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0화 (160/212)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는데, 그가 불쑥 몸을 일으켰다.

“어, 어디 가시려고요?”

“여기서 빠져나갈 방법을 모르겠다며.”

“아…….”

“그럼 직접 찾아야지.”

이 넓은 곳을 뒤지겠다고?

당황하는 사이, 카셀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그 초록 머리 놈은 어디 갔지?”

리르를 찾는 그의 모습에 나는 울적하게 답했다.

“……사라졌어요.”

“사라져?”

“네. 여기 묶여 있는 유령…… 같은 거였나 봐요.”

조잡한 변명이었다. 하지만 그거 말고 도저히 설명할 길이 없었다.

‘퇴사한 제작자가 심어둔 이스터에그라고 어떻게 말해.’

카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나는 괜히 쭈뼛거리며 덧붙였다.

“시키는 일을 제가 해줬더니, 원이 풀려서 사라진 모양이에요.”

“그렇군.”

“……별로 안 놀라시네요?”

의외로 쉽게 납득하는 듯한 그의 모습에 오히려 내가 놀랐다.

카셀은 그런 내 반응에 대수롭지 않다는 듯 답했다.

“대가리가 몇 개씩 달린 뱀이 황궁에 자리 잡고 판을 치는 세상인데, 유령쯤이야.”

하긴. 잘라낼수록 대가리가 2배수로 늘어나는 개사기 마물이 도사리고 있는데, 그깟 승천한 귀신이 대술까.

“……어디서 본 것 같은 생김새였는데.”

그의 말에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데, 문득 카셀이 눈살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겼다.

괴악한 초록 머리칼이 흔히 볼 수 있는 색은 아니었으니 그럴 만했다.

나는 카셀이 떠올릴 법한 인물을 내뱉었다.

“일레인이랑 좀 닮았죠.”

얼굴은 전혀 달랐지만, 초록 머리와 밀빛 눈동자가 판에 찍어 박은 듯 똑 닮아 있었다.

틈만 나면 헛소리를 해대는 것 또한.

‘아무래도…… 일레인이 벨리세르의 환생이겠지.’

물론 리르는 벨리세르가 아니지만 말이다.

‘그러고 보니, 일레인 그놈은 잘 있으려나?’

리르와 일레인의 생김새를 번갈아 떠올리다 보니, 잠시 잊고 있었던 일레인의 안위가 떠올랐다.

그 바보는 마지막까지 정신을 잃은 상태였다.

하지만 호수 안에서 키메라와 싸울 동안 추가로 던져지거나 하지는 않았으니 괜찮을 것이리라.

“……아니. 고대 이종족들의 왕, 벨리세르와 흡사하게 생겼더군.”

그렇게 생각하는데, 카셀에게서 뒤늦게 부정하는 답이 들려 왔다.

뜻밖의 말이었다. 나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카셀이 벨리세르를 어떻게 알지……?’

순간 그가 내가 본 책의 내용과 같은, 모든 진실을 알고 있는 건가 싶어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벨리세르의 유해가 황궁에 묻혀 있다는 속설이 진짜였나.”

그러나 이어진 그의 중얼거림에 그런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무리 잊혔을지라도, 엄연히 고대 마물 토벌 영웅의 일원을 황태자로 나고 자란 그가 모를 리 없었다.

카셀은, 초대 황제의 환생이자 후손이니까.

“그런 건 아닌 거 같아요.”

나는 서둘러 리르를 벨리세르라 여기는 카셀의 착각을 바로잡았다.

“제가 볼 땐 그 유령이 이종족 왕의 열렬한 팬이라 코스프레 한 것 같거든요.”

“코스프레……?”

“아…… 왜 있잖아요. 너무 좋아해서 생긴 것도 막 따라 하고 그러는 거.”

카셀이 ‘코스프레’ 같은 현대 용어를 알 리 없기에, 아차 싶었던 나는 얼른 덧붙였다.

다행히 카셀은 이질적인 단어에 크게 의아해하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릴 뿐.

“……그럼 그 검은 그대를 코스프레 한 거군.”

“네? 무슨 검이요?”

“일단 나갈 구멍부터 찾지.”

뜬금없는 소리에 어리둥절해서 되물었지만, 그는 더 설명해주지 않았다.

정말로 이 넓은 곳을 직접 뒤질 생각인 듯, 카셀이 나를 스쳐 지나갔다.

“으윽……!”

그러나 채 몇 발자국 걷지도 못하고 비틀거렸다.

“전하!”

나는 깜짝 놀라 얼른 그에게 달려가 부축했다.

내가 먹인 포션 조합은 일시적으로 포션 중독 증상이 나타나지 않게 해줄 뿐, 성치 않은 몸을 치유하는 건 아니었다.

그새 도로 창백해진 남자의 낯빛에 마음이 편치 않았다.

“괜찮아요?”

“보다시피, 안 괜찮아.”

제법 솔직한 답이었다.

짜증스럽게 한숨을 내쉰 그가 나를 돌아보며 물었다.

“내게 먹인 포션, 더 갖고 있나?”

물론 더 갖고 있었으나,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건 임시 조치일 뿐이라 남용하면 안 돼요.”

“한두 번쯤은 괜찮아. 내놔.”

맡겨둔 포션이라도 찾는 것처럼 그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포션 남용으로 몸이 이 지경이 됐는데, 또 그럴 생각을 하다니.

무슨 돌려막기도 아니고, 미련하기 짝이 없는 행동에 나는 버럭 소리쳤다.

“뭘 괜찮아요! 그쪽이 의사예요? 저 혼자 찾아볼 테니까 그쪽은 그냥 앉아 있어요.”

“혼자보단 둘이 빠를 텐데.”

“그쪽이 쓸데없이 돌아다니다가 또 쓰러져서 시간을 지체하는 것보단 나아요.”

“허.”

그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헛웃음을 내뱉었다.

“쓸데없다라…… 그런 말은 또 처음 듣는데.”

“저랑 있다 보면 앞으로 종종 듣게 될 겁니다.”

상황이 아무리 거지 같아도, 왕자는 왕자라고, 예쁜 말 고운 말만 듣고 자랐나 보지?

나는 시큰둥하게 대꾸하며 그의 팔을 잡아끌었다.

안 오면 힘으로라도 억지로 끌고 갈 생각이었는데, 그는 순순히 따라와 다시 카우치에 앉았다.

벽난로 옆에 한참 있어선지, 다행히 그의 젖은 몸이 얼추 말라 있었다.

한시름 놓은 나는 그에게 신신당부했다.

“그냥 여기 있어요. 금방 둘러보고 올 테니까.”

“…….”

카셀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그저 나를 무표정하게 바라보기만 했다.

사람 민망하게 왜 그러고 있나 싶을 무렵.

「[황태자 카셀 루크비히]가 당신에게 일정 수준 이상의 호감을 느낍니다.」

불현듯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

변함없이 무표정한 카셀 놈의 얼굴과 시스템 창을 번갈아 보던 나는 그저 기가 막혔다.

‘이게 어디가 호감 갖는 얼굴인데?!’

일정 수준 이상이라면, 그래도 좀 웃는 얼굴이라든지…….

아니, 웃는 얼굴까지도 안 바란다. 적어도 약간의 온화함은 품고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놈은 여전히 찔리면 베일 것 같은 서늘한 눈빛으로 나를 하염없이 응시했다.

결국, 그 시선에 못 이긴 내가 먼저 고개를 돌릴 때까지.

나는 뒤통수에 따라붙는 눈초리를 애써 무시한 채 책장 쪽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하여튼 눈빛은 살벌해 가지고…… 눈꼬리는 또 왜 그렇게 치켜 올라가 있어? 좀 내리고 보면 안 되나?’

중얼중얼 뒤늦은 불만을 구시렁거리는데.

왜인지, 얼굴이 화끈거리는 이유를 좀처럼 알 수 없었다.

* * *

“온슬럿!”

콰아아아앙―!

스킬을 휘감은 주먹에 맞은 벽이 굉음을 내며 움푹 파였다.

하지만 대체 얼마나 두꺼운 건지, 파이기만 할 뿐 좀처럼 무너지거나 구멍이 뚫리지는 않았다.

우두두두두두두―

설상가상 금방 재건되는 모습에 나는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 올렸다.

“아오, 미친!”

이 짓도 벌써 다섯 번째.

어딜 때려 부숴도 금방 다시 원상복구 되는 서고의 마법에 나는 미치고 팔짝 뛸 지경에 이르렀다.

호기롭게 둘러보고 오겠다고 카셀을 앉혀둔 채 홀로 서고를 뒤지고 다닌 지 장장 두어 시간.

찾다 보면 금방 빠져나갈 수 있으리라 여겼던 것과는 달리, 서고는 바늘구멍 빠져나갈 틈 하나 없었다.

여기도 책장, 저기도 책장.

탈출구로 추정되는 문이 있기는커녕, 아무리 때려 부숴도 부서지지 않았다. 정말 환장할 노릇이다.

“망할 리르 새끼. 키메라로 대체 어쩌라고! 하…….”

제대로 된 힌트도 알려주지 않고 사라진 리르를 원망하며 나는 터덜터덜 걸음을 옮겼다.

어느덧 카셀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만큼 먼 건너편에 이른 상태였다.

아무리 데미지를 입혀도 금방 복구되는 환장할 벽을 더 때려 부수는 것은 무의미했다.

‘일단 카셀에게 돌아가서 물어봐야겠다.’

어쨌든 황궁은 나보다 그가 더 잘 알고 있을 테니, 머리를 맞대고 상의하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어……?”

이윽고 카셀을 두고 온 장소에 이른 나는, 벽난로 앞에 서 있는 카셀을 발견했다.

‘가만히 앉아서 쉬라니까, 좀.’

그새를 못 참고 일어난 것은 둘째치고, 그는 이상한 행동을 하는 중이었다.

바로 책장에서 가져온 걸로 추정되는 책 몇 권을, 벽난로 안의 불길 속에 던지고 있는 것이다.

타닥, 타닥.

영원히 보존되는 마법이라도 걸려 있을 줄 알았는데.

여타 종이 쪼가리들처럼 쉽게 타들어 가는 책들을 보고 나는 놀란 눈으로 다가갔다.

“뭐 하는 겁니까?”

가만히 타들어 가는 책들을 응시하던 카셀이 흘끗 내 쪽을 곁눈질하며 물었다.

“책장 때려 부수기는 다 끝났나?”

“책장 아니고 벽입니다.”

나는 조롱하는 듯한 놈의 말을 침착하게 정정했다.

책장을 때려 부쉈다간 또 아까처럼 이상한 그림책이 발동될까 봐 두려워서 건드리지도 않았건만.

파삭!

그러는 사이, 카셀은 가지고 온 다른 책들을 마저 불 속으로 던졌다.

다른 책들은 펼쳐 보지 않아서 잘은 모르지만, 어쨌든 카셀의 과거나 게임 세계관에 조금씩은 연관되어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미련 없이 책을 불태우고 있는 남자의 행태에 나는 조금 당황했다.

“저게 뭔지 알고 태우는 거예요?”

“잘 알지.”

카셀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다가 덧붙였다.

“멍청하고 병신 같은 놈의 헛짓거리들이 적혀 있더군.”

그가 비죽 입꼬리를 들어 코웃음 쳤다.

책 속의 인물을 비웃는 것 같지만, 어딘가 모르게 쓸쓸하고 삭막한 웃음이었다.

‘다른 책들은 그냥 글로 쓰인 건가? 영상으로 발동되는 게 아니고?’

다른 책들은 펼쳐 보지 않았던 나는 조금 놀랐다. 그리고 고민하다가 말했다.

“……함부로 태워도 되는 거예요?”

“뭐 어때.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 텐데.”

역시.

책을 보았을 때부터 예상했지만, 다른 책에는 그의 과거들이 적혀 있던 모양이다.

나는 미련 없이 과거의 자신을 ‘멍청하고 병신 같은 놈’이라 폄하하며 불태우는 카셀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대도 본 건가?”

시선을 느낀 건지 그가 흘끔 고개를 들고 물었다.

나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물론 내가 본 책에도 그의 되풀이되는 일생에 대해 나오긴 했으나, 그건 요약본처럼 극히 짧고 간략했다.

그마저도 빠르게 스쳐 지나가, 전부를 봤고 할 수도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여길 모조리 불 싸지르고 싶은데…… 불이 안 붙더군.”

“…….”

“그래서 고심하여 제일 우스꽝스러운 이야기들을 선정했지.”

“…….”

“아쉽겠어. 미리 봤으면 그대도 마음껏 비웃을 수 있었을 텐데.”

타닥, 타닥.

남자가 일렁이며 책들을 살라 먹는 불길을 바라보며 고요히 중얼거렸다.

정말로 모든 플레이를, 모든 과거와 죽음을 기억하는 거냐고.

나는 그에게 불쑥 묻고 싶어졌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정확한 이유를 모르겠지만, 그러면 돌이킬 수 없을 것 같다는……

밑도 끝도 없는 불안함이 내 입을 틀어막았다.

한동안 말없이 불길을 응시하던 카셀이 불쑥 입을 열었다.

“빠져나갈 구멍은 찾았나?”

“……아니요. 벽을 부숴도 금방 멀쩡해져요.”

나는 어두운 얼굴로 답했다.

이러다 영영 여기에 갇힐까 봐 무서워졌다. 엔딩을 내기 위해서는 1분 1초가 급박한 상황인데.

고심하던 나는 하는 수 없이 카셀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초록 머리 망령이 사라지기 전에 키메라가 힌트라고 했는데…… 뭐 아는 거 있어요?”

“글쎄.”

턱을 매만지며 고민하던 그가, 이내 여상히 말했다.

“키메라에게 잡혀간 공주가 나오는 동화는 알지. 애들이 읽는 거지만.”

“동화요?”

나는 황당함에 젖은 얼굴로 그를 돌아보았다.

‘빠져나갈 구멍 찾자니까, 웬 동화?’

하지만 놈은 아랑곳하지 않고 동화 내용을 읊었다.

“자신을 구하러 온 왕자가 키메라를 죽이고 저주에 걸려 잠들자, 공주가 키스로 왕자를 깨우고 행복하게 살았다는 얘기지.”

“……뻔한 내용이네요.”

잠자는 숲속의 왕자냐고.

어디에나 있을 법한 동화 내용에 시큰둥한 표정을 짓고 있자, 갑자기 카셀이 몸을 돌려 나를 마주 보았다.

“꼭 우리 같지 않나?”

“뭐가요?”

“일국의 왕녀인 그대와 제국의 황태자인 나 말이야. 그리고 잠들어 있던 나를 조금 전에 그대가 깨웠지.”

지금 내가 들은 게 환청이 아니고진짜로 카셀이 말하는 건가?

나는 무표정한 얼굴로 잘도 그런 소리를 지껄이는 카셀을 바라보며 붕어처럼 입을 뻐끔거렸다.

그리고 훌쩍 카셀에게 다가가 그의 이마를 손으로 짚었다.

“무슨…….”

“열은 없는데. 혹시 어디 머리라도 부딪치셨습니까?”

“뭐?”

“아닌데. 쓰러지기 전에 키메라가 먼저 낚아챘는데.”

‘아니면 설마, 아까 끌고 올 때……?’

쓰러진 그의 발목을 잡고 무지막지하게 끌고 오던 것이 떠올라, 묘한 죄책감이 피어오를 무렵.

탁!

불현듯 놈이 이마를 넘어서 제 머리칼까지 헤집는 내 손을 잡아챘다.

“불쾌하군.”

걱정하는 건데, 나를 노려보는 그의 얼굴이 사나웠다.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든 나는, 슬쩍 그에게 잡힌 손을 빼려고 들며 차분히 반박했다.

동화 내용에 우리를 엮던, 그 말도 안 되는 개소리에 말이다.

“애석하게도, 전 왕녀가 아닙니다. 제가 솔레니아 왕녀를 사칭했다는 거 다 알고 있었다면서요? 그리고 전하는 잠든 게 아니라 기절했던 거…….”

“입 맞춰 봐.”

불쑥 말을 끊는 카셀의 음성에, 나는 숨을 멈췄다.

빠져나가려는 내 손목을 여전히 단단히 쥔 채 놈이 이어 말했다.

“혹시 모르지. 그대의 키스로 내게 걸린 저주가 풀려서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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