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2화 (172/212)

순식간에 황궁을 벗어난 마차는 토너먼트 폐막식이 열리는 결투장을 향해 엄청난 속도로 달렸다.

그런데도, 따라 오는 자칭 호위들의 속도가 전혀 뒤처지지 않았다.

빠져나갈 구멍 하나 없이 마차를 빽빽하게 호위하고 있는 황태자의 수하들을 흘끔거리던 나는 찝찝함을 감출 수 없었다.

‘호위라며.’

이건 꼭 감시 같잖아.

“뭐 볼 거라도 있나?”

그때였다.

어색함을 못 견디고 하염없이 창문만 바라보는 내게 카셀이 물었다.

“아뇨. 그…… 마차가 참 빠른 것 같아서요.”

감시하는 거냐고 물을 수는 없었으므로, 나는 적당히 얼버무렸다.

그러자 카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 헛짓거리를 할 틈이 없지.”

“예? 누구…… 말씀이십니까?”

“누구겠나?”

빤히 나를 보며 지껄이는 소리에 나는 그만 입을 다물어야 했다.

‘감시 맞잖아, 이 새꺄!’

어쩐지, 결투장까지 얼마 걸리지도 않는데 마차를 다 탄다 했다.

그냥 이동 스크롤을 쓰거나 마법사들을 부리면 될 것을.

놈의 기대를 충족하기 위해서라도 헛짓거리를 저지르고 싶었으나, 슬프게도 마차는 눈 깜짝할 새 목적지에 도착했다.

“내리지.”

카셀이 먼저 문을 박차고 나갔다.

어영부영 그 뒤를 따라 마차에서 내리던 순간이었다.

문득 내 앞에, 큼지막한 손바닥이 건네졌다.

“잡아.”

“어…….”

고개를 들자 무심한 얼굴로 내게 손을 내밀고 있는 카셀이 보였다.

“왜……죠?”

나는 왜 손을 잡아야 하는지 알 수 없어, 그저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그의 미간이 와락 일그러졌다.

“같이 마차까지 타고 온 주제에 에스코트도 못 받은 여자라는 소문이 돌면 참으로 좋겠군.”

“……저는 에스코트를 받을 만한 귀족도 아닌데요.”

“그럼 레이디를 존중할 줄도 모르는 쓰레기 같은 황태자라는 소리가 나돌겠지.”

아니, 에스코트 좀 안 했다고 쓰레기 같은 황태자까진…….

그렇게 대꾸하고 싶었으나, 눈을 부라리며 거의 윽박지르듯 종용하는 놈의 모습에 하는 수 없이 손을 내밀었다.

최대한 닿는 면적을 줄이려고 살포시 손을 얹는 순간이었다.

그 노력이 무색하게, 손이 닿자마자 덫이 사냥감을 옭아매듯 커다란 손이 내 손아귀를 거세게 옥죄었다.

맞닿은 손이 무척 뜨거웠다.

일순 흠칫하여 카셀을 돌아보았지만, 놈은 여상한 태도로 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그에게 거의 질질 끌려가다시피 하던 나는 몹시 당황했다.

‘왜, 왜 이래? 이것도 감시의 일환인가?’

그렇게 생각하자, 가까스로 요동치는 심장을 가라앉힐 수 있었다.

“황태자 전하 입장하십니다!”

결투장의 입구에 도달하자, 개최식 때처럼 그 앞을 지키고 서 있던 기사들이 재빨리 길을 터줬다,

90도로 허리를 숙인 기사들의 가운데를 황태자와 함께 당당히 지나가는 건 정말 이상한 기분이었다.

‘왕족을 사칭할 할 땐, 다신 여기에 발 들일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나는 뒤바뀐 상황에 놀라면서도, 대체 이 일을 좋아해야 하는 건지 통탄해야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시끌벅적한 내부로 들어오자, 폐막식을 보기 위해 찾아온 사람들로 관중석은 이미 빼곡히 차 있었다.

카셀은 곧장 계단을 올랐다.

비록 귀족은 아니었으나, 황태자의 자비로 초대된 상황이니 나는 당연히 적당한 층에 떨궈 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자유석인 3, 4층을 지나서도 카셀은 내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

“전하, 어디로 가는 겁니까?”

카셀에게 질질 끌려가던 나는, 그가 향하는 곳을 알아채고 서둘러 물었다.

“오늘은 내 손님으로 왔으니 마땅한 자리에 앉아야지.”

그 마땅한 자리가 바로, 정중앙에 우뚝 솟은 돔 아래. 

타국의 고위 인사들이 앉는 곳이라는 것을 깨달은 나는 사색이 되어 외쳤다.

“저, 전 그냥 아무 데나 앉아도 상관없는데요!”

“나는 상관 있는데, 어쩌지.”

카셀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시큰둥하게 답했다.

그러면서도 걸음을 멈추지 않는 탓에, 속절없이 끌려가고 있는데, 이쪽으로 와닿는 시선이 하나, 둘 느껴졌다.

“황태자 전하께서 데리고 온 저 여자, 누구지……?”

“귀족인가? 차림새는 마법사 같기도.”

“직접 에스코트 해주시는 것 보면 타국의 고위 인사인 듯…….”

수군거리는 음성과 점점 몰리는 이목에 나는 무척 난감해졌다.

‘이러면 엔딩까지 물밑에서 조용히 움직이겠단 계획이 틀어지잖아……!’

토너먼트를 마치며 나는 내 포지션 또한 결정했다.

용사인 척하는 괴상한 여자와 괄시당하는 약재상 중에서, 후자를 택하기로.

빠른 엔딩을 위해서 더 이상의 주목과 잡음은 사절이었다.

그런데.

“왜, 왜 여기로 가는……!”

카셀은 예상했던 자리조차 그대로 지나쳤다.

나를 끌고 높다란 계단을 오른 그는, 마침내 황족들이 앉는 돔 앞에 이르러서야 걸음을 멈췄다. 

탁.

내내 꽉 잡고 있던 게 무색하게도, 곧장 내 손을 털어 낸 카셀이 훌쩍 돔 위로 올라섰다.

그리고 금좌 바로 뒤쪽에 죽 늘어져 있는 의자들.

그러니까, 황태자의 최측근들이 앉는 곳을 턱짓했다.

“와서 앉아.”

나는 입을 떡 벌린 채 그가 가리킨 곳을 바라보았다.

이미 꽉 찬 의자들 사이에, 두 개의 빈자리가 눈에 띄었다.

그리고 하필 그 빈자리 옆에 자리한 인간 또한.

[아담 헤일리 백작]

이미 내가 올 거란 걸 알고 있었는지 아담을 비롯한 황태자의 최측근들은 놀란 기색도 없이 덤덤히 나를 응시했다.

현재 제국의 최고 권력자인 황태자의 바로 뒤에 앉는다.

내가 원하는 것은 이런 게 전혀 아니었다.

나는 주춤 뒷걸음치며 말했다.

“이게 무슨…… 제, 제가 어떻게 감히…….”

“그래. 그대가 평민 출신의 하찮은 약팔이에 보잘것없는 재주를 지녔다는 것은 잘 알고 있다.”

“…….”

“그러니까 겸손 그만 떨고 빨리 앉아. 시상식 진행해야 하니까.”

놈은 황태자궁에서 받은 극진한 대접을 거절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외치던 내 말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내뱉었다.

그건 그것대로 소름이 끼쳤다.

대체 어떻게 이 난감한 상황에서 벗어날지 갈팡질팡하고 있을 무렵.

“처, 천사님……?”

“…….”

“천사님!”

갑자기 새된 비명 소리와 함께, 누군가 빠르게 달려와 나를 와락 껴안았다.

“억!”

“처, 천사님! 너, 너무 보고 싶었어요……!”

“이게, 미쳤나…….”

당황한 나는 반사적으로 추행범에게 주먹을 내지르려 했다.

하지만 그러기도 전, 짧은 포옹을 마친 누군가가 재빨리 떨어져 나갔다.

그리고 드러난 나를 껴안은 이의 얼굴에, 나는 조금 당황했다.

짧은 은빛 머리칼을 지닌 훤칠한 남자가 홍조가 가득 핀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누구…….”

누구냐 물으려던 찰나.

남자의 머리 위에 떠 있는 흰 글씨를 본 나는 소리 없이 입을 벌렸다.

[22대 교황 니세]

“니세……?”

믿기지 않았다.

‘이게 니세라고?’

내가 아는 니세는 나만 한 키에 왜소한 체격을 가진, 기다란 은빛의 머리를 산발한 채 늘어뜨리고 다니는 걸뱅이 같은 소년이었다.

그런데 못 본 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그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네, 네. 저, 저 니세예요, 천사님.”

내가 알아봐 준 것이 기뻤는지, 니세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교황 니세]가 당신에게 일정 수준 이상의 호감을 느낍니다.」

「[교황 니세]가 당신과의 재회를 매우 기뻐합니다.」

그의 태도와 일치하는 매우 긍정적인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

‘저걸 보면 니세가 맞는데…….’

니세는 착하니까, 뜨는 시스템 창 문구가 대부분 나쁘지 않은 편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런 그를 한없이 낯선 눈으로 바라보았다.

“아니, 머리는 그렇다 쳐도 키가 어떻게 일주일 만에…….”

“허, 허리를 숙이고 다니는 게, 버, 버릇이 돼서…… 교, 교황은 그러면 아, 안 된다고 배웠어요.”

내 중얼거림에 그가 어색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새삼 이렇게 장성한 남자를 어떻게 여주라고 생각했는지,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 그보다 처, 천사님은 어, 어디 가셨던 거예요?”

황망한 얼굴로 마냥 그를 바라보기만 하는 내게, 니세가 별안간 시무룩한 목소리로 물었다.

“왜, 왜 저를 차, 찾아와 주시지 않으셨어요? 저, 저는 천사님이 다, 다시 와줄 줄 알고 계, 계속 기다렸는데…….”

“사정이 있어서…….”

황태자한테서 도망치는 중이었단 말은 차마 할 수 없었다.

“그보다, 잘 지낸 것 같아서 다행이야, 아니, 요…….”

대신 한결 밝아진 니세에게 무심코 안부 인사를 건네려던 나는, 끝내 어물어물 말끝을 흐리고 말았다.

머리 위에 [교황] 타이틀을 달고 있는 그에게 전처럼 반말을 쓸 수 없다는 자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 순간이었다.

니세가 번뜩 손을 뻗어 내 양손을 붙잡았다.

“예, 예전처럼 대해주세요! 저, 저는 처, 천사님만의 니세잖아요.”

“천사님……?”

나는 그가 해괴한 칭호로 나를 부르고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아챘다.

아무래도 눈깔 괴물의 배 속에서 나를 천사라고 착각했기에 그렇게 부르는 것 같은데…….

‘여기선 그렇게 부르면 안 되지! 나는 일개 약재상이잖아!’

그것을 깨달은 나는 경악했다.

그를 구하던 때는 솔레니아의 왕녀인 척을 할 때였다.

고로, 카셀이 조금이라도 그 존재를 연상케 할 만한 발언은 최대한 삼가야 했다.

왜냐하면.

‘사리 송은 죽었어!’

[황궁 비밀 서고]에서 그를 빠져나가게 하기 위해 대신 자살한 설정으로 말이다.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재빨리 니세의 입을 틀어막으려 했다.

“교황님, 그…… 착각이 있으신 듯한데…….”

“그, 그리고 저, 저는 잘 지냈어요. 리, 리브의 장례식도 잘 치르고, 교, 교황 수업도 잘 듣고…….”

하지만 눈치가 뒈졌는지, 니세는 내 필사적인 눈빛에도 해맑게 주절거렸다.

그때였다.

콰아아앙―!

별안간 엄청난 굉음이 돔 안에 울려 퍼졌다.

화들짝 놀라 휙 고개를 돌렸을 때 목도한 것은.

등받이가 완전히 우그러진 금좌와 그 위에서 가볍게 주먹을 들어 올리고 있는 카셀의 모습이었다.

“손”

“…….”

“놓지.”

나는 반파한 금좌와 놈을 번갈아 보며 입을 떡 벌렸다.

그와 동시에 떠오르는 시스템 창.

「[황태자 카셀 루크비히]가 당신에게 미약한 살심을 느낍니다.」

‘미친놈…… 약 처먹었니? 갑자기 왜 그러는데?!’

나는 놈이 날뛰는 이유를 몰라 그저 우왕좌왕했다.

원래도 미쳐 있는 것은 알았지만, 공식 석상에서 이렇게 날뛸 줄은 몰랐다.

그때, 이채를 띠는 붉은 눈동자가 나와 니세 사이를 빤히 응시했다.

카셀이 말하는 ‘손’이 니세가 부여잡고 있는 내 손인 것을 알아차린 나는 발작하듯 손을 털어냈다.

저 미친놈이 괜한 트집을 잡아 무슨 짓을 저지를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정답이었는지, 그제야 살벌한 시선이 천천히 떨어져 나갔다.

정확히는 니세에게로 옮겨졌다.

“폐막식 축언이나 하라고 불렀더니, 왜 아예 테이블과 찻잔도 가져와서 앉지그래.”

카셀은 새 교황이 된 니세를 가차 없이 깎아내렸다.

그러나 더 기절할 것 같은 상황은 바로 다음이었다. 

“그럴까요?”

니세가 아무렇지도 않게 카셀의 말에 낼름 대꾸를 한 것이다.

‘니세야. 너 미쳤니?’

눈을 부릅뜨고 그를 돌아보자, 앞에서 다시금 살기가 쏟아졌다.

카셀이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음산하게 뇌까렸다.

“……대사제들을 또다시 갈아치워야겠어. 새 교황에게 시간 엄수라는 예의조차 가르치지 않았다니. 신전의 수준이 얼마나 떨어졌는지 알 만하군. 안 그런가?”

“폐막식 시작까진 아직 10분 정도 남았습니다.”

“알면 입 다물고 착석하지, 그래.”

“네.”

살 떨리는 카셀의 반응에도 니세는 무덤덤했다.

정작 그가 카셀의 손에 죽지 않을까 벌벌 떠는 것은 나였다.

간결한 대답을 끝으로 니세가 내게 고개를 돌렸다.

“처, 천사님. 가, 같이 앉아요.”

카셀을 대할 때와는 차원이 다른, 환히 웃는 얼굴에 왜인지 소름이 쭉 끼쳤다.

두 사람의 신경전에 정신이 너덜너덜해진 나는, 니세가 이끄는 대로 얼떨결에 돔 안의 자리에 착석했다.

“…….”

아담이 그런 나를 무뚝뚝하게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돌렸다.

이로써 좌 아담, 우 니세가 됐다.

“처, 천사님, 옆자리에 앉게 돼서 너, 너무 떨려요. 어, 어젯밤 신께서 제게 소, 속삭임을 주셨는데요. 그게 처, 천사님과 곧 만날 수 있다는 예언이 아니었을지…….”

앞에 앉은 사람의 저 살벌한 시선이 느껴지지 않는지, 니세는 열띤 얼굴로 조잘댔다.

필사적으로 고개를 내리고 있던 나는, 폐막식이 시작한다는 안내자의 말에 가까스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제가 부순 의자 앞에 우뚝 선 채 어처구니없다는 시선으로 나를 보고 있는 놈과 눈이 마주쳤다.

「[황태자 카셀 루크비히]가 당신에게 일말의 원망을 가집니다.」

아, 내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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