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하…… 도착했어.”
드디어, 그 빌어먹을 리르 놈의 서고에서 빠져나온 것이다.
포션 병들이 늘어서 있는 익숙한 가판대를 보자 그제야 몸에 바짝 들어가 있던 힘이 쑥 풀렸다.
철커덩―!
그와 동시에 묵직한 쇳소리가 울려 퍼졌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내리자, 땅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묵직한 대검이 보였다.
[S급 바스타드 소드]
카셀의 검이었다.
자동 소환으로 인하여 몸이 원상복구 되면서 몸에 꽂은 검 또한 자연히 뽑혀 나온 듯했다.
그러나 내 전용 무기가 아니어선지, 검이 온전히 원상복구 된 것은 아니었다.
“으으…….”
검날에 흥건히 묻어 있는 핏물을 본 나는 부르르 몸을 떨며 배 부근을 손으로 더듬었다.
날카롭고 차가운 저 검날이 배에 쑤셔 박히는 선득한 감각이 아직도 생생했다.
‘망겜 주제에, 감각 구현은 왜 이렇게 잘되어 있는 거냐고!’
그나마 통각 구현은 제한되어서 다행이라면 다행인 걸까.
조금 전에는 내가 진짜로 좀 미친 모양이다.
‘내 손으로 내 배에 칼을 쑤셔 박는 지경까지 오다니…….’
정말이지, 이제 남주 놈이 뒤지든 말든 두 번은 못 해 먹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도 검으로 인해 심한 타격을 입은 몸은 완벽히 복구된 상태였다.
아슬아슬하게 1만 남았던 HP 창 또한 마찬가지였다.
‘강제 소환 만만세.’
이 망겜에서 극히 드문 NPC 버프를 찬양하며 한시름 돌릴 무렵이었다.
털썩.
“샤리……?”
문득 들려 온 부름에 나는 휙 고개를 돌렸다.
입을 떡 벌린 채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엘프 한 명이 보였다. 일레인의 누나인 엘레나였다.
가게 문을 열기 위한 준비를 하던 중이었는지, 그녀의 발밑에는 놓쳐 버린 건초들이 즐비했다.
“……또, 또 보네요, 엘레나.”
나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인사를 건넸다.
근 하루만에 다시 보는 그녀였으나, 왜인지 무척 오랜만에 보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내 인사에도, 엘레나의 눈은 내게로 향하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내린 나는, 바닥을 나뒹굴고 있는 피 묻은 검신에 몹시 난감해졌다.
“아, 그게, 이건 그러니까…….”
“호, 혹시…….”
‘꿀꺽’ 하고 마른 침을 한 번 삼킨 엘레나가, 이내 비장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수, 수도에서 암살을…… 으, 은신과 증거 인멸이 필요할까요? 바로 준비하도록…….”
“아니요! 그런 거 아니에요!”
황당한 물음에 나는 빽 소리를 지르며 부정했다.
암살은 무슨! 이 피는 제 피라고요……!
“그럼 왜 검에 피가…….”
그러나 걱정이 가득 내려앉아 있는 엘프의 면전에 차마 그런 말을 할 수 없었다.
곧 그녀 외에 루시를 비롯한 다른 엘프들도 마주해야 할 터.
내 피라고 하면 괜한 공포감만 조성할 게 뻔했다.
“……일레인을 도와서 마물을 처치하다 온 거예요.”
나는 결국 그렇게 얼버무릴 수밖에 없었다.
* * *
전투를 하고 왔다는 말에 엘레나는 내게 휴식을 권했으나, 그럴 시간이 없었다.
“헤일리에 좀 갔다 올게요.”
나는 피 묻은 검을 그녀에게 맡긴 채 곧장 길을 떠났다.
그리고 [헤일리 백작 저] 근처의 필드에 도착하자마자 서둘러 필요한 재료들을 긁어모았다.
“섬멸.”
“끼에에에엑―!”
「[라타니아 숲의 비명] 100개를 획득했습니다.」
「[악마종 열매] 100개를 획득했습니다.」
불면 포션으로 인한 중독이었기에, 중화제에도 당연히 불면 포션의 재료가 일부 들어갔다.
그 재료들을 가지고 다시 상점으로 돌아온 나는 정신없이 [포션 중독 중화제]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엘프들이 열심히 가꿔둔 약초들이 많아서 대량 생산에 어려움은 없었다.
“샤리. 대체 뭘 하려고 이렇게 많이 만들었어요?”
“우와! 샤리 온니 체고!”
짧은 시간 동안 내가 만들어 낸 중화제의 수를 보고 엘프들이 기함했다.
“죄송한데 저 급해서 다시 가 볼게요.
나는 엘프들에게 웃는 둥 마는 둥 한 채로, 중화제들만 챙겨 떠날 채비를 했다.
솔직히 너무 초조한 나머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황궁, 아니 수도 전체에 믿을 만한 자가 없었다.”
진담인지, 농담인지는 모르겠으나 카셀이 한 말이 끊임없이 귓가에 맴돌았다.
그 뒤에 이어진 말을 생각하면 거절한 나를 괘씸히 여기고 그냥 농담 삼아 한 말 같기도 했지만…….
‘농담이었으면, 몸이 그 지경이 될 때까지 가만 놔두지 않았겠지.’
그의 몸 상태를 황제가 꿰뚫고 있을 리도 없었을 테고 말이다.
분명 궁의가 카셀의 병명을 황제에게 소상히 전했으리라.
서고에서 빠져나오기 직전, 마지막으로 본 카셀의 상태는 썩 좋아 보이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는 시시각각 죽어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황제가 또 불면 포션을 쓰려 들지도 몰라.’
그 생각에 미치자, 미칠듯한 불안감이 머릿속을 엄습했다.
나는 이동 스크롤을 쓰기 위해 정신없이 상점을 나섰다.
그때였다.
“……리! 샤리!”
다급히 나를 붙드는 손길이 느껴졌다.
“아, 엘레나.”
“왜 이렇게 정신이 없어 보여요? 온 지 두 시간도 안 됐는데……. 많이 급한 일이에요?”
의아함이 담겨 있는 밀빛 눈동자에 잠깐 나갔던 정신이 돌아왔다.
그러고 보니 황궁에 빨리 돌아가야 할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그녀의 남동생을 여태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단 것을 깨달은 나는 숙연해진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빨리 가보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아무리 급해도 그렇지, 그 꼴로 황궁에 들어가려고요?”
“아…….”
그녀의 지적에 나는 그제야 내 모습을 돌아봤다. 그리고 곧장 경악했다.
‘미친!’
얼마나 정신이 없었는지, 화려하고 샤랄라한 마법 소녀 코스튬 복장을 한 채로 돌아다니고 있었다.
소리 없는 비명을 삼키고 있을 때, 엘레나가 내게 무언가를 내밀었다.
“이거, 얼른 입어요.”
[중급 엘프들이 제작한 로브]
엊저녁에 받은 것과 똑같은 로브에 문득 코끝이 시큰해졌다.
멀쩡히 입고 간 로브를 어떻게 해버리고는 아무 말도 안 하는 내게 분명 서운했을 법도 한데.
엘레나의 세심한 배려에 죄책감이 들었다.
카셀 놈에게 입혀준 내 아까운 로브를 떠올리며 나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미안해요. 전에 준 로브는…….”
“그런 건 신경 쓰지 말고요. 그리고 저 검도 챙겨 놨어요.”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나를 다독인 엘레나가 이어서 상점의 입구 쪽을 가리켰다.
그사이 핏물을 말끔히 닦아 낸 카셀의 검이 비스듬히 세워져 있었다.
그녀와 다른 엘프들의 순발력과 센스에 감탄하는 한편, 저 검을 어떻게 할지 고민이 들었다.
내겐 검과 같은 무기는 딱히 필요 없었다.
높은 등급의 무기이니 팔면 돈 좀 되겠지만, 그러기엔 영 찝찝했다.
카셀 놈이라면 분명 검을 찾는다는 핑계로 판매자의 자취를 쫓을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러면 내가 ‘도버 마을의 약재상’과 동일 인물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는 것은 한순간일 것이다.
‘안 되지! 어떻게 그 망할 서고에서 빠져나왔는데……!’
희생하겠답시고 ‘사리 송’을 죽여 놓고 멀쩡히 살아 돌아다니는 꼴을 들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건 내게 죽지 않는 버프가 있다는 것을 들키는 것과 진배없었다.
“샤리, 괜찮아요?”
일순간 창백한 낯으로 고개를 휘젓는 내가 이상했는지, 엘레나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네, 괜찮아요. 챙겨줘서 고마워요, 엘레나!”
나는 그녀에게 진심을 다해 그렇게 외치고는 서둘러 검을 인벤토리에 처박았다.
‘이 검은 로브 대신…… 아니, 루미에카르 대신 내가 잘 써주마.’
나는 그렇게 되뇌며, 황궁으로 갈 채비를 완전히 마쳤다.
* * *
이동 스크롤을 통해 황궁 앞 골목에 도착했을 무렵, 어느덧 새벽 여명이 가시고 완전히 동이 텄다.
나는 우선 몸을 숨긴 채 성문 앞의 동태를 살폈다.
중화제를 만드느라 정신없이 바쁜 나머지, 제작자 놈들에게 채팅을 거는 것도 잊고 있었다.
‘성공했겠지……?’
설마. 나만 강제 소환으로 빠져나오고, 카셀은 아직까지 서고에 갇혀 있는 건 아닐까.
싸한 감각이 전신을 훑었다. 이제라도 채팅으로 카셀을 빼내 달라 닦달해야 하나 싶던 찰나.
골목 너머로 황궁 입구에 살벌하게도 서 있는 검은 갑옷의 기사들이 보였다.
나는 그제야 안도할 수 있었다.
‘……정답이었어.’
내 배에 스스로 칼을 꽂는 미친 짓을 통해, 카셀도 그 망할 서고에서 빠져나온 것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다면 토너먼트 참여자들을 감시해야 할 그의 수행 기사들이 모조리 몰려와 있을 이유가 없었다.
안도와는 별개로, 나는 조금 무거운 눈으로 검은 갑옷의 기사들을 바라보았다.
평소와는 달리, 기사들이 입구에 저렇게 삼엄하게 진을 치고 있는 이유는 간단했다.
황궁 안이 비상사태이기 때문이다.
‘……카셀이 여전히 사경을 헤매고 있단 소리겠지.’
그것을 안 나는 지체하지 않고 골목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번에는 통신 수정구로 일레인을 불러낼 수도, 소인화 포션으로 은밀히 들어갈 수도 없었다.
“누군데 황궁 근처에서 얼쩡거리는 거지? 신원을 밝혀라!”
다가가자마자 검을 들이미는 기사들에게 신원을 밝혀야 했기에.
“큼, 흠.”
나는 잠시 목을 가다듬은 후, 최대한 명령한 음성으로 말했다.
음침하게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는, 마녀 같다는 이유로 쫓겨나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안녕하세요? 저는 약재상 샤리 아즈라엘입니다.”
“약재상……?”
“예. 헤일리 백작님의 부름을 받아 황태자 전하를 치료하러 왔습니다.”
“단장님의 부름을 받고 왔다고?”
아담과 헤일리를 동시에 언급하자 역시나 기사들이 동요했다.
“하지만 백작님께서 오늘 새벽 친히 치료사를 찾으러 가신 걸로 아는데.”
그래도 멍청한 AI들로만 구성된 것은 아닌지, 기사들 중 한 명이 의심스럽다는 눈빛을 보냈다.
시뻘건 눈깔을 가진 놈 앞에서도 밥 먹듯이 거짓말을 한 내게, 이런 피라미들의 눈초리 따윈 아무것도 아니었다.
나는 침착하게 대꾸했다.
“백작님께서는 토너먼트로 인하여 급히 일이 생기는 바람에 저를 먼저 보내셨습니다.”
“따로 전달받은 소식은 없었다. 이봐, 너는 있나?”
당연하게도 기사들이 너도, 나도 고개를 저었다.
“그야 제게 전하라고 하셨으니까요? 그런데, 듣기로는 꽤 급박한 상황이라던데…… 이렇게 문 앞에서 실랑이나 하고 있어도 되나요?”
“이, 이보게! 일단 들여보내자고!”
마지막 말에 개중 상급자로 보이는 사람이 다급히 외쳤다.
상황이 어지간히도 급하긴 급한 모양이었다.
무슨 요새라도 막듯 겹겹이 붙어 서 있던 기사들이 그제야 주춤주춤 길을 터주었다.
‘빨리 문이나 여시지.’
초조한 마음을 애써 내리누르며, 굳게 걸어 닫힌 문이 열리길 기다릴 때였다.
“무슨 일이지?”
불현듯 익숙하고도 불길한 목소리가 뒤에서 울려 퍼졌다.
“단장님! 오셨습니까!”
일사불란하게 길을 터주던 기사들이 일제히 걸음을 멈추고 경례했다.
나는 돌아가지 않는 목을 가까스로 돌려 뒤를 확인했다.
백금발의 훤칠한 남자가 막 마차에서 내려서고 있었다.
[아담 헤일리 백작]
……X발. 타이밍 한 번 죽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