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전에 미쳐 있다니.
놈이 지껄이는 말을 가만히 듣고 있자 관자놀이에 ‘빠직’ 하고 힘줄이 솟았다.
그러나 아담으로서는 이런 내가 의아할 만도 했다.
카셀이 죽어가던 그 순간 내가 바로 옆에 있었다는 걸 꿈에도 모를 테니.
하지만 남주가 죽어서 게임이 망할지도 모르는 마당에 어떤 유저라고 나처럼 행동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그게 아니더라도…….
‘그게 아니더라도, 뭐!’
나는 재빠르게 고개를 저어 서고에서 느꼈던, 심장이 덜컥이는 감각들을 털어냈다.
지금은 그딴 나약한 감상에 젖어 있을 때가 아니었다.
“……높으신 분들이니 어련히 알아서 두둑히 챙겨주실 거라 믿습니다.”
“…….”
“설마, 위대하신 백작님께서 한낱 노예 출신 용사에게 속아 넘어간 불쌍한 영지민의 주머니를 터시려고요.”
결국 아담의 생각에 장단을 맞춰 답하자, 그의 얼굴에서 그제야 의아함이 조금 가셨다.
「[아담 헤일리]가 당신의 자본주의에 감탄합니다.」
「[아담 헤일리]가 당신의 지능을 전보다 약간 더 높게 평가합니다.」
‘그래. 맘껏 폄하해라, 해,’
떠오르는 시스템 창에 이제 더 화도 나지 않았다.
“하나만 더 묻지.”
제발 그만 물어봐.
머리로는 사람 하나 쉽게 수전노로 만들어 놓고 있으면서, 놈은 낯빛 하나 바꾸지 않은 채 지껄였다.
“수도에 있는 약재상들이 모두 자취를 감췄더군. 이미 한참 전에 일어난 일이라, 아픈 자들이 타지역까지 가서 포션을 구매하고 있다는데…….”
“…….”
“혹시 이에 대해 아는 게 있나?”
“네? 저는 전혀 모르는 일…….”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던 나는 별안간 입을 텁 다물었다.
‘맞다.’
까맣게 잊고 있었던 기억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 나 : 이교도 습격도 없으면, 대체 무슨 수로 성녀랑 엮이냐고요!!!
― [GM아리] : 수도의 약재상 NPC를 모두 해제하겠습니다.ㅠ
성녀에게 고용되기 위해, 수도의 모든 약재상 NPC를 해제시킨 것을…….
그 때문에 카셀과 아담이 포션 중화제를 구하는 데 난항을 겪은 듯했다.
‘망할 제작자 놈들. 눈치껏 제자리로 돌려놔야 할 거 아니야!’
흠칫하는 내가 퍽 이상했는지, 푸른 눈에 점점 의심이 서리기 시작했다.
“저, 저는 정말 모르는 일입니다. 수도에 아는 약재상은 없어서요. 하하…….”
하는 수 없이 나는 모르는 척 박박 우겼다.
어쩌면 중화제를 만드는 것은 처음부터 내 몫이었는지도 모르겠단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그렇군.”
다행히 아담은 더 의심하지 않았다.
그는 이내 앞에 있는 기사들을 불러 중화제가 담긴 주머니와 약재들을 건넸다.
황제 쪽 근위병들이 볼 수 없도록 사람들로 둘러싸여 안전하게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약들을 보며 나는 한시름 내려놓았다.
‘직접 먹일 수 있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
황제가 영 불안했지만, 지금으로서는 아담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만들어 온 것을 모두 건넸음에도, 왜인지 아담은 자리를 뜨지 않았다.
의아하다는 듯 바라보자, 그가 슬쩍 내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약재상을 찾으러 타지까지 갈 뻔했는데, 덕분에 수고를 덜게 됐군.”
놀랍게도 내 공을 치하하는 말이었다.
“예……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입니다.”
실컷 의심당하고 엎드려 절 받는 수준이기에, 나는 떨떠름하게 답했다.
그러자 아담이 되물었다.
“따로 원하는 게 있나?”
“원하는 것이요?”
“그래. 전하께서 정신을 차리시면 당연히 상을 내리시겠지만, 나 또한 수고를 덜게 됐으니 사례하도록 하지.”
“아…… 아닙니다. 백작님의 사례는 괜찮습니다.”
나도 양심이라는 게 있는 사람이라 적당히 거절했다.
“그러지 말고 편히 말해 보지. 금화 좋아하잖나.”
하지만 아담은 굴하지 않고 재차 권했다.
금화라는 말에 조금 솔깃한 순간, 번뜩 잊고 있던 인물이 떠올랐다.
‘맞다, 일레인!’
카셀이 해결됐으니 그래도 내 유일한 파티원을 챙길 때였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 일레인 또한 좋은 상태는 아니었으니.
“사례는 정말 괜찮습니다. 저는 이만 제 고용주님께 가보겠습니다!”
지금으로서 일레인이 있을 만한 곳은 던전 앞 천막뿐이었다.
황급히 그쪽을 향해 달려가려던 찰나.
“초록 머리 놈을 말하는 거라면 그쪽에 없다.”
뒤에서 들리는 나지막한 음성에 우뚝 걸음을 멈춰야 했다.
“네? 그럼 어디 있어요?”
“……따라와.”
그 말을 툭 내뱉은 아담이 길 안내라도 해주려는 듯 몸을 돌렸다.
오늘 놈 때문에 여러 번 놀라는 것 같았다.
‘……할 짓이 없나?’
내가 중화제를 빨리 갖다 준 덕분에 시간이 남아도는지, 황송하게도 직접 길 안내까지 해주고 말이다.
‘그럴 리가 없을 텐데.’
왜냐하면, 이제 토너먼트 막바지라 모든 참가자들이 저마다 사력을 다해 점수를 올리려 밤낮없이 던전을 돌기 때문이다.
남은 토너먼트 기간을 떠올리던 나는 몹시도 착잡해졌다.
3일.
그 안에 키메라를 잡지 못하면 기본 규칙을 충족하지 못해서 탈락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었다.
초조한 마음으로 아담의 뒤를 따라 얼마쯤 걸었을까.
다행히 일레인은 황태자 궁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었다.
[황궁 지하 감옥]
“여, 여기에 왜…….”
생소한 건물 이름에 당황하는 것도 잠시.
나는 말없이 계단을 타고 지하로 내려가는 아담을 쫓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감옥의 가장 끄트머리 방에 갇혀 있는 초록 머리를 목도할 수 있었다.
“일레인!”
처량하게 쭈그려 앉아 있던 일레인이 내 부름 소리에 고개를 쳐들었다.
“누나……!”
이어서 놈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쇠창살로 뛰어왔다.
고작 하룻밤 갇혀 있었을 뿐인데 그새 꼬질꼬질해진 몰골을 보니, 마음이 좀 찡해졌다.
“일레인. 너 괜찮아? 몸은…….”
“아니, 누나 진짜 너무한 거 아니에요?!”
나름 감동적인 재회라 생각했던 순간은 일레인이 입을 연 지 1초도 지나지 않아 깨졌다.
한달음에 쇠창살 앞까지 도달한 그가 별안간 내게 삿대질을 하며 성토했다.
“어떻게 저만 그렇게 패대기쳐 두고 황태자 따라서 갈 수…… 웁웁!”
눈이 뒤집힌 채 마구 따지고 드는 모습에 나는 소리 없이 경악하며 서둘러 놈의 입을 틀어막았다.
‘이 새끼가 미쳤…… 아니, 그보다 대체 언제 깨어 있었던 거야?!’
분명 마지막에 봤을 때만 해도 정신을 잃은 상태였건만.
내가 저를 버리고, 키메라에 물려 가는 카셀을 쫓아가는 것을 똑똑히 목격한 모양이었다.
일레인은 무슨 연인의 바람피운 현장을 목격한 사람처럼 아주 치를 떨며 발악했다.
“우으! 배시자! 어더케 나하테…… 우웁!”
안 되겠다. 손만으로는 이놈의 입을 틀어막을 수 없었다.
나는 뒤에 있는 아담의 눈치를 보며 철창에 바짝 섰다.
그리고, 퍽! 퍽!
“하하하! 우리 용사님이 약 먹을 시간이 지나서 또 헛소리를 하시나 봅니다!”
“억.”
주먹으로 명치를 두어 대 다스려주자, 그제야 일레인이 입을 다물었다.
천천히 이성을 되찾아 가는 밀빛 눈동자를 보며, 나는 서둘러 포션 병을 꺼냈다.
“드세요. 입은 다무시고요.”
[S급 힐링 포션]
[S급 체력 포션]
병 주고 약 주는 거냐며.
일레인은 퍽 억울한 얼굴로 나를 노려보았지만, 곧 제정신을 차린 듯 얌전히 병들을 받아들였다.
그가 두 개의 포션을 먹는 동안, 나는 뒤를 돌아 고요히 우리를 관망하고 있던 아담에게 다가갔다.
다행히 어느 정도 거리가 떨어져 있어선지, 그가 우리 대화를 자세히 들은 것 같지는 않았다.
그를 방증하듯 떠오르는 시스템 창은 없었다.
그에 힘입어 나는 일레인을 대신해 따져 물었다.
“……저희 고용주님께서 왜 여기 갇혀 계시는 거죠?”
“고용주나 고용인이나 똑같은 소릴 하는군.”
아담이 다소 껄끄러운 표정으로 답했다.
“황족 시해와 관련된 일이다. 당연히 그 자리에 있던 자들을 모두 용의 선상에 두고 심문할 수밖에.”
“……정신을 잃어가는 와중에도 황태자 전하의 상태가 심상치 않다고 제게 연락한 사람을요?”
물론 그런 일은 없었지만, 나는 부러 큰 소리로 말했다.
일레인 들으라고 한 소리긴 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황태자를 시해하려 든 범인은 너무나도 명백하지 않은가.
아무리 그 상황을 보지 못했다고 한들 아담이 그것을 모를 리 없었다.
일레인이 갇혀 있으면 키메라를 잡을 수 없다는 생각에, 나는 다급히 입을 열었다.
“아까 제게 원하는 게 있냐고 물으셨죠?”
“…….”
“제 고용주님은 죄가 없으니 당장 풀어 주십쇼. 그게 제가 원하는 사례입니다.”
“그건…….”
내가 이렇게까지 나올 줄은 몰랐는지, 아담이 드물게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불가능하다. 전하께서 깨어나서 직접 증언하시기 전까진 용의자를 함부로 풀어줄 수 없다. 게다가 그는 도주 우려가 매우 큰 전적을 가지고 있는 자이지.”
“소지품도 다 빼앗겼는데 황궁에서 어떻게 도주를 합니까?”
일레인이 아무리 날고 기는 도적이라고 한들, ‘벨리세르의 눈동자’도 없이 삼엄한 황궁을 탈출할 수 없었다.
그 생각에 나는 아담이 채 대꾸할 틈을 주지 않고, 마구 말을 쏟아냈다.
“토너먼트 기한이 채 3일도 남지 않은 것 아시지 않습니까? 규칙 위반도 하지 않은 참가자를 가둬두는 건 부당한 처삽니다. 도주가 우려되면 차라리 던전에 감시를 붙이시든가요!”
말하다 보니 분노가 치밀어서 나도 모르게 열변을 토해낸 듯했다.
아담이 황당한 듯 눈을 끔뻑이며 나를 응시했다.
「[아담 헤일리]가 당신의 분노에 당황합니다.」
「[일레인 그리셀다]가 당신에게 깊은 감동을 느낍니다.」
덩달아 떠오른 시스템 창에 머리에 차오른 뜨거운 열기가 푸시식 식었다.
토너먼트 기한을 허무하게 날려 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너무 흥분했다.
거칠어진 숨을 가라앉히고 있는데, 아담이 얼떨떨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사이가…… 꽤 각별한 모양이군.”
뒤늦게 내 일도 아닌, 남 일에 이렇게 성토를 하는 게 퍽 이상해 보일 수 있겠단 자각이 들었다.
“고용주님은 사실…… 제, 제 절……친한 친구입니다.”
결국 나는 또 그 핑계를 댈 수밖에 없었다.
그 말에 아담의 눈이 잠시 커졌다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랬군.”
그가 잠시 틈을 두다가 덧붙였다.
“어떤 사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으나, 저자는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믿음직스러운 자는 아니다.”
“저기요! 앞담하십니까? 그쪽도 만만치 않거든요?!”
애석하게도 아담의 말이 들렸는지 일레인이 철창 사이로 버럭 소리쳤다.
저를 욕하는 소리에도 아담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너는 저자가 토너먼트에서 1등을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
“순위는 중요한 게 아닙니다, 백작님.”
“그럼 뭐가 중요하지?”
“토너먼트에 임하는 마음이 더 중요하죠.”
“토너먼트에 임하는 마음?”
“네. 상금이든, 뭐든, 마물로부터 사람들을 지키고 싶은 마음은 모두 같을 테니 수도까지 한달음에 달려와 참여한 게 아니겠습니까?”
아담이 왜 이런 질문을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나는 본능적으로 이것이 기회라는 것을 알았다.
“제 고용주님께는 딸린 식구가 많습니다. 이제 고작 세 살 먹은 조카에, 피를 나눈 형제들에, 얼마 전에 황태자 전하의 도움으로 암시장에서 탈출한 이종족들까지 더하면 셀 수 없지요.”
“…….”
“백작님께서 제 고용주의 인성을 낮게 평가하시는 것은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토너먼트에 임하는 마음마저 우습게 여기지는 마십시오.”
나는 고개를 들어 푸른 눈을 정면으로 마주했다.
내가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데.
망할 놈의 황태자가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 마당에, 손 하나 까딱 못 하고 탈락할 수는 없지!
“…….”
한동안 우리 사이에 소름 끼치는 정적이 내려앉았다.
분명 후드에 가려져 내 얼굴이 보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아담은 나를 똑똑히 바라보며 대치했다.
그렇게 눈싸움을 한 지 얼마쯤 지났을까.
“……그린 마스크를 풀어줘라.”
마침내 그의 입에서 내가 바라는 답이 떨어졌다.
있는 줄도 몰랐던 간수가 화들짝 놀라 그를 만류했다.
“하, 하지만 단장님! 아직 놈의 심문이 끝나지 않았습니다만…….”
“그만. 지금부터 문제가 생긴다면.”
간수에게 향했던 아담이 다시 몸을 돌려 나를 흘끔 보았다.
“내가 책임지지.”
그 순간이었다.
「[일레인 그리셀다]가 당신에게 일정 수준 이상의 호감을 느낍니다.」
「[아담 헤일리]가 당신에게 일정 수준 이상의 호감을 느낍니다.」
떠오른 시스템 창을 본 나는, 정말이지 이놈의 게임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