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습 같은 물음에 나도 모르게 움찔했다.
황태자 궁에 아무렇게나 내버리고 온 것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버, 버려두긴요. 곱게 보관해두고 있지요…….”
나는 부리부리한 시선을 슬쩍 피하며 우물쭈물 답했다.
그러자 곧장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
「[황태자 카셀 루크비히]가 당신에게 일말의 불신을 느낍니다.」
“……진짭니다.”
한 번 더 강조했으나, 카셀은 조금도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그가 설핏 미간을 구긴 채 나를 돌아보았다.
“왜 입고 다니지 않는 거지? 마음에 들지 않는 건가?”
너무 가까운 거리에 사악한 얼굴이 있다 보니, 정신이 혼미해졌다.
그의 얼굴에 의아함이 감돌 때쯤에서야 나는 가까스로 정신을 되찾았다.
“……솔직히 너무 눈에 띕니다.”
사실 내 로브보다 방어력이 낮은 게 가장 큰 이유였지만.
눈에 띈다는 이유도 거짓은 아니었다.
나는 플레이하는 내내 최대한 잡음 없는, 빠른 엔딩을 원했다.
그러기 위해선 괜한 소란을 몰고 다니지 않는 편이 더 이득이었다.
이제 와 돌이켜보니, 무의미한 일이었던 것 같기도 하지만…….
“눈에 좀 띄면 뭐 어때.”
내 대꾸가 핑계처럼 들리는 건지 카셀의 구겨진 얼굴은 펴질 줄 몰랐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덧붙였다.
“마법사도 아니고, 한낱 평민 약재상이 그런 고급스럽고 예쁜 옷을 입어서 뭐 하겠습니까. 괜히 분란만 생기죠.”
“감히 황태자가 하사한 물건을 놓고 입을 나불댈 리가. 목이 잘린 채 성문에 걸리고 싶어서 환장한 모양이군.”
“으! 아직까지 그런 인간은 없었으니, 진정하십시오.”
놈이 내뱉는 끔찍한 말에 나도 모르게 진저리를 치게 됐다.
그 때문인지 경직되어 있던 놈의 표정이 조금 누그러졌다.
“고작 그런 이유 때문에 입지 않았다니, 의외로군.”
“……무엇이요?”
“하도 돈을 밝히길래 부티가 나면 좋아할 줄 알았는데.”
그 말에 나는 조금 울컥했다.
“그럼 지금 저는 빈티가 난다는 소리입니까?”
“그런 소리는 하지 않았는데.”
놈이 비웃듯 한쪽 입꼬리를 들고 웃었다.
“거울은 보고 살 테니, 본인이 더 잘 알겠지.”
「[황태자 카셀 루크비히]는 오래전부터 당신의 행색에 강한 흥미와 재미를 느끼고 있습니다.」
‘이게.’
떠오른 시스템 창을 본 나는, 약이 바짝 올라 주먹을 다잡았다.
그러나 얼마 안 가 힘을 풀었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고…….
비록 나를 놀리는 것일지라도, 막상 미소 짓고 있는 놈의 얼굴을 보니 그다지 화도 나지 않았다.
‘……요즘 들어 잘 웃네.’
[어둠의 숲]이라는 큰 고비를 넘겨서일까.
최근 들어 카셀이 웃는 모습을 자주 보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커뮤니티에서 남주의 웃음 목격담은 거의 전설처럼 전해졌다. 얼빡샷 캡처가 비싸게 암거래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캡처해 놓으면 카덕들한테 팔 수 있을 텐데.’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면서도, 나는 캡처 기능이 있는 설정 탭 쪽으로 손도 까닥하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을 온전히 나만 간직하고 싶다는 은밀한 욕심 때문이었다.
그러고 보니, 리르의 서재에 이어 벌써 두 번째였다.
의도치 않게 이렇게 꼭 붙어 앉아 있는 것도, 웃기지도 않는 얘기를 도란도란 나누는 것도.
‘……나뿐이었으면 좋겠어.’
무의식중에 그런 생각을 한 나는 이내 소스라치게 놀라 흠칫했다.
나뿐은 개뿔, 만인의 주인공을 상대로 뭔 개소리란 말인가.
카덕들이나 할 법한 생각에 얼굴이 다 화끈거렸다.
몰려오는 민망함을 떨쳐내기 위해 마구 도리질을 치는데, 머리 위에서 못마땅한 타박이 들려왔다.
“그만 좀 움찔거리지. 누가 보면 잡아먹는 줄 알겠군.”
그 말과 동시에 또 움찔거리려는 몸을 나는 힘겹게 억눌렀다.
“아, 아직 옷은 다 안 말랐습니까?”
인제 그만 떨어졌으면 좋겠는데.
하지만 놈은 제가 입은 바지를 턱짓할 뿐 어깨를 꽉 쥔 손을 풀지 않았다.
“직접 만져보든지.”
“아니요, 됐습니다!”
황급히 거절한 나는, 무릎을 모아 안고 최대한 놈과 닿지 않게 몸을 구겼다.
그래봤자 아무런 소용 없었지만.
나도, 카셀도 입을 다물자 숲 안은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잠깐 휴식을 취하기로 했는데, 어느덧 뉘엿뉘엿 해가 지고 있었다.
움직이지 않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카셀은 여기서 야영을 할 생각인 듯했다.
타닥타닥.
장작이 타들어 가는 모닥불 소리가 정겨웠다.
그의 옷이 마를 때까지, 숨죽인 채 일렁이며 춤을 추는 불길만 응시하기로 마음먹었을 때였다.
“……너는 이 일이 다 끝나면, 뭘 할 생각이지?”
그런 내 다짐을 흐트러뜨리듯, 불쑥 카셀이 물었다.
다른 이도 아니고, 그에게 이런 질문을 받을 줄 몰랐던 나는 눈을 크게 떴다.
“……글쎄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문제였다.
매번 게임을 탈출할 생각만 하기 급급했으니까.
‘여기서 나가면, 뭐부터 하지.’
먼저 빌어먹을 사직서부터 제출한 후에, 제작자 놈들을 싹 다 고소하지 않을까.
아니. 그 전에 카셀의 회귀 버그에 대한 보고서부터 작성해야 할지도.
아니, 사실 잘 모르겠다.
나는 다소 충동적인 사람이기에 일단은 집에 틀어박혀 밀린 넷플XX부터 보고 결정할지도.
“우선…… 맥주나 마시면서 푹 쉬지 않을까요.”
“맥주, 휴식.”
더듬더듬 답하자, 카셀이 별안간 내 말을 되새기듯 따라 했다.
뭔가 어색해지는 기분에 나는 재빨리 공을 돌렸다.
“전하께서는요?”
“글쎄.”
딱히 생각해본 적 없는 것은 마찬가지인지, 나와 똑같은 대답을 하는 그의 모습에 기분이 오묘해졌다.
잠시간 고민하던 그는, 이내 모닥불을 응시하며 툭 내뱉었다.
“아무런 꿈도 꾸지 않고 깊게 잠들고 싶군.”
무미건조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 안에 절박한 갈망이 담겨 있다는 것을 모를 수 없었다.
한순간 마음이 무거워졌다.
“……곧 그렇게 될 겁니다.”
나는 그를 바라보며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잖아요.”
내 말에 카셀이 모닥불에서 고개를 돌려 나를 마주 보았다.
이번만큼은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불빛에 반사된 탓일까.
그의 검붉은 눈동자가 일순 격랑처럼 일렁이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군.”
알 수 없는 시선으로 한참 동안 나를 마주 보던 카셀이 이윽고 입을 열었다.
“이상하게 네 말을 듣다 보면, 정말로 그렇게 될 것만 같아.”
그렇게 될 것만 같은 게 아니라, 내가 반드시 그렇게 만들 것이란 말은 하지 않았다.
다만.
「[황태자 카셀 루크비히]가 당신의 말에 일말의 신뢰를 품습니다.」
떠오른 시스템 창에, 나는 처음으로 카셀과의 관계에도 변화가 찾아왔음을 직감했다.
* * *
새벽녘이 되자, 카셀은 자리에서 일어나 하늘을 향해 신호탄을 쐈다.
피유우우우우…… 퍼어어엉!
황금색의 불꽃이 곧장 터지면서 하늘 위에 화려한 황가의 문장을 수놓았다.
불꽃놀이에 쓰는 일반 폭죽과는 달리, 마법으로 만들어진 문장은 사라지지 않고 계속 유지 됐다.
[어둠의 숲] 밖에 있는 마법사와 기사들이 신호를 확인하고 황태자가 마물의 핵을 파괴했음을 황궁에 알릴 것이다.
“곧 나머지도 도착할 것이다.”
하늘을 한 번 쓱 훑어본 카셀이 내게 언질했다.
‘나머지’란 아담과 일레인, 니세를 말하는 것일 테다.
드디어 이 게임의 최종장 진입을 앞두게 되었다.
그 때문인지 나는 꽤 진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계속 합류하는 겁니까?”
“당연한 말은 두 번 묻지 말도록.”
혹시나 해서 물어본 건데, 놈이 가차 없이 내 말을 끊어냈다.
‘그게 왜 당연한 말인데?!’
씩씩거리던 나는 얼마 안 가 놈이 그런 말을 한 이유를 알게 됐다.
신호탄을 날린 지 채 몇 시간 지나지 않아 아담을 필두로 한 메인 캐릭터들이 [어둠의 숲]에 도착했다.
“누나!”
“천사님!”
황태자 옆에 어정쩡하게 서 있는 나를 발견한 일레인과 니세가 곧장 내게 뛰어왔다.
“전하. 어디 다치신 곳은 없으십니까.”
그 뒤로 다가온 아담은 다행히 카셀에게로 향했다.
「[아담 헤일리]가 당신의 정체에 강한 의구심을 품습니다.」
황태자에게 도달하기 전, 시스템 창과 함께 나를 바라보는 아담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러나 나는 필사적으로 외면했다.
‘제발 지금 바로 카셀한테 꼰지르지만 말아다오. 제발, 제발…….’
속으로 그렇게 비는 사이, 일레인과 니세가 정신없이 말을 걸었다.
“누나. 뭐 팔 만한 것 좀 많이 얻었어요?”
“천사님! 괘, 괜찮아요? 어, 어디 다친 데는…… 제, 제가 치료해 드릴게요!”
“잠깐, 잠깐!”
나는 그들의 뒤로 보이는 여러 개의 인영에 서둘러 놈들을 막아섰다.
놀랍게도, [어둠이 숲]에 도착한 것은 비단 메인 캐릭터들뿐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뒤이어 도착한 인물들은 카셀이 수도에 남겨 놓고 온 24인의 용사들이었다.
“왜, 왜 전부…….”
넋이 나간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던 나는 이내 일레인 쪽으로 돌아섰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 묻는 내 눈빛에 그가 술술 답했다.
“이번에 사상자 하나 없이 잘 싸웠거든요. 그래서 그런지 이번에도 다 같이 와서 도우라고 하시더라고요.”
“뭐? 누가?”
누구긴 누구냐는 듯, 일레인이 황태자 쪽을 눈짓했다.
아담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카셀을 보자 머릿속에 커다란 물음표가 떠올랐다.
‘왜……?’
카셀은 번잡하고 통제가 안 되는 상황을 싫어했다.
최종 보스 토벌까지 최소한의 정예 인원으로만 움직이기 위하여 토너먼트까지 개최한 것이었다.
그런데 대체 이 많은 수의 용사들은 다 뭐란 말인가.
또다시 듣도 보도 못한 돌발 상황이 펼쳐졌다.
‘……이게 과연 엔딩에 좋게 작용할까?’
더 많은 인원이 힘을 보태면 최종 보스를 물리치는 데 유리할 것 같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았다.
동료들의 죽음 때문에 미치거나 폭주하는 남주로 인한 게임 오버도 심심찮게 일어나기 때문이다.
불안한 눈으로 여러 명의 용사들을 바라보는데, 일레인의 번잡스러운 목소리가 나를 일깨웠다.
“누나, 누나! 제가 오크 족장 베어낸 거 혹시 봤어요? 네?”
“처, 천사님, 저, 저도 성력으로 들불을 껐어요. 시, 신관들이 하나같이 신의 기적이라고 칭찬을…….”
“그만!”
양쪽에서 들리는 자랑 퍼레이드에 나는 귀를 틀어막으며 소리쳤다.
“제발 나한테 말하지 말고 니들 상사한테 가서 말해!”
나 생각할 거 많으니까, 다 닥쳐!
이놈들이 잘 보일 건 내가 아니라 카셀인데, 대체 왜 이렇게 됐는지 좀처럼 알 수 없었다.
「[일레인 그리셀다]가 당신의 언행에 강한 서운함을 느낍니다.」
「[22대 교황 니세]가 당신에게 조금 실망합니다.」
친밀도에 부정적으로 작용할 것을 각오하고 내뱉은 거부였다.
그러나…….
“아, 왜요오. 좀 들어줘요! 우린 그린 그레이 황궁 수호대잖아요!”
“너, 너무해요, 천사님…… 저, 저는 오로지 처, 천사님만 생각하면서 열심히 힘을 보탰는데…….”
시스템 창과는 달리 놈들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미친놈들아. 제발 나 좀 가만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