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는 동안, 카셀은 수없이 반복된 회귀를 더듬었다.
어느 순간부터인지 정확히 알 수 없는 시점에서 이름 모를 이방인들이 그를 찾아오기 시작했다.
이방인들은 하나같이 특이한 이름과 말투를 쓰곤 했다. 게다가 대부분 무례하고 멍청했다.
그러나 몇십 번째의 회귀 끝에 만난 ‘그’ 이방인은 제법 강하고 영리한 편이었다. 자신의 화를 돋울 만큼 무례하지도 않았다.
“안녕하세요, 황태자 전하. 또 만나네요.”
스쳐 간 수많은 이방인 중 유독 기억에 남은 한 명.
그 이유는, 그만큼 놈이 끈질겼기 때문이리라.
“잠깐! 이렇게 죽는……!”
“에반데. 여기서 이 퀘가 왜 나와?”
“미친, 버그 걸려서 또 몹 안 죽잖아.”
놈은 수많은 실패를 겪고도 다음 생이 시작되면 어김없이 나타났다.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함에도 귀찮아하는 기색 없이 성실히 임했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굳게 믿고 있었던 것 같다.
무슨 목적으로 계속 찾아오는 건지는 알 수 없으나 이자만큼은, 최후까지 자신과 함께할 것이라고.
수많은 실패와 죽음이 반복됐지만, 카셀과 동료들은 다음 회차에서 결국 방법을 찾아냈다.
그리하여 회차가 거듭될수록, 한 걸음씩 끝을 향해 나아갔다.
그리고 마침내, 무수한 사투 끝에 그들은 [태초의 고원]에 도달했다.
이 모든 일의 시작이자 저주의 근원인, 마룡이 있는 곳이었다.
그들은 사활을 걸고 마룡과 싸웠다.
하지만 과연 세계 최강의 마물답게 놈과의 혈투는 쉽지 않았다.
토벌단 전원이 다 같이 전멸할 때도 있었고, ‘이방인’을 비롯한 동료들이 차례대로 죽어가는 것을 고통스럽게 지켜봐야 할 때도 있었다.
늘 끝까지 남아 제일 마지막에 죽는 것은 카셀이었다.
그때마다 마룡, 아니, 저주가 그를 비웃으며 속삭였다.
“너희들은 여전히 진정한 희생과 헌신을 다하지 않는구나. 하나같이 저 혼자 살아남기 급급하지. 역시 인간들이란, 어리석고 우습구나…….”
“선택해라. 이대로 나와 같이 세상의 멸망을 지켜볼지, 아니면 또다시 굴레에 갇힐지.”
마룡은 자못 관대하게 선택지를 주는 듯했으나, 실상 주어진 길은 한 가지뿐이었다.
숨이 붙어 있는 카셀은 그때마다 망설임 없이 칼로 제 심장을 찔렀다.
실은 모든 것에 환멸이 나던 때엔 ‘세상의 멸망을 지켜본다.’라는 선택지를 택한 적도 몇 번 있었으나, 소용없었다.
자신의 선택으로 말미암아 고국을 포함한 전 대륙이 불타오르는 불쾌한 장면만 목격한 뒤 다시 태어나게 될 뿐이었으니.
“아오, 망할! 또 죽냐? 이 X 같은 게임아!”
끝을 코앞에 둔 상태여선지, 이방인은 갈수록 초조해하고, 분개했다.
카셀은 그런 그를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이방인의 말을 정확히 알아들은 건 아니지만, 그 또한 그런 시절이 존재했었으니까.
셀 수 없이 이어지는 실패와 죽음에, 수없이 초조하고, 분노하고, 울분을 토해냈었다.
하지만 변하는 것은 없었다. 그저, 다음 생이 똑같이 시작될 뿐.
‘지금은 절망스럽더라도 언젠가 힘을 합쳐 마룡을 물리치게 되면, 너 또한 여기서 벗어날 수 있겠지.’
어쩌면 그때의 자신은, 전생의 기억을 가진 채 수차례 찾아온 이방인과 제 처지를 동일시하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어리석게도, 이방인이 마지막까지 자신과 함께 싸울 것이라 믿었다.
“전하. 그 진정한 희생이라는 거, 혹시 전하의 희생이 아닐까요?”
어느 날 우연히 죽기 직전 마룡의 속삭임을 들은 이방인이, 다음 생에서 그런 말을 하기 전까진.
마룡이 드래곤 브레스를 내뿜은 이후 잠시간 숨 돌릴 틈이 주어졌을 때였다.
무슨 뜻이냐는 카셀의 말에, 그는 머쓱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니, 그렇잖아요. 아담도, 니세도, 일레인도, 다 마지막까지 전하를 위해 희생했는데……. 그런데도 마룡이 죽지 않는 거면, 전하가 죽어야 한다고 말하는 게 아닌가 해서요.”
“아, 혹시나 해서 덧붙이는데…… 제가 정말로 전하가 어떻게 됐으면 해서 하는 말은 아닌 거 아시죠? 그냥 갑자기 생각나서요. 어쨌든 저 용 대가리를 죽이긴 해야 하니까…….”
굳어진 자신의 표정을 본 놈이 어색하게 웃으며 덧붙였다.
하지만 카셀은 따라 웃을 수 없었다.
실제로 이미 다른 동료들은 마룡과 싸우다 모두 죽은 시점이었다.
이다음은 필연적으로 이방인의 차례였다.
그리고 제 자살을 마지막으로 또다시 모든 것이 반복되겠지.
“그대의 말이 맞아.”
카셀은 고개를 끄덕여 이방인의 말에 동의했다.
후우우우욱―!
때마침 유유히 상공을 활보하던 마룡이 아가리를 쩍 벌리며 그들에게로 날아오기 시작했다.
카셀은 이방인을 제 뒤로 미룬 채, 처음으로 남을 위해 자신을 희생했다.
자신의 머리통만 한 마룡의 송곳니가 어깨 부근을 관통하고.
이어서 불길이 담긴 놈의 숨결에 피부가 녹아내리는 것을 끝으로, 카셀은 그 회차의 생을 마감했다.
그리고 다시 태어났다.
바뀌는 것은 없었다.
그는 여전히 저주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끝을 내기 위해선 지난한 과정을 또다시 반복해야 했다.
그러나.
‘그’ 이방인이 더 이상 찾아오지 않았다.
그다음 생에도. 그다음 생에도.
이윽고 새로운 이방인이 찾아올 때까지.
카셀은 그 이후로 ‘이방인’을 믿지 않았다.
그들이 아무리 강한 힘을 가지고 있고 도움이 된다 한들, 그들은 자신과 달랐다.
마음만 먹으면, 수틀리는 일이 있기라도 하면 끝없는 굴레에서 홀연히 빠져나갈 수 있었다.
결국 이 세상엔 자신 혼자뿐이다.
모든 생을 기억하는 것도, 계속해서 생지옥을 반복해야 하는 것도.
그 순간, 그가 더듬던 과거의 회상이 전환됐다.
익숙한 체향이 코끝을 스쳤다. 달곰하기도 하고 쌉싸름하기도 한, 약초를 닮은 향.
후각부터 시작된 감각이 온몸을 타고 피어나기 시작했다.
사르락, 사르락 움직이는 머리칼 소리와 눈꺼풀을 덮은 따뜻한 손가락.
그리고.
입술 위를 훔치는 보드랍고 촉촉한 감촉.
그 감각과 함께 또 다른 이방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잠에서 깨면, 사리 송은, 그냥 원래부터 없었던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잊어버리세요.”
마침내 시야를 가린 손이 떨어져 나가고 보인 것은.
피를 흘리며 저 대신 죽어가는 여자의 모습이었다.
자수정처럼 선명한 보랏빛이 맺힌 눈동자를 마주한 순간.
쿵.
심장이 커다랗게 한 번 박동하더니, 혈관을 타고 온몸으로 찌릿찌릿한 감각들이 퍼져 나갔다.
수많은 회귀 중, 처음 겪는 그 감각에 카셀은 한없이 낯설고, 두렵고, 화가 났다.
분노인지, 설렘인지 모를 감정에서 한없이 허우적대면서도, 그는 끝내 여자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카셀은 손을 뻗어, 그토록 잡고 싶었던 여자의 머리칼 한 줌을 와락 붙잡았다.
현실이 아님을 알았지만, 상관없었다.
어떡하지, 샤리 아즈라엘.
가장 오랫동안 함께 했던 이방인의 이름도 지웠건만,
너만은 도저히.
그 기억을 끝으로 카셀은 마침내 눈을 떴다.
* * *
「제목 : 겜 접으십쇼. 300번째 말했습니다. 이 게임 접으십쇼.
작성자 : 불멸의황태자따까리
안녕하세요, 형님들. 접니다, 불황따.
이 버그 씹망겜은 답이 없습니다. 하루빨리 접는 것만이 답입니다.
다들 아시다시피 저는 리셋만 300번 넘게 찍고, 8시간 만에 마룡 던전 진입한 최단 기록 보유잡니다.
그래서 마룡 피 80% 깎고 뒤지기 전에 힌트도 얻었습니다.
마룡 잡고 엔딩 보려면 ‘진정한 희생과 헌신’이란 게 필요하다더라고요???
제가 누굽니까? 또 X 빠지게 리셋하면서 메인 캐들 한 명씩 죽여봤다 이거 아닙니까.
그런데요, X발!!!!!!!!!!
기사, 도적, 성녀, 교황 루트로도 다 해 봤는데 이거 엔딩 안 납니다.
심지어 카셀 ㅅㄲ도 설득해서 죽여봤는데, 오버 떠요. ㅁㅊ
그래서 제 결론은요. 이 게임은 답이 없다는 겁니다.
님들도 삽질 그만하시고 이제 현생 사세요.
전 그만 떠납니다. ㅃㅃ」
“……닉네임이 왜 이래?”
아리가 퍼다 준 커뮤니티 글을 읽던 나는, 문득 눈살을 찌푸렸다.
황태자 따까리라면서 카셀을 설득해 죽게끔 유도했다니.
그럴 거면 따까리란 단어는 왜 썼단 말인가? 왜인지, 기분이 썩…….
‘기분이 썩은 뭔 썩이야!’
무의식중에 든 생각에 나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휘저었다.
그리고 다른 생각을 떠올리기 위해 한 번 더 글을 정독했다.
확실히 최단 기록을 보유한 헤비 유저는 다르긴 달랐다.
리셋을 그렇게 많이 해 놓고, 엔딩 보겠답시고 메인 캐릭터들 전부를 한 번씩 죽여보기까지 한 게, 보통 집요한 인간이 아니었다.
하지만 덕분에 나는 미처 알지 못한 새로운 정보를 얻게 됐다.
‘그러고 보니, 서고에서 본 책에도 그런 구절이 있긴 했지.’
「― 이 저주를 푸는 법은 내게 저주를 내린 ‘삶’의 고결한 희생뿐.
― 하지만 ‘삶’은 이미 한참 전에 너희들을 위해 제 몸을 희생했는데 이제 어쩌려나…….」
아무래도 ‘불황따’와 같은 헤비 유저 중 리르의 서고에 들어간 사람은 아무도 없는 듯했다.
서고를 빠져나왔더라면, [고대 마룡]을 죽일 수 있는 단서도 금방 알아차렸을 텐데.
……라고 말은 했지만 서고를 빠져나왔음에도, 단서를 전혀 알아채지 못한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진정한 희생과 헌신이라…….’
강제 소환을 믿고서 저지른 희생으로 얼렁뚱땅 서고를 빠져나오긴 했지만, [고대 마룡]을 처치할 때도 그게 정답일지 확신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일반 유저들은 나와 달리 ‘죽지 않는 버프’가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버프 믿고 엔딩 직전에 그 X랄 했다가, 그대로 게임 오버라도 뜨면 어떡한단 말인가.
머리를 싸매고 한참을 고민하던 나는, 그냥 포기하고 제작자들에게 물어봤다.
― 나 : 진정한 희생과 헌신이 뭐예요?
― [GM아리] : 단어 그대로이지 않을까요?
― [GM아리] : 희생의 사전적 뜻으로는, 다른 사람이나 어떤 목적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 재산, 명예, 이익 따위를 바치거나 버림, 이고요.
― [GM아리] : 헌신은…… (입력 중…)
― 나 : 됐어요.
그걸 몰라서 물어봤겠냐고.
나는 한숨을 내쉬며 도움 안 되는 채팅창을 끄려 했다.
그 순간 ‘띠링’ 하는 알림음과 함께 채팅이 올라왔다.
― [GM지누] : 님은 리르 서재에서 뭐 알아낸 거 없음?
예리한 질문에 나는 채팅을 치려고 움직이던 손을 멈췄다.
키메라를 잡고 난 직후.
그 망할 서고는 대체 뭐냐고 길길이 날뛰던 내 채팅에 오히려 제작자들은 영문 모를 반응을 보였다.
― [GM지누] : 헐.
― [GM아리] : 세상에! 리르가 히든 퀘스트를 만들어 놨다고요? 어쩐지, 그럴 리가 없는데 채팅창 연결이 갑자기 끊겨서 깜짝 놀랐어요.ㅠ
― [GM세라] : 그런 XXXX 놈 같으니! 우리에게 한마디도 없이 그런 파렴치한 짓을 하다니! 정말 끝까지 제 멋대로인 XXX일세!
오히려 나보다 더 분개하며 날뛰는 바람에 오히려 내가 더 황당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퇴사한 직원이 만든 히든 루트로 인한 불상사는 오래가지 않아 마무리됐다.
「[GM지누]가 보상으로 [20,000,000코인]을 지급했습니다.」
‘그래. 2천이면 뭐, 개고생 값으로 나쁘지 않아.’
덕분에 일레인에게 준 아티팩트를 구매하느라 훌쩍 줄어든 코인을 도로 메울 수 있었다.
회상을 마친 나는, 서고에서 본 이상한 책에 대해 말을 꺼내려 했다.
그때였다.
“읏…….”
갑자기 들리는 소리에 나는 화들짝 놀라 채팅창에서 시선을 돌렸다.
침대에 죽은 듯이 누워 있던 남자가 별안간 미간을 찌푸리며 신음했다.
키메라를 잡는 것이 끝난 후, 일레인은 순위 결산을 위해 마물의 정수들을 가지고 떠났다.
그리고 나는 그대로 아담에게 붙잡혀 황태자 궁으로 끌려왔다.
잠깐 의식을 되찾았던 황태자가 얼마 안 가 다시 정신을 잃었다는 명목이었다.
‘그냥 기력 딸려서 잠든 거라고 몇 번을 말해!’
그렇게 외쳤지만 아무도 내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내내 카셀을 지켜보던 나는, 심상치 않은 그의 반응에 벌떡 일어나 한달음에 침대로 다가갔다.
“저, 저기요. 괜찮으세요?”
남자는 창백한 얼굴로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것을 보자 나도 모르게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자, 잠깐만 기다려 보세요. 약을 가져올……!”
곧장 밖에서 달이고 있는 탕약을 가져오기 위해 몸을 돌리는 순간.
타악―.
거센 악력이 손목을 잡아챘다.
그리고.
“……못 놓겠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