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었다. 머리가 핑핑 돌고 혼란스러웠다.
책 위에 떠 있는 게임 속 인물들이 고대의 영웅이라는 설정도 놀라운데…….
어째서 저 인간은 그중 한 명과 똑 닮은 행색을 하고 있는지.
하지만 나는 미처 리르에게 어떻게 된 일인지 따지고 들지 못했다.
빠바밤――!
별안간 웅장하고 빠른 템포의 BGM이 서고에 크게 울려 퍼졌기 때문이다.
거의 천둥과 같은 소리에 어깨를 파르르 떤 나는 반사적으로 책을 향해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마룡을 죽이기 위한 머나먼 여정을 떠났다.
수백, 수천 마리의 마물과 싸우며 힘겹게 나아가던 그들은 마침내 마룡의 둥지에 도착했다.
하지만 마룡과 채 맞닥뜨리기 전, 이변이 생겼다.
‘죽음’이 욕심 많은 인간들에게 간사한 말을 속삭여 이종족들을 공격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 벨리세르! 제발 도와줘!
― 미안하구나. 짐은 형제들에게로 돌아가야만 해!」
토벌대는 마룡의 둥지 앞에 진을 친 마물들에 밀려 수세에 몰려 있었다.
그런 동료들을 냉정하게 등진 초록 머리의 남자가 빠르게 멀어졌다.
홀로그램이 다시 바뀌었다.
제 나라로 돌아간 벨리세르가 마물이 아닌, 약탈을 일삼는 인간들과 싸우는 장면으로.
제아무리 신묘한 힘을 가지고 있는 이종족들일지라도, 수적으로는 인간들에 비해 훨씬 열세였다.
게다가 오랜 시간 마물과 대적하기 위해 개발된 인간들의 무기에 엘프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엘프들이 사는 마을부터 시작해서 이종족들의 나라는 빠르게 붕괴됐다.
어린 딸마저 노예 사냥꾼에게 끌려갈 뻔하자, 벨리세르는 제 손으로 두 눈동자를 뽑아 그것으로 목걸이를 만들어 딸을 숨겼다.
눈을 잃은 벨리세르는 인간들의 손에 쉽게 목숨을 잃었다.
「― 원통하고, 허무하구나. 고작 이런 것을 위하여 필사적으로 싸워왔단 말인가…….」
두 눈에서 피눈물을 흘리며 죽어가는 초록 머리 남자의 모습이 섬뜩하기 그지없었다.
“이게 무슨…….”
그의 비극적인 죽음에 나는 나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이렇게…… 어이없게 죽는다고?”
벨리세르는 분명 모두를 위해 마물 토벌에 기꺼이 참여했다.
자신의 백성들을 위해서였겠지만, 거기엔 분명 이웃 나라의 인간들을 위한 마음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통치자들이 세상을 구하기 위하여 자리를 비운 틈을 타, 습격과 약탈을 하다니…….
이 무슨 개막장 같은 스토리란 말인가.
문득, 암시장에서 봤던 끝도 없이 늘어진 케이지가 떠올랐다.
그 안에 제대로 누울 공간조차 없이 빽빽하게 갇혀 있던 이종족들의 모습.
그것과 처참하게 죽은 벨리세르의 모습을 겹쳐 보던 나는 왠지 모를 오싹함을 느꼈다.
촤르라락!
그러는 사이 책장이 빠르게 다음으로 넘어갔다.
「남겨진 세 명은 마룡과 사활을 건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다행히 벨리세르 없이도 몰려오는 마물들을 어찌어찌 물리친 나머지 파티원들은 마침내 [고대 마룡]을 맞닥뜨렸다.
화면이 불을 뿜으며 날뛰는 마룡의 모습으로 스르륵 바뀌었다.
그리고 지친 몸을 이끌고 최후의 전투를 벌이는 3인의 모습이 담겼다.
「충성스러운 기사 <세피트라온 헤일리>는 뛰어난 검술로 용의 두 날개를 베어냈다.
그러나 거대하고 단단한 발톱을 막을 수는 없었다.」
빠각!
둔탁한 소리와 함께 커다란 용의 발톱이 세피트라온의 갑옷을 뚫고 그의 가슴을 관통했다.
남자가 괴로운 신음을 내질렀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숨이 멎는 순간까지 검을 휘두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성녀 <니세아리브>는 마룡이 내뿜는 불꽃을 온몸으로 막았다. 산 아래 있는 마을을 지키기 위함이었다.」
가녀린 여자는 두려움을 모르는 사람처럼 쩍 벌어진 괴수의 아가리 앞을 막아섰다.
화아아악!
그녀의 몸에서 터져 나오는 성스러운 흰빛이 드래곤 브레스를 계속해서 튕겨냈다.
하지만 오래 버틸 수는 없었다.
티 한 점 없이 곱던 여자의 머리끝과 손끝이 점차 시커멓게 타들어 가기 시작했다.
그다음 장면은 그런 성녀의 앞을 박차고 뛰어올라 검을 휘두르는 초대 황제의 모습이었다.
「동료들의 고귀한 희생으로 만들어진 기회를 놓치지 않고, 초대 황제 <자이눅스 루크비히>는 마룡의 심장에 검을 꽂아 넣었다.
괴로움에 몸부림치던 마룡이 불현듯 입을 벌렸다.
― 왜 너희들은 나를 없애려 드는 거지? 어차피 너희들에겐 이 땅이 아니어도 ‘삶’이 가진 땅. 최초의 별이 탄생한 그 찬란한 땅에 머물 수 있잖아!」
나는 저 말을 하는 것이 마룡에 깃든 ‘죽음’이란 존재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떼를 쓰는 듯한 말투에 초대 황제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저 마룡의 심장에 검을 더 세게 박아 넣을 뿐.
「― 아아…… 안 돼…… 어떻게 버텨 왔는데…….
그간 그들의 필사적인 노력으로 약해진 ‘죽음’은 또다시 ‘끝없는 굴레’를 반복하게 될 것을 예감했다.
― 너희들이 미워. 네놈들을 만들어낸 ‘삶’이 증오스럽다. 너희들도 느껴 봐야 해. ‘죽음’을 겪는 것보다 생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것이 더 끔찍하다는 사실을.
― 너를 저주한다! 나를 없애려는 너도 언젠간 끝없는 ‘탄생의 굴레’에 갇히게 될 거야!」
마룡의 입에서 시커먼 덩어리들이 꾸물꾸물 새어 나와 초대 황제를 뒤덮었다.
정말로 무슨 저주라도 받는 건지 무덤덤하던 초대 황제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 이 저주를 푸는 법은 내게 저주를 내린 ‘삶’의 고결한 희생뿐.
― 하지만 ‘삶’은 이미 한참 전에 너희들을 위해 제 몸을 희생했는데, 이제 어쩌려나…….
그것을 끝으로 마룡은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어린아이가 키득거리는 섬찟한 웃음소리와 함께, 마룡의 눈이 스르륵 감겼다.
‘죽은 건가?’
숨죽인 채 마룡의 말로를 지켜보던 나는 곧바로 고개를 저어 부정했다.
‘잠에 빠졌다’는 말도 그렇고, 저 때 죽었다면 [고대 마룡]이 최종 보스로 나올 리가 없었다.
눈을 감은 용의 모습을 바라본 나는 그저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미친, 심장에 칼을 박아 넣었는데도 안 죽는 놈을 대체 무슨 수로 죽이는데?!’
최종 보스까지 가본 유저가 있었던가?
너무 엄청난 정보들을 한꺼번에 접해서인지 갑자기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확실한 건, 아직까지 아무도 엔딩을 깨지 못했다는 것뿐.
새삼 와닿는 게임 난이도에 이마를 붙들고 있는데, 문득 책 위에서 커다란 함성이 울려 퍼졌다.
「― 황제 폐하 만세! 만세! 만만세!」
“……살았잖아?”
나는 바뀐 장면에 당황했다.
잠든 마룡과 함께, 검은색 덩어리에 뒤덮여 죽었을 것이라 생각한 황제가 제법 멀쩡한 얼굴로 귀환식을 진행하고 있었다.
하지만 살아 돌아온 것은 오로지 그뿐이었다.
촤라락!
넘어가는 책장과 함께, 장면은 엄숙한 장례식으로 빠르게 전환됐다.
마룡과의 전투 끝에 죽은 성녀 니세아리브와 세피트라온은 제국의 영웅으로 추앙되었다.
특히 긴 여정 중에 니세아리브가 베푼 온정을 입은 사람들은 그녀를 신처럼 떠받들었다.
마룡이 잠든 산 아래에서부터 그녀를 추모하는 성전이 하나, 둘 생기기 시작했다.
‘저렇게 해서 주신까지 된 거구나.’
이후 ‘죽음’이 사라지고 마룡이 잠든 뒤 벌어진 일들이 서정적인 BGM과 함께 흘러나왔다.
조금 전까지는 손에 땀을 쥔 채 볼 수밖에 없는 스펙타클한 전투 장면이 이어졌다면, 후일담은 다소 허무하고 씁쓸했다.
홀로 돌아온 자이눅스는 잘 사는 듯하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죽었다.
사인은 돌연사였다.
“와…… 진짜 이렇게 죽는다고?”
사람들은 전투만 하다가 이른 나이에 숨진 젊은 황제의 죽음을 슬퍼했고, 눈물로 그를 기렸다.
어디에도 벨리세르에 대한 이야기는 없었다.
아무래도 중간에 토벌대를 탈주한 데다가, 약탈하는 인간들과 싸우다 죽어선지 그대로 잊힌 듯했다.
처음 나왔던 세계관처럼, 죽은 자이눅스는 붉은색 별이 되어 밤하늘에 맺혔다.
이윽고 얼마 안 가 그 별은 ‘지구’로 보이는 행성으로 이동했다.
그곳에 도착한 붉은색 별은 새로이 태어나 낯선 남자의 일생을 살았다. 환생인 듯했다.
“좋겠다. 환생도 하고.”
나는 심드렁하게 중얼거렸다.
얼마 안 가 낯선 남자가 죽고, 붉은색 별이 밤하늘에 떠올랐다.
그 별은 또다시 멀리 떨어진 ‘죽음’이 있는 땅으로 이동하여 낯선 사람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그 과정이 몇 차례 반복되었다. 다행히 그사이 잠든 마룡이 깨어나 날뛰는 일은 없었다.
인간들은 남은 마물들과 공존하는 방법을 터득해 나가기 시작했다.
“언제 끝나는데…….”
나는 끊임없이 별이 옮겨지고 또 옮겨지는 장면을 지루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솔직히 이쯤 되니 책 내용이 뭘 뜻하는 건지도 알 수 없었다.
그간 종종 언급되던 인물들이 고대 영웅들이었다는 것은 좀 놀라웠지만, 납득하지 못할 정도까진 아니었다.
‘아무렴 설덕들이 짠 게임 배경인데 그 정도야.’
뒤에 있는 인간이 벨리세르와 똑 닮은 외양인 것은 소름 끼쳤지만, 그것도 뭐.
캐릭터가 너무 예쁘고, 멋지게 보이면 자기 캐릭터에 코스프레할 수도 있는 노릇이긴 했다.
실제로 로브로 모습을 가리고 다니기 전엔 몇몇 유저들이 내 코스튬을 따라 하기도 했으니까…….
그러는 사이 책장이 계속해서 넘어갔다.
붉은색 별은 계속해서 두 행성을 오가며, 태어나고, 죽기를 반복했다.
“영웅은 죽지 않아요, 뭐 그런 거냐고.”
허탈하게 웃으며 책의 주제에 대해 아무렇게나 중얼거리던 나는, 이윽고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아직 책장의 끝에 이르지 않은 듯했으나, 내가 볼 땐 이게 이야기의 끝이었다.
더 볼 내용도 없을 것 같고.
“리르. 이제 다 본 것 같은…….”
확신에 가득 찬 채 입을 연 순간이었다.
막 ‘죽음’의 땅에 도착해 새로이 태어나는 붉은색 별과 함께, 불현듯 책 위로 새로운 글씨가 떠올랐다.
「그러던 어느 날, 오래도록 잠들어 있던 마룡이 깨어났다.」
나는 선 채로 딱딱히 굳었다.
기껏 사람 넷이 죽어가며 잠재운 마룡이 다시 깨어난 것도 환장할 일이었지만…….
이전과는 달리 새로 태어난 붉은색 별이, 내가 잘 아는 이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황궁에서 막 태어난 아이는, 다름 아닌.
“……카셀.”
남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