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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40화 〉 240 ­ 투기장에서 더 빛나는 (240/243)

〈 240화 〉 240 ­ 투기장에서 더 빛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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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력을 따지고 들어가면, 무상과의 일대일은 따로 전적표를 만들어도 될 정도로 역사가 깊었다.

공식 대회에서 한 번, 빌드 연구에 도움을 준다고 한 번. 그전까지는 그저 그런 인연이었으나, 도움을 줬다는 명목으로 개막전 티켓이라는 거창한 선물을 받고 난 다음에는 제법 친숙해진 느낌이 있었다. 그 친숙함이라는 것도 서로 온라인 상태일 때 인사 메시지를 주고받는 정도에 불과했으나... 인터넷 지박령에겐 그것만큼 명확한 친분관계가 없는 법이니까. 빠지지 않고 인사를 나눌 정도면 얼굴이 익숙한 이웃 사이 같은 거지.

아무튼 서로 인사 한마디씩 보내는 게 익숙해진 다음에는, 종종 무상과 일대일 매치를 진행하고는 했다. 대부분은 저쪽에서 먼저 초대를 보냈왔다. 이야기를 나눌 때마다 훌륭한 스파링 상대라고 치켜세우는 건 좀처럼 익숙해질 수 없더라. 대회 승리에 큰 도움을 받았다는, 예의상으로 건네는 칭찬의 말. 공식 인터뷰에서 언급할 정도면 나름 진심이 담긴 것 같기도 한데... 칭찬에 몸서리치게 되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당연히 자리에 있을 팀원들은 어디 두고 연습을 도와달라고 부탁하는 건지. 무상의 속내가 어떻든, 나는 프로게이머와 결전을 한다는 사실에 신난다고 달려갔던 때가 많았다. 경쟁전에 비해 부족한 결전 유저 풀을 생각하면 그만한 대전 상대를 구하는 것도 보통 일은 아니었으니까. 왜, 일곱 명 정도가 들어선 채팅방에 들어가 결전 상대를 구하던 지난날의 같지도 않은 추억을 되새기고 보면 이건 투정부리기 힘들 만큼 배부른 상황이었다.

사실 자연스럽게 프로게이머와 교류하며 대전 기회까지 갖는 호화로운 상황이 낯설게 느껴질 만도 했으나, 그걸 제대로 실감할 수는 없었다. 몇 번인가 대화를 나누고 스파링을 하다 보면 마주한 상대가 잘나가는 프로게이머라는 인식은 저 멀리 어딘가로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아직 내 상식 속에서 프로게이머란 일반 유저와 궤를 달리하는 실력을 가진 유저라는 인식이 있었는데­ 무상에게서 그런 인식을 받은 적은 없었다. 무상에겐 미안하지만 어쩌겠나.

무상과의 정확한 전적을 헤아린 적은 없으나, 어찌어찌 계산해 보면 거의 5할에 가까운 승률이 나오지 않을까 싶었다. 체감상으로도 거의 백중세에 가깝게 느껴졌다. 연습을 한답시고 별 시답잖은 실험용 빌드를 들고 올 때도 있었지만, 그건 서로가 마찬가지였고. 몇 번인가 붙어보면 상대가 실력을 숨기고 있는지 정도는 금방 파악할 수 있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무상은 나와 붙을 때마다 전력으로 임했다. 그래서 나온 전적이 반반. 이 정도면 상대가 프로게이머라는 인식이 사라지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팀게임으로 붙지 않고서야 이 생각이 뒤바뀔 일은 없을 것 같기도 하고.

그러니 이제 와서 킹을 상징하는 왕관을 달고 서있는 프로게이머가 대단하다거나 색다르게 느껴질 일은 없는 것이다.

물론... 지켜보는 시청자들은 나와 다를 수 있겠다. 사람의 관점이란 건 본래 제각각이지 않나.

[ㄹㅇ 무상이네]

[진성 노르드빠 이제 방송까지 나오냐ㅋㅋㅋㅋ]

[베코하면 안됨?]

[무상옵빠ㅠㅠㅠㅠ사랑해요]

[좆달린 새.끼는 이 방송에서 입 못열어요^^]

[헉]

[관리자 먹어봤자 시간도 없는 사람이 신청을 왜했음?]

[자 숨어있던 샤이 개밥충들 등판해주세요~]

[나쁜말 금지입니다 방송 규칙 준수해주세요]

[이 방송에 규칙이 있었나]

[이미 친추되어있는게 웃음벨인데?]

이게 과연 유명인의 등판을 반기는 채팅인지.

채팅을 보고 무상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가 궁금했다. 나야 이제 익숙하게 느껴지는 채팅창이지만, 간혹 저걸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받아들일까 하는 의문이 생길 때도 있었으니까. 그건 주로 내 주변 사람들이 얽혀있을 때 드는 생각이었다. 예컨대 내가 방송한다는 사실을 가족들이 알고 있을 때.

가족의 입장에서 보는 채팅창은... 글쎄, 부끄러움이 앞서는 게 사실이다.

방송을 보면서 활발히 채팅을 친다는 혜민이의 말은 외면하기로 한지 오래였다. 계정이 뭔지 알게 된다면 아이피 차단이라도 걸어둘 텐데. 요즘도 매일같이 방송 이야기를 꺼내는 걸 보고 있으면 학업은 제대로 하고 있는 건지 의문이다.

아니, 이건 전형적인 꼰대의 마인드인가.

내가 초대를 받고 들어옴과 동시에 인사를 건넨 무상은, 별다른 멘트도 없이 곧장 게임을 시작했다.

과연 프로는 민심을 생각하고 움직이는 건지. 이전 몇 판에서 빠르게 진행하기 위해 애쓴 내 노력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모양이다. 빠른 진행에 떠들썩한 채팅창을 다스릴 필요도 없어져서, 내가 할 일은 새롭게 갱신한 토토의 마감을 지켜보는 정도가 전부였다.

무상의 등장과 동시에 균형을 되찾은 베팅의 최종 결과는 거의 5 대 5에 가까웠다. 평소 무상과의 전적을 알고 있는 것도 아닐 텐데, 얼추 맞아떨어지는 모양새가 과연. 배당만큼 진실된 수치도 없겠지.

규칙이나 빌드 따위를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과거 몇 번이나 맞붙었던 경험에 따르면, 무상도 변칙적인 빌드를 선호하는 편은 아니었다. 크게 상성을 타지 않는 빌드를 골라 게임을 손 싸움으로 이끌어나가는 걸 선호하는, 자기 플레이에 대한 자신감이 가득 찬 유형.

나는 그걸 굳이 상대를 열심히 분석하지 않아도 쉽게 알 수 있던 것이다. 왜냐하면, 나도 그랬으니까. 빌드 짜는 재미에 푹 빠져 머리를 붙잡고 빌드를 짜다가도, 돌고 돌아 익숙한 빌드를 손에 잡는 까닭은... 그걸로도 전부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 때문이다.

겜창에게서 겜부심을 제외하면 뭐가 남겠나. 게임 실력처럼 하잘것없는 요소에 진심으로 달려드니까 겜창이지.

로딩이 끝나 밝아지는 모니터를 바라보며, 나는 손목을 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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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rd11:ㅎㅅㅇ

게임이 시작하자마자 노르드가 채팅 한 줄을 써올렸다.

"한수요? 요즘 누가 한수요로 게임을 시작해. 저거 결전 모드 오픈하기도 전에나 쓰던 건데... 노르드 이 사람 몇 살이냐? 액면가 보면 20대 초반 같은데 하는 짓만 보면 아주 틀딱이 따로 없어. 근본 냄새 물씬 풍겨서 개같이 호감이네, 진짜. 나이트폴 틀딱 출신 씹고수 미인 게이머? 씨발, 이게 무슨 판타지야."

진수가 중얼거리듯 내뱉은 말은 당연하게도 혼잣말로 남아 바스러졌다. 애초에 대답을 기대하지 않았던 진수는, 잠깐 제 모니터에 비치는 방송 화면에서 눈을 떼 무상이 앉은 곳을 바라봤다.

팀의 막내는 남들 몰래 야한 동영상이라도 보는 것처럼 눈에 불을 켜고 모니터를 주시하는 중이었다. 거북목을 교정한다는 명목으로 의자에 바짝 붙였던 허리가 떨어져서는, 과거에 그렇게도 지적받던 엉거주춤한 자세로 다시 돌아온 모습이다. 등을 굽히고 모니터 쪽으로 머리를 내민 꼴이 거북이의 그것과 똑 닮았다.

마우스를 잡은 무상의 손이 장패드 위에서 커다란 원을 그렸다. 손짓에 따라 크게 회전한 시야가 바로 제자리를 되찾았다. 대회 경기가 시작되기 전 무상이 종종 보여주는, 습관과도 같은 행위. 본인의 말에 따르면 손목을 풀기 위함이라나.

그런 간단한 행위로 손목이 부드럽게 풀릴 일은 만무했다. 그러니까 저건, 손목을 풀기보다는 긴장을 풀기 위한 습관인 셈이다. 바짝 긴장하거나 집중한 상태에 들어가면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오는 루틴이라고 해야 할까. 한동안 팀 막내를 관찰하는 데 재미를 들였던 진수는 그 사실을 잘 알았다.

그 모습이 더는 재밌게 느껴지지 않는 이유도 그렇다. 무상이 노르드와 결투를 할 때면 매번 저런 상태에 들어간다는 것도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었으니. 다만 평소와 다른 점이 있다면, 오늘의 결투는 방송을 통해 수만 명의 시청자가 지켜보고 있다는 점이겠지. 심상치 않은 방송 규모는 공식 리그의 중계방송을 연상케 했다. 이제 막 한 시즌을 마치고 카메라에 적응하기 시작한 막내에게는, 좀처럼 가볍게 행동하기 어려운 환경으로 느껴질만했다.

그래서 진수가 노르드의 승리에 베팅 한 것이다. 전혀 쓰임새 없는 포인트라고 한들, 내기란 무조건 이기고 봐야 할 문제가 아니던가.

결전을 위해 만들어진 좁은 맵. 높은 벽으로 사방이 막힌 원형 경기장은 지형으로 생기는 변수를 최대한 억제하고 있었다. 양옆으로 뚫린 대기석에서 나와 경기장에 진입하는 순간이 곧 전투의 시작이다. 도망칠 장소나 이상한 전략을 꾀할 공간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결투에 어울리는 공간. 이미 노르드가 몇십 명의 지원자를 처단한 장소이기도 했다.

진수는 다시 방송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진수가 선택한 일등 관람석은 다른 게 아닌 노르드의 개인 화면이었다.

관람석을 방송 화면으로 결정한 이유는 간단했다. 절반은 농담기를 쏙 빼고 진지하게 게임에 임하는 후배를 놀리다 불상사가 벌어질 일을 막기 위해서. 나머지 절반은 단순히 노르드의 개인 화면이 더 재밌을 것 같아서.

노르드라는 스트리머는 무상을 통해 알게 됐지만, 그것만으로는 채널 포인트가 쌓일 정도로 방송을 지켜볼 이유가 되지 않는다. 노르드의 채널까지 찾아가 지난 나이트폴 플레이 영상을 챙겨봤던 건... 그녀의 개인 화면이 그만큼 충격적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팀원들이 연습을 할 때면 빠지지 않고 찾아가 훈수 두기를 선호하는 진수로서도,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는 개인 화면. 그를 비롯한 팀원 다수가 '노르드의 빌드' 따위를 운운하던 막내의 말에 귀 기울이게 된 것도, 분명 함께 시청한 플레이 영상들 덕분이리라.

노르드의 플레이는 사람의 시선을 잡아끄는 힘이 있었다. 그래, 마치 지금처럼.

커다란 대검이 무상이 서있던 공간을 거칠게 쓸어내렸다.

위협적인 일격은 상대를 베어내지 못하고 애꿎은 허공을 강타했다. 헤드셋을 타고 부웅 하는 소리가 들려옴과 동시에. 자잘한 발소리와 함께 날카로운 쇳소리가 귀를 파고든다. 대검을 휘두르는 역동적인 동작의 여파로 비틀린 신체는 위협적인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을 사각지대로 만들었다. 일반적인 플레이어라면,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회피를 시도할 터.

노르드의 대처는 궤를 달리했다.

대검을 제대로 회수하지도 못한 전사는 그대로 사각지대를 향해 뛰어들었다. 경고음이 들려온 방향. 한껏 낮아진 시야가 급격히 회전하는데, 몸을 낮춘 자세로 회피 캔슬을 이행한 것 같았다. 움직임에 맞춰 급박하게 돌아간 시야가 뒤늦게 적을 포착한다. 낮게 웅크린 몸 때문인지 날카로운 검날이 코앞에서 번뜩였다. 대응을 하기에는 다가온 검날이 지나치게 가까웠다.

사악­

그대로 머리를 꿰뚫을 것 같던 검날이 종이 한 장 차이로 귓가를 스치고 지나간다. 경미한 부상을 알리는 붉은 신호가 시야 측면을 붉게 물들이는 사이, 기세를 그대로 담아 바짝 접근한 노르드가 무상의 하체를 거칠게 후려쳤다. 순간 균형을 상실한 무상이 크게 비틀거렸다.

지체하지 않고 움직인 노르드의 왼손이 길게 뻗은 츠바이헨더의 검신을 붙잡는다. 파지법을 바꾸는 와중에도 다리는 쉬지 않았다. 균형을 회복하고자 뒤로 물러서는 무상에게 거리를 허용하지 않고 추격한다. 달라붙듯 무상에게 접근한 노르드가 창처럼 부여잡은 대검을 강하게 찔러 넣었다.

퍼억­

베는 것보다 뭉개는 것에 용이한 철덩어리. 간신히 상체를 비트는데 성공한 무상의 옆구리를 육중한 쇳덩이가 후려쳤다. 우욱 하는 신음소리가 공격이 성공했음을 알려왔다.

유효타를 허용한 무상이 연달아 비틀거리며 거리를 벌렸다. 노르드는 더 추격하지 않고 스태미나를 확인했다. 광전사가 뒤따라 거친 숨소리를 내뱉었다.

여기까지. 급박한 전투 상황을 숨죽여 지켜보는 시청자들도 덩달아 호흡을 가다듬을 타이밍이다. 자신도 모르게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던 진수는, 그제서야 자신의 자세가 무상의 그것과 비슷하다는 걸 깨달았다.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댄 진수가 채팅창을 확인했다. 참았던 숨을 내쉬는 듯 감탄 섞인 반응들이 터져 나오는 광경은... 역시. 게임에 빠져들어가는 것처럼 집중하고 있던 것이 자신만이 아니라는 걸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노르드의 플레이는 그랬다. 이성적이고 정석적인 운영을 지향한다고 느낄 때면 꼭 한 번씩, 리스크를 감수하고 크게 지르는 플레이를 서슴지 않고 저지른다. 그 사이에는 추측하기 힘들 정도의 간극이 있는 것이다. 정작 그런 시도가 실패했을 때 생기는 빈틈은, 아찔할 정도로 감각적인 대응으로 받아치는. 열 번 시도해서 한 번을 성공하면 스스로 슈퍼 플레이를 했다고 자부할 수 있는... 프로로서 선택하기 힘든 위험한 운영.

그러니까 더 매료될 수밖에 없었다. 나름 배짱 있다고 자부하는 진수로서도 '저건 좀'하는 찬사를 나오게 만드는 플레이를, 프로 선수를 상대로 하고 있다는 것. 누구보다 상남자스러운 플레이 스타일을 가지고 있으면서, 정작 본인은 여성 플레이어라는 사실도. 진수가 노르드에게 관심을 가지게 된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아마 무상의 존재가 아니었어도, 언젠가 노르드를 발견하고는 빠져들지 않았을까­하고 진심으로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 막내야, 너는 진짜 안 되겠다. 어우, 개 처맞아서 화면 빨개진 거 봐. 더 추해지기 전에 항복하고 빤스런하는 게 좋을 듯? 나는 이 악물고 이겨서 노르드 실물 영접해야지. 월급은 정기적으로 식데해주는 걸로 퉁치면 딱이겠다, 야."

헤드셋을 끼고 집중하고 있는 무상에게 목소리가 닿을 거라고 확신할 수는 없으되.

순간 마우스를 잡은 무상의 오른손이 하얗게 변하는 걸 보고, 진수는 제 놀려먹기 좋은 후배가 자신의 말을 제대로 들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무튼, 진수는 자신이 노르드에게 포인트를 걸었음을 잊지 않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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