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7화 (177/212)

“…….”

집무실 안에 한동안 스산한 적막이 내려앉았다.

나는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저 놈의 말을 곱씹고 또 곱씹으며 현실을 부정하다가,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지금…… 뭐, 뭐라고 하셨죠?”

“귓구멍이 막힌 건가?”

두 번 말하는 게 짜증이 났는지, 카셀이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넌 나와 함께 마물을 토벌하기 위해 떠난다. 그러니 알아서 채비하도록.”

“아뇨, 아뇨! 잠시만요!”

그것으로 할 말은 끝이라는 듯이 자리를 뜨려는 놈의 태도에 나는 벌떡 일어나 그의 소맷자락을 꽉 붙들었다.

“제가 지금 이해가 안 가는데…….”

“…….”

“제가 거길 왜 가야 하죠?”

어차피 파티원으로서 [어둠의 숲]으로 가더라도 거기서 내가 할 일은 그 안에 있는 마물들을 죽이는 무한 사냥 퀘스트를 반복하는 것뿐이었다.

나는 여타 유저들과는 달리 퀘스트 업적도, 그로 인해 얻을 수 있는 아이템도 아무것도 필요 없었다.

그렇기에 나는 [어둠의 숲] 대신 수도에 남아서 곧 다가올 ‘두 번째 재앙’이나 막을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 후 숲을 빠져나온 메인 캐들이 최종 보스를 처치하기 위해 [고대 마룡의 던전]에 입성할 때쯤 은밀히 합류하는 것.

이게 바로 내 ‘물밑 작전’의 핵심이었다.

그렇기에 더더욱 단둘이 [어둠의 숲]으로 가자는 미친 소리가 조금도 와닿지 않았다.

“…….”

이런 내 황망한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카셀 놈은 말없이 시선을 내리깔았다.

새빨간 눈동자가, 놈의 소맷부리를 거의 찢어먹을 듯 쥐고 있는 내 손에 닿았다.

정신이 단단히 나갔나 보다. 맨손으로 놈을 덥석덥석 잡다니.

“으억! 죄, 죄송……!”

나는 화들짝 놀라 집어던지다시피 카셀의 팔을 놓아주었다.

그러자 놈이 와락 일그러진 얼굴로 ‘탁탁!’ 하고 구겨진 옷자락을 폈다.

다행히도 그는 아무런 짓도 하지 않고 다시금 제자리에 앉았다.

나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서둘러 입을 열었다.

“전하, 다시 생각해 보십시오. 저는 그저 일개 약재상에 불과합니다.”

“그래. 네놈이 잔재주나 좀 부리는 하잘것없는 약팔이라는 것쯤은 잘 알고 있어.”

“그러니까요! 그런데 저와 그 위험한 곳에, 그것도 단둘이 가겠다뇨?”

머리에 총이라도 맞았니?

솔직히 그렇게 묻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았다.

그러나 안절부절못하는 나와 달리, 카셀은 태연자약한 음성으로 대꾸했다.

“하지만 별수 없지 않나? 지금으로선 너만이 내 전담 약제사이니, 전투 중에 부상을 입으면 치료나 처방을 해야 할 거 아니야.”

“전 아직 전하의 전담 약제사를 맡겠다고 한 적 없는데요?”

놈의 얼굴이 사납게 꿈틀거렸다.

「[황태자 카셀 루크비히]가 당신에게 일말의 살심을 가집니다.」

한 세트처럼 떠오르는 시스템 창에 나는 허겁지겁 말을 돌렸다.

“그, 그리고 그런 거면 성녀, 아니, 교황님! 교황님이 있지 않습니까?”

원래 토벌 파티원에 힐캐 한 명 끼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게다가 니세는 강력한 치유력에, 마물을 조종하는 능력도 지니고 있지 않은가.

뻔히 존재하는 힐캐를 놔두고 왜! 굳이! 하잘것없는 잔재주를 가진 약팔이를 데리고 가겠다는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내 눈빛을 읽은 걸까. 놈이 드물게 그 이유를 답해줬다.

“만인에게 베풀어야 할 교황의 신성한 힘을 황태자가 사사로이 독차지해서야 쓰나.”

“사사로이는 아니지 않습니까? 마물 토벌이 제국을 위해 얼마나 중요한 일인데…….”

“그리고.”

카셀은 내 말을 가뿐히 무시한 채 깍지를 꼈다.

그 상태로 상체를 숙여 테이블 위에 손을 올린 그가, 짐승처럼 형형히 빛나는 눈으로 나를 쏘아보았다.

“……1억씩이나 받아 처먹어 놓고, 이제 와서 입을 싹 닦으시겠다?”

“네? 그, 그건…….”

그건 네가 목숨 살려준 값이라며!

억울해서 미칠 것 같았다.

그런데 마치 그런 내 머릿속을 읽기라도 한 듯 놈이 느긋하게 지껄였다.

“다른 약제사들도 충분히 제조할 수 있는 하급 중화제와 약재 한두 개 던져주고 그만큼이나 받는 건 좀 과하단 생각 안 드나?”

“한두 개는 아닌데요.”

“1억의 값어치를 할 만큼도 아니지.”

‘개XX야!’

분하지만 할 말이 없었다.

죽어가는 놈을 위해 무려 천 개씩이나 되는 중화제를 갖다 바쳤지만, 중화제 자체는 그렇게 값나가는 물건은 아니었다.

‘XX놈! 그때 그냥 콱 죽게 놔뒀어야 했나?’

나는 거칠게 숨을 씨근덕거리며 과거의 내 행동을 후회했다.

그러나 다시 되돌아가더라도 똑같이 중화제를 만들어 갖다 바칠 것이다.

죽어가는 남주를 방치해서 꼼짝없이 게임 오버 당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그때였다.

분에 못 이겨 바르르 떠는 내가 우스웠는지, 놈이 별안간 픽 웃음을 터뜨렸다.

“걱정 마라. 네놈에게 나 대신 싸우라는 소리 같은 건 안 할 테니까.”

나를 달래기라도 하려는 모양인지, 그가 조금 누그러진 음성으로 덧붙였다.

“1억.”

“…….”

“어둠의 숲에서 무사히 돌아오게 되면, 보상을 추가로 지급하지.”

놀랍게도 내게 싸우란 소리를 하지 않겠다는 말을 들었을 때보다 훨씬 더 진정되는 제안이었다.

‘어차피 엔딩 보면 쓸 수도 없는 게임 머니 따위…….’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1억 코인을 준다는 소리에 또 귀가 번쩍 트였다.

그렇지만 여전히 카셀이 굳이 나를 데려가려는 연유를 좀처럼 알 수 없었다.

“……저는 전하께 별로 도움이 안 될 겁니다.”

나는 망설이다가 마지막 설득을 시도했다.

“싸움은 당연히 못 하고요……. 전술도 잘 몰라요. 의리…… 같은 것도 거의 없다고 볼 수 있습니다.”

“…….”

“헤일리에서처럼, 위험하다고 판단될 시 전하를 팽개치고 홀로 도망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괜찮으시겠습니까?”

“하.”

그때를 떠올리는지, 카셀이 별안간 실소를 터뜨렸다.

내심 뜨끔했지만, 나는 굴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이런 저보다, 전하를 충분히 보필할 수 있는 용사님을 데리고 가시는 게 훨씬 더 도움이 되실 거예요. 예를 들면 헤일리 백작님 같은…….”

“괜찮아.”

하지만 카셀은 더 들을 것도 없다는 듯 내 말을 끊었다.

“네가 그곳에서 할 일은 하나뿐이니까. 내가 잠들면 시간을 재서 깨우는 것.”

“깨우는 것이요.”

“그래.”

그거야 헤일리에서 지긋지긋하게 했던 일이지 않은가.

하지만 이제 카셀은 포션 중독으로 인하여 더는 [불면 유발 포션]을 먹을 수 없는 상태였다.

그도 그것을 잘 알 것이다. 그럼에도.

“왜일까.”

“…….”

“너만큼 날 잘 깨워줄 자가 따로 없을 것 같군.”

그는 이상한 이유를 들어 [어둠의 숲]에 가기를 종용했다.

나는 새어 나오는 한숨을 삼켰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피할 수 없는 일 같았다.

‘제작자 놈들한테 따져도, 본 시나리오에서 벗어나지 않은 변칙이나 남주의 의지라 어쩔 수 없다는 소리나 지껄이겠지…….’

그렇다면.

“정식으로 고용 계약서를 써주실 수 있습니까?”

“고용 계약서?”

“네. 마물을 완전히 토벌할 때까지 보수 및 안전을 책임지신다는 내용이지요. 읽어보시겠습니까?”

그가 허락의 말을 내뱉기도 전에, 나는 주머니에서 종이 뭉텅이를 잽싸게 꺼내 건넸다.

그것을 받은 카셀이 종이를 성의 없이 휙휙 넘겨보았다.

그러다가 마지막 장에서 그의 시선이 우뚝 멈췄다.

“고용주 카셀 루크비히, 고용인…….”

“…….”

“그린 마스크?”

“전하께서도 아시다시피, 지금 저는 아직 용사 그린 마스크에게 고용된 상태입니다.”

나는 이때다 싶어 냉큼 답했다.

내가 건넨 것은 일전에 일레인을 처음 만났을 때 작성했던 고용 계약서였다.

안타깝게도 현재까진 고용주의 이름에 내 멋대로 황태자의 이름을 써넣었던, 사기 문서였다.

하지만 당사자의 서명을 받으면, 더는 사기 문서가 아니게 되지 않는가?

“그런데?”

“그런데 전하께서 지금 상황에 그린 마스크를 고용하시게 된다면, 그의 휘하에 있는 저 또한 자연히 부릴 수 있게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이 문서에 서명을 하라?”

“바로 그것이지요.”

고개를 끄덕이자, 카셀이 종이에서 시선을 떼고 나를 돌아보았다.

“……꼭 이렇게 될 것을 알고 준비라도 한 것 같군.”

“하, 하.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여기 미리 쓰여 있는 내 이름은 뭐지?”

어색하게 웃는 나를 샅샅이 훑어보던 놈이, 서명란 옆에 쓰여 있는 제 이름을 짚었다.

끙, 하고 앓는 소리를 낸 나는 울며 겨자 먹기로 아무렇게나 지껄였다.

“그건…… 그냥 가계약서로 아무렇게나 써놓고 다니는 겁니다. 새 의뢰인들에게 과거 의뢰인으로 이렇게 대단한 사람도 있었다는 것을 어필하기 위해…….”

“…….”

“그…… 일종의 홍보 수단 같은 것이지요.”

“사기를 치는 방법도 참 여러 가지로군.”

내 말 같지도 않은 변명에 놈이 가차 없이 이죽거렸다.

그러나.

「[황태자 카셀 루크비히]가 당신의 언행에 약간의 흡족함을 느낍니다.」

막 떠오른, 놈의 말과는 상반된 시스템 창에 나는 입술을 삐죽거렸다.

카셀은 미리 쓰여 있는 제 이름이 영 석연치 않은 듯했으나, 결국 펜을 뽑아 들었다.

내가 대충 끄적여 놓은 그의 이름 옆에 멋들어진 서명이 휘갈겨졌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조금 감동했다.

‘드디어……!’

가짜 계약서가 진짜 계약서로 탈바꿈됐다.

일레인에게 서명하라고 권할 때는 그저 막연하게 생각했을 뿐인데, 진짜로 이게 현실이 될 줄 몰랐다.

이로써 일레인 또한 빼도 박도 못하는 카셀의 따까리…….

아니, 동료 중 하나가 됐다.

‘게임 시작할 때만 해도 이 미친놈들을 다 어떻게 뭉치게 하나 했는데…….’

비록 정석적인 플레이와는 거리가 매우 멀었지만, 어쨌든 최종 보스 토벌을 위한 파티원 형성.

성공이다!

나는 이런 내가 너무나도 기특해서 미칠 것 같았다.

벅차오르는 감정으로 카셀이 서명한 계약서를 소중히 갈무리하고 있자, 그가 문득 물었다.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뭐지?”

“예? 무슨…….”

“토너먼트 참여를 종용하는 것도 모자라, 고용 계약서까지…… 그린 마스크를 내 곁에 붙여 놓지 못해 안달 나기라도 한 것처럼 굴고 있잖아.”

그의 말에 나는 흠칫했다.

너무 티 나게 행동했나 싶어서다.

하지만 그도 대충 눈치챈 마당에, 이제 와 아닌 척하는 것도 우스웠다.

“누누이 말씀드리지만, 그린 마스크는 훌륭한 용사이자 전력이지 않습니까.”

“…….”

“당연히 토벌 성공과 전하의 승전을 위해서지요.”

나는 낯색 하나 바꾸지 않고 태연히 되뇌었다. 카셀이 곧바로 코웃음 쳤다.

“1억짜리 승전이라. 꽤 나쁘지 않은 수지타산인데.”

“…….”

“오늘 네게 들은 말 중 가장 웃긴 말이군.”

뭐라 비웃어도 상관없었다. 내 말은 진심이었으니까.

본래 시나리오대로라면 카셀을 비롯한 토벌단은 [어둠의 숲]에서 구르며 서서히 동료애를 다지게 된다.

하지만 이번 고용계약으로 인해 숲에 가는 것은 나뿐이니, 파티원들끼리의 단합은 물 건너가게 됐다.

물론 일레인을 카셀 곁에 두게 된 것은 잘된 일이지만…….

‘이래도 되는 걸까?’

무수히 많은 게임 오버 중에서 카셀이 동료를 잃고 미쳐 날뛰는 루트도 잦은 편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놈을 보면, 일레인은 물론 아담이 죽어 넘어져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것 같았다.

‘아냐! 모로 가도 엔딩으로만 가면 돼.’

차라리 그와 단둘이 [어둠의 숲]으로 가는 것은 잘된 일일지 모른다.

일정 시간이 지나면 잠을 깨워달라는 것을 보니, 카셀은 ‘두 번째 재앙’을 어느 정도 통제하려는 모양인 듯했다.

어쩌면 예상했던 것보다 더 빨리 끝날지 모른다는 긍정 회로를 돌릴 무렵.

“늦었으니, 오늘은 이만 돌아가지.”

불쑥 축객령을 들렸다.

“먼 길 떠나려면 준비할 게 많겠군.”

“…….”

“재밌는 여정이 되겠어. 기대되지 않나?”

정말 잘된 일일까?

나는 서늘하게 웃으며 미친놈처럼 중얼거리는 남자를 보며 드는 불안함을 애써 힘겹게 털어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