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실제 상황’이라는 말을 내뱉는 순간 절로 눈이 질끈 감겼다.
그럴 리 없지 않은가.
‘그럼 내 기억은?’
직원으로 입사해서 뼈 빠지게 운영자로 일하고, 게임에 갇히기 전에 VR기기를 찾아 쓰던 내 모습은.
그건 다 뭐란 말인가.
떨리는 눈으로 벨리세르의 모습을 한 남자를 바라보는데, 그가 짐짓 엄숙한 표정으로 답했다.
“이 게임의 제작자인 내게 그렇게 물어본다면…….”
“…….”
“난 당연히 현실이라고 대답할 걸세. 그대야말로, 동료들과 함께 세상을 구할 진정한 영웅이자, 주인공!”
게임 홍보 문구와 같은 말에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래서 이게 게임인지, 현실인지나 알려줄 것이지 대체 무슨 헛소리람.
그런 내 속마음을 눈치챈 건지, 리르가 별안간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내게 속삭였다.
“그대, 내게 진짜 이종족의 왕, 벨리세르냐고 물으려 했지?”
나는 흠칫했다. 내심 생각하고 있던 질문이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리르는 그럴 줄 알았다는 양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내 무슨 연극이라도 하는 어투로 중얼거렸다.
“아름답고 용맹한 왕 벨리세르는 마치 나와 같았지…….”
“…….”
“더 큰 거사를 위하여 소를 과감히 포기하는 용기, 타인을 위해 제 한 목숨 아끼지 않는 진정한 희생!”
“책 속에서는 그렇게 묘사 안 하던데요.”
“배신자라느니, 겁쟁이라느니! 지고한 뜻을 알아보지 못하는 우매한 족속들이나 그렇게 지껄이는 것을!”
심드렁하게 대꾸하자, 남자가 별안간 내게 삿대질하며 버럭 소리 질렀다.
그렇게까지 비약한 적은 없는데.
아무 말도 하고 있지 않자, 급 발진한 것이 퍽 민망했는지 그가 연신 헛기침을 했다.
“큼흠, 참고로 이 왕관, 이건 내가 일일이 디자인한 걸세.”
“…….”
“리와 르는 우리 엄빠 이름에서 하나씩 따왔지. 엄빠가 뭔지 아나?”
나는 익숙하게 그 헛소리를 무시하고 리르를 지나쳐 걸어갔다.
내가 큰 착각을 할 뻔했다.
퇴사했다는 저 정신 나간 인간의 꼴만 봐도 여기가 현실이니, 차원 이동이니 하는 건 말도 안 되는 거였는데.
‘하여튼 지독한 ‘컨셉충’이다…….’
아까 스치듯 생각했지만, 이토록 게임 캐릭터와 자신을 동일시하다니, 보통 ‘오타쿠’가 아니었다.
“어, 어디 가는 건가! 아직 짐의 말 다 안 끝났……!”
리르가 말없이 자신을 지나쳐 걷는 나를 황급히 따라 왔다.
그러든지 말든지, 걸음을 옮기던 나는 이윽고 카우치 앞에 멈춰 섰다.
[황태자 카셀 루크비히]
머리 위에 익숙한 이름표를 달고 있는 남자가, 여전히 두 눈을 꼭 감은 채 미동 없이 누워 있었다.
나는 그런 카셀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이상해.’
분명 제 아버지인 황제에게 대포를 쏠 때만 해도 둘도 없는 성격 파탄자 같았고.
불면 포션에 당해 키메라에게 잡아먹힐 때도 그저, 번거롭고 짜증나기만 했는데…….
책 내용을 봐선지, 기분이 너무 이상했다.
심장이 울렁거리기도 하고, 가슴 한쪽이 찌르르 시리기도 한 게…….
안쓰러움을 넘어선 감정이 드는 것 같았다.
‘게임 속 캐릭터가 불쌍하기라도 해서?’
나는 그런 내가 퍽 낯설어서 일부러 차갑게 자조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나를 쫓아 온 리르를 응시했다.
“……카셀은 AI잖아요.”
입 밖으로 내뱉은 후에도, 나는 그 사실을 속으로 여러 번 되새기듯 반복했다.
여긴 게임이고, 카셀은 게임 캐릭터다.
다른 엑스트라들보다 훨씬 더 지능 높고 변칙이 많은 AI.
그렇게 수십 번 되뇐 나는, 이어서 떼어지지 않는 입술을 억지로 떼어 물었다.
“그럼…… 다 기억하는 거예요?”
“무얼 말인가?”
“모든 것을요.”
이곳이 현실이 아닌 이상, 책이 뜻하는 것은 그것밖에 없지 않나.
어쨌든 카셀이 계속 똑같은 운명으로 태어나는 게 세계관 속 ‘죽음’이라는 존재의 저주 때문이고.
그 이후의 책 내용은, 지금까지 게임 오버를 당한 유저들의 플레이 모습이었다.
그런데 나는 또 다른 것이 궁금해졌다.
그렇다면 새로이 태어날 때마다, 카셀은 왜 점점 황폐해져 간 것일까.
“표정이요.”
“…….”
“점점 죽은 사람 같아졌어요.”
그렇게 중얼거린 나는 책을 통해 본 카셀의 첫 번째 삶을 떠올렸다.
아무것도 모른 채 [악몽의 군주]라 불리는 폐태자가 되고, 헤일리의 첨탑에 갇힌 후 자살한 그.
그는 내내 자신에게 왜 이런 불행이 펼쳐지는지 이해하지 못했고, 괴로워하고, 절망했다.
비록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하는 걸 선택하였으나,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이야말로 그에게 아직 감정이, 일말의 희망이 남아 있었다는 것을 뜻했다.
죽으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이라 믿었을 테니까.
하지만 그는 죽지 못한 채로 또 태어났고, 또다시 지옥을 경험해야 했다.
그리고 점점 감정과 표정을 잃었다.
유저들은 물론, 나 또한 ‘현실로 재현되는 악몽’이 남주에게 부여된 저주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죽지 못하는 것이야말로.
모든 것을 되풀이하면서도 그것을 ‘망각’하지 못하는 것이야말로…….
‘삶’이 ‘죽음’에게 내린 것이자, ‘죽음’이 카셀에게 내린 진정한 저주가 아닐까.
“그걸 다 기억하는 게 아니라면, 사람이 그렇게…… 그렇게 변할 리 없잖아요.”
책장이 넘어갈수록 카셀은 모든 것에 초탈해졌다.
옆에서 동고동락한 동료가 죽어 나가도, 자신의 사지가 잘려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되려 끔찍한 죽음을 맞을 때마다 다소 지루해 보이기까지 했다.
어차피 다시 태어나 똑같은 일을 반복할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처럼.
“……AI라도 그럴 수가 있나?”
헤일리에서와는 달리 제법 평온한 얼굴로 잠이 든 카셀을 우두커니 서서 내려다보던 나는, 이윽고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내내 입을 다물고 있는 리르에게 물었다.
“왜 대답이 없어요?”
“그건…….”
그러자 왜인지, 리르가 난감한 표정으로 볼을 긁적였다.
그러더니 내 쪽을 향해 손가락질했다.
“본인에게 직접 물어보는 게 어떤가?”
그리고 그 손가락 끝을 따라 시선을 옮기던 나는, 거짓말처럼 반짝 뜨여 있는 붉은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헉.”
심장이 쿵 내려앉는 기분에, 나도 모르게 숨을 거칠게 들이마셨다.
분명 방금까지 미동도 없이 눈을 꾹 감고 있었는데, 대체 어느 틈에 정신을 차린 거란 말인가.
당황하여 우왕좌왕하는 사이, 카셀이 나를 뚫어져라 보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나는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어, 언제…… 일어났어요?”
“글쎄.”
“…….”
“그대가 나를 AI 따위에 불과하다며, 기억도 제대로 못 하는 머저리 취급했을 때?”
약간의 틈을 두고 그가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
‘……X발.’
들려오는 답에 나는 눈앞이 아득해졌다.
아무리 정신을 잃었다 한들, 당사자 앞에선 절대 하지 말았어야 할 말을 고스란히 들켰다는 생각에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AI가 뭐지?”
그리고 카셀은 그것을 놓치지 않고 날카롭게 눈을 빛내며 되물었다.
“그, 그건…….”
“…….”
“벼, 별거 아니에요. 그냥…….”
“그대와 같이 수상쩍게 접근한 놈들은 하나같이 나를 그렇게 평하더군.”
“뭐, 뭐라고…….”
“AI 주제에 건방지고 재수 없다고 했던가.”
유저들이 했던 불만을 말하는 듯한 그의 말에 심장이 한 번 더 쿵 떨어졌다.
물론 나 또한 매번 놈을 그렇게 욕하긴 했지만, 그것을 당사자가 모두 주워들은 후 기억하고 있다니.
게다가.
‘나를 유저로 인식하고 있었잖아.’
물론 그건 게임 초기부터 제작자들이 알려줬던 사실이다.
― [GM아리] : 안타깝게도 [악몽의 군주]가 샤리 님을 인식해서, 곧 재앙이 일어날 예정입니다.
그러나 NPC라는 사실에 너무 몰두해서일까.
나는 게임을 하는 내내 스스로를 평범한 유저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아니, 어쩌면.
카셀에게 쉽게 죽임당하던 여타 유저들과는 달리, 다른 방법으로 접근하여 살아남은 것을 내심 즐기고 있었을지도…….
어느 쪽이건, 모든 플레이를 기억하고 있는 카셀에겐 우습기 그지없어 보였으리라.
그에게는 내가 자신을 괄시하던, 별다를 거 없는 유저 중 하나였으리란 생각에 도달하자, 이상하게도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자, 자.”
그때였다.
멍청하게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한 채로 우물쭈물하고 있던 나를 구해준 것은 다름 아닌, 리르였다.
“연인들끼리의 사랑싸움은 조금 있다가 하도록 하지.”
카셀이 깨어났음에도 불구하고 망발을 지껄이는 초록 대가리의 행태에 나는 경악했다.
“미친! 그른그 으느르그 흤즈!”
재빨리 달려들어 놈의 입을 틀어막으려 했으나, 뻗은 손은 그대로 ‘후웅!’ 하고 리르의 몸을 통과했다.
휘청거리는 내 모습에 리르가 껄껄 웃다가 말했다.
“그대에게 전할 메시지는 이게 끝이라네, 용사여. 짐은 그만 떠나 보겠네.”
갑작스러운 작별 인사에 나는 입을 떡 벌렸다.
“……그냥 이렇게, 떠난다고요?”
아무것도 해결된 게 없는데.
사람을 이렇게 혼란의 구렁텅이에 빠뜨린 채로, 지는 가버리겠다?
당황하여 버벅거리던 나는 이윽고 정신을 되찾고 물었다.
“어디로 가는데요? 그럼 같이 가요.”
“이곳에 남은 소기의 목적이 끝났으니, 사라져야지. 말했지 않나. 짐은 그저 이스터에그에 불과…….”
“자, 잠깐!”
나는 우리만 아는 말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늘어놓는 리르의 말을 황급히 가로챘다.
‘아무리 퇴사 직전에 제멋대로 남겨놓았기로서니, 게임 캐릭터 앞에서 너무 위화감 없이 떠드는 거 아니냐고……!’
결국 그에 대한 해명은 카셀과 남겨질 내가 오롯이 떠안아야 하지 않은가.
나는 카셀의 눈치를 보며 리르에게 주춤주춤 다가가 낮게 윽박질렀다.
“가기 전에 여기서 어떻게 빠져나가야 하는지는 얘기해 주고 가야 할 거 아니에요!”
“그걸 아직도 모른단 말인가?”
“……네?”
오히려 내게 되묻는 미친 제작자의 행태에 황당해졌다.
“아무 말도 안 해줬는데 제가 그걸 어떻게 알아요?”
“분명 책을 통해 충분히 힌트를 알아차렸으리라 여겼거늘…… 눈치가 없는 편이었군.”
“장난하냐? 망할 삶이고, 죽음이고, 뭐가 뭔지도 모르겠구만……!”
사람이 너무 황당하니까 나도 모르게 반말이 튀어 나갔다.
그러나 리르는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며 뜬구름 잡는 소리나 지껄였다.
“그대는 의심을 거두고, 체념하는 게 빠른 편이군.”
“나가는 법 알려달라니까, 뭔 개소리…….”
“조금 전까진 분명 두려워하고 혼란스러워했으면서, 생각보다 금방 침착해져서 현실을 받아들이고 살 방도를 찾고 있지 않나?”
“…….”
이곳이 게임 속이 아니라 혹시 차원 이동이라도 한 것이란,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을까 봐 벌벌 떨던 좀 전의 나를 꼬집는 말이었다.
‘여기 온 유저들은 그럼 뭐, 그까짓 책 좀 보고 울기라도 했나 보지?’
역시, 어쩌다 여기까지 온 놈들은 고인물이 아니라 운 나쁘게 들어 온 뉴비일 것이 분명했다.
게임에서 가상 세계관과 현실의 구분이 어렵도록 약간의 페이크를 쓰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예를 들어 좀 전에 본 책의 마지막 장에서 게임 초기의 내 모습을 보여준 것처럼 말이다.
당연했다. 유저들로 하여금 게임 세상에 더 깊게 빠져들고, 중독되게 만들어야 하니까.
뉴비만 보던 리르는 그것을 금방 받아들인 내가 신기한 모양이었다.
그의 말대로 나는 쉽게 흥분을 가라앉히고 냉정을 되찾았다.
물론 아직도 혼란스럽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나는 내 기억을 믿었다. 그러니까, 게임 속에 갇히기 전까지의 내 기억 말이다.
그것은 내가 현실과 가상 세계를 구별할 수 있는 가장 정확한 척도였다.
그때였다.
“기억을 너무 믿지 말게.”
마치 그런 내 속마음을 모두 간파한 것처럼 리르가 말했다.
“……무슨 소리예요?”
“기억이란 건 너무 추상적이고, 변덕스럽거든.”
“…….”
“세상에 그 어떤 것도 완벽한 본질이란 없네. 가령, 이번에는 그대가 운 좋게 짐을 만났지만, 다음 플레이 때도 만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는 것처럼.”
알쏭달쏭한 말이었다. 그러나 나는 단호하게 내뱉었다.
“그럴 리 없어요. 저는 반드시 이 판에 엔딩 내고, 다신 이 망할 게임에 얼씬도 안 할 거니까.”
“부디 행운을 빌지.”
정말 응원을 하는 건지, 놀리는 건지.
얄밉게도 대꾸한 리르가 번뜩 손을 들어 내게 인사했다.
“시간이 다 되었군.”
기분 탓인지, 그의 반투명하던 몸이 점점 투명해지는 것 같았다.
“미안하지만 여기서 빠져나가는 것은 오롯이 그대의 몫일세!”
기분 탓이 아니었다.
선명한 목소리를 끝으로 그의 몸이 빠르게 흩어지기 시작했다.
바짓가랑이를 잡을 수도 없고. 어쩔 줄을 모르던 나는 다급히 외쳤다.
“아니, 힌트! 힌트라도 주고 가!”
“힌트는 키메라라네……!”
마지막까지 알 수 없는 말을 끝으로, GM 리르는 아스라이 사라졌다.
순식간에 텅 빈 자리를 바라보며, 나는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이렇게 가버린다고……?”
X발. 키메라로 대체 이 망할 곳에서 어떻게 빠져나간단 말인가.
책을 읽는 퀘스트를 끝냈음에도, 변함없이 이어지는 히든 루트에 나는 막막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 넓은 곳에서 빠져나갈 구멍을 언제 찾냐고.’
서고는 빌어먹을 만큼 넓고 광활했다.
이곳에 들어올 때 열려 있던 동굴과 이어진 문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사라졌다.
그런고로, 완벽한 고립이었다.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어떻게 이곳에서 벗어날지 고뇌하던 순간이었다.
“이제, 둘만 남았군.”
불현듯 등 뒤에서 스산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럼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어디 한번 변명이라도 들어보도록 할까.”
제기랄. 지금 태평하게 나갈 걱정을 할 때가 아니었다.
「위험! [황태자 카셀 루크비히]가 당신을 [암살자]로 의심합니다.」
나는 떠오르는 시스템 창에 그만 정신이 혼미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