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4화 (174/212)

“큼흠! 용사 그린 마스크! 귀빈들의 앞이니, 체통을 지키게! 개인적인 용무는 수상이 끝나고 보도록!”

그때였다. 헛기침 소리와 함께 사회자가 일레인에게 일침을 가했다.

그 소리에 주변을 돌아보자, 메인 캐들 말고도 모두가 우리를 주목하고 있었다.

여전히 일레인의 품에 안겨 있던 나는, 거의 주먹질을 하듯 놈을 밀어냈다.

퍽!

“억!”

“고용주님…… 기뻐하시는 것도 좋지만, 정신 차리고 상부터 받아오시지요. 예?”

죽고 싶지 않으면.

이를 악물고 작게 속삭이자, 가슴팍을 문지르며 신음하고 있던 일레인이 흠칫 어깨를 떨었다.

다행히도 정신을 되찾은 건지, 그는 시종의 안내에 따라 황태자의 앞으로 가서 무릎을 꿇었다.

“용사 그린 마스크, 제국의 작은 태양께 인사 올립니다.”

내가 사준 나름 비싼 옷을 걸치고서 예를 갖추니 일레인도 제법 그럴듯해 보였다.

카셀은 그런 그를 내려다보며 오만한 표정으로 고개를 까딱였다.

“1등이라…… 꽤 놀랍군.”

그리고서 내뱉은 첫마디가 그거였다.

물론 나도 아담이 아닌 일레인이 1등을 할 줄은 꿈에도 예상치 못했다.

하지만 남주 놈의 입에서 그런 소리를 듣자 욱하는 마음이 샘솟았다.

‘일레인이 뭐 어때서. 1등 좀 할 수도 있지.’

꼭 아담만 1등 하라는 법도 없거늘.

새까만 뒤통수를 노려보며 이를 가는데, 문득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아담은 왜 기권한 거지?’

아담이 토너먼트에서 기권한 루트는 들어 본 적 없었다.

그와의 친밀도를 올리지 못해서 아예 토너먼트에 참여하지 않은 적은 있어도.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카셀과 일레인 사이에 짧은 대화가 오갔다.

“얼마 전까지 뺀질거리기만 하던 것 같은데, 제법이야. 그사이 키메라를 다 잡고.”

“제가 좀 월등한 편입니다.”

무릎 꿇고 앉아 있는 주제에, 일레인은 잘도 대꾸했다.

그들 가까이 있던 황태자의 수하들이 기겁하는 게 느껴졌다.

기껏 1등을 했는데, 죽을 날짜 받으려 드는 듯한 시건방진 태도에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다행히도 애송이의 패기로 받아들인 건지 당사자는 코웃음을 칠 뿐이었다.

“무슨 꼼수를 쓴 건지 모르겠으나, 어쨌든 토너먼트의 1등을 차지한 것은 축하한다.”

“꼼수가 아니라……!”

“여봐라.”

발끈하여 반박하는 일레인을 가뿐히 무시하고, 황태자가 아랫사람들에게 눈짓했다.

그들이 눈치껏 달려가 한쪽에 놓아둔 보상들을 들고 왔다.

1억 코인이 담긴 커다란 상자와 내피눈물로 얻은 검, 루미에카르가 벨벳 쿠션 위에 고이 얹어져 있었다.

“받아라.”

카셀이 검을 들어 일레인에게 떠넘기듯 대충 건넸다.

황태자로부터 검을 직접 받을 줄은 몰랐는지, 일레인이 얼떨떨한 얼굴로 그것을 받아들였다.

미안한 말이지만, 날개가 달린 커다란 대검을 든 일레인의 모습은 지독히도 우스웠다.

카셀이 들었을 땐 이 정도는 아니었다. 그냥 이상한 검을 든 미친놈 같았는데…….

아무래도 나이와 체격 차라는 건 무시할 수 없는 듯했다.

“토너먼트 시상식은 이것으로 마치지. 모두 수고했다.”

일레인이 검을 건네받자마자 카셀이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몹시도 성의 없고 간략한 치하였지만, 딱히 놀랍진 않았다.

본래 아담이 수상하는 장면도 무척이나 짧게 흘러가기 때문이다.

일레인은 생각보다 덤덤한 얼굴로 일어서서 꾸벅 인사한 후 옆쪽으로 물러섰다.

토너먼트의 주인공이니, 아마 폐막식이 끝날 때까지 황태자의 옆에 서 있어야 할 것이다.

나는 매번 아담이 차지했던 자리에 선 채 아담의 검을 들고 있는 일레인을 기묘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걸까…….’

그나마 아예 관계없는 제삼자에게 검이 넘어가지 않아 다행이긴 한데…….

내가 회생시켜서 카셀의 손에 쥐여준 아담 가문의 유물이 일레인의 차지가 되다니.

너무 예상치 못한 개판 같아서 계속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때였다.

“그, 그럼 다음으로는 새 교황님의 축언이 있겠…….”

황태자의 일방적이고 무지막지한 시상식 종료 통보에 사회자가 진땀을 빼며 가까스로 폐막식을 진행하려 했다.

“잠깐.”

하지만 카셀이 불쑥 한 손을 들어 그것을 저지했다.

“그 전에, 상을 내릴 자가 한 명 더 있다.”

그 말에 나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상을 내릴 자가 또 있다고?’

그게 누굴지, 굳이 고민해 볼 필요도 없었다.

나는 내 옆에 있는 아담을 돌아보았다.

무슨 이유에서 기권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는 1등을 빼앗겼음에도 무덤덤해 보였다.

‘……아마, 진짜 1등이 누군지 사람들에게 알리려는 심산이겠지.’

굳이 일레인에게 상을 내린 직후 그러는 게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카셀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웬 생각지도 못한 놈이 꼼수를 써서 제 부하의 공로를 가로채 갔으니 약이 오를 만도 하겠지.

게다가 앞서 들은 아담의 성적과 실력은 나도 인정하는 바였다.

여기서 아담이 실질적인 1등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테니, 그에게 상을 내리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 모른다.

다만, 일레인의 기분이 조금 걸릴 뿐.

흘끔 그를 돌아보자, 일레인은 큰 불만은 없는지 예상외로 담담해 보였다.

‘……그래도 내심 속상하겠지.’

아까 전 나를 얼싸안으며 환히 웃던 그의 얼굴이 떠올라 마음이 좀 무거워졌다.

“상을 내릴 자가 한 명 더 있다니…… 대체 누구지?”

“기권한 2위분이 아닐까요?”

“2위라면, 아무래도…….”

황태자의 말에 관중석이 술렁였다.

굳이 밝히지 않아도 모두들 2위가 누구인지 알고 있는 눈치였다. 황태자가 새로이 상을 내리겠다는 이 또한.

“사, 상을 내릴 자가 누구일지…… 하명하십시오, 전하.”

사회자가 굽신거리며 말했다.

나는 차마 일레인을 계속 볼 자신이 없어 고개를 떨군 채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황태자가 상을 받을 자를 호명했다.

“도버 마을의 약재상, 샤리 아즈라엘.”

“!”

“고개 들고 앞으로 나오도록.”

당연히 아담을 호명하리라 여기던 나는 우선 차분히 현실 부정부터 했다.

‘잘못 들은 거겠지.’

여기서 남주가 나를 부를 리 없지 않은가. 나는 용사도 아니고, 토너먼트 참가자는 더더욱 아닌데.

그러나 그런 내 필사적인 현실 부정은 오래가지 못했다.

내 팔을 툭툭 건드리는 누군가의 몸짓.

“처, 천사님…….”

“샤리 아즈라엘. 내 말이 안 들리나?”

이어서 들리는 음산한 목소리.

나는 기름칠 안 한 로봇처럼 삐걱거리는 고개를 가까스로 들었다.

또다.

모두가 나를 주목하고 있었다.

특히, 빌어먹을 카셀 루크비히가.

‘진짜 나라고?’

나를 뚫어지라 보는 새빨간 시선을 견디지 못한 나는, 주변을 둘러보며 절망했다.

“그래, 너.”

그런 내 물음에 답하듯, 놈이 정확히 나를 손가락질했다.

그리고 입꼬리를 끌어 올린 채 귀신같이 웃었다.

“너무 황송하여 걷기 힘든 거면, 직접 끌어내 주지. 여봐라…….”

“아, 아니요! 갑니다, 가요!”

제자리에서 한 번 펄쩍 뛴 나는 그제야 현실을 받아들이고, 쭈뼛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누구지?”

“황태자 전하의 곁에 저런 이도 있었나?”

“로브 때문에 얼굴이 보이지 않는군!”

사람들의 쑥덕임이 내 귀에 유난히도 잘 들려 왔다.

‘왜, 왜……?!’

놈이 나를 바로 제 최측근들이나 앉는 자리에 앉힐 때부터, 영 불길하다 싶었지만.

이런 상황이 벌어질 줄은 꿈에도 예상치 못했다.

대체 왜 나한테 상을 주는 것이며, 상을 주더라도 굳이 왜 이 자리에서 준단 말인가.

‘이건 좋지 않아.’

이런 식으로 모두의 눈도장이 찍히는 것은 내가 세운 계획과 전혀 맞지 않았다.

황태자가 있는 부서진 황좌까지, 그 몇 걸음 안 되는 거리가 너무 멀게 느껴졌다.

미적거리며 가까스로 카셀 놈 근처에 다가선 순간.

타앗!

“으헉!”

별안간 놈이 내 팔을 휘어잡고 제 옆에 바짝 붙여 세웠다.

그렇게 나는 카셀을 가운데 둔 채, 토너먼트 우승자인 일레인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었다.

황태자는 나를 놓지 않은 채 곧장 본론을 꺼냈다.

“모두 알다시피, 나는 며칠 전 누군가의 습격으로 인해 사경을 헤맸다.”

카셀의 폭탄 발언에 당연하게도 장내가 충격과 공포로 물들었다.

“맙소사, 습격이라니……!”

“대체 누가 그런 무도막심한 짓을……!”

나 또한 매우 당황했다.

그가 이렇게까지 대놓고 그 사실을 공표할 줄 몰랐기 때문이다.

눈치가 빠른 이들은 저 말 한마디로도 황태자를 공격한 이가 누굴지 알아차렸을 것이다.

전대 교황이 사라진 지금, 황태자와 대척점에 선 인간은 딱 한 명뿐이기에.

느닷없는 자신의 발언으로 인하여 사람들이 충격에 휩싸이건 말건, 카셀은 아무렇지 않게 이어 말했다.

“애석하게도, 황궁에 있는 궁의며 약제사들은 모두 눈먼 것들뿐이더군. 그대로 꼼짝없이 황천길에 오르나 했는데…….”

“…….”

“헤일리 백작의 영지에 있던 약재상이 나를 살렸지.”

“…….”

“그자가 바로 이자이다. 모두 똑똑히 보도록.”

나를 제 옆에 바짝 세운 것도 모자라, 미친놈은 여태껏 붙잡고 있던 내 팔을 훌쩍 위로 쳐들고 흔들기까지 했다.

이쯤 되니 나는 해탈한 심정으로 웃기까지 했다.

‘괜찮아. 돌아가자마자 로브 바꿔 입으면 돼.’

다시 허름한 로브를 입으면 아무도 나를 못 알아볼 것이다.

남의 속이 바짝바짝 타들어 가든 말든, 카셀 놈은 잘도 지껄였다.

“이에 샤리 아즈라엘을 내 전담 약제사로 명하고, 보상으로 1억 코인을 내린다.”

‘1억 정도면 괜찮은 것 같기도…….’

역시 황태자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닌가 보다.

이렇게 사람 마음을 한순간에 들었다 내려놓다니.

조금 전까지 바짝바짝 타들어 가던 마음속에 거짓말처럼 평화가 찾아왔다.

마침내 말을 끝마친 황태자가 불쑥 나를 돌아보았다.

“어때. 이 정도면 보수로 충분하지 않나?”

“보수…… 요?”

“이전에 신전보다 얼마나 더 줄 수 있는지 따져 물었었잖아.”

‘내가 언제?!’

놈의 말에 어이가 없어졌다.

“신전에서 주는 것보다 돈을 더 많이 주면, 네놈을 고용할 수 있는 건가?”

“뭐, 성녀와 직접 담판을 지으면 되겠지. 황궁의와 무료로 교환하자고 하면 오히려 쌍수 들고 반길지도 모르겠군.”

나를 고용하겠답시고 막무가내로 협박한 건 놈이었다.

나는 그저 얼마나 줄지 들어나 보려고 물어본 것뿐이었고, 그마저도 선 계약이 있다는 말로 정중히 거절했다.

“1억 정도면 선 계약을 파기해도 될 만큼 성의 표시는 한 것 같은데.”

당황한 내 꼴이 재밌는지, 놈이 드물게 이를 드러내고 씨익 웃었다.

나는 그 모습에 일순, 멍해졌다.

이렇게 순수하게 웃는 카셀의 표정은, 게임을 시작한 이래 처음 보는 것 같아서…….

한 줄기 햇살이 스치는 그의 얼굴이 유독 반짝이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할 때쯤이었다.

“뭐, 어차피 그럴 필요도 없겠군. 토너먼트가 끝났으니 계약도 끝이겠지.”

카셀이 문득 일레인 쪽을 눈짓했다.

나는 그 말에 퍼뜩 정신을 차리고 일레인 쪽을 바라보았다.

말간 밀빛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일레인 그리셀다]가 강한 질투심을 느낍니다.」

떠오른 시스템 창과 함께 잠잠하던 일레인이 불쑥 검을 든 손을 쳐들고 커다랗게 외쳤다.

“이의 있습니다, 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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