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1화 (161/212)

숨도 멈춘 채, 딱딱하게 굳은 나를 보며 놈이 슬쩍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왜 그러고 있지? 매번 잘만 입 맞추더니.”

“무, 무슨…….”

그게 무슨 개소리냐고, 반사적으로 더듬거리며 내뱉던 나는 흠칫 입을 다물었다.

깨닫지 못한 사이, 카셀과의 거리가 지나칠 만큼 가까웠다. 콧잔등에 서로의 숨결이 닿을 만큼.

그 순간, 쿵. 심장이 발끝까지 쑥 내려앉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이, 이 자식 대체 왜 이래?!’

분명 무슨 꿍꿍이가 있어서, 별 뜻 없이 하는 행동이라는 걸 잘 아는데도, 놈의 가라앉은 얼굴을 마주하자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위이이이잉.

어디선가 경고등이 울리는 것 같았다.

피곤함이 짙게 내려앉았음에도 남주의 얼굴이 지나치게 잘생기게 느껴졌다.

이건 좋지 않은 징조였다. 매우.

그때였다.

「[황태자 카셀 루크비히]가 당신의 반응을 궁금해합니다.」

「[황태자 카셀 루크비히]가 당신의 표정에 약간의 흥미와 재미를 느낍니다.」

밤하늘처럼 새까만 머리 위로, 흰 글씨들이 떠올랐다.

그것을 보자 뿌옇던 머릿속이 누군가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서서히 차가워졌다.

‘이 새끼…… 장난치고 있는 거구나.’

그제야 보였다. 약간의 비웃음과 흥미로 반짝이고 있는, 나를 향한 붉은 눈동자가.

‘혹시 내가 입으로 포션 준 걸 알고 있는 건가?!’

그래서 나를 놀리는 거라면, 어느 정도 납득이 되었다.

합리적인 의심과 함께, 아이러니하게도 안도감이 찾아왔다.

이 안도감은 그토록 혐오하는 신체 접촉을 했음에도 놈이 나를 해치려 들지 않았다는 것에서 오는 것일까.

모르겠다.

‘그러고 보니, 지금도 접촉 중인데…….’

문득 깨달은 뜨거운 감각에, 나는 여전히 놈에게 잡혀 있는 손목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지루하군.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지? 빨리 저주 풀고 여기서 안 나갈 건가?”

그때였다.

조용한 내가 기대에 못 미쳤는지, 놈이 핀잔 주듯 지껄였다.

그 말에 울컥하는 감정이 솟구쳤다.

‘아니, 지 저주는 잠드는 것도 아니구만, 뭔 놈의 키스로 여길 나가?!’

뒤늦은 억울함이 턱 끝까지 잠식했다.

놀리는 줄도 모르고 이딴 AI 놈한테 심장이, 가슴이…….

AI 주제에. AI 주제에……!

“……사리 송?”

죽일 듯이 노려보는 내 눈빛을 알아챘는지, 놈이 의아하다는 듯 나를 불렀다.

그래. 놀자는데, 기대에 부응해줘야지.

이를 까득 문 나는, 잡히지 않은 손을 들어 놈의 뺨을 덮었다.

이 정도 접촉으로 나를 죽이려 들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나자, 놈의 뺨을 쥐는 손길에 거침이 없어졌다.

이미 코가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였으나, 나는 더욱 얼굴을 바싹 들이밀고는 속삭였다.

“……제가 어떻게 감히 황태자 전하께 입을 맞출 수 있겠습니까?”

이런 내 모습을 예상치 못한 것일까. 놈의 붉은 눈동자가 한차례 일렁였다.

나는 새어 나오려는 심술궂은 웃음을 꾹 참은 채, 마저 말을 이었다.

“대신 다른 건 드릴 수 있죠.”

“뭐지?”

“그건 바로…….”

기대감을 고조시키기 위해 말끝을 흐리던 나는, 이윽고 고개를 번쩍 치켜들었다.

그리고, 코앞에 있는 놈의 얼굴을 향해 힘껏 머리를 들이박았다.

‘이 삿된 것!’

퍼억―!

“윽!”

둔탁한 소리와 함께 놈이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더니 비틀거리며 물러섰다.

“전하 정신 깨는 특효약이요.”

나는 그제야 참고 있던 웃음을 시원하게 터뜨리며 말했다.

정신 차리라고 이마를 박으려 했던 건데, 하필 코에 부딪혔는지 놈이 나를 잡았던 손으로 자신의 코를 부여잡았다.

그리고 눈을 부릅 치켜뜬 채로 버럭 소리쳤다.

“너…… 미쳤나?!”

「[황태자 카셀 루크비히]가 당신의 행동에 강한 황당함을 느낍니다.」

「[황태자 카셀 루크비히]가 당신에게 일말의 살심을 가집니다.」

「[황태자 카셀 루크비히]가 당신을 보며 [미쳐 날뛰는 암살자]를 연상합니다.」

버럭 소리치는 그의 목소리와 함께 시스템 창이 연이어 떠올랐다.

억울함을 느꼈던 아까와는 달리, 나는 또 나온 ‘암살자’란 단어에 그저 코웃음 쳤다.

“아니요? 미친 건 그쪽이겠죠.”

“황족 시해 죄로 죽고 싶은가 본데.”

“그 전에 먼저 제가 그 황족 살린 건 잊으셨나 보죠?”

한마디도 지지 않고 대꾸하자 놈이 살기를 있는 대로 방출하며 윽박질렀다.

“제기랄, 유혹을 이딴 식으로 거절하는 여자는 처음이군.”

“허. 그게 유혹이었습니까?”

“그럼 사내가 여인에게 입을 맞추라고 요구하는 게, 유혹이 아니면 뭐지?”

물론 표면적으로만 들으면 틀린 말은 아니었다.

내가 놈의 머리 위에 떠오른 시스템 창을 보지 않았더라면.

놈이 내가 할 반응을 기대하며 재미를 느끼는 것을 몰랐다면.

‘그랬다면 뭔가 달랐을까?’

무의식중에 떠오른 생각에 나는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이게 다 요망하고 삿된 놈 때문이었다.

저렇게 먼저 홀릴 듯이 굴어서 수많은 유저들을 가슴앓이하게 만들어 놓고.

조금만 접촉하면 가차 없이 죽인 적이 얼마나 많던가?

‘난 절대 안 속아!’

“자꾸 헛소리를 하시길래, 전 또 여기 있는 귀신 중 하나가 전하 몸에 들린 줄 알았지 뭡니까?”

빌어먹게도 치명적인 얼굴을 똑바로 마주하려고 노력하며, 나는 새초롬한 표정으로 덧붙였다.

“제가 살던 나라에는 귀신 들린 사람을 나뭇가지로 내려쳐서 귀신을 내쫓는 풍습이 있거든요. 안타깝게도, 여긴 나뭇가지가 없잖습니까.”

“미친 나라군.”

카셀이 짓씹듯 답했다. 짐승이 으르렁거리는 듯한 목소리였다.

통증이 좀 가신 걸까.

뒤늦게 코를 잡고 있던 손을 내린 그가, 제 손바닥을 보고는 날카로운 헛웃음을 터뜨렸다.

“하.”

그의 손에 묻어 나온 붉은 액체를 본 나는 눈을 크게 떴다.

피를 볼 생각까진 아니었는데, 너무 당황해서인지 힘 조절을 못 한 것 같았다.

솔직히 날 놀리던 걸 생각하면 쌤통이었다.

하지만 뒤늦게 그의 몸이 아직 성치 않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받으세요.”

나는 숙연해진 마음으로 주머니를 뒤적여 [하급 힐링 포션]을 꺼낸 후 쭈뼛거리며 그에게 건넸다.

“병 주고, 약 주는군.”

카셀이 또 한 번 헛웃음을 터뜨리며, 사납게 뇌까렸다.

병만 줬던 황제보단 낫지 않나, 싶었지만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애초에 큰 부상이 아니었기에 카셀의 코피는 하급 포션으로도 쉽게 멎었다.

다만 그의 손에 묻은 코피를 닦을 만한 천이 없었다.

두리번거리던 나는, 카우치 한쪽에 구겨져 있는 담요를 가져 왔다.

어차피 리르도 사라진 마당에, 우리마저 여기서 나가면 더 쓸 사람도 없을 것이다.

“이리 줘봐요.”

나는 피가 묻은 손을 신경질적으로 털어내고 있는 카셀의 손을 덥석 낚아챘다.

그리고 담요로 닦아내던 순간.

카셀이 털어낸 핏방울이 떨어진 바닥이 희미한 빛을 내며 동그랗게 뚫렸다.

“어…….”

서너 개쯤. 점점이 빛나는 구멍을 본 나는 멈칫 굳었다.

구멍의 크기가 작아서 그 안이 잘 보이지 않았으나, 분명한 건 뚫려 있다는 사실이다.

스킬을 써서 아무리 내려쳐도 움푹 파이기만 할 뿐 뚫리지 않던 벽과는 다르게.

그러나 바닥에 난 구멍들은 금세 스멀스멀 사라지기 시작했다.

“뭘 보는 거지?”

잠시 후 카셀이 나를 돌아봤을 때쯤엔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모, 못 보셨어요? 바닥에 구멍이 났는데…….”

카셀이 내 시선을 따라 바닥을 훑었다. 그러나 그는 미처 보지 못한 듯했다.

“아무것도 없는데.”

한심하다는 눈빛이 되돌아오자, 나는 의기소침하게 대꾸했다.

“잘못 봤나 봐요.”

사실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나조차도 제대로 본 게 맞는지 헷갈렸다.

‘모닥불 빛을 잘못 본 건가?’

고개를 갸웃거리던 나는, 이내 멈췄던 손을 마저 움직였다.

피라서 그런지, 깔끔하게 닦이지 않고 옅은 자국이 남았다.

비록 이곳저곳 굳은살이 배겨 있지만, 남자치고는 하얗고 곱상한 손에 지저분하게 남아 있는 꼴이 보기 싫어서 벅벅 닦아 내고 있는데.

문득 정수리 맡에서 코웃음을 치는 소리가 나지막이 들려왔다.

“언제는 입을 맞추란 말 좀 들었다고 박치기로 남의 코를 박살 낼 만큼 내외하더니…… 잘도 잡고 있군.”

흘끔 고개를 들자, 내게 꽉 부여 잡혀 있던 제 손을 내려다보고 있는 남자가 보였다.

내 모순적인 태도를 지적하는 듯한 말에 나는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놀린 거 다 알아요.”

“뭘.”

“제가 입으로 포션 먹여 드린 거 알고 그러는 거잖아요, 지금.”

힘을 줘 닦아 낸 보람이 있는지, 코피가 묻었던 놈의 손이 마침내 깨끗해졌다.

무심히 그것을 바라보던 나는, 이내 그와 눈을 마주쳤다.

‘역시.’

알고 있었던 모양인지, 놈의 얼굴은 여상했다.

예의 그 무표정한 얼굴.

다행히도 아까처럼 가슴이 내려앉거나 하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놈이 더는 나를 죽이려 들지 않을 것을 확신해서 그런지, 생각보다 덤덤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멋대로 그런 행동을 해서, 화가 나셨다면 죄송합니다.”

“…….”

“그런데 전하의 상태가 좋지 않아서 이것저것 따질 상황이 아니었어요.”

그래서 어쩔 거냐는 듯 응시하자, 그의 눈빛이 묘해졌다.

잠시간 고요히 나를 주시하던 카셀은 이내 허탈하게 웃었다.

“……그대는 내가 화가 나서 그런 소리를 한 것 같아?”

“그럼 아니에요?”

“몰라.”

“예?”

“나도 모른다고. 무슨 생각으로 그딴 말을 지껄인 건지.”

놈이 내뱉는 말 같지도 않은 말에 어처구니가 없어졌다.

‘네가 모르면 대체 누가 아는데?’

묻고 싶었으나, 나는 좀 전의 일을 그다지 되새기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말없이 잡고 있던 그의 손을 뿌리치듯 내려놓았다.

“읏…….”

그런데 놈이 병약한 여주처럼 신음하며 비틀거리는 것 아닌가.

깜짝 놀란 나는 뿌리친 그의 팔을 다시금 잡았다.

또 놀리는 건가 싶었으나, 살펴본 그의 낯빛이 백지장처럼 하얬다.

코피 몇 방울 좀 흘렸다고 타격을 입은 남주의 모습이 어이가 없었지만, 좋지 않은 그의 몸 상태를 떠올리고는 잠자코 그를 부축했다.

조심스럽게 카셀을 벽난로 앞 카우치에 앉힌 나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몸이 많이 안 좋으세요?”

식은땀까지 흘리는 걸 보니, 치료가 시급했다.

‘빨리 여기서 나가서 중화제를 먹어야 하는데.’

그런 생각이 들자 갑자기 참을 수 없을 만큼 답답해졌다.

황궁으로 돌아갔으면, 몸부터 치료했어야지.

그렇게 무식하게 불면 포션을 처먹어 놓고, 왜 아무런 조치도 안 하고 있었냐고.

내가 만든 포션으로 인해 생긴 일이어서 그런가.

미련하게 군 건 놈인데, 꼭 내가 일부러 포션 중독에 걸리게 한 것처럼 알 수 없는 죄책감이 밀려오는 동시에 화가 났다.

“대체 몸이 이 지경이 될 동안 뭐 했습니까?”

“그걸 아는 사람이 이래?”

나도 모르게 따지듯이 묻자, 그가 피식 웃으며 받아쳤다.

피는 멈췄으나, 아직 붉은 기가 남은 콧잔등에 나는 씨근덕거리면서도 입을 다물었다.

괘씸하긴 했지만, 어쨌든 아픈 사람을 상대로 너무 앞뒤 분간 없이 폭력을 휘둘렀다는 자각이 들었던 탓이다.

억울하다는 내 눈빛에 카셀이 또 한 번 가소롭다는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선 천천히 입을 열기를.

“……황궁, 아니 수도 전체에 믿을 만한 자가 없었다.”

“믿을 만한 사람요?”

뜬금없는 말에 눈을 휘둥그레 뜨자, 그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약재상을 따로 고용하려 했는데…….”

“…….”

“나 말고도 상대할 고객이 수두룩 빽빽하다며 가차 없이 거절하더군.”

……내가 언제 그렇게 말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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