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9화 (189/212)

* * *

[어둠의 숲]이 끝나는 지점에는 이 세계 대륙의 끄트머리인 [태초의 고원]이 이어진다.

고원 너머에는 [죽음이 잠든 곳]이라는 활화산이 있다.

용암이 흘러넘치는 그 산의 꼭대기가, 바로 최종 보스인 마룡의 던전이다.

카셀은 메인 캐릭터들을 비롯한 모든 용사들을 데리고 [어둠의 숲]을 빠져나갔다.

빽빽하게 자라 있는 나무 사이를 빠져나오자 드넓은 들판이 펼쳐졌다.

드넓은 풀밭에 거대한 바위가 드문드문 있었고, 그 사이로 수많은 뼛조각이 뒹구는 것이 보였다.

「[태초의 고원]에 진입했습니다.」

“쿠워어어어어―”

불쑥 뜨는 시스템 창과 함께 어디선가 공룡이 우는 듯한 괴성이 들렸다.

쿵, 쿵.

이어서 미약한 진동과 함께 날개 없는 용을 닮은 거대한 마물이 저 멀리서 천천히 움직이는 모습이 포착됐다.

[Lv.500 드레이크]

마룡의 레어 아래에 위치한 [태초의 고원]에는 용족 마물인 드레이크들이 서식하고 있다.

엔딩을 앞두고 있는 만큼, 드레이크는 여타 마물과 달리 개체마다 레벨이 높은 편이었다.

하지만 나름의 밸런스 패치를 한 건지, 공략 난이도가 높지는 않았다.

놈들은 시력이 낮은 편이라 이리저리 유인해가며 공격을 퍼부으면 되기 때문이다.

다만 레벨이 높은 만큼 방어력도 어마어마한 탓에, 완전히 해치울 때까지 시간이 오래 걸린다.

게다가 놈들의 체액에는 치명적인 독이 있어서, 한 방울만 튀어도 그대로 녹아내려 뼈만 남는 수가 있다.

저 들판 위에 굴러다니는 뼛조각들처럼 말이다.

[태초의 고원]에 진입하자마자 카셀은 용사들을 시켜 간이 막사를 설치하게 했다.

그리고 곧장 작전 회의에 들어갔다.

애석하게도, 나는 그 회의에 참여하지 못했다.

― 넌 막사 밖에서 대기해. 때가 되면 부르지.

그의 명으로 인해 퇴출당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막사에서 멀찍이 떨어진 채 나를 제외한 모든 이들이 회의하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기분이 좀 이상한데.’

제삼자가 되어 놈들 사이에서 배제되는 것은 내가 바라던 일이었다.

분명 그랬는데, 나를 제외한 무리를 보자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메인 캐릭터들은 물론, 엑스트라에 가까운 여타 용사들 모두가 진지하게 작전 회의에 임하고 있었다.

나는 입술을 삐죽 내민 채 회의 내용을 홀로 추측해보았다.

‘용사들이 많아졌으니까, 머릿수로 밀어붙이려는 건가?’

원래대로라면 사실 이런 작전 회의를 할 필요가 없었다.

소수 인원에다가 화산 쪽으로 빠르게 움직이길 원하던 카셀은, 드레이크를 다 상대하지 않았다.

상대적으로 레벨이 낮은 드레이크 한 마리만을 유인해서 죽인 뒤, 그 피를 온몸에 발라 다른 개체들의 코를 속였다.

그 덕분에 빠르게 고원을 가로지를 수 있었지만, 체액에 맹독이 있는 드레이크의 특성상 그건 매우 위험한 방법이었다.

그를 비롯한 파티원 전원이 상급 해독 포션을 몇십 개씩 미리 들이켜고는 제한 시간 안에 고원을 가로질러야 성공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의 그는 그렇게 많은 양의 포션을 먹을 수 없는 상태였다.

‘대체 뭘 어떻게 하려는 거지……?’

미심쩍은 눈으로 연신 막사를 흘끔거릴 무렵.

“자, 그럼 다들 구호 한번 따라 하고 마칩시다. 킹갓제너럴마제스티로열 드레이크 토벌대, 아자아자 힘내자!”

누군가의 우렁찬 외침과 함께 회의가 끝났다.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그 외침의 주인공이 누구일지는 뻔했다.

“아, 왜 다들 안 해주고 가는데! 내가 이번 작전 지휘관이잖아! 이봐, 토비! 야!”

아무도 그 괴상한 구호를 따라 하지 않았다.

이미 익숙해졌는지 그것을 무시하고 하나같이 막사에서 흩어질 뿐.

‘쟤 또 저러고 있네.’

나는 분한 얼굴로 제 또래의 용사를 쫓아가는 일레인을 다소 한심하게 바라보았다.

그래도 한편으로는 새 친구도 사귄 놈이 기특하게 느껴졌다.

처음 만났을 때는 삶이 팍팍해서인지, 눈이 독기로 가득 차 있었던 것 같은데…….

장난기를 만면에 띠고 있는 지금의 일레인은 아무런 근심 걱정도 없는 사람 같았다.

본 시나리오와 처지가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는데, 아무래도 가족들이 멀쩡히 살아 있다는 이유 때문일까.

제법 제 나이다워 보이는 그를 낯선 눈으로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어디선가 강렬한 시선이 느껴졌다.

무심코 고개를 돌리던 나는, 막 막사에서 빠져나오고 있던 금발의 남자와 정통으로 눈이 마주쳤다.

‘망할.’

푸른 눈이 나를 뚫어지라 직시하더니, 곧장 이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아, 안 돼……!’

나는 황급히 두리번거리며 숨을 곳을 찾았다.

하지만 이 광활한 평지에 숨을 곳이 있을 리 없었다. 제기랄.

“샤리 아즈라엘.”

그사이 남자는 빠르게 내 앞까지 걸어왔다.

「[아담 헤일리]가 당신에게 강한 의혹을 가집니다.」

“우리 할 얘기가 있지 않나?”

나는 눈을 한 번 질끈 감았다 떴다. 그리고 일단 모르쇠를 시전했다.

“무슨…… 얘기 말씀이신지.”

“내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담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백작저에서 준 것도, 황궁에서 준 것도. 네게 준 아티팩트들은 모두 동일한 등급이 틀림없는데.”

“…….”

“어째서 가장 처음 준 아티팩트로는 헤일리 전체를 방어할 수 있었는지.”

“…….”

“어둠의 숲과 헤일리의 영지 크기가 비슷하기에, 시험해 볼 좋은 기회였지. 마물 떼를 상대하다 보면, 생각지도 못한 돌발 상황이 생길 수도 있을 테니까.”

“…….”

“고대 마룡을 상대하면서 쓸 줄은 미처 몰랐지만.”

아담은 나를 시험해 봤다는 것을 당당하게도 밝혔다.

‘어쩐지, 갑자기 왜 아이템을 잔뜩 주나 했더니…….’

마음 한편이 서늘하게 식으면서도, 나는 좀 놀랐다.

꽤 오래전 일인데 그가 그것을 아직도 염두에 두고 있을 줄은 몰랐기에.

검도 검이었지만, 마룡을 상대하면서 별생각 없이 사용한 방어 아티팩트가 그에게 결정적인 확신을 준 꼴이 됐다.

이미 내 정체를 단정하고 있는 듯한 아담의 얼굴을 보자 할 말이 없었다.

침묵을 고수하자, 그가 답답한 듯 미간을 미미하게 좁혔다.

“왜 말하지 않았지?”

“무엇을요?”

“기가 지네를 처치한 게 너라는 사실 말이다.”

나는 그의 말에 눈을 크게 떴다.

나와 분홍 머리 여자가 동일 인물임을 안 것만으로 거기까지 추측할 줄 몰랐다.

떠보는 기색 따윈 없는 그의 눈빛을 보니, 이미 오래전부터 의심해 온 일인 듯했다.

“이번 수도에서 마룡을 상대한 것도…… 아.”

“…….”

“설마 세이렌 던전도, 너였던 건가?”

그때를 떠올리는지 아담이 별안간 얼굴을 왈칵 일그러뜨렸다.

솔직히 그때 좀 야비하게 굴었던 건 사실인지라 나는 내심 뜨끔했다.

‘그건 네가 먼저 내 막타 가로채서 그런 거잖아!’

만약 놈이 그 일로 따지고 든다면, 나 또한 할 말은 있기에 나는 당당히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리고 순순히 답했다.

확신하는 아담을 보니, 더 이상은 어쭙잖은 거짓말로 넘길 수 없다는 것을 직감해서였다.

“굳이 말씀드릴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에게 말하지 않은 이유야 차고 넘쳤다.

기가 지네 같은 경우에는 황태자가 처치한 것으로 해야 그들의 관계를 돈독히 할 수 있었고…….

그 외의 사건들 또한 하나하나 따지고 보면 다 말 못 할 사정이 존재했다.

‘하지만 이것 또한 굳이 시시콜콜 말할 필요는 없겠지.’

엔딩을 앞둔 상황에서, 굳이 캐릭터들을 납득시킬 필요는 없지 않은가.

냉정하게 생각하는 사이, 아담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되물었다.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고?”

“네.”

“……왜지?”

“딱히 보상이나 무언가를 바라고 한 일들은 아니어서요.”

“네가…… 말인가?”

그가 문득 석연치 않은 눈으로 나를 훑어보았다.

“제가 어때서요?”

“…….”

조금 기분이 상해서 새침하게 쏘아붙이자, 아담은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그 대신.

「[아담 헤일리]가 당신의 언행을 부정합니다.」

「[아담 헤일리]는 오래전부터 당신의 가치관을 ‘무한 자본주의’로 정의 내린 상태입니다.」

‘이 음침한 놈아, 말로 해!’

아담의 속내를 나타내는 시스템 창에 나는 분개했다.

그러나 그에게 종종 무언가를 욕심내는 모습을 보인 건 사실이었으므로, 일부 인정했다.

“물론 토너먼트는 목적이 있어서 그랬습니다.”

“…….”

“그땐…… 죄송했어요.”

그래도 예의상 사과는 했다.

놈이 막타를 빼앗은 것은 빡치지만…….

그를 저지하기 위해 귀마개를 빼앗은 것도 잘한 짓은 아니니까.

“……하.”

그때였다. 우두커니 내 말을 듣고 있던 아담이 불쑥 허탈한 웃음을 내뱉었다.

“목적이 있다 한들, 결국 네가 토너먼트의 1등을 차지한 것도 아니었잖나.”

“…….”

“나는 괜히 기권한 셈이로군.”

“기권이요?”

여기서 기권 얘기가 왜 나와?

혼잣말 같은 그의 중얼거림에 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아담은 한동안 말없이 나를 응시하다가, 이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래. 1등을 포기하면…….”

“…….”

“널 다시 볼 수 있을 거라 생각했으니까.”

드디어 그가 기권한 이유를 알게 됐지만, 나는 더욱 미궁 속으로 빠지는 기분이었다.

‘왜? 본인이 1등을 포기하면 내가 1등을 차치할 줄 알았나?’

그럴 만했다. 그라면 S급 마물인 키메라를 잡은 용사가 있다는 소식을 금방 접했으리라.

‘당연히 1등을 노리고 있을 거라 생각했겠지.’

그러면 돔 위로 호명될 테고, 그때 내 정체를 다시 확인할 수 있을 테니.

그의 기권에는 생각보다 치밀한 이유가 숨겨져 있었다.

하지만 내가 1등 할 가능성이 처음부터 없었다는 사실은 미처 몰랐겠지.

“그런데 토너먼트 정식 참가자도 아니었다니.”

아담이 또 한 번의 허탈한 웃음과 함께 그 이유를 입에 담았다.

“그때 제출했던 마물의 정수 중에 저놈이 잡은 게 있긴 한 건가?”

그의 시선이 어딘가를 향했다. 그 끝에 일레인이 있는 것을 안 나는 머리가 차갑게 식었다.

“……황태자 전하께 말씀드릴 겁니까?”

“무엇을 말이냐.”

“불법 참여 사실 말입니다.”

아니, 이미 벌써 말하고 난 뒤일지도 모른다.

토너먼트는 물론 내 정체에 대한 의혹까지 말이다.

[기가 지네]를 누가 잡았건, 결과적으로 아담은 카셀의 충실한 수하가 된 상태이니까.

세이렌 던전 이후에 카셀이 규칙을 바꾼 것도, 솔직히 아담이 고자질했기 때문이라고 의심했었다.

그러니 이미 카셀에게 모든 것을 털어놨다고 말해도 놀랍지 않았다.

그러나.

「[아담 헤일리]가 당신의 언행에 큰 충격을 받습니다.」

「[아담 헤일리]가 당신에게 깊은 서운함을 느낍니다.」

별안간 떠오른 시스템 창과 함께 아담의 얼굴이 왈칵 일그러졌다.

“네 눈에는 내가 그 정도밖에 안 되는 사내로 보이…….”

“처, 천사님!”

그때였다.

막 난감해지려던 차에, 누군가 우리 둘 사이를 비집고 끼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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