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5화 (185/212)

“지금…… 사과하신 겁니까?”

나는 내가 들은 게 맞는지 더듬더듬 되물었다.

놈은 유저를 일부러 죽였으면 죽였지, 절대로 사과 따윈 하지 않았다.

괜히 인성 파탄자란 별칭이 따라붙은 게 아니란 소리다.

내 떨떠름한 반응이 거슬렸는지, 놈이 나를 흘겨봤다.

“왜.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 살인귀라, 사과 따윈 안 할 줄 알았나 보지?”

“어느 정도는…….”

「[황태자 카셀 루크비히]가 당신에게 미약한 분노를 느낍니다.」

“아니, 아닙니다.”

나도 모르게 사실대로 답하려던 순간 떠오른 시스템 창에 황급히 말을 정정했다.

그제야 카셀의 얼굴에 떠올랐던 살벌함이 조금 가셨다.

한동안 침묵하던 그는, 이내 피곤이 내려앉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악몽을 꾸고 일어난 직후엔…… 온전한 정신이 아니다.”

“…….”

“인간들을 살육하고 다니는 꿈을 수도 없이 꾸는데, 제정신일 리가…….”

그가 자조하듯 조금 웃었다. 그리고 당부하듯 덧붙였다.

“네가 아니라 다른 이였더라도, 과할 정도로 위협했을 것이다.”

“…….”

“그러니 앞으로 내가 잠들었을 땐 최대한 자리를 비우지 말도록 해. 아니면 제대로 찔러 깨우든지.”

말을 잇던 그가, 문득 인상을 찌푸리며 내게 들고 있는 단검을 건넸다.

“이걸 지금 찌른 거라고 놓고 간 건가?”

조금 놀란 심정으로 그의 말에 귀 기울이고 있던 나는, 흠칫하는 몸을 억누르며 최대한 태연하게 답했다.

“네. 저는 분명 지시대로 찔렀는데요.”

사실 그냥 최대한 칼날을 그의 몸에 붙여 나무에 박아넣었을 뿐, 진짜 찌른 건 아니었다.

긴가민가한 건지, 카셀이 의심스러운 눈빛을 띠었다.

“찔렀는데 왜 통증이 없어. 아니, 찔린 자국조차 없던데.”

“혹시 몰라서 힐링 포션을 뿌려 놓고 갔습니다.”

“장난해?”

내 대꾸에 카셀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찌르고 바로 치료해버리면 잠은 어떻게 깨나?”

놈의 핀잔에 나는 울컥해서 반박했다.

“……그렇다고 황족 시해범이 될 순 없잖습니까.”

“허. 황족 시해범?”

“흉터라도 남으면 전하께서 절 가만두셨겠어요?”

내가 미쳤게. 나중 가서 무슨 원망을 들으려고, 찌르란다고 고대로 찌르겠는가.

차라리 내가 좀 더 개고생하는 게 나았다.

아까 전, 잠든 그의 위에서 차마 단검을 내리찍지 못하고 망설이던 나를 능숙하게 포장할 때쯤.

카셀이 실소를 터뜨렸다.

“가만 안 두면, 내가 뭐 너를 죽이나?”

“네.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 살인귀라면서요.”

“그건 네가 날 매도한 말이고.”

“다 그쪽이 먼저 한 말이거든요?”

“그쪽? 이제 아주 맞먹으려 드는군.”

「[황태자 카셀 루크비히]가 당신이 한 언행에 일말의 흥미를 느낍니다.」

「[황태자 카셀 루크비히]가 당신이 어디까지 행동할지 궁금해합니다.」

계급장 떼고 한 판 붙자고 답하려던 나는, 별안간 떠오른 시스템 창에 입을 다물었다.

왜인지 어느 순간부터 살기나 분노 등의 표현보다 저런 흥미, 궁금과 같은 단어들이 더 무섭게 느껴졌다.

놈이 나를 자세히 관찰하는 듯한 이상한 기분이 들어서일까.

내가 입을 다물자 우리의 유치한 말다툼은 빠르게 소강됐다.

어디 한번 계속 지껄여 보라는 오만한 표정을 짓고 있는 놈에게, 나는 별수 없이 진실을 털어놨다.

“사실…… 안 찔렀습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놈이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다.

“내 명령을 이렇게까지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놈은 처음인데.”

“……전 피 보는 거 싫어요.”

빈정거리는 그의 말에, 나야말로 처음으로 확실한 의사 표현을 했다.

“남 다치는 것도요.”

그러니까 나한테 자신을 찌르라는 명령 같은 거 내리지 말라는, 완곡한 거절이었다.

내 말에 카셀은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다가 불쑥 내뱉었다.

“왜.”

“무섭잖아요.”

“참…….”

나름 솔직한 대답이었는데, 그가 할 말이 많지만 참는다는 얼굴로 말끝을 흐렸다.

‘참, 뭐. 왜.’

왜 말을 하다 마는지. 불만스럽게 쳐다보자, 그가 묘하게 고개를 돌려 내 시선을 피했다.

“차라리 황족 시해범이 되는 게 마물 떼에게 개죽음당하는 것보단 나을 텐데.”

그 말에 나는 소리 없이 웃었다.

그 둘 다 싫어서, 좀 전까지 수도로 달려가 개고생하고 돌아온 내 처지가 어이없어서였다.

“그러게요…….”

허망한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카셀이 돌린 고개를 바로 하여 나를 응시했다.

“잘 들어, 샤리 아즈라엘. 이번엔 헤일리와 다르다.”

“…….”

“죽기 싫으면, 아니. 이 숲에 영원히 갇히고 싶지 않으면…….”

내게로 한 발자국 성큼 다가와 바짝 선 그가 나를 내려다보며 낮게 읊조렸다.

“다음번엔 확실히 해야 할 거야.”

“아.”

대답할 틈도 주지 않은 채 놈이 가만히 늘어져 있는 내 한쪽 팔을 휙 낚아챘다.

그리고 들고 있던 단검을 강제로 내 손에 쥐여줬다.

그도 모자라 놓지 못하도록 검을 쥔 내 손을 제 두 손으로 꽉 포개 잡았다.

“뭐, 뭐 하는…….”

눈을 크게 뜨고 그를 올려다본 순간, 그가 포개 잡은 내 손을 제 쪽으로 강하게 잡아당겼다.

푸욱!

“전하!”

무언가를 찌르는 듯한 소리에 나는 대경실색했다.

그러나.

“……속이려면 천이라도 잘라냈어야지.”

천만다행히도 단검은 카셀의 몸뚱이가 아닌, 갑옷 사이에 튀어나온 옷자락에 박혀 있었다.

정확히 내가 검을 박아 넣고 간, 옆구리 쪽의 이음새.

그것을 알아본 나는 숨을 멈췄다.

“다음번에는 수직이 아니라 수평으로 박아 넣는 성의라도 보이란 소리야, 샤리 아즈라엘.”

카셀은 힘이 들어가지 않은 내 손을 쥐고 자유자재로 움직였다.

이제 와서 자해라도 하려는 걸까?

천을 뚫은 날카로운 칼끝이 슬쩍 방향을 바꿔 놈의 옆구리로 향하는 것을 느낀 나는,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아, 알았습니다! 알았으니까, 그만……!”

알았으니까 작작 하라고 외치려던 순간.

문득 카셀의 움직임이 멈췄다. 그와 동시에 타인의 숨결이 얼굴을 스쳤다.

나는 부여 감고 있던 눈을 슬쩍 떴다.

그리고 코앞에 바짝 드리워진 남자의 얼굴을 발견하고 다시금 호흡을 멈췄다.

조금만 까딱하면 이마가 맞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분명 뒤집어쓴 후드 때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얼굴 부근을 샅샅이 훑는 새빨간 시선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런데 너.”

한동안 탐색하는 눈빛으로 나를 살피던 놈이 느른하게 입을 벌렸다.

“혹시, 내가 잠든 틈을 타 수도에 가진 않았나?”

“수, 수도요?”

후드를 쓰고 있는 것이 이번만큼 다행인 적이 없었다.

맨얼굴이었다면, 당황한 표정과 갈 곳을 잃고 흔들리는 눈동자를 고스란히 들켰으리라.

‘뭘 알고 묻는 건가?’

하지만 그럴 리 없었다.

재앙을 불러일으키는 악몽에, 느닷없이 내가 나올 일이 뭐가 있겠는가. 마물도 아니고.

게다가 나는 로브를 벗고 날뛰었다.

설령 꿈에서 날 봤더라도, 내 본 모습 ‘사리 송’이 죽은 줄로 알고 있을 카셀이 약재상인 이 모습과 동일시하는 건 말이 안 됐다.

그렇게 생각하자, 마구 달음박질치던 가슴이 조금씩 진정됐다.

“여기서 수도를 어떻게 갑니까. 이동 스크롤도 못 쓰는데…….”

“내가 준 유물이 있잖나.”

“그건 위급 상황에만 쓰라고 하셨잖아요.”

당당한 내 답에 카셀이 설핏 미간을 구겼다.

좀 모순되긴 했지만, 틀린 소린 아니었다.

재앙이 수도를 덮친다 한들 그곳에 있는 인간들이나 죽어날 뿐, [어둠의 숲]에 있는 우리는 안전했다.

야영장 곳곳에 방어 아티팩트를 깔아둔 건 물론, 근방에 있는 마물들은 해가 저물기 전에 카셀이 도륙 낸 지 오래였기에.

악몽을 되새기기라도 하듯, 카셀은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래. 네가 거기 있을 리가…….”

그가 내 거짓말을 받아들인 듯 중얼거렸다.

“……다 납득하신 거면, 손 좀 놓아주시겠습니까? 저도 전하께서 하신 말씀 명심하도록 하겠습니다.”

“…….”

“그리고 얼굴도…… 너, 너무 가까운 것 같은데요…….”

우리 사이에 이 정도 거리는 좀, 아니지 않나?

나는 부담스러울 만큼 바짝 들이민 놈의 얼굴을 피해, 슬쩍 고개를 옆으로 돌린 채 빌었다.

그러자 놈이 별안간 사납게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리고, 휙!

뿌리치듯 내 손을 털어냈다.

「[황태자 카셀 루크비히]가 당신에게 일말의 짜증을 느낍니다.」

‘아니, 왜 지가 짜증을 내?!’

떠오른 글씨에 황당한 표정을 짓던 나는, 아직 내 손에 쥐어져 있는 검을 깨닫고 소리쳤다.

“이, 이거! 단검은 도로 가지고 가셔야죠!”

“조금 전에 들은 말은 또 귓등으로 스쳐 지나갔나 보지? 모르겠으면 그냥 평생 여기 갇혀 살아.”

신경질적으로 뇌까린 놈이 휙 등을 돌려 모닥불 쪽으로 걸어갔다.

그런 놈의 머리 위로 여러 개의 시스템 창들이 줄줄이 떠올랐다.

「[황태자 카셀 루크비히]가 당신의 언행에 강한 짜증을 느낍니다.」

「[황태자 카셀 루크비히]가 당신의 지능을 의심합니다.」

「[황태자 카셀 루크비히]가 당신의 눈치 없음에 한탄합니다.」

「[황태자 카셀 루크비히]가…….」

“지가 잠 올 때마다 찌르라고 줄 것이지…….”

고만고만한 시스템 창들을 대충 넘겨 읽은 나는 억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다가 귀신 같은 놈이 알아듣고 또 지X 할까 두려워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다행히 아무 말 없이 모닥불 앞에 털썩 주저앉는 것을 보니 들은 것 같지는 않았다.

‘어쨌든 위기는 넘겼다…….’

카셀의 표정을 연신 흘끔거리며, 나는 뒤늦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쨌든 그가 잠든 새 수도로 간 것은 들키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런데 왜일까.

불현듯 추락하는 나를 응시하던 마룡의 당황한 눈빛이 생각난 이유는.

“네가, 왜 여기…….”

‘그러고 보니…… 눈동자 색이 비슷했어.’

카셀과 흡사한 고대 마룡의 눈동자를 떠올리던 나는, 이내 고개를 저어 치오른 위화감을 애써 떨쳐냈다.

시간이 흐르고, 아침이 밝았다.

카셀은 동이 터오르자마자 마물 떼를 썰기 위해 다시 몸을 움직였다.

그리고 내게 꾸역꾸역 단검을 쥐여준 것이 무색하게도.

그가 잠이 드는 불상사는,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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