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하는 것이요?”
“그래.”
카셀이 고개를 까딱였다.
어디 원하는 걸 실컷 떠들어 보라는 듯 자못 오만한 태도였다.
둘도 없는 기회였으므로, 당연히 나는 신중하게 고심했다.
그런 내 모습에 무슨 생각을 한 건지, 별안간 놈이 비죽 웃으며 물었다.
“원하는 게 없나?”
“아니요! 없기는……!”
나는 깜짝 놀라 고개까지 뒤흔들며 답했다.
‘없기는, 씨. 너무 많아서 탈이구만.’
이게 바로 거짓말쟁이의 말로인 것일까.
대체 어디서부터 말을 꺼내야 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놈에게 가장 바라는 것이라면, 나 좀 가만히 내버려 뒀으면 하는 것이다.
의심하지 말고, 내 정체를 파헤치려 하지 말고. 죽이려 들지도, 협박하려 들지도 않는 것 말이다.
‘하지만 이걸 말하려면, 헤일리 때부터 모두 다 털어놔야겠지…….’
사실 내가 널 강제로 재우고 튀었던, 바로 그 약재상이다.
그 한마디 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아까부터 막상 말을 하려니, 입이 좀처럼 떨어지질 않았다.
카셀이 나를 죽이려 들까 봐 두려워서는 아니었다. 다만…….
‘아.’
불현듯 남자의 피처럼 붉은 눈과 눈이 마주친 나는, 왜 사실을 말하는 게 껄끄럽게 느껴지는지 깨달았다.
그가 모든 것을 다 기억하는 것을 알게 돼서였다.
나는 애초부터 이 망겜에 큰 뜻이 없었고, 그런고로 처음부터 유저들처럼 굴지 않았다.
목표는 물밑에서 조용히, 최대한 메인 캐릭터들의 눈에 띄지 않게 엔딩 깨기.
그런데 이미 ‘사리 송’만으로도 충분히 괴상하고 수상쩍은 여자로 인식돼 버렸다.
여기서 약재상까지 곁들여지면, 영영 그의 기억에 각인될까 봐……
그게 조금, 두려워졌다.
‘그런데…… 만약 내가 엔딩을 보고나면, 카셀의 기억은 어떻게 되는 거지? 마룡을 죽인 기억을 가지고 또 회귀하는 건 아니겠지?’
그러다 문득 그런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금세 고개를 저어서 불길한 생각을 털어냈다.
어쨌든 모든 것의 원인인 ‘죽음’이란 존재가 사라지면, 저주도 사라질 것이다.
그러면 카셀도 다른 이들처럼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게 되리라.
지금까지 반복된 모든 회귀, 그리고 내가 깰 엔딩 또한.
‘부디 그랬으면 좋겠다.’
나는 무의식중에 그것을 간절히 바라게 되었다.
왜냐하면, 끔찍한 기억들은 모두 잊히는 편이 좋으니까.
그때였다.
“원하는 것을 말하는 게.”
“…….”
“그렇게 심각한 얼굴로 고민할 일인가?”
불현듯 느릿한 목소리와 함께 왼쪽 뺨을 쿡 찌르는 온기가 느껴졌다.
깊은 상념에 잠겨 있던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 퍼뜩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검지를 뻗어 장난처럼 내 볼을 쿡 찌르고 있는 놈을 발견했다.
“지,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나는 당황하여 후다닥 뒤로 물러섰다.
그러자 놈이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하도 말이 없길래, 선 채로 잠이 들었나 해서 말이야.”
“그, 그럼 그냥 부르면 되지, 왜 사람 볼을 찌르고 그래요!”
“허. 누가 보면 도둑 키스라도 당한 줄 알겠군.”
내 과민 반응에 놈이 어이가 없다는 듯 실소를 내뱉었다.
“무슨 그딴 망발을……!”
뜨끔한 나는 지레 과민 반응하며 치를 떨었다.
그리고 손을 들어 놈이 찔렀던 볼 부근을 벅벅 문질렀다.
그저 미약하게 건드린 것뿐이라는 걸 잘 아는데, 왜인지 그 부분이 모기라도 물린 것처럼 간지럽고 화끈거렸다.
그런 나를 묘한 표정으로 응시하던 카셀이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대체 얼마나 뜯어내려고, 그렇게 고심하는 거지?”
“뜯어내긴 뭘 뜯어내요? 저도 돈 많거든요.”
“그러시겠지.”
내 대꾸에 놈이 가소롭다는 듯 말했다.
그 꼴을 보자 조금 후회가 되었다.
차라리 놈이 갖고 있는 S급 템들이라도 모조리 뜯어낼 것을.
그러나 이미 홧김에 부자라고 질러 버린 후였다.
‘이 멍청아…….’
나는 깊이 자책하며, 조금 누그러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냥…… 앞으로 무슨 일이 있더라도 절 죽이려 들지만 마세요.”
“허.”
내 말에 카셀이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그간 제법 신사적으로 대했던 것 같은데.”
“신사……? 제가 신사의 뜻을 잘못 알고 있는 겁니까?”
나야말로 어이가 없었다.
매번 맞닥뜨릴 때마다 암살자니, 뭐니 의심하고 협박하기 바빴던 주제에!
게다가 약재상의 신분으로 마주칠 적엔 항상 목숨의 위협을 받아야 했다.
그런데 신사는 무슨 놈의 신사.
억울하기 짝이 없다는 내 반응에, 놈의 표정이 일순 차가워졌다.
“나는 그대에게 객으로서 황궁으로 초대하여 대화를 나눌 기회를 주었지.”
“그건…… 결국 명령이라면서요!”
“그럼 토너먼트 개최식을 망치고도 친구 일이라 별수 없었다고 얼버무리는 죄인을 사정하여 모셔가야 하나?”
“으으…….”
“게다가 그 명령조차 무시하고 잘도 토꼈지.”
분하지만 듣고 보니 다 맞는 소리였다.
뭐라고 반박해야 할지 머리를 굴리는 사이, 놈이 가차 없이 말을 이었다.
“타국의 왕족 사칭을 한 것을 알고도 수배령조차 내리지 않았다. 뒤를 쫓지도 않았고.”
“…….”
“게다가 만약 다른 놈이었으면 생명의 은인이고 뭐고, 변명할 기회조차 주지 않고 베어냈을 것이다.”
“…….”
“황궁에 무단 침입한 정체 모를 불순분자를 가만두고 보는 멍청이는 없을 테니까.”
마지막 말을 내뱉는 그는, 그 멍청이가 바로 자신이라는 듯 씁쓸하게 자조했다.
억울하지만, 구구절절 맞는 소리기에 나는 씩씩거리면서도 조용히 입을 다문 채로 있었다.
‘왕족 사칭…… 알고 있었구나.’
그런 와중에도, 놈이 그 사실을 알고도 뒤쫓지 않았다는 게 좀 놀라웠다.
그러고 보니, 놈의 성격이라면 내 모든 인적사항이 적힌 몽타주를 전국에 뿌리고도 남았을 텐데…….
만약 그랬다면 어땠을지 상상하자, 눈앞이 아찔해졌다.
“……모른 척해주신 건 감사합니다.”
나는 결국 불만이 가득 찬 음성으로 감사 인사를 전했다.
“어쨌든 제가 전하의 목숨을 구해 준 건 맞잖아요. 키메라를 상대하느라 얼마나 힘들었다고요.”
“그래서.”
“그러니까, 앞으로 저 의심하고 겁박하려 들지 마세요.”
“…….”
“그게 제가 원하는 겁니다.”
이왕이면 그냥 아예 모르는 척해달라고 하고 싶었으나, 놈의 흉흉한 안광을 보니 차마 그 말이 나오지 않았다.
대신해서 적당히 얼버무리자, 곧장 날카로운 질문이 돌아왔다.
“뭘 의심하지 말아야 하지?”
“제 정체 말이에요! 암살이라느니, 무단 침입한 불순분자라느니…….”
“…….”
“저도 황궁에 오고 싶어서 온 거 아니라구요…….”
나는 다소 우울한 낯빛으로 중얼거렸다.
키메라나 잡고 토너먼트를 끝낼 생각이었는데, 대체 일이 왜 이렇게까지 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 나를 보고 한동안 말이 없던 카셀이, 이윽고 나지막한 한숨을 쉬며 다시 입을 열었다.
“대체 뭘 하려고 황궁 안까지 기어들어 온 건지, 이유나 들어보지.”
“…….”
“이럴 거면 내 초대를 거절하지 않았으면 될 일 아닌가? 토너먼트에 참여할 생각도 없다고 했었지.”
나야말로 이렇게 몰래 기어들어 와 토너먼트에 도둑 참여를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NPC라서 토너먼트에 참여할 수 없다고 하는 걸 어떡해.
게다가 빌어먹을, 초대? 강제 소환을 앞두고 있는데 어떻게……!
“……그러게요.”
“…….”
“내가 대체 여기서 뭘 하고 있는지…….”
나는 광활한 서고를 망연한 눈빛으로 둘러보며 한숨 쉬듯 내뱉었다.
그렇게 캐물어봤자, 그에게 해줄 말이 없었다.
NPC라는 사실을 밝힐지 고민하는 건, 조금 전에 약재상이라는 사실을 밝힐지 고민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그건, 카셀이 사는 세계와 그의 인생을 부정하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들이, 고작 게임의 일부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게…….
아무리 그가 AI에 불과하더라도, 그런 말을 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AI가 뭐지?”
“AI 주제에 건방지고 재수 없다고 했던가.”
게다가 카셀은 이미 그를 거쳐 간 여러 유저들이 함부로 내뱉은 말들을 모조리 기억하고 있었다.
‘입조심 해야 해.’
괜히 놈이 진실을 알게 됐다가, 엔딩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모른다.
이미 많은 변칙을 겪어온 만큼, 나는 앞으로 그를 대하는 데 더욱 신중을 기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대는…….”
그때였다. 문득 그가 입술을 달싹였다.
답지 않게 잠시 망설이던 그가, 이내 입을 열었다.
“그대는, 나를 도와 멸망을 막는 자인가?”
카셀은 내게 지금껏 그를 거쳐 간 유저와 같은 사람이냐고 묻고 있었다.
그의 붉은 눈이 나를 꿰뚫을 듯 바라보았다.
뭐라 대꾸해야 할지 몰라 우물쭈물하고 있는데, 그가 설핏 미간을 찌푸렸다.
“이것조차 대답하지 않을 건가?”
그 말에 그제야 내가 그의 모든 질문에 거의 제대로 된 답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 입장에선 별수 없는 일이었으나, 그의 입장에선 이런 내가 퍽 의심스러울 만도 했다.
잠시 고민하던 나는, 이내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뭐. 비슷합니다.”
“비슷하다?”
“멸망을 막는 건 맞지만, 꼭 그쪽을 돕는다고 할 수만은 없어서요.”
엔딩을 내려는 이유는, 카셀을 위해서가 아니라 온전히 나를 위해서였다.
내가 이 게임에서 탈출하기 위해서.
그래서 보통의 게임 흐름을 무시하고 내 멋대로 행동해 온 것이다.
“……그래서 정체를 숨긴 거예요.”
“…….”
“앞으로도…… 숨길지 모르고요.”
“……그렇군.”
처음으로 내뱉은 진실에, 카셀은 납득했다는 듯 고요히 고개를 끄덕였다.
「[황태자 카셀 루크비히]가 당신의 솔직함에 약간의 호감을 느낍니다.」
「[황태자 카셀 루크비히]가 당신에게 일말의 신뢰를 품습니다.」
그리고 떠오른 시스템 창에, 나는 조금 울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