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0화 (190/212)

[22대 교황 니세]

찬란한 은빛 머리 위에 떠 있는 흰 글씨가 오늘만큼 반가운 적이 없었다.

“니……! 아니, 교황님!”

나는 니세가 채 가까워지기도 전에 먼저 잽싸게 그쪽으로 달려갔다.

아담과의 대화를 계속 이어가는 게 슬슬 부담스럽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시죠, 교황님?”

“그, 그게…….”

달려오는 내 모습에 니세가 얼굴을 붉혔다.

「[22대 교황 니세]가 당신의 환대에 약간 수줍어 합니다.」

예상을 빗나가지 않는 시스템 창을 보자 마음이 편해졌다.

카셀이나 아담처럼 표정 변화도 미미한데, 시스템 창도 난해한 놈들을 상대하는 건 너무 피곤했다.

“화, 황태자 전하께서 처, 천사님을 데, 데리고 오라 하셨어요.”

“저를요?”

그것도 니세를 통해?

나는 어리둥절했지만, 별말 없이 니세를 따랐다.

대체 [태초의 고원]을 가로지르기 위해 무슨 작전을 세웠는지 궁금했기에.

‘아. 맞다.’

막사에 도착하기 직전 뒤늦게 아담에게 인사도 없이 자리를 떠나온 게 떠올랐다.

흘끔 뒤를 돌아보자, 여전히 나와 대화하던 그 자리에 그대로 우두커니 서 있는 아담이 보였다.

‘사람 마음 불편해지게 왜 저러고 있담.’

카셀한테 고자질했냐고 물어본 게 그렇게 충격받을 일인가?

나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고 편치 않은 시선으로 아담을 응시할 때였다.

“샤리 아즈라엘.”

앞쪽에서 서늘한 목소리가 나를 불렀다.

퍼뜩 고개를 돌리자, 막사 입구에 삐딱하게 기대선 카셀이 보였다.

“빨리 안 들어오고 뭐해.”

“예, 예. 갑니다요…….”

그새를 못 참고 재촉하는 놈의 태도에 나는 성의 없이 대꾸하며 멈춘 발걸음을 옮겼다.

카셀은 곧 휙 몸을 돌려 막사 안으로 들어갔다.

그 뒤로 들어가는 니세를 따라 막 안으로 발을 들이밀던 찰나였다.

“아담 헤일리와 무슨 대화를 했지?”

아직 입구를 채 통과하지도 않았는데 놈이 득달같이 물었다.

그런 그의 표정이 무언가 매우 못마땅한 사람 같았다.

‘지 부하랑 시시덕댔다고 화라도 난 건가?’

느닷없는 놈의 짜증에 나는 떨떠름하게 답했다.

“별말 안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 별말 아닌 게 뭔데.”

“일전에 백작님이 제게 아티팩트를 비롯한 마도구와 무기를 주신 적이 있어서, 그것에 대해 감사 인사를 전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태연하게 거짓을 늘어놓았다.

아담이 고자질하지 않은 이상, 굳이 내 입으로 진실을 밝힐 이유가 없었기에.

그러나 내 답을 들은 카셀은 오히려 왈칵 미간을 좁혔다.

“그놈이 네게 무기와 마도구들을 줬다고?”

“처, 천사…… 아니, 샤, 샤리. 마도구가 필요해요? 서, 성물은 안 필요해요?”

카셀에 이어 니세 또한 거의 동시에 내게 말을 쏟아냈다.

나는 다시금 골치가 아파졌다.

‘이래서 두 명 이상 함께 있으면 안 되는데.’

새어 나오는 한숨을 삼킨 나는, 그 둘을 번갈아 보며 차분히 대꾸했다.

“네, 전하를 잘 보필하라며 주셨어요. 그리고 감사합니다만, 성물은 필요 없습니다.”

“제까짓 게 감히…….”

왜인지 카셀이 사납게 얼굴을 구기며 중얼거렸다.

나는 당연히 흠칫했다.

‘아담에게 내린 하사품을 감히 나 까짓 게 썼다는 소린가……?’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나를 향한 부정적인 시스템 창은 뜨지 않은 점이었다.

대신 다른 쪽에서 떠올랐지만.

「[22대 교황 니세]가 당신에게 일말의 서운함을 느낍니다.」

“마, 마도구보다 성물이 더 좋은데…….”

니세의 혼잣말에 카셀의 서슬 퍼런 시선이 그쪽으로 옮겨졌다.

“그, 그보다 저를 찾으셨다고요.”

일전에 본 그들의 기 싸움을 기억하고 있던 나는 또 사달이 나기 전에 허겁지겁 말을 돌렸다.

그제야 카셀이 내뿜던 살벌한 기운을 거두었다.

“너를 부른 건, 네게 따로 시킬 일이 있어서다.”

“제게요? 무슨…….”

의외였다. 작전 회의에서도 제외한 내게 시킬 일이 있다니.

의아한 시선으로 바라보자, 카셀이 작은 유리병을 내게 건넸다.

“받아.”

“이건…….”

“드레이크의 피다.”

대체 어느 틈에 이것을 채취한 걸까.

나는 놀란 눈으로 검붉은 액체가 찰랑이는 유리병을 내려다보았다.

“이것으로 해독 포션을 만들 수 있겠나.”

“네. 물론 만들 수는 있어요. 포션 개수는 얼마나 필요합니까?”

“지금 있는 인원의 수만큼.”

“인원수라면…….”

30개가 채 되지 않은 양이었다.

놀라서 말끝을 흐리는데, 카셀이 고개를 모로 기울이며 물었다.

“왜. 해독 포션을 만들기에 독이 부족한가?”

내가 놀란 건, 재료가 될 마물의 체액이 부족해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제작할 해독제의 양이 너무 적어서 놀란 것이다.

‘고작 30개로 대체 어떻게 해결하려는 거지?’

내가 알고 있는 본 시나리오대로라면, 한 사람당 해독 포션을 적어도 30개씩은 들이켜야 했다.

당연했다. 위장을 위해 드레이크의 피를 온몸에 처바르고 움직여야 하는데, 한두 개로는 턱도 없을 수밖에.

혹시 모르니 넉넉히 1,000개는 정도는 만들 생각으로 다른 부재료들을 잔뜩 챙겨왔건만…….

“부족하면 말해. 더 구해 올 테니.”

이런 속사정을 알 리 없는 카셀이 태평하게 말했다.

직접 구한 건지, 아니면 다른 이들을 시킨 건지는 알 수 없지만, 이렇게 드레이크의 체액을 뽑아 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때문에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부족하지 않습니다. 설령 그렇더라도, 제가 감수해야 할 부분이니 걱정하지 마세요.”

“네가 왜?”

혼자 하는 일 없이 가만히 있는 게 뻘쭘하던 차여서, 마침 잘됐다 싶어 한 말인데.

왜인지 카셀이 눈을 번뜩이며 날카롭게 반응했다.

“시키는 일이나 해. 마물 쪽에는 얼씬도 하지 말고.”

“…….”

“인원수만큼도 필요 없으니, 만들 수 있는 만큼만 만들어.”

“그 정도로…… 어쩌려고요?”

“네게 해독 포션 제작을 맡긴 건 부상자들을 위한 대비책에 지나지 않는다.”

카셀은 냉정할 정도로 딱 잘라 말했다.

“막사에 박혀 있다가, 부상자들이 오면 치료나 해주도록.”

작전 회의에서도 빼더니. 나를 아예 전투에 노출 시킬 생각도 없는 모양이었다.

나는 그 몰래 입술을 삐죽였다.

물론 처지가 처지이니만큼, 나도 나설 생각은 전혀 없었지만.

이러니까 진짜로 싸움이라고는 쥐뿔도 못 하는 평범한 약재상 같지 않은가.

‘이래도…… 되는 건가?’

물밑에서 개고생할 줄 알았는데.

엔딩으로 가는 여정이 생각보다 너무 편했다.

그런데 그게 기쁘다기보다는 영 찝찝하게 느껴졌다.

유저 포함 5인 체제에서 갑자기 파티원 수가 30명 가까이 늘어난 것도 그렇고.

‘뭔가 놓치고 있는 기분인데…….’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이, 내게 전할 말을 모두 끝냈는지 카셀은 휙 몸을 돌려 막사를 빠져나갔다.

그리고 흩어져서 휴식을 취하고 있던 용사들을 불러 모았다.

“집합.”

“조, 조금 이따가 봐요, 천사님……!”

그 부름에 니세 역시 내게 눈짓하며 허둥지둥 밖으로 갔다.

그런 그의 뒷모습을 멀거니 바라보던 나는 불현듯 잊고 있던 사실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쟤도 힐캐잖아.”

성녀에서 교황으로 전직하긴 했지만, 니세의 능력은 포션보다 훨씬 더 성능이 좋았다.

해독은 물론이고, 무려 저주까지 없애 주지 않는가.

“그런데 왜 나한테 해독제를 만들라 시킨 거지……?”

그리고 쟤는 싸움도 못 하면서, 왜 저기 쫄래쫄래 끼어 있단 말인가?

아담, 일레인과 함께 용사들의 선두에 선 니세를 미스터리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을 무렵.

“시작하라.”

카셀이 나지막이 명령했다.

그렇게 나만 모르는 마물 소탕 작전이 시작됐다.

느긋하게 평지를 거닐고 있던 드레이크 한 마리 앞에, 초록 머리의 사내가 땅에서 솟은 듯 ‘뿅’ 하고 나타났다.

이질적인 냄새를 맡은 마물이 곧장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좋지 않은 시력으로는 무성한 초목과 사내의 초록 머리칼을 구분할 수 없었다.

그사이 은밀히 접근한 일레인은 곧장 땅을 박차고 뛰어올라 놈의 눈에 단검을 쑤셔 박았다.

“쿠워어어어어―!”

“이크.”

마물이 괴성을 지르며 몸부림쳤다.

땅을 마구 짓밟는 거대한 발과 흩뿌려지는 피를 가까스로 피한 일레인이 이내 빠르게 내달리기 시작했다.

시력 대신 후각이 발달한 드레이크는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쿵, 쿵, 쿵, 쿵!

도망치는 일레인을 쫓아 놈이 빠른 속도로 돌진했다.

하지만 그 길의 끝엔 함정뿐이었다.

한동안 드레이크를 유인하던 일레인은 이윽고 잽싸게 양파 조각을 꺼냈다.

이윽고 그가 ‘뿅’ 하고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가속도가 붙은 드레이크는 계속해서 달려갔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거대한 바오밥 나무가 있었지만, 놈은 끝내 멈추지 못했다.

쿠우웅―!

“쿠워어어어―!”

나무 기둥에 그대로 머리를 들이받힌 놈이 또 한 번 괴성을 지르며 휘청거렸다.

그 순간이었다.

“지금이다!”

근처에 숨어 있던 인간 무리가 튀어나와 놈을 급습했다.

당연히 드레이크는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카셀과 아담이 선두에 서서 합심하여 공격하니, 그 많던 피통도 순식간에 깎여 나갔다.

“끼오오오오오!”

죽기 직전, 드레이크가 전과는 사뭇 다른 울음을 내질렀다.

“저건…….”

수탉이 우는 소리와 비슷한 그것은 위험에 빠진 드레이크가 제 동료들에게 도움을 청하는 신호였다.

고원에 널리 울려 퍼지는 그 소리에, 멀찍이 떨어져 있던 드레이크들이 하나, 둘 반응했다.

“끼오오오오오!”

죽어가는 동료의 울부짖음이 한 번 더 들리자, 놈들이 그 소리의 근원지 쪽으로 일제히 이동하기 시작했다.

차라리 울부짖지 못하도록 빨리 명줄을 끊어야 할 텐데.

어째선지 카셀과 용사들은 공격조차 멈추고 드레이크가 울부짖는 것을 가만히 지켜만 봤다.

‘대체 어쩌려는 거지?’

막사 입구에 선 채 은밀히 지켜보던 나는 초조하게 입술을 짓씹었다.

그에게 미리 언질을 주지 않은 것이 후회됐다.

회귀를 반복했으니, 당연히 드레이크의 특성을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저러다 다 죽어……!’

점점 몰려드는 드레이크들의 모습에, 지금이라도 가서 막아야 하는지 고민할 무렵이었다.

불쑥 쓰러져 있는 드레이크 옆으로 찬란한 은빛 머리칼이 튀어나온 것은.

“신의 종으로서 맹세하노니, 삿된 것들로부터 영원토록 제니스를 수호하리라.”

화악!

나지막한 읊조림과 함께 흰 의복을 차려입은 니세로부터 여러 갈래의 은빛 줄기가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그리고 그것은 근방의 드레이크들을 모조리 덮쳤다.

잠시 후, 쓰러진 개체를 중심으로 은빛 실 뭉텅이가 거미줄처럼 놈들을 얼기설기 연결했다.

“쿠워어어어어…….”

정수리에 은빛 실이 꽂힌 드레이크들이 하나같이 눈을 허옇게 뒤집어 깐 채 움찔거렸다.

마치 은빛 실을 통해 생명력이 쭉쭉 빠져나가기라도 하는 것처럼.

반면에 카셀을 비롯한 용사들의 급습을 받고 쓰러진 놈은 점차 상처를 회복하기 시작했다.

언제 보아도 실로 기괴하고 신비로운 장면이었다.

쿵. 쿵!

얼마 뒤, 생명력을 모두 빨린 드레이크들이 하나, 둘 쓰러졌다.

그리고, 죽어가던 놈은 완전히 회복한 채 되살아났다.

파충류처럼 한일자로 쭉 찢어져 있던 눈을 온통 은빛으로 물들인 채.

“쿠워어어어!”

되살아난 놈이 우렁차게 울부짖으며 순종하듯 니세를 향해 고개를 조아렸다.

[Lv.500 성스러운 힘으로 잠식된 드레이크]

그간 봤던, 니세가 조종한 마물들과는 다른 이름표에 완전한 복종을 뜻하는 순종적인 몸짓까지.

나는 뒤늦게 그 이유를 알아챘다.

[Lv.999 성녀 리브의 영혼이 깃든 인형]

니세의 품에 낯익은 인형이 안겨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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