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스템 창을 보자, 미묘하게 울렁이던 마음이 푸시시 꺼졌다.
‘이 새끼가, 암살자라니…….’
그 자리를 깊은 분노가 대신했다.
‘뼈 빠지게 구해놨더니, 누구 보고 암살자래?!’
당장 그 소리가 목구멍까지 차올랐으나, 가까스로 참았다.
놈이 부들거리는 나를 빤히 바라보며 재촉했다.
“왜 대답이 없지, 사리 송.”
“아.”
‘사리 송’이라는 호칭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정수리 위를 더듬었다.
그러나 언제나 피부처럼 쓰고 다니던 로브는 내 손으로 나를 암살자라 의심하는 놈에게 입혀준 후였다.
‘망할…….’
암담함이 몰려 왔다.
여기서 모습을 숨긴 약재상이 아닌, 본 모습을 내보이는 게 내게 이로울지 판가름이 서지 않았다.
‘지금쯤 왕녀가 아니란 것도 알았을 텐데.’
「[황태자 카셀 루크비히]의 의심이 가중되고 있습니다.」
「위험! 의심 수준이 높으면 당신에 대한 신뢰도가 하락하고, [제거 대상]으로 분류됩니다.」
「해당 캐릭터의 의심을 풀고, 호감도를 높이십시오!」
그때였다.
놈에게 어떻게 반응하면 좋을지 고민하는 사이, 망할 시스템 창이 연달아 떠올랐다.
그에 잊고 있던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아, 몰라! 망할 놈, 덤벼!’
나는 호감도를 높이라는 시스템 창의 충고와는 정반대로 이를 악물고 내뱉었다.
“죽을 뻔한 사람 열심히 구해놨더니…… 보따리까지 내놓으라는 게 바로 그쪽 같은 인간을 말하는 건가 봅니다?”
“그쪽?”
‘그쪽’이란 말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놈이 한쪽 눈썹을 휙 위로 치켜들었다.
예전 같았으면 그 표정에 쫄았겠지만, 이젠 이판사판이다.
“네, 그쪽.”
“하여튼, 변함이 없군.”
눈을 부릅뜨며 대꾸하자, 놈이 별안간 픽 헛웃음을 지으며 뜻 모를 말을 중얼거렸다.
‘뭐야, 저 미친놈.’
나는 놈이 웃는 영문을 몰라 그저 어리둥절했다.
그사이 웃음기를 지운 놈이 어느새 무표정해진 얼굴로 되물었다.
“죽을 뻔한 나를 구해줬다고?”
“불면 포션병 맞고 기절해서 키메라한테 그대로 잡아 먹힐 뻔한 거, 기억 안 납니까?”
“…….”
내 신랄한 빈정거림에 놈이 입을 꾹 다물었다.
정신을 잃었으니, 당연히 기억을 못 할 만도 했다.
한동안 곰곰이 기억을 되새기는 듯하던 그가 문득 뜬금없는 소리를 했다.
“약팔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대였군, 사리 송.”
“약팔이요?”
“로브를 입고 있었잖아.”
카셀이 지금은 그에게 입혀준 내 로브 자락을 엄지와 검지로 슬쩍 들어 보였다.
완전히 정신을 잃은 상탠 줄 알았는데, 드문드문 떠오르는 것이 있는 모양이었다.
‘아니, 로브 쓰고 있으면 뭐, 다 나야?’
그런 와중에도 나를 잘도 알아본 놈의 눈썰미에 소름이 다 끼쳤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한 가지 욕망이 치밀었다.
‘지금…… 그냥 사실대로 말할까?’
그 약팔이가 바로 나라는 것을 말이다.
처음엔 분명 내가 ‘평범한 유저’가 아니고 NPC란 생각에 사로잡혀 쓸데없는 의심을 피하기 위해 하찮은 약재상인 척하기를 택했다.
후에는 헤일리에서 그를 강제로 잠재운 것 때문에 나를 죽이려 들까 무서워 필사적으로 숨겼다.
하지만 지나고 보니…….
이미 의심은 의심대로 다 당하고, 무얼 위해 그토록 숨겨왔는지도 알 수 없게 됐다.
‘……망할.’
지금까지의 개고생을 떠올리자 눈물이 절로 찔끔 났다.
그것을 재빨리 지워낸 나는, 여전히 심각한 얼굴로 기억을 되새기는 중인 카셀을 바라보며 떼어지지 않는 입술을 억지로 열었다.
“저기요. 그게 그…….”
“그러고 보니. 달려드는 키메라에게 나를 방패막이로 썼지 않나?”
“예, 예?”
그러나 진실을 털어놓으려던 순간, 불현듯 날카로운 붉은 동공이 찌르듯 내게 와 박혔다.
‘그, 그걸 기억한다고?!’
지레 뜨끔한 나는, 하려던 말도 잊고 일단 부정했다.
“그, 그럴 리가요.”
“굳이 로브를 벗어 입혀준 것도, 짐짝처럼 끌고 가기 위해서였군.”
“그, 그건……!”
약을 먹어선지, 그즈음부터 그의 의식이 정확히 돌아오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차마 부정도 못 한 채 버벅대는 나를 노려보며 카셀이 제 뒤통수를 짜증스럽게 매만졌다.
“쯧. 어쩐지 뒤통수가 갈린 것처럼 아프더라니.”
「[황태자 카셀 루크비히]가 당신에게 미약한 살기를 품습니다.」
이미 어렴풋한 제 기억이 진실이라고 확신한 듯 떠오른 시스템 창에 아니라고 부정할 새도 없었다.
나는 그의 눈치를 보며 하는 수 없이 변명했다.
“……초록 머리가 안 도와줘서 어쩔 수 없었다구요…….”
내가 생각해도, 너무 자비 없이 마구 끌고 오긴 했다.
“어우!”
울퉁불퉁한 동굴 바닥에 카셀의 머리가 처박힐 때마다, 리르 놈이 얼마나 대신 아파해줬던가.
새삼 드는 숙연함에 눈을 마주치지 못하자, 내게 사납게 못 박혀 있던 카셀의 시선이 마지못해 떨어졌다.
“여긴 어디지?”
“황궁 지하에 있는 비밀 서고라는데, 저도 자세히는 몰라요.”
선선히 대꾸했음에도, 카셀은 못 미덥다는 눈빛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렇게 의심해봤자, 알 수 없는 책장과 책들뿐이었다.
나는 넓디넓은 서고를 유심히 둘러 보는 카셀에게 일말의 희망을 갖고 물었다.
“혹시…… 여기서 어떻게 나가는지 아세요?”
“몰라.”
그러나 물음이 채 끝나기도 전에 싸가지 없고 단호한 대답이 돌아왔다.
“잘 떠올려 보세요. 언젠가 한 번 와 봤을 수도 있잖아요.”
나는 울컥 솟는 화를 참고 차분히 독려했다.
그가 정말로 모든 플레이를 기억하고 있다면.
그 수백, 수천 번의 회귀 동안 한 번쯤 이곳에 와보았지 않을까.
‘회귀…….’
그러다 문득, 내가 떠올린 단어에 기분이 몹시 이상해졌다.
유저 입장에선 그저 ‘게임 오버’로 끝날 일이지만, 모든 것을 기억하는 카셀에겐 지긋지긋한 회귀였을 거라 생각하니…….
아까 책을 본 직후처럼, 또다시 가슴이 울렁거렸다.
나조차 정의할 수 없는 이상한 기분에 휩싸인 채 카셀을 바라보는데.
이윽고 탐색을 끝낸 그가 단정 짓듯 말했다.
“이곳에 온 건 처음이다.”
“…….”
“알았으면, 일찍이 불태워서 이런 귀찮은 일을 방지했겠지.”
놈이라면 충분히 그럴 만해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불현듯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지금까지 카셀의 의지랍시고 시나리오 순서가 바뀐 것도 그럼…….’
반복된 회귀로 인해 일어날 일들을 알고 있던 그가 상황을 바꾼 모양이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그간 뒤죽박죽이던 게임의 시나리오 순서가 납득됐다.
그와 동시에 애써 묻어 두고 있던 막막함이 치솟았다.
‘나…… 이 게임 깰 수 있을까?’
모든 플레이를 기억하고 있는 남주도 모자라, 그로 인해 언제 시나리오가 뒤바뀔지 모르는 상황이라니.
이런 미친 헬 난이도 게임이 세상에 어디 있단 말인가.
그때였다.
“나를 죽이기 위해 이상한 곳으로 끌고 온 것은 아닌가 보군.”
절망스러운 내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망할 헬 난이도의 주범이 나를 돌아보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황태자 카셀 루크비히]가 당신에게 품었던 [암살자]라는 의심을 완전히 거둬들입니다.」
떠오른 시스템 창을 보자니, 조금 전 느끼던 막막함도 잊을 만큼 기가 막혔다.
“……죽이려면 눈 뜨기 전에 죽였겠죠. 포션 대신 독약을 먹이든지요.”
나는 조금 힘 빠진 목소리로 답했다.
마음 같아선 진짜 독약을 먹여도 시원찮았으나, 절대로 그럴 수 없는 상황이 통탄스러웠다.
놈은 내 말에 사과는커녕 여전히 의심스럽다는 듯 캐묻기 바빴다.
“체력 포션과 해독 포션은 그대가 먹인 건가?”
“그럼 누가 먹였겠어요? 반투명체 초록 머리 망령이?”
“……정신을 잃은 상태라 쉽지 않았을 텐데, 용케도 먹였군.”
카셀은 내 빈정거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멋대로 지껄였다.
그러더니 불쑥 손을 들어 제 아랫입술을 쓰다듬는 것이 아닌가.
의미심장한 놈의 말과 행동에 불현듯 잊고 있던 장면이 번뜩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포션을 먹이기 위해 놈에게 여러 번 입맞춤하던 순간들…….
‘아냐! 그건 입맞춤이 아니라, 그냥 의료 행위였다고!’
나는 사색이 된 채 고개를 마구 뒤흔들다가, 놈에게 버럭 외쳤다.
“저, 저기요! 이, 입술은 갑자기 왜 쓰다듬고 그러세요?!”
“글쎄.”
내 지적에 놈이 그제야 쓰다듬던 아랫입술에서 손을 뗐다.
그리고 어깨를 으쓱이며 대꾸했다.
“정신을 잃은 내게 포션을 대체 어떻게 먹였을까, 궁금해서 말이야.”
“뭐, 뭘 어떻게 먹여요? 입에 주둥이 처박고 먹였죠!”
“주둥이를 처박고 먹였다라…….”
“포션병 주둥이요, 포션병 주둥이!”
자꾸만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대화를 나는 필사적으로 막았다.
‘다른 건 몰라도, 이건 절대 들키면 안 돼……!’
벌써 두 번째로 놈에게 입 맞췄, 아니!
입으로 포션을 먹였다는 사실을 말이다.
때때로 상태 이상에 걸리는 놈에게 그런 행동을 했다가 어떻게 죽었는지, 유저들의 생생한 간증 글을 떠올리자 목 뒤가 다 오싹해졌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저 망할 놈 살리다가 억울하게 죽을 수는 없어!’
놈은 심각한 결벽증에 의심병 말기 환자였다.
틈만 나면 나를 암살자로 의심하는 것만 봐도 그랬다.
그러니 이것만은 절대로, 절대로 묻어둬야 했다.
“……최대한 손 안 대고 먹였으니 걱정하지 마십쇼. 그쪽이랑 접촉하기 싫은 건 피차 마찬가지니까…….”
“뭐, 그건 그렇다 치고.”
치를 떨며 닿지 않았다는 것을 강조하는데, 생각보다 놈이 순순히 그것을 받아넘겼다.
어떻게 먹였는지, 그 과정을 하나부터 열까지 세세하게 나열하라고 할 줄 알았건만, 시시한 반응이었다.
게다가.
‘그렇다 치다니……?’
그렇다 치는 게 아니라, 그게 확실하다고 다시 한번 못 박으려는 찰나, 놈이 나보다 한발 앞서 말했다.
“빚을 지게 됐군.”
“빚……?”
“그래. 내 목숨을 살려줬지 않나.”
그걸 알고는 있다니.
혹시라도 놈이 내가 입 맞춘 것을 알아차릴까 전전긍긍하던 나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카셀을 돌아보았다.
하도 캐묻는 게 당당해서, 내가 자신을 살려준 것 또한 당연한 일로 치부하고 있는 줄 알았다.
내게 신세를 진 걸 알고 있다는 것도 놀라운데, 이어서 놈이 더 의외로운 소리를 내뱉었다.
“이곳에서 빠져나가면 원하는 것을 하나 들어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