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카셀이 마물 떼와 격전을 벌이는 사이, 나는 구석에 쭈그려 앉아 심각한 얼굴로 허공을 노려보았다,
― 나 : 용 뭔데요?
난 솔직히 이 망겜에 더 놀랄 것도 없을 거라 여겼다.
인제 와서 놀라고 화를 내기엔, 충분히 경악스러운 상황들을 이미 여러 번 겪어왔지 않은가.
― 나 : 마물한테도 AI 들어간단 소리 없었잖아요. 말하는 용대가리 뭔데?!
― 나 : 아니, 다 떠나서 두 번째 재앙에서 최종 보스 뜬다는 설정 없었잖아요.
― 나 : 이렇게 엉망진창이니까 유저들이 다 떠나지!! XX XXX!!!
그런데 아니었다.
막상 채팅창을 열자 육두문자가 절로 튀어나왔다.
― [GM지누] : 그건 솔직히 ㅇㅈ
― [GM세라] : 후배여. 그것은 용사로서 겪어야 할 어쩔 수 없는 숙명 같은 일이라네.
― [GM세라] : 모든 전투가 똑같을 수는 없는 법.
오랜만에 마주하는 내 격한 반응에도 제작자 놈들의 태도는 여상했다. 여전히 뻔뻔하단 소리다.
나는 튀어나올 것 같은 괴성을 가까스로 참고, 폭력적으로 채팅을 입력했다.
― 나 : 아니, XX!! 장난해??? 이번에 까딱했으면 진짜 죽을 뻔했잖아요!!!
― 나 : 더는 못 해먹겠으니까, 저 빨리 내보내 줘요. 빨리!!!
― [GM아리] : 죄송합니다, 샤리 님. 고대 마룡은 최종 보스답게 약간의 인공 지능을 부여하긴 했습니다만…….
― [GM아리] : 이렇게 돌발적으로 튀어나올 줄은 정말 예상치 못했어요.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는데…….
― [GM아리] : ㅠㅠ
아리의 말에 골이 띵해졌다. 나는 멍한 얼굴로 답했다.
― 나 : 그럼 이거 버그잖아요.
― [GM아리] : 그렇다고 볼 수 있습니다만, 어쨌든 지능을 탑재했기에 발생할 가능성도 무시할 수는…… (입력 중…)
― 나 : XX!! 버그 맞잖아!! 인정 좀 해!!!
― [GM아리] : 보상 지급하도록 하겠습니다. ㅠㅠ
“……어이가 없네.”
처음으로 제작자들에게 버그가 있음을 인정받았지만,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다른 것도 아니고, 왜 하필 최종 보스와 관련된 버그란 말인가.
엔딩을 코앞에 둔 상황에서 돌발상황이 발생하니 영 찝찝하게만 느껴졌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니 유별날 것도 없었다.
이제껏 플레이하는 내내 돌발상황은 발생했었다. 비록 제작자 놈들이 버그라 인정하지 않았을 뿐.
‘망할 똥망겜 같으니.’
― 나 : 보상은 둘째치고,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데요.
어쨌든 여기까지 온 이상 빨리 엔딩 내고 탈출하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치솟는 분노를 내리누르고, 차분히 해결 방안을 물었다.
― 나 : 님들이 양심이 있으면 공략 방법이라도 제때제때 알려달라고요.
― [GM아리] : (입력 중…)
― [GM지누] : (입력 중…)
― [GM세라] : (입력 중…)
‘맞다. 이 새끼들, 엔딩 본 적 없지.’
우르르 뜨는 회피 스킬에, 험악하게 얼굴을 일그러뜨릴 무렵이었다.
― [GM지누] : 마룡 말대로 퀘스트 조건 충족하면 되지 않겠음?
― 나 : 조건요?
― [GM지누] : ㅇㅇ. 엔딩 보려면 진정한 희생과 헌신이 필요함.
그건 나도 잘 알고 있다.
불굴의 의지로 수차례 고대 마룡을 상대한 헤비 유저, ‘불황따’의 글에서도 언급된 얘기였다.
하지만.
― 나 : 대체 그 진정한 희생과 헌신이 뭔데요!
― [GM세라] : 그래서 본좌가 생각을 좀 해보았노라.
― [GM세라] : 후배여, 그대가 이 세상과 카셀을 비롯한 인간들을 순수하게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 그리고 그것에서부터 우러나온 행동이 바로 그 해답이 아니겠는가?
“하, 사랑? 사랑은 얼어 죽을.”
세라의 말에 나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지금 그쪽 몇 시냐?’
새벽이 아니고서야 나올 수 없는 감성 아닌가.
반사적으로 현실 시간을 따져보던 나는 문득 드는 위화감에 멈칫했다.
그러고 보니…… 게임 바깥을 생각하는 게 너무 오랜만인 것 같아서였다.
처음 게임을 시작할 때만 해도, 수시로 몇 시인지, 얼마나 지났는지, 회사는 어떻게 돌아가고 있을지 떠올리곤 했는데…….
지금은 딱히 생각나는 게 없었다.
‘대충 이틀은 족히 지난 것 같은데…….’
갑자기 덜컥 겁이 났다.
게임에 갇힌 것을 알아차렸을 때 느낀 것과 같은 불안함이 몰려왔다.
나는 불안감을 가라앉히기 위해 황급히 제작자들에게 물었다.
― 나 : 그런데, 지금 플레이한 지……
“왜. 실연이라도 당했나 보지?”
그때였다.
채팅을 채 입력하기 전, 불쑥 다가서는 누군가의 기척이 느껴졌다.
퍼뜩 고개를 들자, 불투명한 채팅창 너머로 새빨간 눈이 나를 직시하고 있는 게 보였다.
“……전하.”
나는 덜컹거리는 가슴을 내리누르고 침착하게 채팅창을 껐다.
제작자들과의 대화에 몰두한 사이, 우리의 남주께서 한 무리의 마물 떼를 전멸시킨 모양이었다.
‘무서운 놈.’
직접 사냥 퀘스트를 할 일이 없어서 편하긴 했지만, 짧은 새 도륙 난 상급 마물들을 보니 등골이 오싹해졌다.
나는 혀를 내두르며 자리에서 주섬주섬 일어났다.
“……일은 다 끝나셨습니까?”
놈이 그런 나를 빤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혹시 대상이 난가?”
“네?”
“실연당한 대상이 나냐고.”
“무슨…….”
“사랑 타령하면서 날 죽일 듯이 노려보길래.”
나는 그제야 채팅창을 노려보며 중얼거린 내 말이 큰 오해를 일으켰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런 거 아닙니다.”
당황해서 재빨리 부인했지만, 놈의 눈이 가느스름해졌다.
「[황태자 카셀 루크비히]가 당신에게 일말의 불신을 느낍니다.」
“고백을 받은 기억은 없는데…….”
“아, 아니라고요!”
떠오른 시스템 창과 중얼거림에 화들짝 놀라 외쳤지만, 놈은 그대로 내 말을 무시하고 등을 돌렸다.
“마물의 핵을 찾았다.”
덧붙여진 말에 나는 눈을 크게 떴다.
두 번째 재앙이 발생한 후, 이제 고작 이틀이 지난 상태였다.
[어둠의 숲] 정벌에 나선 지는 5일 차.
풀팟으로 움직여도 최소 1주일은 걸리는 핵을 벌써 찾아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역시…… 남주는 남주야.’
세계관 최강자인 데다 회귀한 기억까지 있으니, 이런 속도가 나올 수밖에.
그런데 한편으로는 왜 저런 남주를 동료로 두고도 여태껏 엔딩을 낸 유저가 없는지 의아하기도 했다.
복잡한 눈으로 남주를 응시하던 나는, 휘적휘적 멀어지는 그를 다급히 쫓아갔다.
“좀 쉬셔야 하지 않습니까?”
두 번째 재앙이 발생했던 직후부터 카셀은 이틀간 단 한숨도 자지 않은 상태였다.
게다가 핵에 도달했다면, 근방의 마물들은 모두 처치됐다는 뜻.
“핵을 먼저 처리한 뒤에.”
그러나 우려 섞인 내 목소리에도 그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숲의 더 깊숙한 곳으로 얼마나 더 걸어갔을까.
마침내 지긋지긋한 나무와 풀숲이 끊기고, 거대한 늪지대가 나타났다.
마치 용암처럼 보글보글 기포가 끓는 새까만 늪은 불길한 기운을 잔뜩 내뿜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에, 마물을 탄생시키는 핵이 존재했다.
녹아내리는 새까만 눈을 아무렇게나 뭉쳐 놓은 것처럼 생긴 결정체는 족히 장정 2명을 합쳐 놓은 것보다 컸다.
“여기서 기다려.”
“어, 어……. 자, 잠깐만요!”
철컥, 쿵.
카셀은 말릴 틈도 없이 갑옷을 벗어 내려놓고 성큼성큼 늪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전하!”
아무렇지도 않게 질척한 늪 속에 하반신을 담그는 그의 모습은 나를 몹시 당황케 했다.
솔직히 이런 것쯤은 나를 시킬 줄 알았다.
여기까지 오는 내내 아무것도 한 게 없으니까.
위험해 보이는 기세에 비해 마물의 핵을 제거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핵에 무기를 박아 넣어 균열을 일으킨 후 늪 아래로 가라앉히면 끝.
늪 속에서 새로 태어나는 마물들이 공격하기도 했으나, 방어 아티팩트가 있으니 큰 문제는 없었다.
다만 딱 한 가지, 축축하고 기분 나쁜 늪을 직접 가로질러 중앙에 도달해야 한다는 게 단점이었다.
게다가 자칫 뭐에 걸려 넘어지기라도 하면, 누군가 구해주기 전까지 빠져나올 수도 없었다.
그래서 종종 이 늪에서 메인 캐릭터 혹은 유저 캐릭터가 죽어 허탈하게 게임오버 당하는 유저들이 있었는데…….
하지만 그중 남주가 직접 핵을 제거하기 위해 나섰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 없었다.
촤악, 촤악―!
나는 검기로 끈적한 진흙과 단단히 얽혀 있는 식물 줄기들을 베어가며 앞으로 나아가는 카셀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의 옷이 새카만 오물로 더러워질수록 내 기분도 점점 이상해졌다.
‘왜 직접 한다고 나선 걸까.’
평범한 약재상이니 싸움을 못 하리라 여긴 것은 그렇다 치고.
나는 그가 직접 고용한 아랫사람이니, 솔직히 늪을 가로지르는 일을 시키더라도 할 말이 없었다.
그 덕분에 여기까지 편히 왔으니, 이런 일 정도쯤은 마땅히 할 생각이기도 했고.
그런데 왜…….
촤악―!
마침내 늪을 가로질러 중앙에 도달했을 무렵, 카셀은 진흙 괴물처럼 온몸이 진흙으로 뒤덮여 있었다.
콰직―!
그는 늪 수면 위에 떠 있는 핵 결정체에 망설임 없이 검을 박아 넣었다.
콰즉, 콰즉, 콰즈즈즛…….
검이 박힌 자리부터 핵 전체로 균열이 파죽지세처럼 퍼져나갔다.
그리고 얼마 안 가.
콰르르르르!
산산조각 난 결정들이 허공에서 쏟아져 내렸다.
꼭 검은색 얼음 결정들이 쏟아져 내리는 것 같은 장관이었다.
아래로 떨어진 그것들은 마치 늪에 녹아들기라도 하듯 빠르게 가라앉았다.
이윽고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늪 깊숙한 곳에서 희미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점점 강해지던 빛은 여러 개로 갈라져 늪을 뚫고 나오기에 이르렀고.
종국엔 숲 전체를 섬멸하듯이 뒤덮었다.
“읏!”
눈이 시렸다. 동시에 강한 바람이 주변에 마구 몰아쳤다.
반사적으로 눈 앞을 가리던 나는, 바람이 잠잠해질 때쯤이 돼서야 팔을 내렸다.
“아…….”
그리고 마주친 숲의 광경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스산하고 불길한 기운을 내뿜던 숲이 정화되고 있었다.
하늘을 뒤덮고 있던 우중충한 색깔의 나무와 넝쿨들은 푸릇한 색을 띠기 시작했다.
썩은 것처럼 새까만 진흙이 들끓던 늪지대 또한 맑은 호수로 변해 갔다.
도처에 짙게 깔린 안개가 개고, 한 줄기 햇살이 내리쬐자 더는 [어둠의 숲]이라 부를 수 없을 정도로 다른 공간이 되었다.
이런 장면은 남의 플레이 영상에서도 본 적 없기에 나는 한동안 넋을 놓고 숲의 변화를 지켜보았다.
촤악!
그런 나를 일깨운 것은 맑아진 호수를 헤치고 나온 남자의 기척이었다.
묻었던 진흙은 물에 모두 씻겨진 건지, 막 땅을 밟은 카셀의 몰골은 제법 깔끔했다.
그러나.
“헉!”
갑자기 훌러덩 윗옷을 까뒤집는 놈의 행태에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왜, 왜 갑자기 옷을 벗으시는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