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39화 〉 239 ­ 베팅은 원래 눈을 감고 해야 한다 (239/243)

〈 239화 〉 239 ­ 베팅은 원래 눈을 감고 해야 한다

* * *

대시 캔슬을 세 번 정도 반복했을 즈음, 마주한 상대가 더는 못 참겠다는 듯 칼을 찔러왔다.

신중히 뒷걸음질 치던 상대에게 거리를 좁혀 들어가던 상태. 의표를 찌르기 위함인지 자세도 제대로 잡지 않고 뻗어낸 일격은, 순간적인 대응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꽤나 위협적이었다.

머리로 판단을 내리기 이전에 반응한 손가락은 내게 가장 익숙한 회피 커맨드를 입력했다. 비스듬히 꺾인 흉갑이 쇄도하는 칼끝을 절묘하게 흘려냈다. 이어폰을 타고 흐르는 둔탁한 사운드. 그 와중에도 방어가 약한 급소 부분을 골라 찌르는 걸 보면, 과연 썩어도 퀸이라는 걸까.

그럼에도 한 끗이 모자란 건 어쩔 수 없는 문제였다. 애초에 뿌리친다는 판단을 하지 말았어야지. 차라리 극단적으로 거리를 좁혀 난타전을 유도했다면­ 아니. 반반 승률을 논하기엔 그래도 수준 차이가 있는 것 같은데.

짧은 순간, 게임 내내 폼멜 끝에서 겉돌던 왼손이 오른손과 교차하듯 뻗어나갔다. 역동적인 동작 때문에 비틀린 시야 끝자락에서 붉은 핏방울이 튀었다.

짧은 백대시 한 번. 거리를 벌리고 보면, 목에 단검이 박힌 채 비틀거리던 상대가 숨 막히는 소리를 뱉어대며 쓰러지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격한 동작의 여파로 캐릭터가 내쉬는 거친 숨소리가 저편에서 들려오는 들끓는 신음소리와 뒤섞였다.

삼 분... 아니, 그것보다 살짝 빨랐나.

마지막에도 대처가 안 좋았는데. 방패도 뭣도 없이 검 하나만 쓰는 빌드는 보통 기습적인 수 하나 둘 정도는 숨겨두고 있는 게 상식이지 않나.

모션 캔슬 몇 번에 현혹되어 빈틈을 내주는 것도 썩 보기 좋은 모양새는 아니었다. 이런 걸 보면, 역시 룩이나 퀸이나 별 차이가 없는 것 같기도 하고... 썩어도 퀸이라는 평가도 취소해야 할지도 모른다.

털썩하고 바닥에 쓰러지는 시체를 확인함과 동시에, 나는 곧장 게임에서 나갔다.

"다음."

[자비가없노ㅋㅋㅋㅋㅋ]

[캔슬 속도 존나빠르네]

[메롱쿤... 굳빠이]

[포인트가 복사가 되네요]

['다음' 좆간지ㄷㄷㄷㄷ]

[어지간하면 다 3분컷이야 무슨ㅋㅋ]

[오늘 관리자 뽑는 거 맞나요??]

[와 아직도 역배하는 새끼들이 있네 뇌가 없나 ㄹㅇ]

[학살쇼가 따로없구만]

[무상 나와!!! 데카 나와!!!]

이게 몇 판째였지 하고 카페의 신청 순번을 확인하면, 방금이 정확히 열두 번째 되는 사람이었다.

본격적으로 게임을 시작하고 거의 한 시간가량이 흐른 시점. 열둘에 한 시간이면, 남은 사람들을 모두 상대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오늘 끝내는 게 불가능하다는 사실은 확실해졌다. 막막하기 짝이 없군.

연이은 결투의 반복. 방송 채팅창은 실상 경마장이나 도박장의 그것과 별반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다.

관리자 선발을 위한 결투를 시작한 순간부터, 채팅창에서는 승자 베팅­소위 토토를 열어달라는 요청이 빗발쳤다. 방송을 보면 쌓이는 채널 포인트라는 재산으로 참여하는 일종의 가상 토토. 막상 포인트를 많이 모은다고 무슨 혜택이 있는 것도 아닐진대, 시청자들은 여기에 환장하는 모습을 보였다.

저런 걸 해서 방송이 더 재밌다면야 내가 할 말은 없지만, 승부가 끝날 때마다 포인트 정산에 손이 한 번 더 움직여야 한다는 건 더없이 귀찮은 요소였다.

참가자 대부분이 노르드가 이긴다는 쪽에 포인트를 내던지고 있으니 결과를 맞춘다고 포인트가 크게 늘어나는 것도 아닐 터. 배당만 봐도 거는 의미가 있나 싶을 지경인데... 뭐가 좋은지 승부가 결정날 때마다 포인트가 복사가 된다고 부르짖는 모습을 보면 그만두기도 힘들었다.

그래, 지들이 좋다는데 뭐.

"다음 분 초대... 아."

열세 번째 지원자의 초대를 받기 위해 기다리던 순간이다.

<'우나밍♡'님의 게임="" 초대=""/>

닉네임이 주는 임팩트는, 단순히 활자의 의미에서 비롯되는 건 아니었으므로.

나는 돌연 시야에 잡힌 게임 초대를 보고 재차 신청서 목록을 확인할 수밖에 없었다.

"...... 진짜 신청했잖아."

[우나밍?]

[찐이네 우나밍 방송 안키고 뭐하냐ㅋㅋㅋㅋㅋㅋ]

[나밍님 오늘 휴방인데...]

[찾아보셈 다른 스트리머도 있음]

[하꼬들 기회다 싶어서 모기짓하러 왔네ㅎ]

[이왜진]

프로게이머에 이어서 스트리머까지.

뻔뻔스레 본인의 저스틴 닉네임과 동일한 이름을 하고 있는 우나밍은, 간결한 신청서 내용에도 온갖 이모티콘을 가득 욱여넣어서 글을 난잡하게 만들어둔 상태였다.

이 사람은 대체 언제 공지를 보고 신청한 걸까. 분명 오늘 문자를 주고받을 때만 하더라도 별다른 말이 없었는데.

나를 놀리기 위해 일부러 숨기고 있었던 거라면 제법 성과를 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전혀 예상치도 못한 사람에게 초대를 받고, 한순간 스턴이 걸려버린 건 팩트였으니까.

... 이게 뭔가 싶으면서도, 불현듯 영상 각이 제대로 잡혔다는 생각이 떠올랐다는 게 더 놀라웠다. 아마 방송을 지켜보고 있을 주연도 시시덕거리고 있지 않을까. 아니면 일거리가 대폭 늘어났다는 사실에 머리를 짚고 있던가. 편집자의 입장을 제대로 이해하기 힘든 나로서는 어떤 게 더 정확한 추측인지 결론내리기가 쉽지 않았다.

주연은 정상인과는 거리가 멀기도 하고.

우나밍♡:하이룽 :)

초대를 받고 들어가면, 담배 향 나는 인사말이 나를 반겼다.

오늘이 본인의 휴방 날이라는 걸 어필하면서 푹 쉬겠다고 하더니만, 잔뜩 늘어선 게임 전적은 그녀가 나이트폴에 진심이라는 사실을 가감 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오늘만 대체 몇 판을 한 거야, 대체. 그야 쉬면서 게임을 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으나... 나이트폴 스트리머가 쉬면서까지 나이트폴을 하는 건 조금 병적이라는 생각이 들 수밖에.

Nord11:ㅎ2요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굳이 게임 채팅창에 질문을 늘어놓지는 않기로 했다.

예컨대 그런 것들이다. 팬카페 관리자를 뽑는 건데 대체 무슨 동기로 지원한 건지, 만약 승리해서 관리자를 하게 되면 카페 관리를 할 시간적 여유는 있는 건지, 왜 하루에 한 번씩 본인의 셀카 사진을 내게 보내오는 건지... 아니, 이건 사적인 문제니까 뒤로 미뤄두고.

아무튼 떠오르는 문제들은 차고 넘쳤으나, 하나하나 집고 넘어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따지고 보면 내가 관리자 자격 조건을 상세하게 기술하지도 않았으니까. 써놓은 조건이라고는 아마 퀸 이상이라는 나이트폴 랭크 제한이 전부였지. 그것만으로도 꽤나 많은 사람을 차단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내 방송을 보는 인간들 중 퀸 이상 가는 유저가 이렇게 많을 줄은 몰랐다.

이 중 과반수는 그냥 재미를 위해 도전하는 식으로 신청서를 작성한 게 분명했다. 아무리 그래도 카페 관리자 따위에 이렇게 열을 올릴 이유는 없을 테니까.

앞서 확인한 무상의 경우처럼, 현실적으로 관리자 활동을 할 수 없는 인간들이 지원했다고 해서 그대로 내쳐버릴 수는 없었다. 이미 반쯤은 '노르드에게 결투를 신청하세요' 따위의 컨텐츠로 변질되어 버린 것이다. 제대로 된 관리자를 선출하기는 진작부터 힘들어진 상태. 그나마 긍정적으로 생각할 여지가 있다면, 방송적으로는 크게 흥행하고 있다는 점이겠지. 차고 넘치는 시청자를 보면 그건 확실했다.

... 누가 봐도 재미로 신청한 티가 묻어 나오는 인간들을 보면 볼수록 괘씸함이 커져서, 절대 관리자 권한을 내주면 안 되겠다는 마음이 덩치를 부풀리는 단계였다. 오늘 하루는 이를 악물고 집중해 볼까. 상대 중에 프로게이머가 있다고 한들 단판 승부라면 충분히 승산을 논해볼 만할 텐데.

우나밍의 등장으로 난리가 난 채팅창을 훑어보며 잡념에 빠져있으면, 금방 미나가 채팅으로 말을 걸었다.

우나밍♡:관리자 뽑히면 진짜 만나주는거야?

이 사람 뭐라는 거야. 매번 어디 놀러 가자고 말하는 인간이 무슨... 방송용 컨셉이 과하다.

Nord11:나밍님은 이미 저랑 만난 적 있잖아요.

우나밍♡:그거랑은 느낌이 다르자나ㅋㅋ 나 원하는 것도 따로 있눈뎅

Nord11: ?­?

그러면서 진심으로 하겠다고 말하는 게, 정말 바라는 거라도 있나 싶었다. 잘나가는 스트리머가 남의 팬카페 관리자를 하면서 대체 뭘 요구할까. 미나하면 떠오르는 게 담배뿐인 나는 그걸 짐작하기도 힘들었다. 아니... 담배 살 돈 정도야 있을 게 아닌가. 보루 째로 사다 놓고 펴도 별 위화감은 없을 것 같은데.

잠깐 준비가 필요하다고 말한 미나가 뜸을 들일 무렵, 나는 단기 결전을 한다는 마음가짐으로 빌드를 손봤다.

여기선 휴방 날 몸소 찾아온 미나를 위해서라도­ 빨리 보내주는 게 맞는 선택이겠지.

###

'앞으로 10게임 내에 노르드가 패배한다'

한 게임마다 베팅을 새로 열기가 귀찮다는 점에서 시작된 토토는, 생각보다 빠른 속도로 결과에 도달했다.

10 게임. 노르드가 실력파로 유명하다고 해서, 방송에서 패배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던 건 아니었다. 한 번의 실수가 치명적으로 작용할 수 있는 시스템. 나이트폴에서 무적이나 무패 따위의 표현은 자주 사용되지 않았다.

경쟁전 방송을 하다 보면 그 노르드도 빈번히 회색 화면을 마주하고, 결국 패배했다는 결과 창을 직면하게 되는 바. 토토의 배당이 성공과 실패에 반반씩 갈라진 것도 썩 자연스러운 광경이라고, 포인트를 내던진 시청자들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을 터다.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는 분명 그런 분위기였다.

"다음 분 초대주세요."

[노르드 그만잘해!!!!]

[제발 1승만 해봐 개허접들아]

[지금까지 우나밍이 제일 분전한거 실화냐ㅋㅋ]

[이거 커트라인 킹으로 올려도 상관없을듯ㅇㅇ 퀸 생각보다 별거 없네]

[이사람 나이트폴 일주일간 전적도 없던데 왜 더 잘해진 거 같지]

[응 일대일이면 노르드 방해할 변수없어ㅋㅋ]

[카페 관리자 컷 존나 높네 ㅅ1발]

말 그대로 연승가도였다.

시간 단축을 목적으로 하는 건지, 노르드가 보여주는 플레이 스타일은 평소와는 궤를 달리했다. 마치 버서크가 상시 발동된 것처럼 느껴지는 공격 일변도의 운영. 때때로 무장을 바꿔가면서도 공격적인 운영은 변하지 않았다.

거리 조절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저돌적으로 돌진하는 플레이 스타일이 돋보였다. 좁혀지는 거리에 당황한 상대가 당황해서 수를 던지면 당연하다는 듯 완벽한 대처가 따라붙는다. 첫 수 싸움에서 얻어낸 이점을 바탕으로 단숨에 적의 숨통을 끊어내는 운영법.

방송을 통해 비슷한 패턴이 반복되고 있음을 눈치챘을 사람들이 매번 동일한 방식으로 죽어나갔다. 우나밍이 5분이 넘는 시간 동안 노르드를 붙잡아 두었을 뿐, 나머지는 한순간에 결판나는 승부가 대부분이었다.

한 호흡이라고 말해도 좋을 만큼, 짧은 순간에 승부가 결정되는 결투. 랭커라 칭송받는 퀸 유저들이 별다른 반항도 못하고 무너지는 모습은 충격적이기까지 했다. 그 속에 간간이 네임드라 불리는 플레이어들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이 극적인 효과를 더했다.

이어지는 새 베팅에서, 포인트의 저울추가 노르드 쪽으로 크게 출렁거릴 무렵.

다음 신청자의 명단을 쭉 훑어낸 노르드가, 한마디 탄성을 내뱉었다.

"아... 무상."

이미 베팅을 눌러버린 시청자 다수가 채팅창에서 비명을 토해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