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0화 (180/212)

카셀은 혼자서도 잘만 싸웠다.

굳이 내 도움이 필요 없을 만큼, 그는 몰려드는 마물 떼를 당황하지 않고 순식간에 해치웠다.

게다가 이미 [어둠의 숲]의 지리와 자주 등장하는 마물의 정보를 잘 알고 있어서인지, 그는 매우 효율적이고 빠르게 숲의 중앙을 향해 나아갔다.

그 과정에 내 도움은 그다지 들어가지 않았다.

기껏해야 체력 회복에 도움 되는 약초 혹은 희석된 포션을 주는 것뿐.

‘이럴 거면 아예 혼자 와도 됐잖아. 난 왜…….’

신들린 것처럼 움직이는 검과 몸놀림을 보다 보면, 과연 남주는 남주구나 싶었다.

풀팟 영상으로만 보던 중상급 마물 떼를 홀로 상대하고 있다니.

이 정도면 나머지 메인 캐들은 그저, 최종 보스를 죽이기 위해 곁들여진 정도가 아닌가?

“쿠에에에엑!”

“이동하지.”

때마침 마지막 지렁이 마물을 해치운 카셀이 점액이 묻은 검을 털며 내게 말했다.

‘으, 징그러워.’

아담이 준 방어 아티팩트를 발동시킨 채 안전한 구석에 가만히 서서 구경하고 있던 나는 그제야 주춤주춤 그에게 다가갔다.

“……조금 쉬었다 가시는 게 어떻습니까?”

때마침 여기선 지렁이 마물 떼를 끝으로 마물이 더 나타나지 않는 것이 기억났다.

내 권유에 카셀이 못마땅한 눈으로 나를 흘겨보았다.

“내내 하는 일 없이 서 있었으면서 또 휴식이 필요하나?”

“으읏…….”

매도하는 놈의 말에 울컥함이 차올랐다.

사실이긴 했다. [어둠의 숲]에 들어온 지 이틀이 지나는 동안, 나는 손 하나 까딱한 적 없으니까.

하지만 나는 놈을 찌릿 노려보며 버럭 소리쳤다.

“제가 아니라 전하 생각해서 드린 말씀이거든요?”

“…….”

“안색이 안 좋습니다. 이거라도 드세요.”

주섬주섬 [말린 만드라고라 뿌리]를 건네주자, 퍽 의외였는지 그의 눈이 약간 커졌다.

철컥!

내가 건넨 것을 받아 든 그는 이내 검을 던지고, 바닥에 아무렇게나 주저앉았다.

「[황태자 카셀 루크비히]가 당신에게 약간의 고마움을 가집니다.」

우득우득. 물도 없이 뿌리를 생으로 씹는 그의 머리 위로 시스템 창 한 줄이 떠올랐다.

‘츤데레야, 뭐야.’

그것을 어처구니없는 눈으로 바라보던 나는 그와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자리 잡고 앉았다.

확실히 약초가 도움이 되는지, 창백했던 카셀의 혈색이 조금씩 돌아왔다.

그런 그를 고요히 지켜보던 나는 속으로 날짜를 셌다.

‘……이제 삼 일짼가.’

[어둠의 숲]으로 들어오게 된 시일과, 카셀이 잠을 자지 않은 지도 벌써삼 일째.

악몽을 꾸면 찾아오는 재앙 때문인지, 카셀은 또 잠을 아예 자지 않고 버텼다.

종종 인성 파탄자에 피도 눈물도 없는 놈이라 욕하면서도, 이런 노력만큼은 폄하할 수 없었다.

‘황태자라 그런가?’

타인을 위해 저렇게까지 할 수 있다는 게…….

솔직히 나 같으면 수도 인간들이고 뭐고, 내 몸이 더 우선일 것 같았다.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퍽 안색이 밝아진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묻자, 그가 고개를 들어 나를 마주 보았다.

“너는.”

“……네?”

“그대는 괜찮나?”

생각지도 못한 질문이 돌아왔다.

잠시 눈을 깜빡이던 나는 이내 우물쭈물 답했다.

“저야…… 멀쩡하죠. 누구 덕분에 하는 일 없이 내내 서 있기만 했으니까요.”

“꿍하기는.”

내 대답에 놈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덧붙였다.

“나와 같이 잠을 못 자고 있잖아.”

나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눈을 끔뻑였다.

마물 떼를 도륙하느라 바쁜 와중에내 상황까지 헤아리고 있을 줄은 전혀 몰랐다.

‘내내 붙어 있던 일레인도 모르던 건데…… 어떻게 알았지?’

누군가 내 수면에 대해 신경 써주다니.

카셀의 날카로운 눈썰미에 놀라기에 앞서 기묘한 파동이 가슴속에서 피어올랐다.

그 이상한 느낌이 심장을 빠르게 뛰게 했다.

나는 그것을 애써 무시한 채 입을 열었다.

“……저는 원래 잠을 잘 안 잡니다.”

“약재상의 사명 같은 거라 했나.”

카셀이 한 번 더 실소를 터뜨리며 말했다.

“대단하신 사명이군. 고용인을 위해 잠까지 줄여가며 살신성인하다니. 과연 제국의 황태자마저 순서를 기다리게 할 만한 인재야.”

널 위한 게 아니라, 원래 잠을 못 자거든?

놈의 빈정거림에 맞받아치고 싶었으나 참았다.

필연적 불면에 대해 설명할 말도 떠오르지 않거니와, 억지로 잠을 참아내는 사람에게 대거리하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은 채 무시하고 있을 무렵.

카셀이 불쑥 물었다.

“무섭진 않나?”

“……뭐가요?”

“마물 말이야. 징그럽게 생긴 것들이 득실거리잖아.”

그가 좀 전에 죽인 지렁이 마물의 사체들을 턱짓했다.

확실히, [어둠의 숲]에서 출몰하는 마물들은 여타 봐 온 것들에 비해 훨씬 그로테스크하게 생기긴 했다.

아무래도 마물을 태어나게 하는 ‘핵’이 있다는 설정 때문일지 모른다.

하지만 더 기괴하게 생겼다 한들, 내 눈엔 다 거기서 거기였다.

언제 어디서 출몰하건, 하나같이 징그럽다는 뜻이다.

“어차피 마을에서 살 때도 내내 봐 오던 건데요.”

“아주 대장군감이야.”

대수롭지 않은 내 대꾸에 카셀이 농담 같지도 않은 헛소리를 내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간 침묵하던 그는, 한참 후 고요히 중얼거렸다.

“……나는 처음 어둠의 숲에 와서 저것들을 목도했을 때, 징그럽고 소름이 돋아서 손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

“애송이처럼 양손으로 검을 붙든 채 그저 얼어붙어만 있었지.”

귀 기울이지 않으면 잘 들리지 않는 그 음성에, 나는 흠칫 고개를 들었다.

“전하…… 께서요?”

믿기지 않는 말이었다. 지렁이 마물을 보고 얼어붙은 남주라니.

수치스러울 법도 한데, 그는 의외로 아무렇지도 않게 수긍했다.

“그래.”

“하지만…… 전하께서도 이번이 처음 방문하는 것이지 않습니까?”

나는 잠시 망설이다 되물었다.

물론 그간 반복된 회귀로 그가 이곳에 수없이 왔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약재상이 저 고백을 대수롭지 않게 넘기는 것도 수상쩍은 일일 테다.

“그러게.”

처음 듣는 사람처럼 묻는 내 모습이 온당했는지, 카셀이 나지막이 대꾸했다.

“내가 말하는 때가 대체 언제였는지, 이제 기억도 안 나는군.”

“…….”

“진짜 겪은 일은 맞는 건지. 그저 수백 번 꾼 악몽 중 하나인 건지…….”

“…….”

“정말로 끝이 있긴 한 건지.”

그는 조금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중얼거리다가, 이내 허탈하게 웃었다.

악몽이든, 실제든.

벗어날 수 없는 것은 매한가지이기에, 가려내기를 체념한 것 같았다.

그런 그를 바라보고 있자니, 또다시 가슴 깊은 곳에서 알 수 없는 감정들이 꿈틀거렸다.

아마, 내 힘으로 벗어날 수 없는 지독한 악몽에 갇혔다는 동질감 때문이겠지.

그래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당연히 끝은 있어요.”

그 말을 내뱉은 것은 순전히 충동 때문이었다.

아차 싶었으나, 뱉은 말을 도로 주워 담을 수 없었다.

나는 나를 번뜩이는 눈으로 응시하는 남자에게 어색하게 웃으며 덧붙였다.

“반복해서 악몽을 꾸는 이유가 있지 않겠습니까? 그 원인을 찾아 제거하면…….”

“…….”

“그러면, 전하께서도 편히 잠들 수 있겠지요.”

나름 그의 전담 약제사이니, 의학적 소견을 바탕으로 한 위로였다.

그리고 사실이기도 했다.

그가 잠들지 못하는 원인.

악몽을 꾸는 원인인, 이 빌어먹을 게임을 곧 내 손으로 끝낼 거니까.

카셀은 한동안 나를 뚫어지라 바라보다가 기습하듯 물었다.

“너도 원인을 찾지 못해서 잠들지 못하는 건가, 샤리 아즈라엘.”

그의 물음에 나는 흠칫 놀랐다.

내가 자지 않는 이유를 그런 식으로 해석할 줄은 몰랐다.

그와 동시에 문득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유저 캐릭터는 잠을 잤던가?’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물론 내가 알기론, 유저 캐릭터 또한 게임 접속 중에 잠을 자는 효과 따윈 없었다.

다만 로그아웃 시, 캐릭터가 잠든 것처럼 보이는 효과가 나타나긴 했던 것 같은데…….

심각하게 게임 설정을 되새기던 나는, 금방 떠올리기를 포기했다.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었기 때문이다.

어차피 나는 다른 유저들처럼 로그아웃도 못 하는 처지인데.

“……글쎄요.”

한순간 기분이 가라앉은 나는 여전히 답을 기다리듯 나를 응시하는 카셀을 바라보며 아무렇게나 말했다.

“어쩌면 저도, 전하와 같이 지독한 악몽 속에서 헤매고 있는 걸지도요.”

그냥 그의 장단에 맞춰 대충 대꾸했을 뿐인데.

왜일까.

“그렇군.”

카셀이 입꼬리를 끌어 올려 씨익 웃었다.

일순 머릿속이 멍해졌다. 그리고 그 순간.

「[황태자 카셀 루크비히]가 당신의 대답에 지극히 만족스러워합니다.」

쿵.

떠오른 시스템 창에 또다시 가슴이 불유쾌하게 두근거렸다.

나는 술렁이는 마음을 잠재우기 바빠, 그가 웃는 이유도.

만족스럽다는 감정을 나타내는 시스템 창이 뜬 연유도.

아무것도 헤아리지 못했다.

* * *

짧은 휴식을 끝으로, 카셀은 다시 일어나 기계처럼 마물 떼를 해치워 나갔다.

[Lv.70 매머드 개구리]와 [Lv.56 식인 넝쿨] 마물 떼를 연이어 해치우자, 순식간에 해가 저물었다.

카셀은 적당한 야영지를 찾아 천막을 치고 불을 피웠다.

그리고 간편 식품으로 대충 요기한 후 내게 말했다.

“샤리 아즈라엘. 지금부터 2시간에 한 번씩 내게 말을 걸어.”

뜬금없는 요구에 나는 잠시 놀랐다. 하지만 곧 그의 얼굴을 보고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피로가 잔뜩 내려앉은 카셀의 낯빛은 이제 약초나 체력 포션 따위로도 버틸 수 없을 만큼 한계였다.

그 또한 자신의 몸 상태를 잘 알고 있기에 재앙을 준비하는 것일 테다.

“2시간이 지났는데도 내게서 돌아오는 답이 없다면.”

“…….”

“이것으로 아무 데나 찌르도록 해.”

그 말과 동시에 그가 건넨 것은 작은 단검이었다.

또다시 파괴적인 방법으로 잠을 깨려는 그의 모습에, 나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유혈 낭자는 싫습니다. 다른 방법으로…….”

“다른 방법이랄 게 있나?”

그 말에 내 입이 딱 다물렸다.

그의 말대로 이제 다른 방법이 없었다.

더 이상 불면 포션을 쓸 수도 없고, 깊은 잠이 든 그를 통증 없이 깨우기란 요원했다.

“이번에는 헤일리와 달라. 설령 지금도 네게 숨겨진 조력자가 있다 한들 수도 전체를 덮칠 재앙을 막을 수 없다.”

카셀이 나지막이 읊조렸다. 뱉는 족족 옳은 말인지라 할 말이 없었다.

“……조력자 같은 거 없어요.”

나는 힘없이 대꾸하며, 결국 그가 건네는 단검을 받아들였다.

이제부터는 수도에 남겨 둔 메인 캐들을 비롯한 용사들이 막아 낼 수 있을 정도로 재앙을 통제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하지만 나는 그 방법이라는 게 불만스러웠다.

‘정말 찔러 깨우는 수밖에 없나?’

단검을 쥔 채 불안한 눈으로 카셀을 살피는데, 그는 그것으로 할 일이 끝났다는 양 눈을 감았다.

바로 잠들진 않겠지만, 더 실랑이할 기력도 없는 듯했다.

그 상태로 카셀은 제법 오래 버텼다.

마침내 자정이 찾아왔을 무렵.

“전하, 2시간 지났습니다.”

“…….”

“전하.”

2시간마다 꼬박꼬박 대꾸하던 그에게서 답이 끊겼다.

그리고.

「[두 번째 재앙]이 수도에 도래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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