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6화 (176/212)

일레인이 내게 후려 맞은 어깨를 문지르며 퍽 억울한 얼굴로 답했다.

“아니, 마침 누나 칭찬 타임인 거 같길래…… 사실 1등 한 것도 다 제 공도 아닌데, 누나도 같이 언급하면 좋잖아요.”

“내가 말했지. 나는 눈에 띄면 안 되는 사람이라고.”

“치. 제가 말하기도 전에 이미 황태자가 누나 유명인사로 만들어 놨거든요.”

“…….”

“황태자만 그랬게요? 교황이 누나 안았을 때부터 다 쳐다봤거든요? 다들 누구냐고 쑥덕거리더만.”

맞는 말인지라 나는 순간 말을 잃었다.

일레인이 그런 내 눈치를 은근슬쩍 보며 물었다.

“그런데 교황 말이에요. 걔 맞죠? 그때 호텔에서 누나가 데려왔던 그 거지 놈. 왜 누나가 여자애라고 박박 우겼었잖아요. 사내새끼 맞더만!”

“…….”

“그새 얼굴 때깔이 완전 달라져서, 못 알아볼 뻔했네.”

혼잣말처럼 잘도 주절거리는 그를 보며 나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난 대체 네가 뭔 생각을 하면서 사는지 모르겠다.”

“제가 할 말이거든요.”

일레인이 입술을 삐죽이며 덧붙였다.

“이왕 이렇게 된 거, 그냥 즐겨요. 유명한 것도 다 한때라고요.”

“하…… 머리야.”

놈의 무책임한 발언에 눈앞이 아찔해졌다.

그건 말처럼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나는 어쨌든 곧 엔딩과 함께 사라질 예정이기에, 오늘과 같은 과한 관심과 주목은 썩 좋지 않았다.

게다가 정식으로 인정받은 용사도 아닌, 일개 약재상이 이런 엄청난 무기를 가지고 있어 봤자 제대로 쓸 수도 없을 것이다.

나는 더 이상 본 모습을 내보일 수 없는 처지였기에.

‘뭐, 지금까지라고 제대로 쓰인 것도 아니긴 하지만.’

나는 방 한편에 대충 놔둔 검을 흘깃 눈짓하며 심통 난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검을 마구 내돌릴 거면, 차라리 내게 돌려달라는 말이 현실이 돼버렸다.

그래서 기분이 무척 이상했다.

내가 검을 받아들이던 순간 만족감을 드러냈던 카셀의 상태창도 그렇고…….

어쩌면 암시장 때처럼, 일부러 검을 미끼로 쓴 게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럴 리 없지.’

나는 재차 생각했다. 내 연기와 도망질은 제법 완벽했다.

나는 루미에카르로부터 시선을 거두고, 진짜 궁금했던 것을 일레인에게 물었다.

“……왜 하필 저 검이야?”

“네?”

“나한테 그렇게 보은하고 싶었으면, 네가 받은 상금 줬으면 됐잖아.”

경기장에서 말한 일레인의 발언이 진심이라는 것쯤은 잘 알았다.

그가 내게 정말로 고마움을 느끼고 한 행동이라는 것도.

“허.”

내 물음에 일레인이 술이 좀 깨는 듯한 얼굴로 헛웃음을 내뱉었다.

“누나, 그 검 가지고 싶어 했잖아요?”

“……내가?”

뜬금없는 소리였다. 나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되물었다.

“내가 언제?”

“우승 상품 얘기만 나오면 한숨을 푹푹 쉬었으면서…… 그 검, 헤일린지 헬렐렌지가 다시 가져가도 문제라고 그랬잖아요.”

‘내가 그랬던가?’

토너먼트 도중 일레인과 목표 순위에 대해 몇 번 이야기를 나눈 것은 기억났지만, 그런 말까지 한 줄은 몰랐다.

물론 아담의 전용 무기가 돼야 했을 검이 우승 상품으로 나온 게 내내 기가 막히긴 했다.

아담 놈이 1등을 해서 다시 가져가더라도, 또 언제 마구잡이로 내돌려질지 모르겠다고 불안해하기도 했고…….

‘나도 모르게 계속 푸념했나 봐.’

루미에카르는 이미 카셀도, 아담의 무기도 아닌, 하나의 도구로 전락한 지 오래란 생각에 낭패스러웠던 것도 같다.

“무려 황태자가 내린 검을 제 마음대로 남한테 막 넘길 순 없잖아요. 주려면 남들 다 보는 앞에서 허락받고 주는 수밖에 없었다구요.”

“…….”

“저도 완전히 아무 생각 없이 사는 건 아니거든요? 쳇!”

뭔 생각으로 사냐는 핀잔이 퍽 억울했는지, 일레인이 울컥한 음성으로 반박했다.

그렇게 말하니 또 할 말이 없어졌다.

나는 하는 수 없이 조금 우물쭈물하다가 말했다.

“……고마워, 그린 마스크. 덕분에 저걸 다 손에 넣었네.”

“…….”

“가질 수 있을 거라고 한 번도 생각한 적 없는데…….”

내가 회생시켰지만, 내가 가질 수 있는 무기라고 여긴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아담의 기권으로 인해 일레인이 가지게 됐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여전히 루미에카르가 내 손에 돌아온 게 영 얼떨떨하게만 느껴졌다.

내 감사 인사에 일레인이 불퉁한 얼굴로 답했다.

“때린 것도 사과해요.”

“그건 안 미안해.”

“아, 왜요!”

“앞으로도 나한테 한마디 말없이 돌발 행동하기만 해.”

“누난 진짜 분위기 깨는 데 선수다…… 깜짝 선물 몰라요?!”

깜짝 선물이고, 지X이고.

안 그래도 엉망진창인 망겜인데, 계획에도 없는 일들이 어떤 상황을 초래할지 알 수 없었다.

그의 마음은 고마웠지만,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진지하게 말했다.

“쓸데없는 짓 말고 시키는 거나 잘해. 황태자가 허락해줘서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어쩔 뻔했어? 네가 괘씸해서, 괜히 상금까지 도로 뺏기라도 했으면 어쩔 뻔했냐고.”

“설마, 황태자씩이나 돼서 쩨쩨하게 그러겠어요?”

“너는 그 인간이 아직도 제정신 같아 보여?”

“…….”

내 말에 일레인의 표정이 숙연해졌다.

일레인도 카셀이 무슨 변덕으로 내게 검을 넘기는 것을 허락했는지 의뭉스럽긴 마찬가지일 터.

그러나 몇 번 부딪혔을 때를 떠올려 보면, 내 말이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일이라는 사실을 깨닫기라도 한 모양이다.

시무룩해진 그의 기세에, 나는 조금 누그러진 목소리로 덧붙였다.

“오늘 일은 고맙지만, 앞으로 나 챙겨줄 생각 말고 네 몫이나 잘 챙겨. 아직 집도 절도 없는 네 처지와 내 집에 얹혀사는 네 가족들만 생각하라고.”

“아, 알았다구요! 하여튼, 냉정하기는.”

「[일레인 그리셀다]가 당신에게 약간의 실망감을 가집니다.」

「[일레인 그리셀다]가 당신을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이라 생각합니다.」

간만에 부정적인 문구가 떠올랐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아직도 많은 사람이 모인 곳에서 황태자로부터 특별히 상을 받고, 1등을 한 일레인에게 우승 상품을 넘겨받은 것이 엔딩을 내는 데 이로울지 가늠이 가지 않았다.

고작 게임일 뿐인데, 뭐 이렇게 신경 쓸 게 많은지 알 수 없었다.

그렇지만.

“그린 마스크.”

“……왜요.”

“너는 만약…….”

내가 없어지고 나면, 어떻게 할 거야?

입가에 맴도는 의미 없는 질문을 망설이고 있을 무렵.

“이야기는 다 끝났나?”

“악!”

“으악!”

불쑥 끼어드는 불청객의 목소리에 나와 일레인이 동시에 비명을 지르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팔짱을 낀 채 문틀에 기대어 우리를 지켜보는 장신의 남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 카셀이었다.

“헉.”

일레인이 숨넘어가는 소리를 내었다.

나 또한 예상치 못한 인물의 등장에 기겁한 것은 매한가지였다.

‘분명 문을 닫았던 것 같은데…….’

대체 어느 틈에 온 것이란 말인가.

“꽤 열띤 토론이더군.”

놈은 뻣뻣하게 얼어붙은 우리를 보며 귀신같은 미소를 지었다.

“기대에 부흥할 만큼 쩨쩨하지 못해 미안한걸.”

“대, 대체 언제……! 아니, 문을 닫고 있었는데 왜……!”

몹시 당황해서 마구 더듬으며 따져 묻자, 놈이 태연하게 받아쳤다.

“내 궁에서 내가 못 들어갈 곳이라도 있나?”

“…….”

“이야기 다 끝났으면 잠시 나오지, 샤리 아즈라엘. 할 말이 있다.”

놈이 문밖으로 고개를 까딱거렸다.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지만, 나는 잠자코 자리에서 일어났다.

“……누나.”

일레인이 그런 나를 걱정스럽게 붙들었다.

“같이 가요.”

“아니. 넌 네 방으로 돌아가 있어.”

“그치만…….”

나는 괜찮다는 뜻으로 어깨를 한 번 으쓱였다.

설마, 고작 뒷담 좀 했다고 사람을 죽이기라도 할까.

그러나 그 생각을 떠올리자마자 불안감이 엄습했다.

‘……정말 그러면 어떡하지?’

나는 움직이지 않는 발을 억지로 움직여 카셀의 앞에 멈춰 섰다.

놈이 그런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다가, 문득 눈살을 찌푸렸다.

“참…… 쥐새끼처럼 빨리도 갈아입었군.”

그가 준 화려한 로브를 벗고, 원래의 내 허름한 로브로 갈아입은 것을 지적하는 것이었다.

‘쥐새끼라니!’

물론 돌아오자마자 잽싸게 갈아입었다. 그 누구도 나를 알아보지 못하도록.

썩 못마땅한 표정으로 나를 흘겨보던 카셀이 이내 휙 등을 돌렸다.

“따라와.”

별수 없이 그런 그의 뒤를 쫓아가며 나는 주머니 속을 뒤적였다.

‘뒷담 했다고 죽이려 들면, 내가 먼저 선빵 치고 튄다.’

포션이 들어 있지 않은 빈 유리병들을 매만지며 얼마쯤 걸었을까.

다행히도 나를 죽이려 들 예정은 아니었는지, 카셀은 음침한 궁 구석이 아닌 자신의 집무실로 향했다.

문을 열고 먼저 안으로 들어간 그를 뒤따라 들어갔을 즈음, 그가 접객용 소파를 턱짓했다.

“앉아.”

“죄송합니다, 전하.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제발 목숨만은…….”

나는 일단 주섬주섬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이것을 위해 함께 가주겠다는 일레인을 떼놓고 온 것이었다.

비굴하지만, 나도 나름 체면이라는 게 있는 인간이기에…….

“허.”

먼저 상석에 앉던 그가 나를 어처구니없다는 듯 바라보며 실소했다.

“헤일리에서부터 생각했던 건데…… 그대의 눈에는 내가 무슨 피와 살육에 미친 인간으로밖에 안 보이는 모양이지?”

“…….”

대답하지 않자 그가 이를 악물고 뇌까렸다.

“당장 일어나.”

“네.”

심상치 않은 기세에 나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후…….”

그런 내 일련의 행동을 지켜보던 카셀이 흘러내린 앞머리를 쓸어 올리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황태자 카셀 루크비히]가 당신의 정신 상태에 깊은 번뇌를 느낍니다.」

덩달아 떠오른 시스템 창에 나는 남몰래 입술을 삐죽였다.

‘아니, 내가 없는 일 지어내서 이러겠냐고.’

놈이 별것도 아닌 일로 여러 번 나를 위협했던 것은 사실이지 않은가.

속으로 억울함을 토로하는데, 그가 불쑥 테이블 중앙에 놓여 있는 티팟을 가리켰다.

“차라도 들 텐가?”

“아니요.”

“그럼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지.”

마주 보고 한가로이 차를 들 사이는 아니었기에, 곧장 거절하자 그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말했다.

“며칠 후, 마물 토벌을 위하여 북쪽에 있는 어둠의 숲으로 떠날 예정이다.”

토너먼트가 끝난 후 남주는 곧장 토벌단을 꾸려 먼 여정을 떠난다.

당연하게도 토벌단 파티원은 유저를 포함한 메인 캐릭터들이었다.

“……그렇군요.”

이미 알고 있는 게임 시나리오에 그저 묵묵히 답하자, 카셀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놀라지 않는군.”

“토너먼트가 끝났으니 그럴 거라고 예상은 했습니다.”

한 가지 의문인 것은, 이 얘기를 왜 내게 하냐는 것이다. 그것도 이 으슥한 밤에 따로 불러서.

‘하려면 일레인에게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왜인지 잦아들었던 불안감이 다시금 무럭무럭 샘솟기 시작했다.

“그……러면 그린 마스크도 마물 토벌에 데리고 가실 겁니까?”

나는 애써 치솟는 불길함을 무시한 채 물었다.

마침 나도 일레인이 카셀의 파티원으로 발탁되는 것을 확인하고 싶던 차였다.

우승자이니 당연히 토벌단에서 빠질 리는 없겠지만, 워낙에 변수가 잦은 망겜이기에 확신할 수 없었다.

카셀의 입으로 엔딩까지 함께할 동료로 인정을 받았다는 사실과, 토벌단 파티원이 제대로 형성됐음을 확인받고 싶었다.

그러나.

“아니.”

조금의 재고도 없는 거절에 나는 입을 떡 벌렸다.

“그린 마스크는 데리고 가지 않을 예정이다.”

“……예?! 왜, 왜…….”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나는 버벅대다가 간신히 그를 설득했다.

“그는 토너먼트 우승자입니다. 그런 전력을 쓰지 않는 건 큰 인적 낭비…….”

“그린 마스크뿐만 아니라, 싸움을 할 줄 아는 자들은 모두 수도 근경에 남겨둘 계획이다. 어둠의 숲으로 들어가는 건 오로지 나 혼자뿐이지.”

“혼자요? 혼자는 너무 위험하잖아요. 토너먼트 순위가 높은 자들 위주로 토벌단을 꾸리는 게…….”

“아, 혼자는 아니군.”

내 말을 족족 가로챈 채 제 할 말만을 내뱉던 카셀이 문득 잊고 있던 것을 떠올리듯 덧붙였다.

“어둠의 숲으로 가는 것은 너와 나, 단둘뿐이다, 샤리 아즈라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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