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담의 도움으로 나와 일레인은 무사히 던전 앞 천막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다만, 일레인의 필살기나 다름없는 ‘벨리세르의 눈동자’를 비롯한 소지품은 돌려받을 수 없었다.
혹시 모를 도주의 가능성을 원천 차단하기 위함이었다.
천만 다행히도 키메라를 잡는 데 ‘벨리세르의 눈동자’는 필요 없었다.
소식을 전해 들은 일레인이 잔뜩 찌푸려진 얼굴로 불만을 토해냈다.
“그딴 거 없어도 황궁 탈출하는 것쯤이야 식은 죽 먹기라고.”
“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내가 분명 나 올 때까지 황제가 찾아와도 따라가지 말라고 했지?”
천막까지 수송해준 기사들이 떠난 것을 확인한 나는 곧장 입을 열었다.
솔직히 안 봐도 뻔한 일이었으나, 그래도 확인은 해야 할 것 같아 물은 것이었다.
“따라간 게 아니라, 마법사 놈들 때문에……!”
예상대로 일레인이 분개하며 반박했다.
그러나 곧 말을 멈춘 그가 내게서 휙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그건 이쪽에서 물어야 하는 거 아닌가? 사람이 죽든 말든 가차 없이 버리고 간 인간이 역으로 따지고 드네.”
아직도 기분이 덜 풀렸는지, 일레인이 불퉁하게 중얼거렸다.
나는 나지막한 한숨을 쉬고는 말했다.
“아직도 삐졌어?”
“삐지긴요!”
그 말에 일레인이 다시 휙 고개를 돌려 나를 째려보았다.
“어디 제 장례식 와서도 삐졌냐고 물어보시죠.”
“아직 안 죽었잖아.”
“그쪽 행동은 이미 절 죽인 거나 마찬가지거든요?”
나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된 모양인지, 이놈의 게임 캐릭터들은 하나같이 비약이 심했다.
“그럼 사람이 마물에 물려 가는데, 가만히 보고 있어? 어쩔 수 없…….”
“누난 기절한 저보다 그놈이 더 소중해요?!”
나름 내 행동이 정당성 있음을 설명하는 중인데, 별안간 놈이 빽 고함을 내질렀다.
「[일레인 그리셀다]가 당신에게 강한 서운함을 가집니다.」
「[일레인 그리셀다]가 당신의 언행에 강한 질투심을 느낍니다.」
‘질투심은 또 뭐야?’
연달아 떠오르는 시스템 창에 머리가 아파졌다.
오늘 참 여러모로 나한테 서운한 사람이 많은 듯했다.
‘게임하기도 바빠 죽겠는데, 내가 저놈들 서운한 거까지 달래 줘야 해?!’
그렇지만 나를 노려보는 일레인 얼굴이 어지간히도 서운해 보여서, 하는 수 없이 사과했다.
“아, 알았어. 내가 미안해, 그린 마스크. 화 풀어.”
“…….”
“황태자가 더 소중해서가 아니라…… 너도 알다시피 지금 그 인간이 죽으면 토너먼트고 뭐고, 다 무용지물이라고.”
“…….”
“게다가 황태자는 우리 고용주, 그러니까, 물주가 될 사람이잖아. 절대 죽게 놔두면 안 되지.”
“…….”
“우리가 서로 입장이 바뀌었더라도, 난 너한테 그 인간부터 구하라고 시켰을 거야.”
내 덧붙임에 일레인의 얼굴이 오묘해졌다.
「당신에게 느끼던 [일레인 그리셀다]의 서운함이 조금 풀립니다.」
「[일레인 그리셀다]가 당신의 냉정함에 약간 감탄합니다.」
평소와 같은 꼬락서니로 떠오르는 시스템 창에 나는 안도했다.
“그리고 황태자가 너 대신 제물로 물려 갔으니까, 너는 안전할 거라고 판단해서 한 일이야.”
어깨를 으쓱이며 대수롭지 않게 내뱉으면서도, 나는 속이 좀 뜨끔했다.
일레인에게는 정말 미안하게도, 당시에 그런 건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손 하나 까딱 못한 채 키메라에게 물려 가는 카셀을 본 순간…….
가슴이 쿵 내려앉으면서, 몸이 먼저 움직였다.
냉정하게 이것저것 따질 틈도 없었다.
그라면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키메라를 제거하고 나올 거란 믿음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냐. 그대로 죽어버렸을 수도 있잖아.’
그러면 꼼짝없이 4년간 게임 속에 갇혀 살아야 한다.
그러니까 내가 남주를 구하기 위해 몸을 날린 것은 당연했다.
‘반드시 엔딩 내야 되니까.’
나는 속으로 재차 되뇌었다.
그래야만 했다. 아니, 그랬다.
그게 아니라면, 게임 속 캐릭터를 상대로 그런 울렁이는 이상한 감정을 느끼는 게 말이 안 되잖는가.
그것도 카셀이 무한 회귀를 반복 중이란 것을 알기도 전에…….
문득 내가 이 이상한 감정을 느끼기 시작한 게, 서고에 갇히기 한참 전부터라는 것을 깨달은 나는 온몸의 피가 손끝을 타고 쭉 빠져나가는 기분을 느꼈다.
‘동정도…… 아니라고?’
무의식중에 든 생각을 우두커니 곱씹고 있을 무렵.
“……나! 약재상 선생 누나!”
일레인의 외침에 나는 퍼뜩 상념에서 깨어났다.
“……어, 어?”
“그래서 그다음에는 어떻게 된 거냐고요. 대체 하룻밤 동안 어디 있었던 거예요?”
고개를 들고 바라보자, 일레인이 의아하다는 얼굴로 물었다.
나를 향한 그의 눈동자가 말갛게 빛나고 있었다.
그렇게 황태자를 쫓아간 내가, 혹시 죽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은 것처럼, 그저 순수한 궁금함 뿐이었다.
언제나와 같이 뇌가 해맑은 녀석을 마주 보자, 왜인지 불안정했던 마음이 가라앉았다.
“……뭘 어떻게 돼. 이동 스크롤로 도망갔다가, 황태자 상태 이상 때문에 다시 돌아왔지.”
나는 본능적으로 비밀 서고에 대한 일을 함구했다.
그리고 예상치 못한 부분에서 날카로운 일레인이 따지고 들세라 재빨리 말을 돌렸다.
“그보다, 넌 대체 언제 깨어난 거야?”
“……그 미친놈이 대포 쏴 댔을 때요.”
‘생각보다 이른 시점이었구나.’
그때를 떠올리며 묘한 죄책감에 휘감겨 있던 찰나.
마찬가지로 같은 때를 떠올리는 건지 일레인이 희게 질린 낯으로 치를 떨었다.
“마법사들이 눈치챌까 봐 계속 기절한 척하고 있는데, 포탄 맞고 죽을까 봐 제가 얼마나 무서웠는지 알아요?!”
“…….”
“마침 누나 왔길래 도망칠 기회만 보고 있었는데…….”
놈이 끝내 나를 원망스럽게 노려보았다. 때문에 나는 순순히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 내가 죄인이다. 내가 죽일 년이야…….”
“알면 됐어요.”
「[일레인 그리셀다]가 당신의 말에 격하게 동감합니다.」
「[일레인 그리셀다]가 당신의 객관성에 일말의 존경심을 느낍니다.」
저게.
* * *
해가 지고 으슥한 밤이 찾아왔다.
채비를 마친 나는, [소인화 포션]을 마신 후 일레인에게 말했다.
“까보자뀨.”
낮 동안 먹고, 자고, 쉰 일레인이 한결 번지르르해진 얼굴로 말했다.
“……그런데 우리 둘이서 키메라를 잡을 수 있을까요? 벨리세르의 눈동자도 없는데.”
그딴 거 없어도 된다며 호언장담하더니, 막상 던전으로 들어갈 때가 되자 슬슬 걱정이 드는 모양이다.
나는 그런 놈을 비웃으며 시큰둥하게 답했다.
“뚤 아냐.”
“네? 둘 아니면 누가 더 있는데요?”
“까서 썰명할 테니까, 일딴 엎뜨려.”
내 말에 일레인은 불만스러운 듯했으나 순순히 몸을 낮췄다.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방어력, 회복력과 같은 효능이 있는 의복 아이템들마저 다 빼앗겨 버렸다.
그가 입고 있는, 죄수들이 입는 허름한 거적때기에는 주머니가 없었다.
그 탓에 하는 수 없이 그의 머리카락 속에 숨어 이동하기로 했다.
하지만 그건 잘못된 선택이었을까.
“우웩, 이께 뭔 냄쌔야!”
놈의 머리 위에 올라타자마자 올라오는 정수리 냄새에 일순 눈앞이 아찔해졌다.
“아, 진짜. 누나는 사람 민망하게! 감옥에 있는 내내 못 씻었으니까 별수 없죠.”
“야, 이꼰 싸람한테 날 쑤 없는 냄쌔야!”
“그럼 제가 뭐 짐승이게요? 뭐…… 지금은 짐승 같은 꼴이긴 하네. 누나의 애마인 건가? 아니, 누나만의 귀여운 너구리다구리!”
“X랄하지 말고, 쭈글 꺼 같으니까 빨리 까기나 해!”
잠시를 못 참고 헛소리를 하는 놈의 머리통을 발로 퍽퍽 내리 차며 재촉하자, 그제야 놈이 투덜투덜 몸을 움직였다.
천막을 나오자 던전 주변을 지키는 기사들이 바로 보였다.
일레인을 감시하는 자가 더해졌는지 전보다 그 수가 훨씬 많아진 듯하여 마음이 불편했다.
‘그래도 머리카락 속에 숨어 들어갈 줄은 모르겠지.’
예상대로 그들은 일레인이 던전 안으로 들어갈 동안 잠자코 지켜만 볼 뿐 전혀 막지 않았다.
순조롭게 호수 앞까지 도착하자마자 나는 괴성을 지르며 놈의 머리카락 속에서 뛰쳐나왔다.
“우웩!”
한동안 호숫가에 서서 구역질을 하다가, 힘겹게 [소인화 해제 포션]을 마셨다.
그러자 일레인이 불그스름해진 얼굴로 소리쳤다.
“아, 그 정도는 아니거든요?!”
“…….”
나는 말없이 그에게 [위장 향기 포션]을 건넸다.
후각이 예민한 키메라를 교란하기 위해 가져온 것이었다.
일레인이 파르르 떨다가 그것을 받아들였다.
「[일레인 그리셀다]가 당신에게 격렬한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일레인 그리셀다]가 당신의 배려 없음에 강한 서운함을 가집니다.」
놈이 강한 서운함을 느끼더라도, 이번만큼은 별수 없었다.
일레인이 포션을 모조리 복용한 것을 확인한 나는 이윽고 손가락을 모아 커다랗게 휘파람을 불었다.
“휘익―!”
그러나 몇 분이 지나도, 호수 근처는 잠잠했다.
“아오, 이 새끼가…….”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몇 차례 더 휘파람을 불러 젖혔다.
“누나, 뭐 하는 거예요?”
일레인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런 나를 보고 물었다.
그러나 슬슬 열이 받는 중이어서 나는 대답을 해줄 여력이 없었다.
“휘익―!”
휘파람의 횟수가 8번을 넘길 때쯤, 나는 그냥 [도버 마을]에 다녀오는 쪽으로 결정했다.
그놈을 반 죽여 놓을 심산으로 이동 스크롤을 꺼내는 순간.
“꾸웨에에에엑!”
어디선가 우렁찬 울부짖음이 울려 퍼졌다.
그와 동시에 머나먼 하늘 저편에서 커다란 그림자가 빠르게 이쪽으로 가까워졌다.
“무슨…… 윽!”
후욱!
일레인이 한 번 더 입을 연 순간, 호숫가에 강한 돌풍이 몰아쳤다.
그리고, 쿠우우웅――!
땅을 울리는 굉음과 함께 거대한 그림자가 호숫가에 내려앉았다.
“꾸웨에에에엑!”
날개를 퍼덕이며 당차게도 울부짖는 정체불명의 그림자는 다름 아닌.
[Lv.300 천둥 코끼리새]
“……천둥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