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3화 (163/212)

“……카셀!”

나는 바닥으로 힘없이 쓰러지는 카셀의 몸을 가까스로 잡았다.

묵직한 몸을 힘겹게 일으켜 카우치에 기대게 하자, 창백한 낯빛과 초점이 흐려진 눈동자가 보였다.

「[황태자 카셀 루크비히]는 현재 상태 이상으로 움직일 수 없습니다.」

불길함을 느끼기 무섭게 떠오르는 시스템 창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여기서 이런다고?”

조금 전까지 잘만 주절거리던 것이 무색하게도, 급격히 나빠진 카셀의 상태에 절망이 찾아왔다.

‘아직 나갈 방법도 못 찾았는데…….’

임시 조치로 사용했던 포션들을 더 먹일 순 없었다.

안 그래도 포션 중독 증상을 보이는 몸에 포션을 들이붓는 것은 자살 행위나 다름없었다.

남주에게는, 당장 포션 중독 중화제가 필요했다.

갈 곳을 잃은 내 눈에 힘이 풀린 카셀의 주먹이 들어왔다.

정신을 잃지 않기 위해 꽤 오랫동안 참은 건지, 그의 손바닥에 선명한 손톱자국이 새겨져 있었다.

그것을 본 나는 아랫입술을 피가 날 만큼 깨물었다.

‘바보 같아.’

너무 안일했다. 태평하게 그와 대화나 나눌 때가 아니었는데…….

놈이 말을 건다고 넙죽넙죽 대답한 내가 한심하고 멍청해서, 속에서 천불이 이는 것 같았다.

나는 서둘러 벌떡 일어나 주변을 돌아보았다.

이미 수차례 둘러보고도 빠져나갈 구멍을 찾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두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이 상태로 늦어지면 카셀의 이번 삶은 끝이다.

카셀 놈은 자신의 끝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듯했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다.

‘여기서 죽으면, 이대로 꼼짝없이 4년 동안 갇히게 되는 거잖아……!’

그때였다.

서고를 정처 없이 맴돌던 내 시선 끝에 책 하나가 닿은 것은.

“퀘스트 책…….”

재생되던 영상은 끝났지만, 책은 여전히 펼쳐진 그 상태 그대로였다.

책을 다 본 뒤에 나갈 방법을 물으니, 리르가 ‘아직도 모르냐’며 핀잔을 줬었다.

‘맞아, 책!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저 책 때문에 여기 오게 된 건데.’

퀘스트 템과 장소가 연관된 것은 게임에서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곧장 그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두 손으로 책을 들어 올렸다.

촤라라락!

그리고 책장을 처음부터 넘겨보며 힌트가 될 만한 단서를 찾기 시작했다.

다행히 홀로그램에서 본 글과 그림들이 책 안에 고스란히 새겨져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꼼꼼히 훑어봐도, 책 속 그 어디에도 ‘키메라’와 관련된 단서는 보이지 않았다.

그저 만물을 위한 ‘삶’의 희생과 고대 영웅들의 헌신.

그리고 카셀의 고통스러운 회귀뿐…….

“……희생과 헌신.”

책을 요약하던 나는 불현듯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기억에 우뚝 생각을 멈췄다.

「[죽음의 흔적]이 호수 깊은 곳에 닿았습니다.」

「[고귀한 희생과 헌신]이 호수 안에 잠들어 있던 누군가의 심금을 울립니다.」

이곳에 들어오기 전 보았던 시스템 창.

“사랑하는 연인을 위해 옷까지 벗어주길 마다하지 않는 희생과 헌신이라…… 이 얼마나 아름다운 광경이란 말인가!”

“더 큰 거사를 위하여 소를 과감히 포기하는 용기, 타인을 위해 제 한 목숨 아끼지 않는 진정한 희생!”

유달리 희생과 헌신을 여러 번 입에 담던 리르의 목소리.

“뭘 보는 거지?”

“모, 못 보셨어요? 바닥에 구멍이 났는데…….”

카셀의 피가 닿자 바닥에 생긴 구멍.

“X발…….”

마침내 힌트를 알아차린 나는, 분을 못 이기고 허공을 향해 주먹질을 하며 소리쳤다.

“그럼 처음부터 힌트가 희생과 헌신이라고 얘기 했어야 할 거 아니야―!”

정신 나간 제작자 놈 같으니라고.

대뜸 ‘키메라’라고 던져두고 가면 대체 그걸 어떻게 알아차리고 빠져나간단 말인가!

“하…….”

나는 보기만 해도 치가 떨리는 책을 집어 던지듯 내팽개치고는 카셀에게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의 앞에 쭈그려 앉고 말했다.

“……전하. 제가 드디어 빠져나갈 방법을 찾았어요.”

“…….”

내 말을 알아들은 건지, 카셀이 눈을 느릿하게 깜빡였다.

내가 먹인 포션들이 그래도 완전히 효능을 다한 것은 아닌지, 그는 처음처럼 의식을 완전히 잃지는 않았다.

그래도 서둘러 나가서 중화제를 먹여야 하는 것만은 변함없었다.

드디어 여기서 빠져나갈 수 있다는 희망적인 상황과는 달리, 나는 무거운 마음으로 입을 열었다.

“……죄송한데, 깨우지 말라는 말은 못 들어 드릴 것 같아요.”

깨우지 말아 달라는 그의 말이, 누구보다 진심이라는 것을 잘 알아서.

또 그 사소한 부탁조차 들어주지 못하는 나라서…….

“제가 여기서 그냥 잠들게 놔둬도, 어차피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거 아시잖아요.”

정말 미안하게도, 나는 그가 바라는 대로 이대로 잠들게 할 수 없었다.

그는 괴롭겠지만, 엔딩까지 나와 함께 가야 했다.

그래야만 내가 이 망겜에서 탈출할 수 있으니까.

‘그리고 어쩌면…….’

어쩌면. 엔딩을 깬 후엔 카셀도 바라는 대로 안식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합리화하며, 나는 변명처럼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못 들어 줬다고, 저를 너무 미워하지는 마세요.”

“…….”

“나가서 또 제가 의심된다고 찾으려 들지도 말고요. 잊지 않으셨죠? 원하는 거 하나 들어준다고 했던 약속이요.”

담담하게 이어지는 내 독백에, 허공을 부유하던 카셀의 눈동자가 스르륵 내 쪽으로 이동했다.

다행히 듣고 있는 모양이었다.

‘……다행이야. 당신이 독하고 강한 인간이라서.’

나는 최악의 몸 상태에도 정신을 잃지 않는 카셀의 모습에 감탄하는 한편, 깊은 안도감을 느꼈다.

반드시 엔딩을 맞아야 하는 내 플레이가 이대로 망하지 않았다는 것에 대한 안도감인지.

아니면, 그가 아직 자신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에 대한 안도감인지는 알 수 없었다.

나는 나를 응시하는 그를 가만히 마주 보다가, 이내 천천히 상체를 숙였다.

스르렁―.

이윽고 섬뜩한 쇳소리와 함께, 카셀의 허리춤에 채워져 있던 그의 검을 뽑았다.

내 손에 들린 자신의 검을 본 카셀이 눈을 부릅떴다.

“뭐, 하는…….”

그가 간신히 쥐어 짜낸 듯한 목소리를 내었다.

나는 그런 그를 보고 희미하게 웃었다.

“지금 또 제가 암살자가 아닐까 하는 의심 했죠?”

「[황태자 카셀 루크비히]가 당신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어 합니다.」

「[황태자 카셀 루크비히]가 당신에게 일말의 분노를 느낍니다.」

아니라고 부정하기 위해서 한 말인데, 곧장 떠오른 시스템 창을 보니 역효과인 듯했다.

하지만 지금으로선 그가 분노하고 의심해도 별수 없었다.

휘익.

나는 웃음기를 지우고 뽑아 든 검날을 내 쪽으로 틀었다.

“여기서 빠져나갈 방법은 희생과 헌신인 것 같아요, 전하.”

희생과 헌신.

그것의 또 다른 이름은 ‘죽음’이다.

책이 바로 그것을 보여주었다. ‘삶’의 죽음과 고대 영웅들의 죽음과 카셀의 죽음.

물론 빌어먹게도 리르가 말한 힌트 또한 틀린 건 아니었다.

카셀을 짊어지고 ‘키메라’를 죽인 후에 이곳에 끌려오게 됐으니, 히든 루트 달성 조건을 충족한 것이다.

끌려오기 전, 내가 죽인 키메라의 피가 호수 안에 널리 퍼지기까지 시간이 걸린 것도 그렇고.

카셀이 흘린 코피가 아니었다면, 그로 인해 바닥에 난 구멍이 아니었다면 정말이지 이곳에 4년간 갇혀 있을 뻔했다.

피가 의미하는 것은 죽음이니까, 결정적인 힌트가 되어줬다.

‘정답은 바로, 누군가의 희생이겠지.’

“무슨, 짓…….”

내 말과 행동이 좀처럼 이해가 가지 않는지, 카셀의 붉은 눈동자가 얕게 진동했다.

나는 헤일리에서처럼 손을 뻗어 그의 눈을 가렸다.

앞으로 이어질 광경은 별로 보기 좋진 않아서, 그가 충격받는 걸 미연에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죄책감 갖지 마세요. 저도 나가려고 이러는 거니까.”

“이거…… 사리…… 송…….”

느닷없이 눈을 가린 내 행태에 카셀이 이를 악물고 되뇌었다.

‘놓으란 소린가.’

그에게 약재상이 나라고 밝히지 않은 것이 이렇게 다행으로 돌아올 줄 몰랐다.

이로써 그는 ‘사리 송’인 나를 영영 찾지 않을 것이다.

죽었다고 생각할 테니까.

‘이런 건 처음이라, 무서운데…….’

높은 곳에서 떨어지거나 마물에게 공격당해서 죽은 적은 많았어도, 내 손으로 검을 휘둘러 죽을 생각은 못 했다.

서슬 퍼런 검날을 보니 뒤늦게 오한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진작 죽어봤으면 되는 일인데.’

그럼 어쨌든 간에 나는 이곳에서 탈출했을 거 아닌가?

왜 진작 죽어서 강제 소환당할 생각을 못 하고 나갈 구멍을 찾아 헤맸는지.

과거의 내가 우매하고 한심하게 느껴졌다.

설령 이게 정답이 아니어도 상관없었다.

일단 여기서 나간 후에, 제작자 놈들을 족쳐서 다시 돌아오면 되니까.

“사리, 송…….”

카셀은 그런 와중에도, 미약하게 몸을 움찔거리며 내 손을 떨쳐내려고 최선을 다했다.

나는 그를 가라앉은 눈으로 가만히 응시했다.

‘어차피 약재상인 거 밝히고 나면 카셀이 어떻게 나올지 볼 자신 없었잖아.’

실은, 내게 화를 내거나 경멸할까 두려워서 말 안 해 놓고는.

이제 와 다행이라는 둥, 그가 충격받길 바라지 않는다는 내 위선을 자조하며 나는 치밀어 오르는 두려움을 억눌렀다.

나는 어차피 죽어도 죽지 않을 것이고, 카셀은 빨리 여기서 나가 치료를 받아야 한다.

그것 외에 우리 사이에 필요한 건 없었다.

이것도 모두 이 순간의 충동일 뿐이야.

이 울렁거림도, 이 술렁임도, 이.

이…….

“샤…… 리…….”

나는 샤리인지, 사리인지 모를 이름을 달싹이는 입술을 향해 천천히 고개를 내렸다.

보드랍고 따뜻한 온기가 스치듯 입술을 적셨을 무렵, 나는 곧장 고개를 들고 속삭였다.

“……잠에서 깨면, 사리 송은 그냥 원래부터 없었던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잊어버리세요.”

그 말과 동시에, 나는 내게 겨누고 있던 검에 그대로 힘을 주어 내리꽂으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필격.”

「[Lv.999 필격] 스킬이 발동됩니다.」

푸욱―

배에서 느껴지는 화끈한 통증과 함께, HP가 바로 훅 깎였다.

[HP –998]

[HP 1]

「위험! 체력이 10% 미만입니다! NPC 소속 지역으로 자동 소환됩니다.」

‘후. 위험할 뻔했다.’

떠오른 시스템 창에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어떻게 1을 남기고 가까스로 HP가 깎이긴 했다.

여러 번 찌를 수는 없으니 한 번에 타격을 주기 위해 반쯤 도박으로 스킬을 질렀는데, 천운이었다.

‘그런데…… 1조차 안 남고 단번에 HP가 깎이면 어떻게 되는 거지? 그럼 NPC라도 죽을 수 있는 건가?’

텅 빈 HP창을 바라보다가 문득 든 의문에 갸웃거리는 순간.

“……리!”

왜인지, 간절하고 급박하게 나를 부르는 소리와 함께 눈앞이 새빨갛게 점멸했다.

그리고.

「[도버 마을]에 도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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