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그대는, 나를 도와 멸망을 막는 자인가?”
그 말에 ‘비슷하다’ 긍정하던 여자를 보고, 카셀은 딱히 놀라지 않았다.
예상한 바였기 때문이다.
당신을 도우러 왔다느니, 함께 힘을 합쳐 멸망을 막고 세상을 구하자느니…….
수많은 이들이 듣기 좋은 소리를 늘어놓으며 그에게 쉽게도 접근하고, 쉽게도 사라졌다.
카셀은 처음엔 의심했고, 그다음엔 혹시 바뀌는 것이 있을까 기대하고 실망했다.
그리고 종국엔 그들이 뭘 하든 신경 쓰지 않았다.
새로 시작된 지긋지긋한 삶에 방해만 되지만 않는다면.
“멸망을 막는 건 맞지만, 꼭 그쪽을 돕는다고 할 수만은 없어서요.”
“……그래서 정체를 숨긴 거예요.”
그런데 약간의 망설임 끝에 나온 여자의 대답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분명 도울 테니 함께하자는, 허무맹랑한 소리를 지껄일 줄 알았는데…….
카셀은 여자의 경계심 가득한 눈을 떠올렸다.
과거의 자신이었다면, 그러한 대답을 괘씸히 여기고 끊임없이 의심하는 게 마땅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카셀은 여자를 적대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당당히도 그런 말을 내뱉는 여자에게서 좀처럼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널 돕는 것이 아니라, 내 목적 때문이라고.
자신에게 접근하는 정체 모를 힘을 가진 인간들과는 달리 퍽 얄미운 소리를 지껄이는 모습이, 얼굴이.
어쩐지 눈이 부셔서.
‘……하.’
카셀은 소리 없이 새어 나오는 신음을 억눌렀다.
비록 방식이 색달라 눈길을 끌었지만, 그녀 또한 어느 순간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리라.
그래서 카셀은 호기심에 여자의 자취를 뒤쫓으면서도 아무런 기대를 품지 않았다.
자신의 손아귀에서 유령처럼 빠져나가고 또 유령처럼 나타나도.
누구보다 강한 힘으로 마물을 없애도,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과거의 동료들을 구해도.
이제 와 그런 것에 일일이 희망을 걸기에 카셀은 이미 너무 많이 마모된 상태였다.
수백, 수천 번의 회귀 동안 동료들은 그를 위해 마물과 싸우다 죽었다.
그런 동료들을 살리기 위해 그 또한 수백, 수천 번 죽었다.
그 끔찍한 일을 겪었음에도, 다시 눈을 뜨면 아무도 카셀을 기억하지 못했다.
그는 점점 타인과 자신의 죽음에 무감각해졌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뭘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이 지옥의 끝이 과연, 존재하는 건지조차…….
그런데.
“여기서 빠져나갈 방법은 희생과 헌신이었어요, 전하.”
허탈하게 중얼거리는 여자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가슴이 발끝까지 내려앉았다.
여기서 빠져나가지 못하고 이대로 이번 생을 마감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며 포기할 즈음이었다.
“죄책감 갖지 마세요. 저도 나가려고 이러는 거니까.”
카셀은 본능적으로 알았다.
여기서 빠져나가기 위해, 여자가 모종의 방법을 찾았으나 그게 썩 좋지 않은 방향이라는 것을.
헤일리에서처럼, 눈앞을 가리는 여자의 손이 그 추측을 확신으로 바꾸어주었다.
“이거…… 사리…… 송…….”
카셀은 이를 악물고 필사적으로 여자의 손을 잡아채려 노력했다.
‘하지 마, 뭐든.’
허리춤의 검을 빼 드는 그녀의 손을 잡고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빌어먹을, 포션 중독에 잠식된 몸이 좀처럼 움직이질 않았다.
이번 생에는 재앙을 빨리 끝내버릴 요량으로 아무렇게나 들이켰던 게 이렇게 발목을 잡을 줄이야.
“이번에 잠들면 깨우지 마, 사리 송”
“…….”
“죽고 싶어질 거 같거든.”
‘내가, 죽고 싶어질 것 같다고 해서 그래? 그런 말을 해서 날 동정하는 건가?’
그러나 설령 이대로 죽어 버린들, 그게 이 여자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건 모두 자신이 감내해야 할 몫이었다.
자신의 저주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었으니까.
‘그냥 해 본 소리였어.’
네가 내 저주를 알아주는 것 같아서.
아직도 개소리를 하냐며, 눈을 흘기는 모습이…… 어여뻐서.
그러니까 빌어먹을, 희생과 헌신이 뭐든 여자가 아닌 자신이 행해야 하는 일이란 뜻이다.
머리 한구석을 선득하게 만드는 불길함에, 카셀은 여전히 제 눈을 가리고 있는 여자를 연신 불렀다.
“사리, 송…….”
아니.
“샤…… 리…….”
샤리 아즈라엘.
‘알려주면 내가 할 테니까, 검 내려놔.’
하지만 그 말을 채 내뱉기도 전에, 보드라운 감촉이 그의 입술 위를 덮었다.
촉-
감질날 만큼 짧게 입을 맞추고, 금세 멀어진 여자가 작게 속삭였다.
“……잠에서 깨면, 사리 송은, 그냥 원래부터 없었던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잊어버리세요.”
그리고.
푸욱―
곧장 이어 들리는 소리에 카셀은 머릿속이 하얘지는 것을 느꼈다.
익숙한 소리였다. 날카로운 것이 여리고 연약한 살을 헤집는 소리.
“으…….”
미약한 신음과 함께, 마침내 그의 눈을 내내 가리고 있던 여자의 손이 떨어져 나갔다.
그리고 그의 앞에 펼쳐진 광경은, 일순 시야가 붉게 명멸할 정도의 아찔한 피의 향연이었다.
스스로 검으로 제 몸을 찌른 여자는 보라색 눈을 고통스럽게 찌푸린 채였다.
뚝, 뚝…….
검날에 꿰뚫린 곳에서 피가 줄줄 새어 나왔다.
카셀은 힘이 들어가지 않는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생각대로 움직이지 않는 몸을 두들겨 패서라도 일깨우고 싶었다.
여자의 피가 흘러내려 점차 바닥 위로 넓게 퍼져나갔다.
그리고 그 피가 닿은 부분은 희미한 빛을 뿜어낸 뒤 사라졌다.
사라진 공간 너머로 보이는 것은, 동틀 녘의 호숫가였다.
피가 점점 퍼지면서 바닥에 사람 한 명은 거뜬히 지날 수 있는 균열이 생겼다.
여자의 말이 맞았다. 빠져나갈 방법을 찾아낸 것이다. 정말이지, 최악의 방법이었다.
카셀은 바로 균열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조금씩 형태가 사라지는 여자에게 온통 시선을 빼앗긴 상태였기 때문이다.
“……안, 돼.”
넋을 놓고 있던 그의 붉은 눈에 번뜩 광채가 서렸다.
그는 일순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여 손을 뻗었다.
나풀거리는 사랑스러운 분홍색 머리칼을 가득 움켜쥐었다.
그러나 여자의 머리칼은 흘러내리는 모래처럼 손에서 쉬이 사라졌다.
헤일리의 첨탑에서도 목격했던 일이다. 암시장에서도, 경기장의 옥상에서도…….
얼마 뒤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예상치 못한 장소에서 뻔뻔하게 다시 나타날 것을 아는데도.
그런데도 꿈결처럼 사라지는 여자를 보고 있자, 카셀은 문득 두려워졌다.
‘다시 돌아올 거지?’
사라진 여자의 자취를 간절히 좇으며, 카셀은 초조하게 생각했다.
아주 오랜만에 느끼는 감정에, 그는 속절없이 흔들렸다.
접근한 이방인들이나 아끼던 동료들, 부하들이 죽거나 소리 없이 사라지는 것은 이미 수백, 수천 번 겪었다.
닳고 닳은 감각으로는 더 느낄 감흥도 없건만…….
카셀은 그녀를 붙들고 당장 묻고 싶었다.
‘다시 돌아올 거라 말해. 이대로 끝이 아니라고.’
네 목적을 위해 멸망을 막기로 했잖아.
카셀은 여자의 집념을 믿었다. 보랏빛 눈동자에 새겨진 강한 의지 또한.
하지만 이번에는 여자가 이대로 죽어버리면.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면…….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하지?
한 번도 겪어 본 적 없는 감정에 카셀은 풍랑을 맞은 나그네처럼 정처 없이 휩쓸렸다.
그때였다.
“……전하!”
누군가 다급히 그를 불렀다.
“전하를 꺼내라! 어서!”
이어서 여러 발자국 소리가 쏟아지더니, 카셀은 균열 속에서 강제로 꺼내졌다.
키메라에게 물린 채 사라진 황태자를 찾아 호숫가를 수색하던 수하들이었다.
느닷없이 나타난 균열을 제일 먼저 발견한 것은 아담 헤일리였다.
“전하, 괜찮으십니까?”
바라던 보랏빛 눈동자 대신, 지긋지긋한 푸른 눈동자가 시야를 메웠다.
카셀은 벌써 수백 번째 마주하고, 제 눈앞에서 죽고, 그럼에도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는, 첫 번째 동료를 아득 부여잡고 읊조렸다.
“중화, 제…….”
“…….”
“당장…….”
당장 포션 중화제를 가져오라는 말을 하려 했으나, 간신히 버티던 의식이 기어이 끊겼다.
당황으로 물드는 아담 헤일리의 얼굴을 뒤로 한 채 카셀은 눈을 감았다.
까마득한 심연에 잠긴 그는 마침내 깨달았다.
자신이 왜 여자에게 이런 감정을 느끼게 됐는지를.
생의 반복을 거듭하는 지난한 시간 동안, 아무도 그를 기억하지 못했다.
아무도 알지 못했다.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는 저주를.
“어차피 전하께서는 이번이 아니어도 다시 살아나서 마룡을 처치할 수 있지 않습니까.”
지나간 어느 삶에서의 아담이 말했다.
처음으로 회귀에 대한 비밀을 동료들에게 털어놓았을 때였다.
죽음을 목전에 앞둔 동료들은 카셀을 원망하고 또 부러워했다.
“전하께서는 다 겪어봤으니 이것도 시시하게 느껴지겠죠.”
“포기하지 마세요. 그래도 카셀에겐 기회가 또 있잖아요.”
“그래. 이번에 죽어도 뭐, 리셋하고 다시 하면 되지.”
일레인 그리셀다도, 니세도, 성녀도, 이방인마저 입을 모아 그렇게 말했다.
모두가 그의 실패와 죽음을 별거 아니라 치부했고, 카셀 또한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 이번 생이 안 되면, 다음 생에서 다시 하면 되니까.
“……전하. 제가 드디어 빠져나갈 방법을 찾았어요.”
하지만 여자는 여타 이방인들과 같은 말을 입에 담지 않았다.
곧 죽어버릴지 모르는 답 없는 상황 속에서도,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생각해 보면 언제나 그랬다.
헤일리에서 봉인 마물을 혼자 상대할 때도. 암시장에서 암흑단의 보스를, 토너먼트 개최식에서 교황과 마물을 홀로 상대할 때에도.
그런 여자를 볼 때면, 까마득한 옛적에 잃어버렸던 삶에 대한 욕구가,
이 지옥을 끝낼 수 있다는 희망이 되살아나곤 했다.
돌이켜보면 그 때문이었을지 모른다.
자신답지 않게, 유달리 여자의 정체를 집요하게 파헤치고, 거듭 생각하기 시작한 이유는.
“……죄송한데, 깨우지 말라는 말은 못 들어 드릴 것 같아요.”
“그러니까…… 못 들어 줬다고, 저를 너무 미워하지는 마세요.”
넌 다시 하면 되지 않느냐는 말은 들어봤어도, 원하는 것을 들어주지 못해서 미안하단 말을 들어 본 적 또한 없었다.
마치 다신 잠에서 깨고 싶지 않다는 자신의 마음을 여자는 모두 이해하고 있는 듯했다.
그래서 놓칠 수 없었다.
무슨 목적으로 자신에게 접근했든, 무슨 속내를 숨기고 있든.
수백 번째 반복돼 특별할 게 없는 삶을 처음으로 가치 있게 여겨준 여자.
어디에서든 빛나는 샤리 아즈라엘을,
놓을 수 있을 리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