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6화 (156/212)

요란스러운 홀로그램 때문에 책과 조금 떨어져 있던 나는 한달음에 그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그새 자라나 대여섯 살이 된 아이를 샅샅이 뜯어보았다.

검은색 머리에 붉은 눈.

자이눅스와 흡사한 외양이었으나, 자세히 뜯어보니 조금 달랐다.

키와 골격이 평범하고, 눈매가 부드럽던 초대 황제에 비해 아이는 날 때부터 튼튼한 장골인 데다 형형한 눈빛을 지니고 있었다.

나는 확신했다. 자이눅스가 아닌, 카셀이 틀림없다고.

차이는 아이가 자랄수록 더욱 극대화됐다.

책장이 넘어갈 때마다 무럭무럭 자라난 아이는 어느덧 완연한 카셀 루크비히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초대 황제의 환생이…… 카셀이라고?”

나는 혼란스러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촤르라락!

책장이 넘어갔다.

빨리 감기라도 하듯 빠르게 움직이는 장면과는 달리, 더 뜨는 글씨는 없었다.

짧은 유년 시절이 끝나고, 장성한 카셀은 지금과 똑같이 날카롭고 기세등등한 황태자의 모습이었다.

촤르라락!

책장이 넘어가고, 그를 못마땅해하는 황제와 비열한 웃음을 짓는 교황.

지나가는 그의 뒤로 손가락질하는 귀족들이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이건…….”

빠르게 흘러가다 어느 순간 우뚝 멈춘 장면에 나는 숨을 멈췄다.

그건 헤일리의 첨탑에 갇혀 있는 카셀의 모습이었다.

사지가 묶여 있는 처참한 꼴로 무력하게 누워 있던 그는, 그대로 잠들었고 얼마 안 가 재앙이 찾아왔다.

꺼지지 않는 들불과 마물 떼에 휩싸인 헤일리의 땅은 그렇게 한순간에 멸망했다.

뉴비 유저들이 올린 영상으로 꽤 많이 보았던 장면이라 놀랄 것도 없었다.

하지만 조금 이상했던 건.

‘유저가 없어.’

어딜 봐도, 그를 도와주러 왔어야 할 유저가 없었다.

게다가 멸망 이후 나오는 쿠키 영상에서는 분명 사라진 것으로 나왔는데, 책 위의 카셀은 어쩐 일인지 잿더미가 된 헤일리 영지에서 눈을 떴다.

“아…….”

놀랄 것도 없다고 생각했던 나는 이어지는 장면에 큰 충격을 받았다.

자신만 홀로 살아남았다는 사실을 자각한 그는…….

그대로 자살했다. 주변에 널브러진 검으로 스스로 목을 베어서.

촤라라락!

그것을 끝으로 책장이 넘어갔다.

“으아아아앙!”

다음에 나온 장면은 다시 태어난 카셀의 모습이었다.

“……뭐야? 왜 반복되는 거지?”

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책 위를 응시했다.

갓 태어난 카셀은 순식간에 자라났다.

하지만 같은 장면들이 반복되는 듯하면서도, 카셀은 전과는 다른 양상을 보였다.

신전보다 먼저 자신의 꿈에 대해 알리고, 아무것도 모르는 시절에 일어났던 몇몇 재앙들을 막았다.

그 노고를 인정해 주듯 이번엔 아무도 그를 [악몽의 군주]라 부르며 멸시하지 않았고, 죄인의 신분으로 헤일리에 유배되지도 않았다.

되려 예지몽을 꾸는 예언가라며 황태자를 칭송했다.

그 결과…….

헤일리를 덮쳤던 재앙이 이번에는 수도를 덮쳤다.

예고 없이 찾아온 수면은 하루아침에 수도 전체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사람들은 분노했다. 카셀이 위험을 전부 예측해줄 것이라 굳게 믿었던 만큼 배신감도 어마어마했다.

카셀은 황족으로서 국가의 안위를 지키지 못한 죄로 처형돼서 죽었다.

촤라라락!

다시 책장이 넘어갔다.

“으아아아앙!”

갓 태어난 카셀로 시작되는 장면.

성장하는 내내 카셀은 악에 받쳐 있었다.

그는 전번과는 달리 이번에는 재앙에 관해 아무런 언질을 하지 않았고, 결국 신탁에 따라 헤일리에 유배되었다.

카셀은 이번에도 잠들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버텼다.

“다 같이 사이좋게 뒤지고 싶어? 칼! 제발 단검이라도 가져오라고!”

잠을 깰 수 있게 해달라고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지만, 아무도 그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다.

바닥에 이마를 퍽퍽 박으며 버티던 그는, 끝내 잠들었다.

재앙이 찾아왔고, 카셀은 다시금 잿더미 속에서 홀로 깨어났다.

다행히도 그는 자살하지 않았다. 혈혈단신의 맨몸으로 수도로 향했을 뿐.

아마도 황궁으로 돌아가려 했겠지만, 그는 채 수도에 도착하기도 전에 상급 마물 떼를 만나 싸우다 죽었다.

촤르라락!

또 한 번 책장이 넘어가고, 다음 생의 카셀은 일찍이 몸을 단련했다.

주변을 경계하고, 아무도 신뢰하지 않았다.

헤일리에 가서도 사슬을 뜯어내어 자해하는 방법으로 잠들지 않는 것에 성공했다.

마침내 재앙을 막았지만, 황제와 귀족들은 그를 복권해 주지 않았다.

아담의 충성 또한 얻지 못한 그는 감옥에서 생을 마감했다.

촤르라락!

책장이 넘어가고, 다음 생에서의 그는 다시 재앙을 일으켰다.

촤르라락!

“어…….”

그다음 생에서 그는 일찍이 황제에게 재앙에 관하여 털어놓고, 거래를 했다.

재앙을 막은 후 먼 타국으로 떠나, 다시는 제국에 얼씬거리지 않기로.

그리고 처음으로 헤일리에 유저로 추정되는 인물이 등장했다.

하지만 그는 제게 불면 포션을 먹이려는 수상한 유저를 죽였다.

그는 황제와의 약속대로 헤일리의 재앙을 막고 타국으로 떠났다.

하지만 얼마 안 가 완전히 깨어난 마룡으로 인해 제국 전체가 멸망했다.

촤르라락!

그다음 생에서의 그는 마침내 유저를 이용하여 아담의 충성을 얻어냈다.

스스로 복권한 뒤, 암흑단을 소탕하다가 발락크와 대적하다 죽었다.

촤르라락!

그다음 생에서 그는 일레인을 만났다. 그리고 암살당했다.

촤르라락!

그다음 생에서는 일레인을 얻었으나, 성녀가 누군지 알아보지 못했고.

그다음 생에서 간신히 마물을 토벌할 동료들을 모두 구했으나, 드래곤 레어 문턱에도 이르지 못하고 전멸했다.

그다음 생에선 마룡과 싸우다가.

그다음 생에서도.

그다음 생에서도…….

정신없이 스쳐 지나가는 책장들은 무수히 많은 남주의 죽음을 담고 있었다.

아니, 게임을 하는 유저들의 실패라고 해야 하는 걸지도.

생을 계속 살아낼수록 카셀의 낯빛에 점차 생기가 없어졌다.

멀쩡한 사람 같던 그의 감정은 점점 메마르고 황폐해졌고,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마치 지난 일생의 모든 것을 기억하는 사람처럼.

그는 도대체 무엇을 위해 싸우는지 알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저 체념한 것처럼 끝을 향해 기계적으로 움직일 뿐.

그런 카셀의 모습에 왜인지, 덜컥 가슴이 내려앉았다.

점점 나까지 정신이 피폐해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던 와중.

나는 문득 이상함을 느꼈다.

‘왜 죽었는데도…… 카셀은 별이 돼서 이동하지 않는 거지?’

이 책 속에 나오는 만물들은 죽은 후에 별이 되어 다른 행성으로 이동하곤 했다.

물론 그렇지 않은 인물들도 있었다.

최초로 마룡을 상대한 고대의 영웅들.

무슨 이유에선지, 자이눅스를 제외한 다른 이들이 환생하는 장면은 나오지 않았지만.

나는 왜인지, 그들이 누구로 환생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들 모두가 카셀처럼 끝없이 생을 반복하는 것도 아니었다.

‘아니, 어쩌면 반복하는 게 맞는 건가?’

나는 화면 속에 스쳐 지나가는, 토벌대로 발탁된 카셀의 동료들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아담, 일레인, 니세.

그들 또한 오랜 싸움으로 지친 얼굴이긴 했으나, 그 누구도 카셀처럼 황폐해 보이지는 않았다.

그들에겐 마물을 모두 무찌르면 행복해질 거라는, 희망과 믿음이 있었다.

카셀에게는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끝이 있으리라는 희망은커녕, 무의식적으로 검을 움직이는 그의 눈은 죽어 있었다.

텅 빈 동공이 공허함을 넘어 스산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촤라라락!

혼란에 빠져 있는 와중에도 책장은 카셀의 끝없이 되풀이되는 삶을 보여주다, 마침내 마지막 장에 이르렀다.

“이것은 마취총이 아닙니다, 선생님. 보시다시피, 약물을 주입하는 마도구입니다. 주사기 비슷한 것이죠.”

홀로그램 속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어 화면을 바라보았다.

홀로그램으로 떠오른 것은 바로 나였다.

“뱉으면 안 돼!”

“시간이 촉박해서 이 방법밖에…… 죄송합니다, 선생님.”

로브를 뒤집어쓴 채 [마물 마취총]으로 남자에게 포션을 먹이고 있는 내 모습.

그리고 그걸 지켜보는 카셀의 죽은 눈동자에 처음으로 빛이 돌았다.

그것이 살기인지, 아니면 다른 패턴을 보이는 유저를 향한 흥미인지, 그도 아니면…….

그의 눈에 떠 오른 묘한 빛을 가늠하고 있는데.

팟―!

갑작스럽게 화면이 암전되었다.

그리고.

「To be continue…….」

허탈한 문구와 함께 마침내 책이 ‘탁!’ 하고 덮였다.

애초에 내가 그만 읽고 싶다고 해서 멈출 수 있는 시스템이 아니었던 것이다.

“……다 보았나?”

책이 덮인 후에도 움직일 생각을 못 하고 멍하니 서 있는 내게 다가오는 인기척이 들렸다.

슬쩍 눈을 돌리자, 근처에 선 초록 머리의 남자가 보였다.

바로 조금 전에 책이 보여주는 홀로그램이 끝나서인지, 내 앞에 서 있는 게 정말로 GM인지 고대 영웅 벨리세르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그런 나를 보며 남자가 태연히 입을 열었다.

“혼란스러운 모양이군.”

“이거…… 현실, 아니죠?”

나는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고대 영웅이고, 카셀이고…….

책을 보는 내내 머릿속 한편에서 불길한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뭐, 이곳의 멸망을 막기 위해 지구에서 유저…… 아니, 용사들을 차원 이동시킨 거라든지…….”

“…….”

“게임이 아니라, 뭐…… 시, 실제 상황이라든지…….”

“…….”

“그런 거 아니죠?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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