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8화 (178/212)

* * *

다음 날.

카셀은 꼭두새벽부터 일레인을 포함한 토너먼트 상위권 용사 25인을 집합시켰다.

왜인지 나 또한 강제로 참석해야 했다.

“모두 나에 대한 소문을 한 번쯤은 들어 본 적 있겠지. 악몽의 군주라고.”

내게 그랬듯 그는 덤덤하게 용사들에게 통보했다.

“신전에서 예언하기를, 곧 수도 근경에 재앙이 찾아올 것이라 한다.”

카셀이 제 옆에 있던 니세를 눈짓했다.

그러자 그가 말간 얼굴로 고개를 끄덕여 동조했다.

갓 교황이 된 니세가 페막식까지 참여한 게 좀 의아했는데, 일찍이 두 사람 간엔 모종의 거래가 오간 것 같았다.

회귀를 반복한 카셀은 두 번째 재앙이 찾아올 것을 알고 있겠지만, 직접 말하면 괜한 반발을 살지 모르니 예언으로 포장하는 듯했다.

나는 퍽 가까워 보이는 카셀과 니세를 묘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교황 옷 안 입고 있었으면, 여주라고 착각할 만도…….’

물론 폐막식에서 으르렁거리던 두 사람을 떠올리면 전혀 그런 사이는 아닌 듯했지만.

나로선 메인 캐들이 알아서 뭉치면 좋았다.

하지만 얼마 전까지 니세가 여주라고 굳게 믿어선지, 두 사람이 나란히 선 그림이 기묘하게 느껴졌다.

“최대한 시기를 늦춰 보겠지만, 완전히 재앙을 막을 수는 없다. 그렇기에 그대들의 도움이 절실하다.”

카셀은 긴장감이 감도는 좌중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나는 내일 곧장 어둠의 숲으로 토벌을 떠날 예정이다. 마물을 탄생시키는 핵을 제거할 때까지, 그대들이 남아 수도를 지켜주길 바란다. 물론 보상은 확실히 하지.”

그가 말을 끝맺자 장내에 싸늘한 정적이 찾아왔다.

토너먼트가 끝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재앙과 맞닥뜨리게 생겼으니, 두렵기도 하고 기가 막히기도 할 것이다.

그때였다. 고요한 정적을 가르고 누군가 손을 들어 질문했다.

“어둠의 숲에 가는 인원은 누구누구입니까?”

멀리서도 눈에 띄는 초록 머리. 일레인이었다.

그는 심각해진 다른 용사들과 달리, 황태자의 발언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했다.

“어둠의 숲으로 가는 자는 나뿐이다.”

카셀이 나지막이 대꾸했다.

‘저게.’

잠자코 상황을 지켜보던 나는 욱하는 마음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아무리 내가 싸움 못 하는 평범한 약재상을 표방하고 있다지만, 어쨌든 이제 정식으로 고용됐지 않은가?

뻔히 같이 가기로 해놓고, 나를 없는 존재 취급하는 놈을 있는 힘껏 노려보는 순간.

“너무 위험한 계획입니다.”

누군가 당당히 황태자를 만류했다. 아담이었다.

토너먼트 기권자였지만, 그가 이 자리에 있는 것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당장 토벌대를 꾸려도 모자랄 판에 전하 홀로 가시다니요. 그러다 부상을 당하시기라도 한다면…….”

“아, 완전히 혼자 가는 것은 아니군.”

우려 섞인 아담의 목소리에, 카셀이 답했다.

마치 까먹고 있었던 것을 상기하듯, 그가 흘끔 구석에 박혀 있는 내 쪽을 돌아보며 말했다.

“전담 약재상도 데리고 갈 예정이니, 부상은 문제 될 것 없다.”

“누나……!”

“천사님……!”

카셀 놈의 선언이 끝나기 무섭게 세 쌍의 눈이 내게 꽂혔다.

「[일레인 그리셀다]가 당신에게 강한 서운함을 느낍니다.」

「[22대 교황 니세]가 당신을 향한 강한 걱정을 품습니다.」

「[아담 헤일리]가 당신에게 약간의 실망감을 가집니다.」

우르르 떠오르는 시스템 창을 보자마자 정신이 피로해졌다.

어젯밤 카셀에게 들은 얘기를 미처 일레인에게 말할 틈이 없었다.

아무것도 모르던 녀석은 내게 배신감을 느끼는 듯했고, 니세는 니세다웠고…….

‘실망은 뭔데?’

조금 어이없는 아담의 상태창을 바라보던 중.

물끄러미 나를 응시하던 그가 이내 제 주군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저도 함께 가겠습니다, 전하.”

“헛소리. 그대는 수도에 남아서 나 대신 병사들을 지휘해야 할 것 아니야.”

“하지만…….”

“어둠의 숲의 지리를 나보다 잘 아는 이는 없을 것이다. 핵의 위치 또한.”

카셀은 자신 있게 말했다.

그 말대로, 그보다 숲의 지리를 잘 아는 자는 없을 것이다.

회귀 사실을 몰랐다면 나 또한 아담처럼 무모하다며 반대했을 것이다.

“……이론과 실제는 다를 겁니다.”

아담은 망설이듯 입술을 달싹이다가 덧붙였다.

“전하께서 어둠의 숲에 대한 많은 지식을 보유하고 계신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전하께서도 직접 가보신 적은 없지 않습니까.”

“인원이 많아질수록 이동 속도는 느려지고, 마물들에게 매번 위치를 발각당할 뿐이다. 그사이 주요 인력들의 부재로 수도가 전복되기라도 하면.”

“…….”

“그 책임은 누가 질 거지, 아담 헤일리?”

마치 겪어본 적 있는 사람처럼 카셀의 목소리엔 기묘한 확신이 담겨 있었다.

‘……실제로도 많이 겪어 봤겠지.’

내가 봤던 [어둠의 숲] 퀘스트 영상은 전부 다 풀팟(풀파티) 영상뿐이었다.

이 망겜에는 무수히 많은 하차 포인트가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어둠의 숲]은 가장 유저 탈주가 많은 퀘스트였다.

퀘스트 자체의 난이도는 그다지 높지 않았다.

핵이 있는 중앙에 도달하는 동안 사냥 퀘스트를 무한 반복하면 끝이니까.

하지만 기껏 전투와 노상을 까며 동료애를 다지는 사이, 두 번째 재앙으로 수도가 전복돼서 어이없게 게임이 오버된다.

원인은 전투를 마치고 잠든 카셀 때문이었다.

그는 어둠의 숲에 들어간 이후 잠이 들 때마다 악몽을 꾸는데, 그때마다 마물 떼들이 수도 근경을 덮친다.

부지불식간에 헤일리를 멸망으로 휩쓸고 간 첫 번째 재앙과는 달리, 두 번째 재앙은 그래도 제법 양호한 편이다.

토너먼트와 어둠의 숲 토벌로 인해 중상급 마물의 수를 많이 줄였다는 설정에다가, 트라우마가 있는 카셀이 잠을 길게 자지 않기 때문이다.

‘2시간쯤이었나?’

그러나 그것도 세 번째 악몽까지는 어찌어찌 수도에 남겨둔 용사들로 버티지만, 그다음엔 게임 오버였다.

이것을 전혀 모른 채 어둠의 숲에서 뼈 빠지게 전투를 하다 잠깐의 휴식을 취하던 유저는 갑자기 뜬 게임 오버 창에 하나같이 광분하다가 끝내 탈퇴한다.

그리고 그 불똥은 대부분 가만있던 운영자……

그러니까, 나한테 제일 많이 튀었다.

‘욕 참 많이 먹었었지…….’

하여튼, [어둠의 숲]에서 카셀이 잠드는 것을 긴장을 늦추지 말고 지켜봐야 하며, 만약 그가 악몽을 꾸는 기색이면 곧장 수도로 달려가야 한다.

이것을 알고 있던 나는 아예 토벌에 끼지 않으려 했던 것이다.

메인 캐들이 토벌을 하며 동료애를 다지는 사이, 나는 나대로 물밑에서 조용히 수도를 지킨다.

이보다 완벽한 계획은 없었다.

‘그런데, 왜……?’

느닷없이 메인 캐들을 다 두고 홀로 떠날 마음을 먹었는지.

그 이유를 좀처럼 알 수 없는 남주 새끼가, 아담을 비롯한 용사들 하나하나에게 시선을 주며 말했다.

“그대들에게 강요하는 것은 아니다. 혹 두렵거나 싸우기 싫다면, 황궁을 떠나 본래 살던 곳으로 돌아가도 좋다. 탓을 하거나 불이익을 주는 일은 없을 테니까.”

‘나. 나 하기 싫어.’

슬쩍 손을 들어 보였지만, 놈은 내 쪽은 쳐다도 보지 않았다.

그리고 나 말고 아무도 하기 싫다는 자는 없었다.

“저는 남겠습니다.”

“저도요!”

“황태자 전하의 명을 받들겠습니다!”

용사들이 결연한 얼굴로 하나, 둘 대답했다.

“모두 남게 됐군.”

마침내 일레인까지 남아 싸우겠다는 답을 하자, 카셀은 흡족한 얼굴로 자리를 파했다.

나만 혼자 하기 싫다는 쓰레기가 된 채 들었던 손을 어색하게 내릴 뿐이었다.

황태자가 회의장을 빠져나가자마자 일레인이 득달같이 내게 달려왔다.

“누나. 잠깐 얘기 좀 해요.”

그러나 내게 달려온 것은 일레인뿐만이 아니었다.

“천사님……!”

“샤리 아즈라엘.”

니세, 아담까지.

어느새 내 주위를 우르르 둘러싼 놈들을 보자 나는 아연해졌다.

빠져나가던 사람들이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흘끔거리는 게 느껴졌다.

왜인지 쪽팔려서 고개를 숙이는 사이, 놈들이 나를 둘러싼 채 옥신각신하기 시작했다.

“제가 먼저 왔는데요?”

“저, 저는 천사님의 하나뿐인 친우로서 그, 급히 할 말이 있어요.”

“황태자 전하와 관련된 중요 안건이다.”

문득 놈들이 나를 동시에 돌아보았다.

누구와 먼저 대화를 할지, 내게 선택하라는 것 같았다.

밀빛, 은빛, 푸른빛.

각기 다른 눈동자들이 저마다 강렬한 눈빛을 내뿜으며 나를 닦달했다.

그렇기에 나는 오늘도.

‘이 미친놈들아. 제발 나 좀……!’

소리 없이 비명을 질렀다.

* * *

“하실 말씀이 무엇이죠?”

결국 내가 선택한 것은 아담이었다.

메인 퀘스트를 앞두고, 남주와 관련된 중요한 안건부터 듣지 않을 수 없었다.

「[일레인 그리셀다]가 당신의 행동에 강한 질투심을 품습니다.」

「[22대 교황 니세]가 당신에게 높은 수준의 속상함을 느낍니다.」

아담을 선택하자 곧장 떠올랐던 시스템 창들을 되새기자 눈앞이 아찔해졌다.

억울하게도, 정작 선택당한 놈은 별로 좋아하는 눈치도 아니었다.

아담은 조금 착잡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이내 등을 돌렸다.

“잠시 따라오지.”

아담은 나를 끌고 아예 황태자 궁 밖으로 빠져나갔다.

그리고 궁 뒷길을 따라 꽤 오래 걸었다.

대체 얼마나 중요한 안건이길래 이렇게 멀리까지 가나 싶을 때쯤, 그가 드디어 남루한 건물 앞에 멈춰 섰다.

“여긴…….”

어디지?

나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건물을 둘러보았다.

사람이 거주하는 공간이라기보단 창고에 가까워 보였다.

아담은 말없이 문 앞에 다가서서 잠금 해제 마법 시동어를 읊었다.

겉보기엔 허름해 보였는데, 중요한 것을 보관하는 곳인지 잠금과 보안 마법이 몇 겹이나 걸려 있었다.

“들어가지.”

꽤 오랜 시간이 흐른 후 마침내 문을 연 그가 내게 권했다.

건물 안은 예상대로 창고가 맞았다.

그것도 갖가지 금은보화 및 아티팩트가 쌓여 있는 대박 창고.

휘황찬란하게 빛나는 내부를 정신없이 둘러보고 있을 때쯤이었다.

먼저 안으로 들어갔던 아담이 무언가를 잔뜩 들고 와 내게 건넸다.

“받아.”

“네?”

“최상급 방어 아티팩트다.”

[S급 방어 아티팩트]˟10개

그 말대로 그가 내게 건넨 것은 여러 개의 아티팩트였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건 공격 아티팩트다. 이건 초심자도 쓸 수 있는 석궁이고, 이건 단검, 이건 안에 입는 갑옷으로…….”

[S급 공격 아티팩트]˟10개

[S급 광역 저격 석궁]

[S급 타이탄의 뼈로 만든 단검]

[S급 고대 씨터틀로 만든 갑옷]

[S급 ……]

아담이 주는 아이템들이 어정쩡하게 서 있는 내 팔 위에 차곡차곡 쌓이다가 종내에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와르르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런.”

그제야 아담이 내게 막무가내로 아이템을 쥐여주는 행동을 멈추고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황당함이 가득한 얼굴로 되물었다.

“지금…… 뭐하세요?”

“보면 모르나? 토벌에 필요한 것들을 챙겨 주는 중이다.”

“황태자 전하께 이런 게 필요할 것 같지는…… 아니, 그보다 전하께 직접 전해주시면 되지, 왜 저한테 그러십니까?”

나는 약간의 불만을 담아 쏘아붙였다.

‘그렇게 황태자가 걱정되면 직접 주면 될 것이지. 내가 네놈들 ‘시다바리’야?!’

그렇지 않은가. 다른 시종 시켜서 해도 될 것을 왜 나한테 주고 난리인지.

“뭐?”

그런데 아담이 짜증스러운 내 음성에 일순 눈을 크게 떴다.

그는 잠시간 무슨 말을 할지 고민되는 듯 어물거리다 말했다.

“……이건 전하께서 내게 하사하신 물품들이다.”

“네. 그러니까 직접 주시라고요.”

그래서 어쩌라고.

내 말에 아담이 울컥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하사받은 물건을 주인에게 돌려주는 게 말이 되나?”

「[아담 헤일리]가 당신의 지능에 일말의 의심을 품습니다.」

그와 동시에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

‘이게.’

주먹을 꽉 움켜쥐는 사이, 아담이 한숨 쉬듯 말했다.

“……전하가 아니라 네게 주는 거다, 샤리 아즈라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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