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위. 덴커브 마을 출신의 마커스!”
시상식은 25위부터 호명하는 것을 시작으로 순조롭게 진행됐다.
1등이 아니더라도 25위 안에 든 실력자들에게는 약간의 포상금과 함께 중상급의 무기가 주어진다.
그 이유는 후에 있을 게임 시놉시스 때문이다.
카셀이 유저 및 메인 캐들과 함께 최후의 전투를 위해 떠나면, 용사 20인은 수도의 근경을 지킨다.
‘두 번째 재앙 때문이었지…….’
게임의 시놉시스를 차근히 떠올리는 동안 다음 순위가 차례대로 호명됐다.
대체로 귀족이 더 많았으나, 평민 출신 용사들 또한 속속 불렸다.
그렇기에 일레인을 응원하고 있는 나는 나름 공평한 심사가 만족스러웠다.
“10위! 황궁 기사단 소속이자 벨루아 자작가의 차남, 헥토르 벨루아! 하급 마물의 정수 500개, 중급 마물의 정수 120개, 상급 마물의 정수 2개!”
“9위! 워렌 네이선 백작! 하급 마물의 정수 520개, 중급 마물의 정수 98개, 상급 마물의 정수 3개!”
10위권에 이르자 호명하는 방식이 달라졌다.
‘마물의 정수’는 마물을 처리했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였다.
때문에 마물 정수의 개수가 점수에 가장 크게 반영됐다.
따라서 강한 용사일수록 잡다한 아이템은 다른 파티원들에게 넘기고 정수만 챙겼을 확률이 컸다.
당연하게도 마물의 레벨과 난이도에 따라 부여되는 점수에도 차등이 있었다.
하급보다는 중급이, 중급보다는 상급이, 상급보다는 S급이 점수가 훨씬 더 컸다.
‘역시. 그때 여왕 세이렌의 정수를 빼앗기지 않길 잘했어.’
나는 아담과 대치했던 때를 떠올리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흘끔 왼쪽에 있는 아담을 바라보자, 그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통 모를 무표정한 얼굴로 아래에 있는 결투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놈은 왜 저 아래 있지 않고 여기 있는 거지?’
나는 뙤약볕을 고스란히 받고 있는 결투장 안의 참가자들과 높다란 돔 위에 편안히 앉아 있는 아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아무리 황태자의 최측근이라지만 혼자만 너무 혜택을 보는 거 아닌가.’
나는 참가자들의 머리 위에 떠 있는 바글바글한 흰 글씨들에 가려 여태 초록 대가리도 못 찾은 상태였다.
팔자 좋은 아담의 처지에 남몰래 입술을 삐죽이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아담이 휙 고갤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내게 할 말이 있나.”
“네? 아, 아니요?”
지레 찔려서 화들짝 고개를 내젓자 그가 왜인지, 짧은 한숨을 내쉬며 시선을 거뒀다.
그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려던 찰나였다.
「[아담 헤일리]가 당신에게 일정 수준 이상의 불만을 갖습니다.」
별안간 떠오른 시스템 창에 나는 아연해졌다.
‘넌 또 왜……?’
아무리 생각해도 이 망할 놈들과는 더 이상의 접점을 만들지 않는 편이 현명했다.
이렇게 눈만 마주쳐도 나를 잡아먹으려 드는데, 동료로 엮이기라도 하면…….
나는 다시 한번 본래의 모습을 숨기고 평범한 약재상인 척하길 천 번, 만 번 잘했다고 생각했다.
‘이것만 끝나면 엔딩까지 쥐죽은 듯 이 있는 거야.’
토너먼트 내내 했던 다짐을 또 한 번 반복할 무렵.
“……5위!”
드디어 5위권이 호명되기 시작했다.
나는 떨리는 손을 맞잡고 곧장 경기장을 응시했다.
일레인이 아직까지 호명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 5위 정도면 나쁘지 않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나는 내심 그 이상을 기대했다.
이날만을 위해 개같이 남의 던전을 돌았다.
당초 목표했던 순위는 3~4위였다.
본 시나리오와 같이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카셀의 눈에 띈 게 아닌 지금.
3, 4위 정도 안에는 들어야 토벌단으로 당당히 선택받을 수 있을 것이다.
“페투니아 마을 출신, 검은 부엉이! 하급 마물의 정수 1200개, 중급 마물의 정수 216개, 상급 마물의 정수 5개!”
다행히 일레인은 5위를 벗어났다.
그러나 뒤이어 들려 온 물량에 혀를 내둘렀다.
확실히 순위가 높아지자 잡은 마물의 수도 단위가 달라졌다.
그 때문인지 어느새 시끌벅적하던 관중석도 고요해졌다.
다들 자신이 응원하거나 판돈을 건 용사가 과연 1위를 차지할지 초조하게 지켜보는 것이다.
다음 호명이 막힘 없이 이어졌다.
“4위! 마탑 소속이자 테일러 공작가의 장녀, 디아나 테일러! 하급 마물의 정수 1340개, 중급 마물의 정수 332개, 상급 마물의 정수 6개!”
“3위! 황궁 기사단의 부기사단장이자 갈라고스 후작가의 장남, 안토니오 갈라고스! 하급 마물의 정수 1350개, 중급 마물의 정수 340개, 상급 마물의 정수 6개!”
근소한 차이로 3위와 4위가 발표됐다.
내 동공이 지진 나듯 흔들리기 시작한 것도 그때쯤이었다.
일레인이 호명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 계획대로라면 일레인은 4위, 운이 좋으면 3위를 해야 했다.
S급 마물의 정수가 없는 상황에서 그 이상은 불가능하니까.
그렇기에 아담과 같은 던전에 배치되길 간절히 바랐던 것이다.
아담은 본 시나리오와 같이 S급 오우거 던전에 배치되었으니, 그와 함께한다면 조금이라도 점수에 도움 될 아이템을 더 얻어먹을 수 있을 테니까.
‘설마…… 일레인 이 자식, 정수 안 내고 딴 길로 샌 거 아니야?!’
나는 혼란스러운 눈으로 수많은 참가자 사이에서 일레인을 찾으려 했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우왕좌왕하는 사이 어느덧 호명이 끝나기 직전에 이르렀다.
“2위! 중급 마물의 정수 521개, 상급 마물의 정수 7개, S급 마물의 정수 1개!”
일레인을 찾느라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2위의 결과가 똑똑히 들렸다.
나는 흠칫 놀랐다.
‘S급 마물을 잡은 인간이 아담 말고 또 있단 말이야……?’
어차피 1위는 아담 놈일 테니, 5위부터 2위까진 모두 도찐개찐이었다.
그런데 유저도 없는 상황에서, 이렇게 발군을 보이는 실력자가 있다니.
게다가 내가 아는 한 아담이 배치된 오우거 던전을 제외하고 S급 마물이 있는 던전은 따로 없었다.
‘혹시 내가 모르는 S급 던전이 또 있는 건가?’
예상과는 다르게 흘러가는 시상식에 크게 당황하고 있는 내게, 사회자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전해졌다.
“안타깝게도 2위분은 기권을 했기에, 따로 호명하지 않고 넘어가겠습니다.”
그 말을 들은 관중들이 저마다 황당함이 담긴 얼굴로 탄식했다.
당연했다. 기껏 저런 성적을 만들어 놓고 기권을 하다니.
미치지 않고서야 저지를 수 없는 일이었다.
“대체…… 2위가 누굴까요?”
“혹시, 황태자 전하가 아닐까요? 몸이 미령하시다는 연유로 요 며칠간 칩거하셨잖습니까. 그사이 참여하신 게 아닐지…….”
2위가 끝내 호명되지 않았기에 사람들의 궁금증은 더욱 증폭됐다.
제법 그럴듯한 추측을 내미는 자도 있었다.
나 또한 시상을 앞두고 기권한 미친놈이 궁금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보다 안도감이 더 컸다.
‘일레인은 아니야.’
우리는 첫날부터 남의 던전 보스 몹을 스틸하느라 저렇게 많은 수의 마물을 잡을 시간이 없었다.
하기야, 나한테 맞아 죽고 싶은 게 아닌 이상 일레인이 제 발로 기권할 리는 없었다.
‘그럼 일레인 이 자식은 대체 어떻게 된 거냐고……!’
혹시 공동 순위였는데 내가 미처 듣지 못한 것일까.
아니면 순위 결산을 하러 가다가, 황제가 보낸 암살자에 당하기라도…….
1위가 발표되기까지의 그 짧은 순간 동안 온갖 망상들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하지만 모든 것을 다 떠나.
‘……토너먼트는 망했어.’
목표했던 4위의 이름을 들었을 때부터 슬슬 들던 불안함이, 현실이 되었다.
황태자 궁에 간 그 하룻밤 사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일레인은 결국 마물의 정수를 제출하지 못했다.
그게 아니라면 호명조차 되지 않았을 리 없다.
철저히 계산해서 보스 몹들을 잡았으니까.
‘만약 일레인이 토벌 파티원에 끼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 거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문제에 직면하게 되자 나는 몹시 혼란스러워졌다.
내가 토벌 파티원이 아닌 경우는 수도 없이 생각해봤어도, 메인 캐가 제외될 수도 있다니.
이 무슨 X 같은 게임이 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대망의 1위 발표를 하겠습니다. 이번 토너먼트 1위는 바로……!”
그때였다.
참담한 심정으로 멍하니 경기장을 내려다보는데, 드디어 1위 발표가 시작됐다.
그러나 좀 전과는 달리 별로 궁금하지도, 듣고 싶지도 않았다.
‘안 봐도 아담 놈이겠지.’
허탈함인지, 분노인지 모를 것들이 가슴 속에서 마구 뒤엉켰다.
당장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었지만, 앉은 위치 때문에 그럴 수도 없었다.
나는 몇 발자국 앞, 반쯤 부서진 의자 위에 잘도 앉아 있는 남주 놈의 뒤통수를 짜증스럽게 바라보았다.
카셀은 전혀 모르는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쩐지 놈이 이 꼴을 보여주려 의도적으로 이 자리에 앉힌 건가 싶은 원망이 샘솟았다.
토너먼트가 망했다는 억울함에 너무 열렬히 노려본 탓일까.
별안간 카셀이 휙 고개를 뒤로 돌렸다.
아차 할 새 없이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하급 마물의 정수 88개, 중급 마물의 정수 15개, 상급 마물의 정수 10개, S급 마물의 정수 1개를 잡은……!”
“…….”
“엘프족 출신의 그린 마스크!”
들려 온 소리에 나는 일순 숨을 멈췄다.
‘1위……?’
어째서 일레인이 1위인지 도통 알 수 없었다.
적당한 상위권을 위해, 우리는 널린 하급 마물들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오로지 보스 몹만 조졌다.
그래서 다른 순위권자들과는 달리 결과물이 저 모양인 것이다.
대부분의 던전 보스 몹들은 중상급에 불과했다. 그런데.
“S급 마물은 대체 뭐지……?”
아래 관중석 쪽에서 누군가 내 생각을 대신해서 말했다.
“헤일리 백작님이 배치되신 오우거 던전 말고 최상급 던전이 또 있단 말이오?”
“그린 마스크? 그건 누구지?”
“아, 과거에 보석을 털고 다녔다는 좀도둑! 황궁 던전 근처를 얼쩡거린단 얘길 들었는데!”
“황궁의 던전 안에 있는 마물이라 하면, 황제 폐하의 그…… 헉!”
황궁 던전 안에 있는 마물에 대하여 수군거리던 사람들이 갑자기 짠 것처럼 조용해졌다.
‘맞다.’
나는 그제야 ‘S급 마물의 정수’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미친, 키메라……!’
일레인이 배치되었던 황궁 던전 자체는 S급이 아닌, 상급으로 분류됐기에 전혀 생각지 못하고 있었다.
마물이 보스 몹 딱 하나 있기 때문에 오우거 던전에 비하면 난이도가 낮은 편이었다.
게다가 키메라를 잡을 거라곤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기에, 놈의 등급을 헤아릴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원래대로라면 카셀이 퇴치해야 한다는 사실에 매몰되어 있던 나는, 키메라를 점수가 아닌 그저 기간 안에 빨리 해치워야 할 과업이라 여겼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게, 카셀 놈의 변덕으로 인한 규칙 변경 때문에 워낙 갑작스럽게 해치워야 했고…….
키메라의 내장 속을 헤집고 다니던 그 3일 동안 내내 쫓기는 듯한 촉박함과 두려움에 시달리느라 정신이 너덜너덜한 상태였다.
이러고 있는 사이, 중화제가 듣지 않아서 남주가 손 쓸 틈도 없이 죽어버릴까 봐.
솔직히 마물의 정수고 뭐고, 빨리 키메라의 심장을 찾은 후 밖으로 나갈 생각밖에 없었다.
“보상 전달을 위해, 용사 그린 마스크는 돔 위로 올라오시오!”
회상에 잠겨 있는 사이, 사회자가 일레인을 호출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퍼뜩 정신을 되찾자, 눈이 마주쳤던 카셀은 어느새 거짓말처럼 고개를 앞으로 돌린 후였다.
그가 왜 1위 발표의 순간에 나를 돌아본 건지.
의미를 헤아릴 새도 없이 “저예요, 저! 제가 그린 마스큽니다!” 하는 경박스러운 말투가 지척에서 들렸다.
이종족에 대한 약간의 멸시와 호기심이 섞인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면서도 일레인은 신나게 뛰어 올라왔다.
수상자를 맞이하기 위해 사람들이 주춤주춤 일어섰다.
나 또한 눈치를 보며 일어선 순간.
막 돔 위로 오른 일레인이 나를 발견하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약재상 선생 누나……?”
분명 옷을 바꿔 입었는데 대체 어떻게 알아본 건지, 놀랄 틈도 없었다.
“억……!”
“누나!”
일레인이 곧장 내게로 달려와 나를 얼싸안았기 때문이다.
“누나 들었어요? 1등이라고요! 우리가 해냈어요! 제가 말했죠, 무조건 1등 할 거라고! 역시 우리는 블랙 그레이, 아니, 화이트 그레이 마물 도살단이에요!”
“자, 잠깐……!”
일레인은 퍽이나 기쁜 건지, 랩 하듯이 헛소리를 지껄이며 나를 안고 방방 뛰었다.
그 바람에 본의 아니게 몸이 마구 뒤흔들렸다.
그때였다.
「[황태자 카셀 루크비히]가 당신에게 미약한 분노를 느낍니다.」
「[아담 헤일리]가 당신에게 일말의 서운함을 가집니다.」
「[22대 교황 니세]가 당신의 행동에 약간의 질투심이 샘솟습니다.」
별안간 동시다발적으로 떠오른 시스템 창에, 이제 뒤흔들리는 것은 내 동공이 되었다.
「[일레인 그리셀다]가 사람들의 시선에 강한 우월감을 느낍니다.」
마지막으로 정점을 찍는 일레인의 머리 위까지.
나는 오늘도 소리 없이 비명을 질렀다.
‘미친놈들아…… 제발 나 좀 가만 내버려 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