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7화 (187/212)

내 외침에 바지춤을 붙들고 있던 카셀이 황당하다는 듯 웃었다.

“그럼 젖은 채로 있나?”

“모닥불을 피워서 말리시면 되잖아요!”

“그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는데.”

놈이 별안간 물을 뚝뚝 흘리며 내게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적당히 그을린 탄탄한 가슴팍이 훌쩍 눈앞으로 다가왔다.

“무, 무슨…….”

손가락 틈새로 그런 카셀을 지켜보던 나는 주춤주춤 뒷걸음질을 쳤다.

“그, 그만! 왜 가까이 오시는 건데요!”

당황해서 따져 물었으나 놈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벌거벗은 미친놈을 피해 계속해서 뒤로 물러서다 보니, 어느덧 나무 기둥에 닿았다.

그사이 훌쩍 다가온 놈의 가슴팍이 앞을 가로막았다.

앞은 상의 탈의한 남주, 뒤는 나무 기둥. 그사이에 낀 채로 이도 저도 못 하고 있을 무렵.

탁.

놈이 한 팔을 들어 나무 기둥에 느슨히 팔등을 대고 고개를 숙였다.

“왜, 왜 이러세요…….”

완벽하게 갇힌 듯한 느낌에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바짝 긴장했다.

그 상태로 뒤집어쓴 내 후드 가까이 얼굴을 바싹 들이민 놈이, 속삭이듯 말했다.

“……네가 이 로브를 주면 해결되겠군.”

그 순간, 덥석.

정수리가 위로 잡아당겨지는 듯한 팽팽한 느낌이 들었다.

반사적으로 위를 보자, 놈이 나무 기둥에 올린 손으로 내 후드 자락을 와락 움켜잡고 있었다.

“악! 왜, 왜 이러시냐니까요……!”

“전부터 생각하던 건데 말이야. 곤경에 처한 사람을 위해 이 로브를 벗어 줄 생각은 안 드나?”

놈이 장난처럼 후드를 위로 주욱 당겼다가 놓기를 반복했다.

그래봤자, 벗겨지지도 않는 거 왜 매번 걸고넘어지는 건지.

순간 강제 헤드뱅잉을 당하는 줄 알고 눈을 꾹 감고 있었던 나는 다시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제가…… 왜요?”

“헤일리에서도 그랬지.”

내 반문에 놈이 눈을 번뜩이며 답했다.

“묻은 음식물로 곤란해하는 것을 뻔히 알면서, 이거라도 입고 있으라는 호의는 끝까지 베풀지 않더군.”

그렇게 매도하니 내가 세상 둘도 없는 쓰레기 같지 않은가.

나는 억울한 목소리로 반박했다.

“그, 그때는…… 그때는 어차피 내내 벗고 계셨잖습니까.”

“그렇게 말하니 꼭 누구에게 몸 못 보여줘서 환장한 노출증 변태 같은걸.”

“…….”

“하물며 지금은 죄인도 아닌 상사가 곤경에 처했는데 말이야.”

“악……!”

놈이 한쪽 눈을 찡그리며 또 한 번 후드를 위로 잡아당겼다.

몸이 강제로 위로 솟아오르는 느낌에 나는 진저리를 치며 소리쳤다.

“로브를 못 벗는 사정이 있다고 말씀드렸잖아요!”

“사정? 아아. 얼굴이 썩어 문드러졌다고 그랬나.”

썩어 문드러졌다니.

내 입으로 괴사 되었다고 얘기했지만, 그렇게 비약하는 말을 들으니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이럴 시간에 모닥불을 피우는 게 더 빠르고 현명한 것 같습니다.”

나는 위로 잔뜩 끌어 올려진 로브 자락을 따라 까치발을 선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한 채 일갈했다.

그때였다.

확!

놀랍게도, 머리 위에 팽팽하게 느껴지던 악력이 풀렸다.

눈앞에 적나라하게 드리워져 있던 탄탄한 가슴팍이 다소 멀어졌다.

“맞아.”

의외로 순순히 내 머리채, 아니, 후드 자락을 놓아준 놈이 고개를 끄덕이며 내 말에 수긍했다.

그리고는 짧게 웃었다.

“네가 왜 벗냐고 난리 쳐서 장난친 거야.”

“장난……?”

“그래. 매번 당하고 진저리치는 모습이 우습잖나.”

나는 기이한 소리를 듣기라도 한 것처럼 얼떨떨한 눈으로 그를 마주 보았다.

이어서 눈꼬리를 접은 채 환히 웃고 있는 카셀의 얼굴을 발견한 순간.

쿵.

심장이 발끝까지 내려앉는 듯한 아찔함이 느껴졌다.

동시에 갖가지 상념들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그게, 장난이라고?’

두 번 장난 쳤다 가는 로브를 아주 찢어 먹을 기세네.

그런데 그것보다, 왜 그렇게 웃는데?

왜 그렇게 사람을 홀릴 것처럼.

이 사악한 것…….

통제하지 못할 만큼 마구 흩어지던 생각들이 멈춘 것은, 놈이 내게서 뒤돌아 모닥불을 향해 걸어갈 무렵이었다.

“옷이 마를 동안 근처에서 좀 쉬었다 가지.”

사람을 불구덩이 속에 집어넣어 놓고 홀로 태평하게 장작을 찾는 모습이 얄밉기 그지없었다.

나는 아직도 두방망이질 치는 가슴을 진정하기가 어려운데.

‘큰일 날 뻔했어.’

카셀이 불을 피우는 동안 나는 우두커니 서서 가슴 부근을 부여잡은 채 한동안 생각을 정리했다.

놈이 장난이라고 지껄인 행동 및 웃음은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이다.

꽤 오래 붙어 다녔으니, 어쩌면 그만큼 내가 편해졌다는 방증일지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까지 격 없이 굴었다간 뒤통수 맞기 십상이니 조심해야 했다.

어처구니없이 죽임당한 유저들을 셀 수 없이 보지 않았는가.

‘그런데 왜 이렇게 진정이 안 되는 건데, 이 심장 새끼야.’

나는 어느덧 평소의 무감정한 표정으로 돌아간 놈을 울 것 같은 심정으로 바라보았다.

뭐.

인제 와서 게임 속 캐릭터 따위한테 설렘이나 호감 따위의 감정을 느끼기라도 해서 뭐 어쩔 건데.

어차피 곧 엔딩이 나면 난 여기서 탈출할 거고, 카셀은…….

나 같은 건 잊어버릴 확률이 컸다.

어쨌든 언젠간 정식 출시가 될 테고, 그러면 베타 시절의 데이터는 삭제될 것이다.

좀 더 ‘덕후’스럽게 생각해봐도, 악의 근원을 죽인 주인공이 과거의 불행한 기억을 잊고 행복해지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닌가.

하물며 그냥 주인공도 아닌, 일국의 황태자.

그의 주위로 많은 사람이 몰려들 테고, 스치듯 고용된 일개 약재상을 떠올릴 틈 따윈 없을 것이다.

‘그런데…… 만약 이 망겜이 정식 출시되면, 카셀은 또 회귀를 반복하는 건가?’

꼬리를 물고 이어지던 상념이 어느 지점에서 멈췄다.

불쑥 든 오싹한 생각에 나는 곧장 고개를 내저었다.

‘……설마.’

지금은 베타 버전이라 생긴 오류일 것이다.

모든 플레이를 기억하는 게임 캐릭터라니.

아무리 가상 인물에 불과하다지만, 너무 가혹하고 섬뜩한 일 아닌가?

“안 잡아먹을 테니까 와서 앉아.”

그때였다. 내 심각한 시선을 눈치챈 건지, 카셀이 휙 나를 쳐다봤다.

불빛 때문인지 평소보다 더 시뻘겋게 타오르는 눈과 마주치자 퍼뜩 정신이 들었다.

그가 멀어진 뒤에도 내내 경계하듯 나무 기둥에 붙어 있던 꼴이라는 것을 자각한 나는 머쓱하게 걸음을 옮겼다.

이윽고 카셀의 맞은편에 앉으려던 찰나.

“거기 말고 이쪽으로.”

탁, 탁.

별안간 놈이 제 옆쪽 자리를 내리쳤다. 나는 어정쩡한 자세로 굳었다.

“전…… 여기가 좋은데요.”

“너는 명령에 불복할 줄밖에 모르나?”

놈이 짜증스럽게 쏘아붙였다.

‘아, 또 왜!’

나야말로 왜 그딴 명령을 내리는지 짜증이 났다.

하지만 여기서 더 뻗댔다간 분노나 지능 어쩌구 같은 시스템 창이 뜰 게 뻔했다.

하는 수 없이 모닥불을 빙 돌아 그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놈과 한 발자국 떨어진 곳에 엉거주춤 앉으려던 순간.

덥석, 소맷자락이 잡혔다. 그리고 강한 힘이 나를 아래로 훅 끌어당겼다.

“악!”

휘청거리던 나는 놈의 바로 옆자리에 털썩 주저앉게 됐다.

본의 아니게 놈과 상체를 부딪친 나는 깜짝 놀라 용수철처럼 곧장 튀어 오르려 했다.

그러나 어느 사이 감싼 건지, 어깨 위에 올라온 무거운 팔이 옴짝달싹할 수 없을 정도로 나를 짓눌렀다.

로브와 맞닿은 타인의 헐벗은 몸이 너무나도 신경 쓰였다.

그럴 리 없는데도 뜨거운 피부가 생생하게 느껴지는 것 같아서, 나는 발작하듯 소리쳤다.

“아, 또 왜 이러시는데요!”

“로브를 벗어줄 수 없으면 체온이라도 나눠줘야 할 것 아니야.”

돌아오는 목소리가 너무나도 가까웠다.

왜인지, 차마 옆을 돌아보지도 못한 채 나는 바보처럼 숨죽여 답했다.

“……불 피웠잖습니까.”

“늪지대에서 체온 유지가 얼마나 중요한지 모르나? 내가 여기서 죽거나 병이라도 들면 너부터 사형이야.”

“제가 왜요?”

“그럼 모시는 황태자가 추위에 덜덜 떨며 죽든 말든 홀로 따뜻하게 껴입고도 목이 무사히 붙어 있길 바라나?”

“…….”

놈이 가소롭다는 듯 웃었고, 나는 말을 잃었다.

어처구니없고 빡치지만 맞는 말이기도 했기에.

내 주머니에는 그딴 병이나 추위 따윈 가볍게 치료할 수 있는 포션이 수백 가지 있었으나, 포션 중독인 카셀에게 함부로 먹일 수 없었다.

‘그럼 이대로…… 이렇게 꼭 붙어서 앉아 있어야 한다고?’

나는 놈과 맞닿아 있는 부분과 어깨 위에 얹어진 묵직한 손을 연신 흘끔거리며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온몸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가슴이 또 이상한 방향으로 꿈질거릴 것 같아서 숨을 크게 쉬기 어려웠다.

“……전하께서는 종종 제가 여성이라는 사실을 잊으시는 것 같습니다.”

내가 얼마나 같잖고 편하게 느껴지면 이렇게 맨몸으로 죽부인 껴안듯 껴안는단 말인가.

한탄하듯 중얼거린 내 말에, 놈은 여상하게 답했다.

“잊다니. 아주 잘 알고 있지.”

“알고…… 있다고요?”

“그래.”

놈이 내 어깨를 잡지 않은 팔로 모닥불을 뒤적이며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배려하고 있으니까 바지라도 입고 있는 거 아니야.”

그 말에 내 시선이 자연히 아래로 내려갔다.

여전히 덜 마른 채 짙은 색을 띠고 있는 바지가 보였다.

생각해보니, 아까 상체를 벗은 후 곧장 바지춤을 붙들었던 것 같기도.

별로 배려받고 있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지만, 막상 축축하게 젖어 있는 옷을 걸치고 있는 꼴을 보자 마음이 편치 않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여분의 로브라도 챙겨 가지고 올 걸 그랬어요.”

“그러게. 미처 생각지 못했군.”

짧게 수긍하던 그가, 이내 날카로운 눈으로 나를 훑어봤다.

“그러고 보니…… 내가 하사한 로브는 어디다 버려두고 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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