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2화 (162/212)

예전부터 생각한 건데, 놈은 비약이 무척 심한 편이었다.

“저는 먼저 고용해주신 고객과의 약속을 최우선 하는 편입니다. 부디 넓은 아량을 베풀어 순서를 지켜주신다면…….”

내가 눈물을 머금고 비굴하게 자비를 구하던 모습이 이토록 생생한데.

대체 그 말이 어떻게 저렇게 오만하기 짝이 없는 거절로 탈바꿈될 수 있단 말인가.

‘교황한테 말해서 황궁의와 교환하겠답시고 협박할 땐 언제고……!’

그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그러나 아직 놈에게 내 정체를 밝힌 게 아니므로, 차마 그 생각을 전부 내뱉을 수 없었다.

“그, 그런데…….”

나는 묘하게 나를 주시하고 있는 놈의 시선을 피하며 말을 돌렸다.

“황제 폐하께선 전하를 왜 그렇게 못마땅해하시는 겁니까?”

“……뜻대로 움직이지 않아서겠지.”

의외의 질문이었는지 카셀은 눈썹을 위로 치켜들었다. 그러나 이내 순순히 답했다.

“제 어미를 잡아먹고 태어난 것도 모자라, 악몽을 현실로 일으키는 재주를 가진 놈이 황태자라니.”

“…….”

“아, 재앙을 일으켜 제국을 멸망시킬 운명이라는 신전의 예언도 있었지. 온갖 악운이란 악운은 다 갖고 태어났군.”

그는 꼭 남의 얘기라도 하듯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어미를 잡아먹고 태어나다니. 전혀 알지 못했던 카셀의 숨겨진 설정에 나는 내심 놀랐다.

“그러니 못마땅해할 법도 하지 않나.”

중얼거리던 그가 이윽고 자조하듯 웃었다. 씁쓸함과 회한이 느껴지는 웃음이었다.

나는 그의 반응에 신기한 마음이 들면서도, 곧 기분이 이상해졌다.

캐릭터 설정값인지, 반복된 회귀 때문인지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으나, 나는 그동안 카셀의 인격이 완전히 파탄 났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이다.

더는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못할 만큼, 처음 본 유저들을 서슴없이 죽이고도 조금의 가책조차 느끼지 않을 만큼 말이다.

그러나 지금의 그는, 누구보다 무감하고 건조한 동시에 그 누구보다 고독하고 고통스러워 보였다.

“왜 그런 눈으로 보지? 뒤늦게 연민이라도 드나?”

카셀은 말이 없는 내 모습이 우스웠는지 피식 웃으며 물었다.

그러나 입과는 달리 붉은 눈동자는 한 점의 웃음기 없이 서늘하기만 하다는 걸.

이미 헤일리에서부터 지긋지긋하게 겪어 온 나는 속지 않았다.

“……아니요.”

애석하게도, 게임에 갇힌 진짜 인간인 나로서는 게임 속 캐릭터 따위에게 가질 연민 같은 건 없었다.

나는 술렁이는 가슴을 애써 무시한 채 답했다.

“이해가 가지 않아서요.”

“뭐가?”

“재앙은 결국 일어나지 않았잖아요.”

“그랬지.”

카셀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덧붙였다.

“하지만 죽을 줄 알았던 놈이 멀쩡히 살아 돌아와서 팔다리를 자르는 것도 모자라, 돈줄마저 끊으려 드니 죽이고 싶을 수밖에.”

“아…….”

나는 그제야 황제가 왜 키메라에게 제물까지 바쳐가면서 집착했는지 완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호수 속에 있는 보물이 황제의 유일한 자금줄이었던 것이다.

황궁의 실권을 장악한 카셀이 국고를 황제에게서 빼앗지 않고 가만히 두고 볼 리 없었다.

‘하긴. 토너먼트에 참여한 부하한테도 캐시템을 뿌려댄 놈인데…….’

나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번쩍번쩍한 S급 아이템들로 중무장하고 있던 아담을 떠올렸다.

대체 얼마나 숨통을 조였기에 제국의 황제가 마물의 몸에 딸려 나오는 금품에 절절매게끔 만든 건지.

‘연민은 무슨…….’

새삼 이 게임의 남주가 피도 눈물도 없는 놈이라는 것을 자각하게 됐다.

“너무 내 얘기만 했군. 이제 그대의 이야기도 해봐.”

그때였다. 카셀이 문득 나를 돌아보며 권유했다.

“제 얘기요?”

“그래. 황궁에는 어떻게 들어 온 거지?”

느닷없는 질문에 당황하던 나는 이내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훑었다.

“혹시…… 나가서 처벌하려고 물으시는 거면 묵비권을 행사하겠습니다.”

“허. 나갈 방법도 찾지 못했으면서, 꿈도 크시군.”

그가 헛웃음을 내뱉으며 빈정거렸다.

“정말로 궁금해서 묻는 거다. 경비를 삼엄하게 세워뒀는데, 꽤 용하다 싶어서.”

“…….”

“그리고 목숨을 구해준 대가로, 의심하지도 겁박하지도 말라고 요구한 것은 벌써 잊었나 보지?”

그 말에 나는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원하는 것을 말하라기에 일단 말하긴 했지만, 카셀이 그걸 들어줄 것이라 예상치 못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놈은 뼛속까지 타인에 대한 불신이 새겨져 있으니까.

하지만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에는 미약한 흥미와 관심만 있을 뿐 다른 불순한 의도는 보이지 않았다.

조금 시간을 두고 기다려 보았으나, 떠오르는 시스템 창 또한 없었다.

“……소인화 포션을 이용했어요.”

그제야 나는 망설임을 관두고, 우물쭈물 사실을 털어놓았다.

“그랬군. 어쩐지…….”

그런데 예상과는 달리, 카셀은 놀라기는커녕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어리둥절한 채 되물었다.

“어쩐지, 뭐가요?”

“……소인화 포션 같은 희귀 포션을 잘도 구했다 싶어서.”

그가 뜸을 들이다가, 못마땅한 음성으로 대꾸했다.

석연치 않은 반응에 위화감이 들었으나, 되물을 틈도 없이 그가 또 다른 질문을 던졌다.

“황궁 던전엔 왜 들어온 거지? 가만히 있으면 그대의 동료가 알아서 마물을 처치했을 텐데.”

퍽이나 그랬겠다.

짐짓 일레인의 능력을 높게 쳐주는 듯한 놈의 가증스러움에 입을 삐쭉이던 나는, 적당히 사실을 섞어 답했다.

“……그린 마스크가 황제 폐하가 수상하다며, 키메라를 잡는 동안 자신의 뒤를 좀 부탁했어요.”

“규칙 위반이다.”

“…….”

그것에 대해선 할 말이 없었다.

그러나 처음부터 잠입해서 ‘남의 던전 보스몹 가로채기’ 꼼수를 써온 사실을 들키는 것보단 나았기에 침묵했다.

그러다 문득 억울함이 들었다.

“그러게 그린 마스크한테도 다른 파티원을 배정해줬으면 좀 좋았습니까?”

아니, 최소 일레인을 아담의 파티에 끼워줬더라면. 그러면 내가 나설 일도 없었을 거 아닌가!

물론 그런 내 호소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마치 본인이 토너먼트 참가자인 것처럼 말하는군.”

카셀이 코웃음 치며 되물었다.

“그럴 거면 직접 참여하지 그랬나? 그대라면 기꺼이 황궁으로 배정해줬을 텐데 말이야.”

“그러는 전하야말로 왜 그린 마스크를 혼자 배정하셨습니까?”

놈의 조롱하는 말에 욱해서 따져 물었는데, 뒤늦게 너무 흥분했다는 자각이 들었다.

나는 얼른 덧붙였다.

“무, 물론 그는 뛰어난 용사긴 하지만요……. 너무 심한 처사잖아요.”

“대단한 우정 납셨군.”

예상대로 놈이 차갑게 이죽거렸다. 약오르지만, 반박할 수 없었다.

‘친구 일이 아니라 내 일이야, 이 새끼야……!’

일레인과 동료가 돼야 하는 건 내가 아니라 카셀 놈인데, 왜 상황이 점점 요상하게 흘러가는 걸까.

찔끔 흘러나오는 눈물을 삼키며 나는 높다란 천장으로 고개를 돌렸다.

카셀이 더는 입을 열지 않았고, 나도 그에게서 답을 들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대화가 끊기니 우리 사이를 채우는 소리는 ‘타닥타닥’ 타오르는 모닥불 소리뿐이었다.

그 소리를 듣고 있자, 새삼 우리의 지금 모습이 마치 난로 앞에 앉아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는 연인의 모습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높다란 천장을 올려다보던 시선을 돌려 다시금 카셀을 바라보았다.

그는 제가 던진 책을 모두 살라먹고 새빨갛게 타오르는 불꽃을 응시하고 있었다.

제법 평화로운 광경이었다.

‘평화롭다니…….’

카셀은 눈만 마주치면 으르렁거리며 나를 족치려 들고, 나는 그런 놈에게서 도망치기 바쁘던 게 얼마 전인데, 평화라니.

우리 사이에 이만큼이나 어색한 단어가 또 있을까.

그런데도 왜인지 모를 간지러운 감각이 스멀스멀 발을 타고 오르는 것 같았다.

반사적으로 발끝을 꿈지럭거리는데, 시선을 느낀 건지 카셀이 불쑥 입을 열었다.

“……글쎄.”

“…….”

“그대가 올 것을 예측하기라도 했나 보지.”

나는 그가 뒤늦게 덧붙인 말에 눈을 커다랗게 떴다.

모닥불에서 시선을 뗀 그가 짓궂은 표정을 지으며 그런 나를 돌아봤다.

“친우를 위해서라면, 암시장이든 토너먼트 개최식이든 기꺼이 나선 자가 아닌가. 겁도 없이 왕족을 사칭하고 다니기도 했지.”

“그건…….”

“그래서 그대의 친구를 고립시키면,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생각보다 치밀하고 또 조금도 예상치 못한 놈의 계략에 나는 말을 잃었다.

‘그래서 일레인을 황궁에 혼자 배정한 거라고…….’

지금껏 퀘스트를 위해 움직인 내 모든 모습이 그에게는 우정을 위한 헌신으로 보였으리라 생각하니, 어이가 없어졌다.

무슨, 친구를 위해 물불 안 가리는 세상 둘도 없는 우정꾼이 아닌가.

그리고 그 황당무계한 추측에 기반한 계략이 들어맞았다는 게 더 환장할 노릇이다.

“궁금하군.”

어처구니가 없어서 그저 입을 뻐끔거리고 있는데, 문득 카셀이 다시 모닥불 쪽으로 시선을 던지며 말했다.

“나도 그대의 친구가 되면…… 그렇게 내 일처럼 나서줄지.”

“전하는 저랑 친구 하고 싶으세요?”

“아니.”

돌아오는 대답이 칼 같았다.

‘아니, 그럴 거면 그런 소린 왜 해?’

기가 막혀서 연신 헛바람을 내뱉던 나는 이윽고 삐딱하게 대꾸했다.

“저도 하기 싫거든요?”

“친구 사이는, 잠들면 입 맞춰서 깨워줄 수가 없잖나.”

“아직도 그 개소리세요?”

처맞고 코피를 흘려 놓고도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린 것 같은 놈의 중얼거림에 눈살을 찌푸릴 때였다.

스르륵.

불현듯 카셀과 맞닿아 있던 어깨가 무거워졌다.

“……저, 전하?”

화들짝 놀란 나는 곧장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보이는 것은 새까만 정수리뿐이었다.

카셀이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댄 것이다.

나는 당연히 숨도 못 쉴 만큼 당황했다.

‘얘기 좀 나눴다고, 우리가 이런 스킨십을 할 만큼 가까운 사이는 아니지 않나……?’

그러나 생각과는 달리, 쿵.

심장이 내려앉는 소리와 함께 머릿속이 하얘졌다.

“저, 저기요. 머리는 왜…….”

“……이렇게 눈을 감으면, 영영 깨어나지 않을 수 있을 것 같군.”

카셀의 음성은 좀 전과는 달리 힘이 없었다.

“저, 전하, 졸리세요? 여기서 자면 안 돼요……!”

어깨에 내려앉은 묵직한 무게에 정신이 쏠린 바람에, 나는 그런 그의 목소리가 금방이라도 꺼질 것처럼 아스라하다는 것을 바로 눈치채지 못했다.

그가 내 귓가에 속삭이듯 읊조렸다.

“이번에 잠들면 깨우지 마, 사리 송.”

“무슨…….”

“눈을 떴는데, 모든 게 꿈이고 다시 시작해야 한다면.”

“…….”

“죽고 싶어질 거 같거든.”

그게 무슨 소리냐고 되물을 새도 없었다.

스르륵.

내 어깨에 기대 있던 카셀의 머리가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졌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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