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4화 (154/212)

한국인이라면 이런 프롤로그는 스킵하는 것이 국룰 아니던가.

다급히 스킵을 찾는 사이, 책 위로 떠오른 글자들이 홀로그램과 같은 그림으로 변했다.

‘삶’과 ‘죽음’의 싸움을 뜻하는 듯 환한 빛 덩어리와 어둠 덩어리가 격돌했다.

이윽고 전쟁에서 진 어둠 덩어리가 스르륵 사라졌다.

“아니, 스킵 없어?!”

책을 샅샅이 훑어보던 나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 스킵 버튼에 답답해서 가슴을 쳤다.

‘미친, 망겜 같으니. 강제 히든 루트 진입에 강제 프롤로그 영상 시청이냐고!’

나는 형형한 눈빛으로 뒤에 있는 리르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그는 카우치에 편히 앉은 채 얄밉게 어깨를 으쓱일 뿐 스킵하는 법 따위를 알려주지 않았다.

촤르르륵―

그 와중에 책장 넘어가는 소리와 함께 홀로그램이 빠르게 바뀌었다.

하는 수 없이 그것을 잠자코 지켜보며, 나는 한 가지 의문점을 가졌다.

‘왜 이런 걸 미리 공개하지 않고 숨겨둔 거지?’

유저 커뮤니티는 물론, 제작자들마저도 이 게임의 세계관을 담은 프롤로그를 언급한 적 없었다.

사실 그럴 만했던 게, 이 게임은 딱히 세계관을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그저 남주를 도와 동료들을 모으고 마물들을 처치하는 게 전부인 전투형 게임에서, 세계관이 뭐가 중요하겠는가.

‘그럼 대체 이건 뭔데.’

세계관이 필요 없는 게임치고 제법 정교한 설정들이 책 위로 이어지고 있었다.

「‘삶’은 자신의 힘을 아낌없이 사용하여 자신이 쟁취한 땅에 축복을 내렸다.

그리하여 그 땅에서 갖은 생명들이 태어났다.

‘삶’이 다스리는 땅의 생명들은 평온한 일생을 살았다. 그러나 어떤 것도 영원하지 않은 법.」

그림이 바뀌었다.

싸움에서 이긴 빛 덩어리는 지구로 추정되는 둥근 행성에 깃들었다.

지구 안에서 인간, 동물, 식물 등의 갖가지 생명체들이 태어났다.

시간의 흐름을 알려주듯 막 태어난 아이들이 나이를 먹고 죽음에 이르는 장면이 물 흐르듯 이어졌다.

이윽고 땅바닥에 널브러진 사체들 위로 작은 빛이 떠올랐다.

그 빛은 일제히 날아올라 컴컴한 밤하늘을 비추는 별이 되었다.

웅장한 음악과 함께 흐르는 영상은 무척이나 신비롭고 아름다웠다.

대체 태초의 탄생이 왜 나오는지는 모르겠지만…… 생각보다 고퀄이었다.

홀린 듯이 책 위를 바라보던 나는 자연스레 프롤로그 영상을 평가하게 되었다.

‘이런 거 만들 시간에 버그나 해결할 것이지.’

하여튼 이 게임의 미친 제작자들은 이상한 곳에 집착하곤 했다.

그러고는 이렇게 꽁꽁 숨겨 둔 게 못내 이해가 가지 않았다.

「― 가엾은 것들.

‘삶’은 찰나의 순간을 살다 별이 되어 스러지는 것들을 안타까이 여겼다.

그리하여 남은 힘을 모조리 쥐어짜내 별들을 또 다른 땅으로 인도한 후 ‘망각’이라는 축복을 내렸다.

그곳은 쫓겨난 죽음이 머무는 땅이었다.」

밤하늘을 비추던 화면이 다시 바뀌었다.

황폐한 땅 위로, ‘삶’이 데려온 수백, 수천 개의 별이 하나둘 심어졌다.

그 별들이 다시 탄생하는, 좀 전에 본 것과 같은 장면이 반복됐다.

그리고 그곳에서 태어난 것들은 죽으면 별이 되어 다시 지구로 옮겨졌다.

「― 모든 아이들의 찬란한 삶이 영원토록 이어지기를…….」

여성 성우의 목소리가 나지막이 울려 퍼졌다.

그 말대로 정말 무한 루프였다.

영상 속의 생명체들은 지구와 죽음이 머무는 땅을 오가며 계속해서 새로이 태어났다.

‘뭐, 환생이나 윤회를 뜻하는 건가?’

나는 알 듯 말 듯한 영상을 다소 심드렁하게 바라보았다.

제국의 건국 배경치고 너무 거창하고 잡다했다.

내가 제작팀이었으면 고대 인간들이 마물과 싸우는 액션 신이나 잔뜩 넣었을 것이다.

‘보통은 그런 게 게임 프롤로그 국룰 아닌가?’

역시 ‘설정 덕후’들은 뭐가 다르긴 다른가 보다, 하는 생각과 동시에 제작자들이 왜 이것을 히든 루트에 꽁꽁 숨겼는지 그제야 이해가 갔다.

스킵도 없는, 이딴 심오한 영상을 처음부터 공개했다간, 진입 장벽 때문에 아무도 게임을 시작하지 않았으리라.

그 사이, 힘을 다한 빛 덩어리는 황폐한 땅으로 흡수되듯 사라졌다.

자신이 만들어낸 생명들의 영원한 환생을 위해 희생한 것 같았다.

그 뒤에는 굳이 ‘삶’이 인도해주지 않아도, 두 행성에서 죽어 별이 된 것들이 알아서 양측으로 이동하는 장면을 끝으로 영상이 멈췄다.

‘이게 끝이야?’

보통 탄생 설화로는 신이니, 용이니 하는 휘황찬란한 존재가 나오지 않는가.

‘근데 이 게임은 신도, 용도 나오는데 웬 우주 배경?’

여신 리세아리브와 최종 보스인 [고대 마룡]을 떠올린 나는 샐쭉한 표정을 지었다.

어쨌든 이걸로 이상한 프롤로그는 대충 끝난 모양이었다.

“다 봤…….”

리르에게 다 봤다고 말하며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촤르라락―!

다시금 책장이 마구 넘겨지기 시작하며, 멈췄던 영상이 빠르게 움직였다.

‘아! 아직도 안 끝났냐고. 누가 망겜 아니랄까 봐, 아무도 안 보는 프롤로그를 대체 몇 부작으로 만든 거야?’

나는 짜증을 삼키며 도로 제자리에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대체 어디까지 설명할 건지, 책 위에 떠오른 장면은 전쟁에서 진 ‘죽음’이 어떤 처지가 되었는지부터 보여주기 시작했다.

척박하고 갈라진 땅 아래, 아까 봤던 어둠 덩어리가 꿈틀거렸다.

「한편, 황폐한 땅으로 내쫓긴 ‘죽음’은 전쟁에서 진 벌로 ‘끝없는 탄생’이라는 굴레에 갇혔다.

‘죽음’은 만물의 생명이 꺼지는 순간 힘을 얻었고, 그것이 곧 그를 존재하게 했다.

따라서 ‘죽음’은 ‘삶’으로 인하여 자신이 머무는 땅에 새로운 생명이 탄생할 때마다 힘을 잃었고, 누군가의 수명이 다할 때마다 다시 태어났다.

― 더 이상 새로이 태어나기 싫어.

끝없이 죽고, 태어나고, 죽고, 다시 태어나길 반복하던 죽음은 분노했다.

그는 ‘삶’에게 저주받아 ‘망각’의 축복을 받지 못한 탓에, 모든 죽음의 순간들을 기억했다.

― 더는 죽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다시 태어난 ‘죽음’이 고심했다. 다행히 그것은 실로 간단했다.

더는 죽지 않을 만큼 강대한 힘.

바로, 수많은 죽음이 있으면 되는 일일지니.

우습게도, 그의 손짓 하나에 ‘삶’이 만든 생명들은 허무하리만치 쉽게 스러졌다.」

그와 동시에 책 위의 그림은 따라잡기 힘들 만큼 빠르게 휙휙 바뀌었다.

집채만 한 파도가 마을을 덮치고, 땅이 마구 진동하며 갈라졌다.

이어서 화산이 터지고, 하늘에서 날벼락이 마구 내리쳤다.

그 틈으로 사람들이 허무하게 죽어 나가는 게 보였다.

“으.”

유저 배려 차원인지 빠르게 지나갔다지만, 제법 잔인하고 생생한 장면들에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거대한 자연재해 앞에 속수무책으로 죽어 나가는 것도 잠시.

얼마 지나지 않아 살아남은 사람들이 댐을 건설하고, 방파제를 세우는 장면이 이어졌다.

그들은 힘을 합하여 위험에 처한 동물들을 구해주고, 때론 그 반대가 되기도 했다.

군락에 불과했던 인간들의 터전이 점차 발전하면서 나라와 제국을 형성했다.

분할된 여러 대륙 중 가장 큰 대륙을 차치한 곳의 이름이 강조됐다.

<제니스 제국>

마침내 이 망할 게임의 배경이 되는 나라의 이름이 언급됐다.

하지만 바로 화면이 바뀌는 것을 보니, 이 프롤로그 영상에서는 그것이 딱히 중요한 것 같지 않았다.

‘아니, 건국 설환데 왜 제국 얘기가 안 나오는 거야.’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나는 계속해서 영상에 집중했다.

힘을 얻은 ‘죽음’이라는 존재가 그래서 어떻게 되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죽음’에게는 불행하게도, 자연재해는 전에 비해 큰 피해를 일으키지 못했다.

「― 이런 것으로는 강한 힘을 가질 수 없어.

또다시 저주의 굴레에 갇히게 된 죽음은 깊이 고민했다.

― 그래. 그거야!

마침내 한 가지 방법을 떠올린 죽음이 길게 웃었다.

‘죽음’은 더 이상 자연재해를 일으키지 않았다.

대신 ‘끝없는 탄생’의 굴레를 반복하며, 인간들이 일구어 더는 황폐하지 않은 땅을 깊숙이 침투해 나갔다.

그리고 그곳에 잠들어 있는 것들을 하나, 둘 일깨웠다.

‘죽음’이 깨운 것들은 인간들과의 싸움에서 진 채 오지로 내쫓긴 불길한 존재들이었다.

마치 ‘삶’에게 진 채 쓸모없는 땅으로 내쫓긴 ‘죽음’처럼.」

‘죽음’이 깨운 존재를 본 나는 일순 눈을 크게 떴다.

그것들은 바로 마물이었다.

「― 쿠웨에에엑!

‘죽음’의 축복을 받고 깨어난 마물들은 빠르게 늘어나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을 살육해 나갔다.

하지만 늘 그랬듯, 인간들은 또다시 방법을 찾았다.

그들은 단단한 무기와 강한 군대를 만들어 용맹하게 저항했다.

― 이것으로는 부족해.

‘죽음’은 다시 저주의 굴레에 갇히게 될까 봐 두려웠다.

그래서 그 무엇보다 강대하고 사악한 존재를 찾아 헤매기 시작했다.

다행히 얼마 안 가 용암이 들끓는 화산의 꼭대기에 잠들어 있는 거대한 존재를 발견할 수 있었다.」

“뭐야. 최종 보스잖아?”

심드렁했던 나는 어느 순간부터 잔뜩 몰입한 채로 책 위에 펼쳐지는 홀로그램을 응시했다.

화산에 잠들어 있는 존재는 다름 아닌 이 게임의 최종 보스, [고대 마룡]이었다.

검은색 덩어리가 잠든 용의 입으로 스며들었다.

「‘죽음’은 잠든 마룡의 몸에 깃들었다.

깨어난 마룡은 거세게 포효했다. 용의 날카로운 이빨과 단단한 발톱, 뜨거운 불꽃이 뿜어져 나오는 숨결에 수많은 생명들이 죽어 나갔다.

― 더, 더!

차오르는 힘을 느끼며 ‘죽음’이 광포하게 웃었다.

그는 곧 이 땅의 모든 생명체들을 잡아먹을 것을 예감했다.

욕심이 가득한 ‘죽음’은 더 나아가, 태초에 ‘삶’이 가졌던 쓸모있는 땅 또한 탐이 났다.

별들이 건너오는 바로 그 땅.

― 이곳도, 그곳도, 내가 모조리 삼킬 거야!

마룡을 조종할 만큼 강대해진 죽음을 막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용과 마물들의 무차별적인 공격에 죽어가던 인간들은 크나큰 시름에 잠겼다.

하여 <제니스 제국>의 초대 황제, <자이눅스 루크비히>는 특별한 힘을 가진 자들을 선출하여 마룡을 물리칠 토벌대를 꾸렸다.」

이 프롤로그에서 꽤나 중요한 인물인지 화면에 크게 떠오르는 황제의 모습에 나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주요 인물치곤, 처음 듣고 보는 인물이었다.

초대 황제라는 자는 생각보다 앳된 얼굴이었다.

성인이라기보단 소년에 가까운, 일레인과 비슷한 나이대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보다 내가 더 놀란 것은,

“……카셀?”

초대 황제라는 소년의 얼굴이 카셀과 똑 닮아 있었다. 그의 어린 시절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밤하늘처럼 새까만 머리칼과 피처럼 붉은 눈.

‘그러고 보니…… 황제는 눈이 빨갛지 않았어.’

나는 반사적으로 카셀의 친아버지인 황제의 얼굴을 떠올렸다.

황제의 머리카락은 카셀과 같은 검은색이었지만, 눈은 분명 평범한 고동색이었다.

나는 기묘한 기분에 휩싸인 채 퍽 익숙한 외양의 초대 황제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황제에 이어, 또 다른 인물들이 하나둘 책 위로 떠올랐다.

「충성스러운 신하이자 강한 기사였던 <세피트라온 헤일리>.

치유와 수호의 힘을 지닌 성녀 <니세아리브>.

자연을 다루는 위대한 이종족들의 왕 <벨리세르>.」

“어…….”

이어지는 설명에 나는 초대 황제를 봤을 때보다 더 크게 당황했다.

좀 전부터 느끼던 위화감이 한 층 더 강해졌다.

책 위에 떠오르는 사람들은 모두 내가 익히 아는 자들이었다.

지금까지 게임을 플레이하는 동안 보아온, 제법 주요한 설정들을 맡은 인물들.

하지만 내가 당황한 것은, 이미 알고 있던 게임 속 인물들이 건국 설화 속의 토벌 파티원들이라는 사실 때문만은 아니었다.

“리…… 르?”

엘프들의 왕 벨리세르.

책 위에 떠 있는 그의 모습이 내 뒤에 있는 GM의 모습과 똑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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