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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42화 〉 242 ­ 새벽에는 늘 라면이 생각나 (242/243)

〈 242화 〉 242 ­ 새벽에는 늘 라면이 생각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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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게이머라는 직책을 버젓이 달고 있는 미꾸라지 하나가 관리자 명찰을 받아 갔다고 한들, 이 피곤한 면접이 한순간에 막을 내린 건 아니었다.

당초부터 이리도 많은 사람이 지원하리라고는 예상치 못했던 상황. 선을 정해뒀을 리가 없었다. 게임을 하는 유저 중 몇 명 있지도 않은, '퀸'이라는 랭크 제한이 알아서 검문소 역할을 수행할 거라 믿었건만. 세상 천지에 나이트폴을 하는 인간들은 다 모여들었는지, 신청자가 예상 범주를 훌쩍 뛰어넘어버렸다.

한 명을 뽑았다고 딱 잘라 그만두기도 쉽지 않았다. 기회도 받지 못한 신청자들이 수두룩하게 남아있을뿐더러, 내게 관리자 권한을 얻어낸 인간은 제대로 활동을 할 수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바쁜 인간이었으니. 프로게이머가 팬카페 관리자. 인터뷰에서야 취미 생활과 관리자 업무를 겸하겠다는 개소리를 내뱉긴 했으나, 그걸 그대로 믿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루의 절반 이상을 연습에 소모한다는 직종이 관리자 구실을 수행할 수가 있겠냐고.

엄밀히 따지면 나는 내 팬을 자처하는 프로 한 명에게 한없이 명예직에 가까운 권한을 내준 것뿐이었다. 거창하게 커진 판이지만, 카페 관리자를 구한다는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시작했던 일인데. 실상, 몇 시간 동안 진행한 면접에서 내가 구한 건 단 한 명의 관리자(명예)가 전부였으니. 내가 이 상태로 면접을 끝낼 수도 없던 것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데카와의 인터뷰를 끝낸 직후 다시 확인한, 내 팬카페의 관리자 신청 게시판에는 아직도 절반에 가까운 지원자들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삼십 명이 넘는 사람들을 상대한 다음에도 그만큼의 양이 눈에 보이는 게... 참 버겁기도 했다. 컵에 물이 반이나 남았다니, 이렇게 신날 수가.

그러니까, 오늘은 방송 시간이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는 뜻이다.

"... 분명히 캔슬, 했는데."

[기계는 거짓말을 하지않아요 선생님]

[목소리 잠긴거봐라ㅋㅋㅋㅋㅋ 졸았는데?]

[맛탱이가 가셨네]

[웅얼거리는거 너무 커여워ㅠㅠㅠㅠ]

[노르드도 사람이야 사람]

[이제 그만 자자... 보고있는 나도 힘들다...]

[새벽방송 너무좋고]

[방송 시간 길어지는거 개꿀인데 맨날 관리자 선출하죠 ㅎㅎ]

[뭘 자 남아있는 거 다 끝내고 가야지]

[몇시간짼데 그럴만하긴해ㅋㅋㅋ]

[모카상 의문의 개이득]

[어째 실수가 많아지더만...]

[응ㅋㅋ 방송 더해봐~ 출근해서 자면 그만이야~ 회사 짤리면 돼~]

눈꺼풀이 무겁다.

노곤한 몸을 풀고자 길게 기지개를 켜면, 어두컴컴한 원룸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여전히 밝은 빛을 뿜어대고 있는 모니터 주변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회색으로 변한 게임 컴퓨터의 모니터보다 훨씬 어두운 방 안. 조명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모니터에서 멀리 떨어진 현관 쪽은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다.

무심코 손을 얹은 핸드폰 액정이 현재 시각을 알려왔다. 새벽 네 시 반. 방송을 킨 시간이 저녁 먹을 무렵이라는 걸 감안하면... 거의 반나절에 가까운 시간 동안 방송을 이어간 셈이다. 그 정도 시간이면 말만 계속했어도 입에서 침이 말랐을 텐데. 관리자를 아무에게나 줄 수는 없다고 게임에 한껏 집중했던 나는 반쯤 넋이 나간 상태였다.

이쯤 되면 손가락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것도 당연하다. 아니, 어쩌면 명령을 내리는 뇌가 제 기능을 수행하고 있지 못한 거일 수도.

"명예로운 승리네요. 축하드립니다. 어... 카페모카 쁘락치님."

[카페모카 프라푸치노요... 선생님]

[쁘락치 ㅇㅈㄹ]

[ㅋㅋㅋㅋㅋㅋㅋ 개웃기네]

[관리자주면 카페 팔아치울거같은 이름이네요]

[닉네임 불러주는 포상..개부럽다]

뻑뻑한 눈으로 활자를 읽는 것만큼 고역인 일도 없다.

젊었을 때는 이틀 밤도 눈뜨고 지새울 수 있다고 했는데. 피곤에 전 몸은 이틀은커녕 하루도 견디기 힘들어하는 것 같았다. 몇 주간 운동을 한다고 타고난 빈약함을 극복할 수는 없는 건지.

졸음을 호소하는 눈, 무거운 머리, 뻐근한 팔, 어렴풋이 통증이 느껴지는 손목, 그 와중에도 공복을 호소하는 배. 몸 상태를 의식하면 집중할 때는 몰랐던 감각들이 하나 둘 고개를 들더니 자기 존재를 어필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될 때까지 계속했는데도 아직 지원자가 남아있다는 게 소름일 따름이다.

"한 페이지 남았어요, 여러분."

아무 설정도 건드리지 않은 카페 게시판. 페이지 하나를 차지하는 글은 열다섯 개였다.

방송에 보이지 않게 따로 열어둔 메모장을 재차 확인했다. 합격자를 적어둔 메모장에는, 닉네임 세 개가 나란히 적혀 있었다. 이번에 추가된 카페 뭐시기를 포함하면 총 네 명. 몇 십 명의 지원자 중 선출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면 많은 수는 아니었다.

데카를 없는 사람이라고 치면 세 명이다. 세 명. 이 정도면 아직 크다고 할 수 없는 팬카페를 관리하기에 충분한 숫자인 것 같은데.

... 이제 그만해도 되지 않을까.

"자아, 그럼 여러분."

[?]

[설마 그냥 간다는 건 아니겠죠??? 아직 한 페이지가 남았는데??]

[불안하게 운떼지마셈]

[새벽까지 못자게했는데 끝까지 책임져 ]

[방종 냄새뭐야]

정작 그만둔다는 말은 꺼내지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일부 예민한 시청자들이 벌써부터 발작을 하고 일어났다.

방종 냄새가 난다고 과민반응하는 걸 보면 저컴 게시판을 이용하던 당시 인기글에 올라왔던 게시글 하나가 떠올랐다. 뻘글 답지 않게 장황하게 늘어놓던 게시글의 내용은, 내 방종 타이밍이 얼마나 기습적이며 잔인한지에 대한 설명이었는데... 나로서는 이해하기 쉽지 않았다. 방송국처럼 정규 타임을 정해둔 것도 아닌데, 얼마큼 방송을 했으면 언제 방송이 꺼져도 이상하지 않은 셈이지 않나. 방종을 하기 몇 분 전부터 알람을 해줄 것도 아니고.

이런 내 생각과는 달리, 시청자들은 내 방종 타이밍에 불만이 많은 것 같았다. 그래도 평소 같으면 그냥 방종을 했을 텐데. 새벽녘의 조용한 분위기 때문인지 괜히 다른 생각이 떠올랐다.

평일 새벽인데도 만 명이 넘는 시청자 수. 나는 내 방송이 그만큼 재밌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아마 일일이 다 언급하기 힘든 어그로에 끌려 모인 사람들일 거라는, 썩 좋지 않은 추측이 머리를 어지럽힌다. 만사에 부정적인 시선은 갈수록 늘어나는 시청자 숫자도 낙관적으로 바라보지 못했다. 무의식 속에서는 이걸 다 산더미 같은 거품이라고 인식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몇천 명이었던 시청자도 거품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보다 더 증가하면 그건 뭔가. 머릿속으로 거품으로 이루어진 산을 그려내고 있으면 문득 입에서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래도 이만큼 커다란 거품이면, 거품이 걷힌 다음에도 남은 알맹이가 없지는 않을 것 같았다. 이것도 성장이라면 성장일까.

의식해서 개미를 털어내는 것도 이젠 부질없게 느껴졌다. 걷힐 거품이라면 알아서 사라지겠지. 거리에서 나를 알아보고 다가오는 사람들이 생긴 지금, 숫자로 표기되는 시청자 전부가 허망하게 없어질 허상이라고 생각하는 건 부정적인 걸 넘어서 무례한 짓에 가까웠다.

나를 보러 모인 사람들. 가끔은... 바라는 바를 들어줄 필요도 있으리라.

"저 피곤해서, 게임은 더 못하겠어요."

실망한 채팅창에서 불 모양의 이모티콘이 올라오기 전, 나는 재빨리 뒷말을 덧붙인다.

"남은 분들은 내일 다시 하고... 뒤풀이로 캠이라도 켤까요? 출출한데 라면이라도 끓여오게."

뭘 원하나 해서 대충 던진 제안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커다란 파장을 일으켜서.

내가 지금껏 그토록 저들이 원하는 걸 안 들어줬나 하는, 자기반성을 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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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라면을 끓여오겠다며 자리를 비운 노르드는, 5분여의 시간이 흘렀을 무렵 다시 나타났다.

노르드를 대신해 사운드를 채우던 음악이 사라진 직후. 탁, 하고 마이크가 켜지는 소리와 함께 대기 화면도 카메라를 전환했다. 옅은 불빛이 비치는 어두운 방 안. 설정을 만지는지 몸을 일으킨 혜진의 상반신이 드러난다. 몇 번인가 딸깍거리는 소리가 들린 다음에야, 혜진은 밀어두었던 의자를 당겨 자리에 앉았다.

모니터의 밝기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조명이 자리를 비추고 있는 건지. 캄캄한 방 안에서도 혜진이 앉은 자리는 그다지 어둡지 않았다. 어두운 배경 속에서 화장기 없는 창백한 피부가 회백색으로 도드라졌다.

방송 시간이 길어졌다는 걸 알려주는 듯, 눈 밑에 내려온 다크서클은 평소보다 짙었다. 대충 걸쳤는지 어깨 절반 지점까지 흘러내린 얇은 회색 카디건. 그 속에는 목이 늘어난 흰색 반팔 티가 자리했다. 길게 내려오는 머리카락은 목덜미 부근에서 적당히 넘겨 묶은 상태. 혜진은 피곤한지 반쯤 감긴 눈을 비비고는 퀭한 눈을 다시 떴다. 양손을 잡고 쓸어내리는 과정에서 노곤함이 묻어 나왔다.

전반적으로, 꾸민 기색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제 얼굴이 어떻게 나오는지 확인하기 위해 정면을 주시하던 혜진은, 이내 팔을 뻗어 카메라의 각도를 조정했다. 살짝 아래로 내려간 카메라가 김이 올라오는 양은 냄비를 포착했다. 쇠젓가락이 부딪히며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일으켰다.

"라면 끓여왔어요. 다행히 하나가 남아있었네... 추레하다고요? 그냥 그대로 킨 건데. 집에 혼자 사는 사람이 다 이렇죠."

새벽인데도 채팅창의 화력은 전혀 죽지 않았다. 혜진의 등장으로 재점화된 채팅창을 쓱 훑어내린 혜진은, 이내 냄비 쪽으로 시선을 돌리고 젓가락질을 시작했다. 후루룩하는 소리가 마이크를 타고 흘러들어왔다.

"우움, 잘 끓였네. 파요? 그런 건 없어요. 엊그제 점심에 밥 볶을 때 다 털어 넣었어. 어... 머리 얘기는 왜 이렇게 많이 해. 이거 라면 먹을 때는 무조건 묶어야 돼요. 안 그러면 국물에 머리카락 들어가. 면발이랑 구분하기 힘들어진다니까."

...

"좋아서 했다고? 별걸 다 좋아하네. 걸러 들을게요. 내가 보니까 뭔 꼴을 하고 있어도 좋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더라고.

억빠... 육수? 너무 그렇게 부르지는 마세요. 무슨 집단처럼 느껴지잖아. 한데 뭉쳐버리면 서로 혐오해서 싸우는 거 밖에 더 있어? 좋게 좋게 봐야지. 꼴 보기 싫은 채팅 있는 건 알겠는데, 세상 일이라는 게 어떻게 다 마음에 들겠어요."

...

"저는 퍼진 면 안 좋아해요. 싫어하는 건 아닌데. 우움, 움. 계란은 넣었어요. 자, 여기 계란. 김치는 어딨냐고? 나 라면 먹을 때 김치 별로 안 먹는데. 둘 다 나트륨 덩어리라 극악의 시너지잖아."

......

"... 그럴 수도 있지. 제 취향도 인정해 주세요. 먹을 거 먹는데 자기 마음대로 먹는 거지... 음. 케이크에 김치­바로 십 분 차단."

...

"코스프레 다시 입어달라고. 솔직히 채팅 쓰면서 본인도 그럴 가능성 없을 거라고 생각했죠? 정답이에요. 오늘 공지 올리기 전에 카페 인기글 훑어봤는데, 바로 도망쳤어요. 제가 그런 걸 잘 못 봐서. 여러분도 누가 흑역사 사진으로 남겨뒀다고 하면 기겁을 할 거잖아요. 그런 느낌이야."

...

"카페 활성화는... 이미 잘 되고 있더라고요. 저는 아직 신경도 안 썼는데, 회원 수가 벌써. 그래서 오늘 바로 관리자 모집한 거잖아요. 이렇게 많이 신청할 줄은 진짜 몰랐어요. 신청한 사람들도 진짜... 우움.

솔직히 아직 뭐 줘야 될지 생각도 못 했어. 돈 주고 고용하면 뭔가 이상하지 않나. 다른 카페는 어떻게 운영하는지 아세요? 혹시 관리자들 돈고 일하는지."

...

"뭐야. 데카님 지금도 있어요? ... 무상 씨도 있잖아. 아직도 방송 보고 있어? ... 진짜 관리자 할 정도로 시간이 남는 건가?"

...

노르드답지 않게 길게 이어진 소통 시간은, 그녀가 라면을 전부 먹을 때까지 계속됐다.

캠은 켰지만 방송에서 게임도 하지 않고, 먹을 것까지 주워 먹으며 채팅만 바라봤다고 생각한 혜진은 끝마무리를 날로 먹었다고 생각했으되.

가뭄에 단비 같은 소통을 주고받은 시청자들은, 그 시간을 오늘 방송의 하이라이트라고 받아들였으니.

어찌 보면... 서로에게 윈윈으로 작용한 방송이라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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