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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41화 〉 241 ­ 패자는 말이 없다 (241/243)

〈 241화 〉 241 ­ 패자는 말이 없다

* * *

버클러를 잡은 왼손이 정면을 비스듬히 막아섰다.

분주히 움직이던 다리가 정지한 것도 잠시뿐이었다. 초를 세는 것도 불가능한 찰나. 전방에 내밀어진 버클러는, 기대했던 충격이 찾아오지 않자 곧장 제자리로 돌아온다. 동시에 무언가를 기다리듯 잠깐 멈춰 섰던 다리가 다시 바닥을 거세게 박찼다.

노르드가 측면으로 물러난 찰나. 방금까지 버클러가 머물렀던 자리로 창끝이 비집고 들어왔다. 허공을 꿰뚫었다는 사실을 인지하기도 전, 기다란 장대는 주인의 품으로 회수됐다. 공격이 빗나가는 결과를 미리 짐작이라도 했던 것 같은 움직임. 공격을 한 직후인데도 빈틈을 찾기 힘들었다. 금방이라도 다시 창을 뻗을 수 있다는 듯 자세를 낮춘 창병에게서 위압감이 흘렀다.

서로의 병장기가 닿지 않는 거리에서, 긴장감이 흐르는 대치 구도가 형성된다. 상태를 확인하기 위함인지 잠깐 인터페이스를 활성화하면, 시야에 비친 창병의 머리 위로 검은색 글자가 존재감을 드러냈다.

[GB Deca]

가끔은 단순한 닉네임이 무게감을 품을 때가 있다. 개인 방송이나 매드 무비가 아닌, 공식 리그에서 꾸준한 퍼포먼스를 보여줌으로써 많은 플레이어에게 이름을 각인시킨 프로게이머. 프로 리그에서도 손꼽히는 창 사용자는, 언제 튀어나와도 이상하지 않은 용수철처럼 몸을 잔뜩 웅크리고 있었다. 바닥에 낮게 내리깔린 창끝이 뱀의 머리같이 느껴졌다.

쇠가 맹렬히 부딪히면서 발생한 충돌음도, 전투가 시작되고 웅장하게 흐르던 배경음도 끝이 난 지금. 방송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정적 속에서 기묘한 대치 구도가 이어지는 와중. 노르드가 마우스를 움직인 건지 마이크를 타고 달칵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요한 수면에 물방울이 떨어지듯, 작은 파문이 일어났다.

움츠렸던 용수철이 튀어 오른 건 그때였다.

먼저 움직인 건 진수, 데카였다. 중량을 최소화한 극단적인 빌드. 달려드는 속도가 무섭도록 빨랐다. 바닥으로 머리를 내린 창끝은 교활하게도 자신의 움직임을 쉽사리 보여주지 않는다. 허리춤에서 잔뜩 수축되어 있던 창은, 데카가 정확히 세 발짝을 내딛는 순간 수직으로 머리를 꺾어 올리고는 노르드를 향해 몸을 뻗었다. 바닥에서부터 솟구치듯 튀어 오른 창촉이 허리춤을 노리고 달려든다.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섬뜩하게 들려왔다.

챙­!

매섭게 찔러 들어오는 쇠꼬챙이를 튕겨낸 건 작달막한 크기의 버클러였다.

불똥이 튀었다. 궤도를 온전히 읽어내지는 못했는지, 버클러의 끝자락에 스치듯 맞닿은 창은 궤적이 어긋난 채로 노르드의 허벅지에 생채기를 남기고 지나갔다. 불발한 패링. 방패는 명백히 창끝이 도달하는 순간을 노리고 움직였다. 주먹보다 조금 널찍한, 팔뚝을 다 가리지도 못하는 작은 원형 방패는 위협적으로 찔러 들어오는 창을 벌써 몇 번째나 받아내고 있었다.

공격을 흘린 순간 노르드가 대응에 나섰다. 창을 내지른 데카의 품으로 잰걸음치는 동시에 오른손에 든 아밍 소드가 날을 번뜩였다. 잔재주 없이 곧게 뻗은 검날이 데카의 목을 노렸다. 거리를 허용했다고 판단한 데카는, 망설임 없이 땅바닥에 몸을 굴렀다. 허공을 훑은 아밍 소드의 주위로 흙먼지가 흩날렸다.

서로가 한 수를 주고받은 직후. 이어지는 건 난타전이다.

병장기의 준칙과도 같은 거리재기는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버클러를 정면에 내세운 노르드가 끈덕지게 달라붙으면, 데카는 무작정 물러서기보다 정면으로 맞붙는 쪽을 선택했다. 불안정한 자세로 내지른 찌르기가 연달아 급소를 노린다. 달려드는 와중에도 절묘하게 버클러를 조작한 노르드는 치명적인 일격을 몇 번이나 막아냈다. 피부가 맞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서로의 병장기가 붙었다 떨어지기를 반복했다. 하나 둘, 두 플레이어의 팔다리에 깊은 상처가 생기기 시작했다.

승부수를 던진 건 데카였다.

양손으로 붙잡은 창을 강하게 내지르는 척, 모션을 보여주고는 곧장 동작을 캔슬한다. 백스텝 한 번에 노르드와의 거리가 벌어졌다. 한 번 수를 교환한 이래로 끈덕지게 달라붙었던 노르드에게서 한 걸음이나마 거리를 벌린 상태. 조금이나마 유리한 포인트를 얻어냈다.

이후는 심리전의 영역이다. 강하게 일격을 뻗어낼 기회를 얻은 창병이, 어느 타이밍에 공격을 수행할지. 거리를 벌린 즉시 창을 몸 쪽 깊숙이 당긴 데카가 눈을 부릅뜨고 노르드를 주시했다. 심장을 보호하듯 흉부를 막아선 버클러가 착용자의 호흡에 따라 위아래로 미세하게 흔들렸다.

다음 순간.

데카가 발을 내디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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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못 막았다."

한순간에 회색빛으로 변해버린 모니터를 주시하면서, 나는 얼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와 ㅁㅊ]

[지린다진짜ㅋㅋㅋㅋㅋㅋㅋㅋ]

[게임 수준 뭐?임]

[무상하고 다르긴하네]

[내포인트?내포인트?내포인트?내포인트?내포인트?내포인트?내포인트?내포인트?]

[패링 한번 실패해서 패배ㅋㅋㅋㅋ 실화냐?]

[선생님...믿고 걸었는데...]

[마지막에 페이크친거임? 아니 캔슬 이행하는 것도 모션이 너무 빨라서 뭔지 모르겠어; 이걸 ㅅㅂ 지금까지 어케막았지]

[아 제대로된 빌드로 다시 붙자고 ㅡㅡ 왜 데카랑 할때 패링 특화 빌드를 쓰냐고ㅋㅋㅋ 리스크가 너무 크잖아]

[개레전드네 이번게임]

칙칙한 회색 화면을 유지하고 있는 우측 모니터의 옆, 송출용 컴퓨터의 모니터는 밝고 선명했다.

게임에 너무 집중하느라 볼 수 없었던 탓일까. 짧다면 짧은 전투가 끝난 직후, 승부가 결정 난 순간 바라본 채팅창의 화력은 무시무시했다. 체감상으로는 그간 못 본 채팅이 한꺼번에 밀려닥치는 기분이었다. 송출용 컴퓨터를 따로 쓰는 게 아니었다면, 아마 방송이든 나이트폴이든 둘 중 하나는 터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빠른 속도. 나는 아쉬움과 허탈함이 뒤섞인 미묘한 감정을 품고 채팅창이 올라가는 모습을 멍하니 쳐다봤다.

패배를 했음에도 별다른 비난이 없는걸 보면, 그래도 게임의 수준이 높기는 했던 모양이다. 앞선 게임들과는 달리 정산을 끝낸 다음에도 게임 내용에 대한 이야기가 가득했다. 게임 중간중간 데카와 내가 사용했던 잡기술, 심리전, 특성 활용이나 판단의 근거까지. 역배야 잘 먹을게 따위의 헛소리나 주절거리던 이전과는 여러모로 다른 분위기였다.

잠깐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로 채팅창을 주시했다. 한동안 채팅창을 가만히 보고 있어도, 마지막 수싸움에서 게임을 작살낸 내 치명적인 실수에 대해 언급하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왜 그럴까. 정작 나는 그 실수 하나가 계속 신경 쓰여서 사지가 발발 떨릴 지경인데.

이건 분명 오늘 밤 잠자리에 들기 위해 몸을 뉜 나를 두고두고 괴롭힐 사항이었다. 분명 눈치채고 있었는데, 패링 타이밍에 손가락이 꼬여서­ 속으로 변명을 내뱉는 내가 추한 걸 아는데도 그걸 멈추기 힘들었다. 억울함이 치밀어 오르는데 어떡하라고.

승부욕이란 대체 뭔지. 게임에 한해 발동하는 불타는 승부욕은 찬물 한 바가지를 뒤집어쓰고 추욱 늘어진 상태였다. 프로를 상대로 지는 게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라는 건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걸 아는 것과 아쉬움이 생기는 건 전혀 다른 문제였다. 오히려 상대가 프로이기 때문에 더더욱, 이길 수 있는 승부를 실수 하나로 놓쳤다는 게... 너무나 아쉬운 것이다.

GB Deca:와ㅋㅋ

GB Deca:마지막에 패링 모션보고 쪼금 아찔했네요 ㅎㅎ

GB Deca:저 아니었으면 백이면 백 저스트패링 당하고 죽었을듯;; 역시 황르드

... 도발 좀 할 줄 아는 놈인가?

리스폰의 영향으로 색채를 되찾은 게임 화면. 오늘 첫 패배의 씁쓸한 뒷맛을 되새기고 있으면, 인게임 채팅창으로 데카가 목소리를 높였다. 문장 끝에 보란 듯이 첨가한 초성 두 글자가 사람 속을 세게도 긁어내렸다.

프로라는 사람이 저렇게 진중하지 못한 채팅을 써올려도 되는 건가. 이미지라는 걸 생각해야 할 텐데.

Nord11:수고하셨습니다

GB Deca:즐겜했습니다~ 관리자 자리는 언제부터 주시나요? 즉결처형 권한도 있는건가요?

Nord11:개인 메시지로 보내드리겠습니다. 질문 답변도 따로 해드릴게요.

GB Deca:아 ㅎㅎ 그럼 기대하고 있을게요 혹시 승자 인터뷰같은 거 해주시나요? 저 베코 바로 가능합니다

Nord11:^^

짧은 대화로도 알 수 있었다. 이건, 길게 상대할수록 손해 보는 인간상이라고.

인터뷰는 무슨. 마음 같아서는 곧장 거절하고 자리를 뜨고 싶었으나... 그러기도 힘들었다. 벌써 방송 시간만 몇 시간째인가. 방송을 시작하고 휴식 시간도 없이 줄창 결투만 진행한 상태인데, 몇 시간이 지나서야 첫 번째로 관리자 권한을 얻어낸 사람이 나왔다. 그것도 프로 타이틀을 달고 있는, 나도 닉네임을 기억할 정도로(물론 직관의 영향이 크긴 했지만) 유명한 플레이어가 그 대상이다. 본인이 인터뷰를 지원하고 나온 차에, 이걸 무시하고 지나갈 수가 있을까. 시청자들이 얼마나 인터뷰를 원할지는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 봐라. 채팅창이 터질 만큼 원하고 있잖아.

"아아­ 들리시나요?"

"네. 잘 들립니다."

"어우, 직접 들으니까 목소리 더 좋으시네요?"

"... 직접은 아니죠. 이것도 마이크 타고 들리는 소리일 텐데."

"하하, 기분이라는 게 있잖아요?"

데카의 목소리는 생각보다 훨씬 굵었다.

사인을 받기 위해 GB 게이밍의 선수들을 마주했던 기억을 되살려도, 얼굴과 목소리를 매칭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 시끌벅적한 회장 속에서 목소리를 듣고 있을 여력이 있을 리가. 주의 깊게 살펴보지 않으면 사람 얼굴도 쉽게 잊어버리고 마는 나였다.

사실, 대회 하이라이트 따위를 보면서 여러 번 목격했던 데카의 얼굴도 지금 생각해 보라면 그다지 뚜렷하지 않은 것이다. 두루뭉술하게 떠오른 남정네의 얼굴이, 오히려 사람의 인상을 더 헷갈리게 만들어 놓는 꼴이다. 나는 목소리를 듣고 연상한 데카의 얼굴을 바로 지워버렸다.

"먼저, 간략한 소개를... 음. GB 게이밍의 데카 선수입니다."

"...... 끝이에요?"

"네. 더 하실 말씀이 있나요?"

나지막한 웃음소리와 함께 뭐라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가 선명하지 않았다. 저 멀리서 주절거리는 듯한 음성이 들리는 걸 보면, 주변 사람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 같았다.

함께 지원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옆 사람의 정체는 아마 무상이겠지. 프로팀이 넣은 신청서를 생각하면 아직도 어이가 없었다. 기어코 승리까지 가져가는구나.

"아, 죄송해요. 방송에서만 보다가 직접 겪으니까 재밌어서. 네, 다들 아시다시피 저는 GB 게이밍 소속 게이머 데카구요. 이제 노르드 팬카페 관리자라는 직책도 추가 소속으로 붙일 수 있게 됐네요. 아주 영광입니다."

"... 창을 잘 쓰시더라고요."

"예? 하하. 제가 또 창하면 알아주는 사람이죠. 리그에서 손에 꼽는 창 플레이어, 이른바 GB의 대표 창남­ 읍!"

저 멀리. 또 한 번 말소리가 멀리 떨어진다. 먹먹하게 들리는 거리감과 달리 높아진 언성을 생각하면, 지켜보지 않아도 대충 어떤 느낌의 대화가 이뤄지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대충 저 게임단에서 데카라는 인간이 차지하고 있을 포지션도.

뭐... 무슨 집단이든 사고뭉치 한 명 정도는 존재하지 않나. 사람들 사이에서 늘 정리하는 역할을 떠맡았던 나는 그걸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인간들을 상대하느라, 정리역을 하는 사람이 얼마나 고생하게 되는지. 괜스레 무상에 대한 내적 친밀감이 높아지는 기분이다.

"아오, 뭐 얼마나 이상한 드립 쳤다고 진짜. 크흠, 죄송합니다. 저희 막내가 좀 걱정이 많아서."

"아뇨. 마음껏 말씀하셔도 괜찮습니다. 저는 어차피 책임지지 않으니까요."

"그렇죠? 제가 몇 년차 베테랑인데, 입조심을 못할까요. 아무튼 게임 재밌게 했습니다. 광전사 플레이 위주로 봤는데 패링각 재는 거나 무빙치는 것만 봐도 기본기 얼마나 탄탄한지 잘 알겠네요. 솔직히 저희 팀 친구들이랑 결전떠도 어지간하면 다 비비실 거 같은데요? 아, 무상이는 직접 바르셨지 참."

"... 아니요. 제가 한 수 배웠습니다."

그렇게 농락을 당하고도, 입발린 칭찬에 은근히 기분이 들뜨는 수준이란. 사람의 감정이란 참 별 볼일 없는 것이다.

제 입으로 베테랑 소리를 내뱉은 데카의 말에 문제는 없는지, 오랜 프로 경력답게 데카의 인터뷰 스킬은 꽤나 훌륭한 편이었다.

준비하지도 않은 인터뷰에 정리된 질문이 있을 턱이 있을까. 내 어설픈 진행 솜씨에도 불구하고, 번잡한 채팅 속에서 괜찮은 질문 몇 가지를 알아서 꼽아 대답하는 모습은 대단히 인상적이었다. 한 번 열린 말문이 좀처럼 닫히지 않는 터라, 한동안은 내가 게스트가 된 것처럼 뒤로 물러나 있을 지경이었다.

지금까지의 경험을 생각하면, 데카의 인터뷰 스킬은 나와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아니... 비교 대상으로 삼았다는 사실에 울컥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인 게임 빌드와 관련된 질문을 받고 한참을 떠들던 데카는, 불현듯 뭐가 떠올랐다는 듯 갑자기 언성을 드높였다.

"­아, 맞아! 저 진짜 궁금한 거 있는데 물어봐도 됩니까?"

"저한테요? ... 예. 물어보세요."

"관리자 뽑히면 만나서 이야기할 수 있다는 거. 그거 진지하게 생각해도 되는 거죠?"

... 아.

내가 그런 말을 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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