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5화 (175/212)

“이의……?”

일레인의 외침에 황태자의 한쪽 눈썹이 위로 휙 들렸다.

느닷없는 이의 제기에 소란스럽던 장내가 한순간 고요해졌다.

‘네놈이 정녕 미쳤구나.’

나는 경악에 가득 찬 얼굴로 일레인을 돌아보았다.

황태자가 그렇다면 그런 거지, 여기서 이의가 왜 나온단 말인가.

“그응즈님…… 흘 믈은 들이 으쓸뜨 흐스즈으……(고용주님, 할 말은 둘이 있을 때 하시지요.)”

아무 말 하지 마.

지금은 그냥 감사하다고만 하고 가만히 짜져 있으란 말이야.

나는 황급히 일레인의 입을 틀어막으려 했다.

그러나 놈은 내 필사적인 도리질과 눈빛으로 전하는 쌍욕에도 굴하지 않고 비장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것도 하필 나를 가리키며.

“약재상 선생 누나…….”

“…….”

“아니, 샤리 아즈라엘은 비록 토너먼트에 참가하진 않았지만 제 우승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러니까 나를 황태자의 전담 약제사로 내어 줄 수 없다.

나는 놈이 이어서 할 법한 말을 상상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나.

“그렇기에…… 저 또한 보은을 할 수 있도록 허락해주십시오, 전하.”

이어진 일레인의 말에 나는 감았던 눈을 스르륵 떴다.

‘갑자기 보은은 무슨 보은?’

나는 그의 돌발 행동에 무척 당황했다.

이런 건 사전에 한마디도 나눈 적 없던 얘기였다.

우리는 시상식에서 상만 받고 쿨하게 퇴장하기로 사전에 입을 맞췄다.

그럴 만큼 상급 마물의 정수 10개는 꽤 임팩트 있는 결과물이었으니까.

상위권에 호명되는 것만으로도 이미 눈에 띄는 것은 자명한 일이었는데, 황태자의 최측근을 제치고 1등까지 차지했다.

그러니, 지금 이렇게 나대지 않아도 충분히 이목을 끌었단 소리다.

사전에 입 맞춘 대로, 시상식이 끝나면 곧장 조용히 퇴장했어야 한다.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이 자식아!’

나는 일레인을 바라보며 계속 눈짓했다.

하지만 그는 더 이상 나를 보지 않았다.

휘익!

허락을 구하듯 검을 거꾸로 세워 들고는, 황태자의 앞에 무릎을 꿇었을 뿐.

그간 아슬아슬하게 죽지 않을 정도의 무례한 언행을 일삼던 놈이, 자의로 황태자 앞에 무릎을 꿇다니.

내 눈으로 보고 있음에도 믿기지 않았다.

“지대한 영향이라.”

황태자는 일레인의 돌발 행동에 나처럼 당황하지 않았다.

턱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리는 그의 표정은 썩 의미심장했다.

“샤리 아즈라엘이 우승에 어떤 영향을 끼쳤지?”

카셀이 불쑥 물었다. 그러자 일레인이 기다렸다는 듯 답했다.

“그녀는 암흑단에게 잡혀 죽을 뻔하던 저를 구해주고, 오갈 곳 없던 제 가족들에게 집을 내어주었습니다.”

“…….”

“아무런 목표 없이 망나니처럼 살아가던 제게 삶의 목표를 심어주었고, 토너먼트에 참여할 수 있도록 독려도 해줬습니다.”

“…….”

“던전에 들어가기 두려워하던 제게, 치료사로서 함께 해주겠다고 먼저 나서준 것도 그녀입니다. 전하께서 그녀의 약을 먹고 건강을 되찾으셨듯, 저 또한 마물과의 전투 중 그녀 덕분에 여러 번 목숨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

“약재상 선생 누나는 제게도…… 생명의 은인이자, 부모와 같은 존재입니다. 제 우승의 8할이 그녀 덕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그래서…… 저는 약재상 선생 누나에게 우승 상품으로 받은 이 검을 바치고자 합니다. 부디 허락해주십시오.”

모두에게 ‘약재상 선생 누나’라는 괴상한 호칭이 까발려졌지만, 나는 수치심을 느낄 새도 없이 멍하니 일레인을 응시했다.

진지한 얼굴로 황태자에게 막힘 없이 말을 토해내는 일레인의 모습이 너무나도 낯설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저 붕어처럼 입을 벌린 채 검과 일레인, 그리고 카셀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검을 바치겠다?”

“…….”

“검을 바치는 행위가 무엇인지는 알고는 있나?”

일레인의 고백에 카셀이 건조하게 되물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조롱하는 투는 아니었다.

일레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저는 비록 정식 기사는 아니지만, 제국에서 기사가 레이디에게 검을 바치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정도는 압니다.”

비록 게임 세상이지만, 나 또한 그 정도는 알았다.

‘영원한 충성과 수호의 맹세.’

하지만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메인 캐 중 하나에게 충성 맹세를 받는 유저라니?

그런 맹세를 하려면 내가 아니라 남주이자 황태자인 카셀에게 해야 했다.

게다가 일레인과 나, 그리고 엘프들은 엄연히 고용계약으로 맺어진 사이였다.

내가 일레인에게 행한 모든 일은, 그가 하는 말처럼 온전한 호의로 베푼 일이 아니란 뜻이다.

나는 걷잡을 수 없이 흘러가는 이 상황을 대체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저는 무지한 이종족 출신이라, 기사도 같은 건 잘 모릅니다. 그러나 엘프들에게는 입은 은혜를 무조건 10배로 갚아야 한다는 불문율이 있습니다.”

그사이 일레인이 결연한 목소리로 재차 읍소했다.

“그러니 부디 제게도 검을 바치는 행위를 허락해주십시오, 황태자 전하.”

“저, 저는 괜찮습니다, 전하. 이 친구가 아직 어려서 하는 말이니 너무 괘념치 마십시오.”

나는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재빨리 덧붙였다.

그러나 일레인도, 카셀도, 아무도 내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다.

‘제발, 다들 왜 이래……!’

아담을 제치고 1등을 했으니, 몸을 사려도 모자랄 판에 일레인이 도대체 왜 이러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검 같은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다만 이런 돌발 행동을 괘씸하게 여긴 남주에게 일레인이 밉보일까 봐 두려울 뿐.

카셀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무표정한 그 얼굴을 보며 안절부절못하던 내가, 결국 참지 못하고 일레인이 머리를 다친 것 같다고 한마디 더 보태려던 순간.

“……기사 서임을 받았든, 받지 않았든, 오랜 전투에서 우승한 이들에겐 마땅히 명예가 주어지기 마련이지.”

마침내 남주가 무거운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

그는 일레인에게서 시선을 떼고, 돔 아래 토너먼트 참여자들이 줄지어 서 있는 경기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번 토너먼트는 단순히 힘과 능력의 우열을 가리고자 연 무술 대회 같은 게 아니다.”

“…….”

“제국은 아주 오래전부터 마물과 지긋지긋한 전쟁을 치르고 있지. 이 나라의 국민이라면, 모두 한 번쯤은 마물로 인하여 뼈아픈 상처를 겪었을 것이다.”

경기장 안에 한순간 적막이 가득 찼다.

그의 말이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인간들은 오랜 시간에 걸쳐 마물과 상생하는 법을 터득했지만, 여전히 마물로 인한 사건 사고는 끊이질 않았다.

게다가 최근 신전이 마물을 이용해 저지른 충격적인 비리가 밝혀지면서, 해묵은 증오와 상처가 곳곳에서 곪아 터졌다.

그러니 여기 있는 대부분의 참가자들에게도 마물과 관련된 불행한 기억은 존재했다.

카셀은 수 없이 죽고 다쳐 왔던 자신의 백성들을 돌아보며, 묵묵히 읊조렸다.

“목적이 뭐든. 지켜야 할 것을 위하여 지난 일주일간 치열하게 싸웠다면, 살아남은 그대들이 바로 제니스의 기사다.”

“…….”

“이번 토너먼트는 그저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을, 모두 명심하도록.”

“…….”

“또한, 우린 오랜 전쟁 끝에 승리할 것이다, 반드시.”

그저 담담한 목소리로 사실을 읊었을 뿐인데, 카셀의 말은 그 어떤 말보다 설득력 있게 느껴졌다.

‘아.’

나는 문득 눈살을 찌푸렸다.

그토록 간결하게 시상식을 끝내버린 조금 전 모습이 무색하게도, 진정한 통치자다운 그의 모습이…….

빛이 나 보였다. 찰나 눈이 부셔서, 반사적으로 눈살을 찌푸렸을 만큼.

고요한 경기장 내부를 한 바퀴 훑은 카셀의 시선이 마지막으로 일레인에게 닿았다.

“따라서 그대의 행위를 허락하지, 용사 그린 마스크.”

일레인은 짧은 묵례와 함께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막을 새도 없이 검을 들고 내 쪽으로 저벅저벅 걸어왔다.

심상치 않은 그의 기세에 나는 반사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그리고 그 순간.

콰직―!

한달음에 다가온 일레인이 별안간 내 발치에 힘껏 검을 꽂아 넣고는 다시금 무릎을 꿇었다.

“약재상 선생 누나.”

“어…….”

“받아…… 줄 거죠?”

초롱초롱하게 빛나는 밀빛 눈동자가 나를 또렷이 응시했다.

저 좋을 대로 일은 다 저질러 놓고,

이 기대감에 가득 차 있는 눈빛은 대체 뭐란 말인가.

「[일레인 그리셀다]가 당신에게 강한 기대감을 품습니다.」

「[일레인 그리셀다]가 당신에게 약간의 수줍음을 느낍니다.」

그 순간엔, 일레인이 내게 바친 검을 도저히 안 받을 수 없었다.

거절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황태자가 허락하고, 모든 귀족과 참가자들이 내 다음 행동만을 주시하고 있는 빌어먹을 상황에서…….

“와아아아아아―!”

거의 떠밀리다시피 검의 손잡이를 쥐자, 우레와 같은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제니스 제국 만세!”

“황태자 전하 만세!”

“꺼지지 않는 제니스의 불빛이여, 영원하라!”

일레인의 얼굴이 뿌듯함으로 물들었다.

그런 그를 곁눈질하며, 나는 심란한 마음으로 검을 내려다보았다.

[Lv.999 루미에카르]

‘미친…… 이게 이렇게 다시 내 손으로 돌아온다고?’

대체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내가 회생시켜서 아담 주라고 남주에게 건넨 아담의 가보가, 토너먼트의 우승 상품으로 일레인에게 주어졌다가 다시 내 손에 돌아오게 됐다.

부메랑도 이렇게는 안 돌아오겠단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황태자 카셀 루크비히]가 당신의 행동에 만족감을 느낍니다.」

「[아담 헤일리]가 당신을 보며 약간의 후회를 곱씹습니다.」

「[22대 교황 니세]가 당신에게 일말의 동경심을 가집니다.」

「[일레인 그리셀다]가 당신에게 강한 호감을 가집니다.」

귀청이 떠나가라 울리는 함성 사이로 우르르 떠오르는 무수히 많은 시스템 창의 향연 속에서…….

나는 이 게임이 어디로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 * *

천만다행히도 황태자 궁으로 돌아가는 마차에서는 카셀과 동석하지 않아도 됐다.

곧장 용사들을 위한 연회가 열려서, 나를 제외한 모든 메인 캐들이 그쪽으로 이동했기 때문이다.

귀족도, 토너먼트 참가자도 아닌 나는 그 자리에 참여할 수 없었다.

그러나 전혀 서운하거나 아쉽지 않았다.

오늘 받은 지대한 관심만으로도 나는 이미 심신이 너덜너덜해진 상태였기에.

일레인은 늦은 밤이 돼서야 거나하게 취한 채로 기어들어 왔다.

마물 토벌 출정까지 황태자 궁에 머물게 됐다는 소식은 전해 들었지만, 왜 하필 내 옆방인지는 알 수 없었다.

“헤헷! 아까 봤어요, 누나?! 다들 한목소리로 그린 마스크 연호하는 거? 연회에서도 제가 누나한테 검을 바친 이야기밖에 없었어요! 역시 1위 위엄, 개쩔어!”

그런 남의 심정도 모르고, 놈은 막무가내로 내 방에 쳐들어와 신난 목소리로 주정을 부려댔다.

‘취했으면 제 방으로 돌아가서 발이나 닦고 잘 것이지,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새키가…….’

하지만 마침 잘됐다.

언제 놈을 드잡이질할지 영 타이밍을 못 잡고 있었는데, 지금이 기회였다.

달칵.

텅 빈 복도를 확인한 후 신속하게 문을 닫은 나는, 이윽고 주먹을 쥐고 나지막이 속삭였다.

“온슬럿.”

“악! 왜 때려요! 악, 잠시만, 누나!”

퍽, 퍽! 퍼억!

잠시간 방 안에 매타작 소리와 함께 일레인의 비명이 꽥꽥 울려 퍼졌다.

“악! 아니, 이유라도 알고 맞자고요! 토너먼트 1위 용사 모양 빠지게……!”

“1위 용사? 너 돌았지.”

나는 그제야 놈을 후려갈기던 것을 멈추고 도끼눈을 떴다.

“대체 그 자리에서 검은 왜 나한테 바친다고 한 건데?! 사전에 그런 얘기 없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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