑어보면 대부분이 자유게시판에 올라온 글이었다. 굳이 일일이 글을 읽어보지 않아도, 훈훈한 어휘가 가득한 제목을 보면 한창 투기장이 진행 중이라는 사실을 쉽게 눈치챌 수 있었다. 이번엔 또 무슨 이유로 싸우고 있는 걸까. 얼마나 싸움이 오래 끌린 건지 원인이 된 떡밥을 찾기도 힘들 지경이다. 페이지를 넘기다 보면 한숨이 절로 나왔다.
커뮤니티라는 건 본디 공통된 관심사를 가진 인간들이 모인 군집이 아닌가. 노르드 팬카페면, 노르드라는 스트리머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가입하는그런 적당히 화목한 커뮤니티가 되어야 할 텐데. 공통된 관심사를 가진다고 의견 충돌이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법은 없지만, 이 정도면 애초에 싸울 마음으로 모여들었다고 봐도 무방한 수준이다. 욕설 섞인 게시글을 하나씩 삭제하고 있으니 성가신 일을 하나 더 만들었다는 후회가 찾아왔다. 내가 팬카페를 왜 만들었더라... 분명 이점이 더 많을 거라고 생각하고 내린 결정이었는데. 아무튼 시작은 고된 게 당연하다고 되뇔 수밖에 없었다.
저컴 게시판과 다를 바 없는 자유게시판에 비하면, 추천을 많이 받은 인기 게시글은 제목만 봐도 깔끔하고 그럴싸해 보였다.
말머리의 대부분이 핫클립. 사이사이에 들어간 말머리 없는 게시글도 게시판을 살펴보면 움짤인 경우가 많았다. 몇 천을 넘어 몇 만을 향해 달리는 조회수가 인상적이다. 비대한 조회수나 댓글 수만 보더라도, 하루 사이에 폭증한 가입자들이 무슨 목적으로 팬카페에 방문했는지를 쉽게 유추할 수 있었으니. 브이로그도 그렇고, 역시 얼굴 팔아 장사하는 게 히트인가 싶었다.
<개인소장용 모음.jpg="">[324]
<노르드 등장="">[356]
<이거 칼고님="" 눈깔="" 돌아가는거="" 다보임ㅋㅋㅋㅋ="">[217]
<환각 플레이="" 중="" 쭈구리된="" 노르드="" 클립="">[406]
<좆디건 걸치기="" 전="" 움짤따옴="">[388]
.
.
.
<충격)노르드 누드화보="" 촬영선언="" ㄷㄷㄷㄷ="">[508]
<급방종 전="" 마지막="" 장면...="" ㅅㅂ="">[452]
...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 편중된 거 아닌가.
1위부터 쭉. 카페 인기글 목록을 가득 채운 게시글이 죄다 어제 방송과 관련된 내용들뿐이다. 더 자세히 파고들면, 그중에서도 방송 클립이 대다수를 차지하는 상황. 나는 주저하면서도 첫 번째 게시글을 클릭했다.
카페에 정리해서 올린 주제에 뻔뻔하게도 '개인소장용'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게시글이다. 글을 올린 날짜가 오늘이었다. 정확히는 오늘 새벽. 새벽 네 시경에 올린 글에 이토록 많은 추천이 달린 것도 신기했다. 보통 새벽에 올리는 글은 조명되지 못하고 흘러가는 게 정상일 텐데, 방송의 여파가 거기까지 남아있었다는 걸까.
"으으음."
스크롤을 내려 첫 번째 사진을 본 순간, 침음이 절로 흘렀다.
내가 어지간하면 캠방 영상을 업로드하지 않는 이유. 그건 단순히 내가 내 얼굴이 나오는 영상에 대한 면역력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오그라드는 손발을 억지로 피는 것도 정도껏이지, 영상을 보는 내내 그게 반복되면 버티는 것도 힘든 일이다.
영상 편집이야 거의 주연이 도맡아 하고 있지만, 어떤 영상을 편집할지 정하거나 편집된 영상을 검수하는 일에는 빠지지 않고 참여하고 있는 나다. 성실하다 못해 일 중독처럼 느껴지는 주연은 그 와중에도 내 의견을 빠짐없이 수용하고는 했으니 대부분의 캠방 영상은 내 선에서 잘린다고 봐도 무방했다.
예외가 있다면 각을 잡고 촬영했던 브이로그 영상 정도일까. 애써 촬영한 영상을 수치스럽다는 이유로 날리는 것도 큰 손해라, 그날 촬영했던 영상은 검수도 하지 않고 전부 주연에게 맡겨버렸다. 그렇게 해서 대박이 터진 걸 보면, 내가 쪽팔리다고 생각할수록 성공 가능성이 높은 건 검증된 사실인 것 같기도 하고... 그걸 인정하는 것도 슬픈 일이었다.
아무튼, 요는 내 영상을 꾹꾹 눌러 담은 게시글을 읽어내리는 건 생각보다 더 고된 일이었다는 말이다. 캠방 움짤로 도배됐던 저컴 게시판도 보고 있기 꺼려졌던 판에, 저런 옷을 입고 나온 방송이라니. 드레스를 입고 등장해 몸을 움찔거리는 내 모습을 보자마자, 나는 화면 하단부까지 스크롤을 강제로 내려버렸다. 대체 얼마나 많은 움짤을 모아둔 건지 스크롤은 또 겁나게 길었다. 내 카페 인기글이 전부 이런 글이라니. 뭔가 정신이 아찔했다. 이건 게임 스트리머 카페라기보다 연예인 팬카페 느낌이 강하지 않나. 카페 주인장의 얼빡샷 따위가 인기글을 차지하는 건 대체로 아이돌 팬카페라던가 그런 쪽의... 염병.
인기글 정독은 그냥 그만두기로 결정하고 뒤로 가기를 난타했다. 카페 주인장이 팬카페 정서에 어울리지 못하고 있으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차라리 별거 아닌 일로 피 터지게 싸우는 자유게시판이 훨씬 편하게 느껴지는 게, 내 근본은 여전하구나 싶더라.
카페 구성 자체가 부실하다 보니 추가해야 되는 것들도 대놓고 눈에 들어왔다. 이를테면 규칙 하나 없는 무정부 상태에 가까운 카페 현황이라든지. 실시간으로 갱신되고 있는 욕설 게시글을 치워내면서, 나는 카페 규칙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다.
규칙을 추가하는 건 꽤 번거로운 일이었는데, 가장 큰 원인은 규칙을 만들면 만들수록 카페를 관리하는 일에도 더 손이 많이 가기 때문이다.
타 회원에게 욕설 금지라는 규칙을 새롭게 만들어두면, 이를 어기는 이용자가 나올 시 차단을 하는 등의 적절한 조치를 취할 필요가 있다. 제재가 없는 규칙은 아무런 실효성이 없으니 당연한 일이다. 그럼 규칙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관리자가 신경 쓸 사항도 증가한다는 뜻인데... 안 그래도 업무량이 폭발하고 있는 내가 하루 종일 카페만 바라보면서 관리를 할 여력이 있을 리가 없다. 믿을 만한 조력자인 주연은 편집을 하느라 바쁠 테고. 물어보면 본인이야 괜찮다고 말하겠지만, 저컴 게시판과 카페 관리자를 동일선상에 둘 수는 없는 노릇이다. 편집자가 편집을 해야지 왠종일 내 카페만 보고 있으면 되겠나.
공지 글쓰기를 켜놓고 한동안 고민에 잠겨있던 나는, 결국 카페 관리자를 몇 명쯤 추가하기로 마음먹었다. 문제는 누구를 어떻게 추가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인데, 여기에 대해서는 생각해둔 바가 있었다. 내가 한창 나이트폴 커뮤니티를 달고 살던 시기, 관리자 권한을 누가 받느냐에 대해서는 언제나 명확한 해결책이 있던 것이다. 역시 이런 건 과거 선인들의 훌륭한 선례를 따라가는 게 맞겠지.
나는 망설임 없이 공지글을 써 내려갔다.
.
.
.
<카페 관리자="" 급구합니다.=""/>
안녕하세요, 주인장 노르드입니다.
카페에 새롭게 가입하신 분들이 크게 늘었습니다. 무슨 계기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감사하네요. 기왕 만든 카페가 더 활성화됐으면 하는 바람이 큽니다.
오늘 얼마간 카페 게시글을 읽어 봤습니다만, 회원 간 욕설을 주고받는 게 너무 자연스럽더군요. 편한 것도 좋지만 너무 격식이 없는 것도 문제의 여지가 많은 것 같습니다. 조만간 카페 규칙을 만들어 공지하겠습니다. 규칙이 많지는 않을 테니, 다들 잘 준수하시고 카페 활동을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카페에 규칙이 생기면 제재를 위한 관리자가 필요하겠죠?
그래서 오늘부터 카페 관리를 도와주실 관리자분을 뽑으려고 합니다. 이렇게 글을 남기면 많은 분들이 지원하실 거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만, 정말 아무나 뽑을 수는 없는 일이지 않습니까. 관리자 권한을 받고 날뛰는 트롤링을 막기 위해서라도 여기선 엄중한 모집 절차가 필수적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관리자를 하고 싶으신 분들은 제게 나이트폴로 도전해 주세요. 저와의 결전에서 승리하시거나, 충분한 자격이 있다 판단될시 관리자 권한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신청 게시판은 따로 개설해두도록 하겠습니다. 신청하실 분들은 게시글에 나이트폴과 카페 닉네임을 남겨주세요. 빠르면 오늘 저녁 방송부터 시작하겠습니다. 많은 신청 바랍니다.
추신. 퀸 밑으로는 신청 안 받습니다. 원래 좁밥은 관리자 못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