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래서 나보고 해독 포션을 만들라고 시킨 거구나.’
니세는 마물을 조종하는 데 많은 힘을 써야 했다. 그런데 치유를 위해 피까지 뽑게 할 수는 없었다.
“서, 성공했다!”
“역시, 교황님의 성력이란……!”
“전하의 전략이 통했어!”
순종적으로 고개를 조아린 드레이크를 보며 용사들이 환호했다.
다행히도 이 과정에서 드레이크의 체액을 맞아 중상을 입은 이는 없어 보였다.
그 광경을 몰래 훔쳐보던 나는 내심 카셀의 계획에 감탄하면서도, 한편으론 무척 이상한 기분에 휩싸였다.
‘이래서야 꼭…….’
난 쓸모없는 인간 같지 않은가?
물론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해독 포션은 꼭 필요했다.
30개를 제작하는 것쯤이야 식은 죽 먹기보다 쉬운 일이었다.
거기에 더해 카셀이 준 드레이크의 피를 몽땅 써서 100개쯤 만들어 놓은 상태다.
하지만 해독 포션을 몇 개나 만들어 놓든, 부상당한 이가 없으면 무용지물인 일이었다.
게다가 재료만 있다면 누구든 만들 수 있기도 했고, 정 안 되면 니세가 무리해서 제 피를 내놓으면 그만이다.
……환호하는 용사들 사이에 어디에도 내 몫은 없는 것 같았다.
‘같은 게 아니라 없는 거 맞지, 뭐.’
나는 냉정하게 내 생각을 정정했다.
카셀의 묘한 배제에 씁쓸해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왜냐하면, 이건 내가 원하던 일이었기 때문이다.
머리 아플 일 없이, 적당히 평범한 약재상인 척하며 메인 캐릭터들에게 업혀 가는 것.
분명 원하던 대로 게임이 진행되고 있는데, 왜 이런 기분이 드는지 좀처럼 알 수 없었다.
그때였다.
용사들에게 무어라 말을 건네던 카셀이 별안간 이쪽을 향해 휙 고개를 돌렸다.
“읏.”
나는 흠칫 놀라 막사 안쪽으로 몸을 물렸다.
막사 안에 처박혀서 포션이나 만들랬는데, 이렇게 한가로이 구경하고 있는 걸 알면 또 뭐라 X랄 할지 모른다.
‘귀신 같은 놈.’
거리가 꽤 됐는데, 그걸 또 알아보다니.
놈의 짐승 같은 감각에 혀를 내두른 나는 결국 훔쳐보기를 포기했다.
바깥의 소음만으로 대충 추측하건대, 그 뒤로도 용사들은 몇 번 더 같은 방법으로 드레이크를 유인하고 급습하길 반복하는 듯했다.
그들은 해가 저물고 나서야 눈이 은빛으로 물든 4마리의 드레이크와 함께 진영으로 돌아왔다.
확실히 실력 있는 자들뿐이어선지, 드레이크의 체액을 맞은 자는 단둘뿐이었다.
하지만 그들 또한 한 명은 다리에 스치고, 또 한 명은 갑옷 위에 맞았기에 치명상은 아니었다.
그들에게 포션을 건네며, 나는 예상대로 100개나 만들어 둔 [드레이크 해독 포션]이 쓸모없어졌음을 인정했다.
그 많던 드레이크들이, 단 4마리만 빼고 모조리 죽었기 때문이다.
전투에서 승리하고 돌아온 용사들은 곧장 파티를 열었다.
저마다 가져온 식량을 몽땅 꺼내고, 거기에 약간의 술까지 곁들이자 밖은 금세 시끌벅적해졌다.
“누나, 누나! 제가 드레이크 유인하는 거 봤어요?”
“못 봤어.”
“처, 천사님! 제가 성력으로 드, 드레이크들을 조종했는데…….”
“이거 드세요, 교황님.”
“누나!”
“너도 먹어.”
왜인지 오늘만큼은 도저히 그들의 말을 듣고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체력 포션을 하나씩 물려줘서 입을 다물게 했다.
그러나 그게 패착이었다. 그걸 본 용사들이 너도나도 달라고 아우성을 쳤기 때문이다.
“약제사님! 저는 안 주십니까? 제가 말입니다, 오늘 이 주먹으로 드레이크 놈의 코를 뭉개 놓았……!”
“저도요! 저도!”
“다 드세요.”
[S급 체력 포션]˟50개
[S급 힐링 포션]˟50개
[S급 마력 포션]˟50개
[드레이크 체액 해독 포션]˟98개
내친김에 드레이크 포션도 몽땅 내놨다.
많은 양의 S급 포션에 용사들의 눈이 뒤집히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대박! 최상급 포션?!”
“와아아아! 약제사님 만만세!”
“야, 인마! 하나씩만 가져가라고!”
포션을 향해 우르르 달려드는 그들을 뒤로한 채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진영에서 떨어져 얼마쯤 걸었을까.
시끌벅적한 소음이 희미해진 것을 느꼈을 무렵, 나는 털썩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단 한 마리의 드레이크도 없는 고원은 낯설 만큼 고요하고 적막했다.
‘이제 저것만 남은 건가.’
나는 다소 건조한 눈으로 저 멀리 손톱만 하게 보이는 검은색 산.
마룡의 던전이 있는 [죽음이 잠든 곳]을 응시했다.
카셀은 오늘 밤 이곳에서 야영하고, 내일 새벽같이 저 산을 향해 나아가기로 결정했다.
예상보다 빠르게 드레이크 떼를 해결한 덕에 엔딩이 부쩍 가까이 다가왔다.
이제 하루, 이틀 내에 이 망할 게임에서 탈출할 수 있을지 모른다.
‘탈출이라니…….’
그토록 요원해 보이던 탈출이, 이제 손에 잡힐 만큼 가까이 다가왔는데.
왜인지 영 실감이 나지 않았다.
이 망할 게임 속에 너무 오랫동안 갇혀 있어서 그런 걸까.
“왜 여기 있지?”
그때, 머리 위쪽으로 누군가의 목소리가 불쑥 들렸다.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자, 두 개의 새빨간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도 선명히 빛나는 게 보였다.
“전하.”
나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면서도 당황스러움을 숨길 수 없었다.
용사들과 함께해야 할 주인공이 왜 여기 있단 말인가?
놈은 당황하는 나를 본체만체하고는 내가 앉았던 자리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앉아.”
그 말에 나는 엉거주춤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는 나를 보지 않은 채 되물었다.
“왜 여기 있냐고 물었을 텐데.”
“……바람 쐬러 왔는데요.”
“야영한 지가 며칠짼데, 그간 쐰 바람으론 모자라나?”
대충 둘러댄 대답에 놈이 코웃음을 쳤다.
“그러는 전하께서야 말로 왜 여기 계십니까?”
“나도 바람 쐬러 왔다.”
“야영한 지 며칠 안 되셨나 봐요.”
“누구랑 달리 바람 쐴 틈 없이 검만 휘둘러서 말이야.”
“안됐네요. 앞으로도 검을 휘두를 일만 가득하실 텐데, 지금 많이 즐겨두시죠. 그럼 저는 이만.”
더 말 섞을 생각이 없었으므로, 나는 그만 자리를 뜨려 했다.
놈이 전광석화처럼 내 어깨를 잡아채지만 않았더라면 말이다.
“어디 가게.”
자리를 뜨려는 게 그렇게도 탐탁지 않은 건지 놈이 눈을 번뜩이며 물었다.
“전하께서 방해받지 않고 편히 바람 쐬시라고 자리를 피해드리는 건데요.”
“입만 살아선. 차라리 그냥 불편하다고 해.”
“사실 좀 불편합니다.”
말하래서 말한 건데 놈이 나를 살벌하게 노려보았다.
「[황태자 카셀 루크비히]가 당신에게 괘씸함을 느낍니다.」
덩달아 떠오르는 시스템 창에 몹시 억울해졌다.
“……아주 한 마디를 안 지는군. 대체 누가 상사고, 누가 아랫사람인지.”
놈이 못마땅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렇게 괘씸한데 어깨를 붙든 손은 왜 놓아주지 않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나는 놔달라고 말하려다가, 불 난 집에 부채질하는 꼴이 될 것 같아서 그냥 입을 다물었다.
일어서려던 몸에도 힘을 풀고 다시 편히 주저앉자, 그제야 나를 억압하던 손이 떨어져 나갔다.
“……용사들에게 포션을 뿌렸던데.”
한동안 침묵한 채 평원 너머를 노려보던 카셀이 문득 입을 열었다.
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할 일이니까요.”
그러자 그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는 게 느껴졌다.
“혹시.”
“…….”
“화난 건가?”
나는 그제야 그를 마주 보았다.
“제가 왜요?”
“작전 회의에서부터 계속 배제했으니까.”
나는 좀 놀랐다. 그가 그런 것을 신경 쓰고 있으리라고는 예상치 못했기에.
게다가 내 기분이 이상한 원인이 그의 말과 관련됐다는 것 또한 부정할 수 없었다.
“……화가 난 건 아닙니다.”
그럴 이유가 없었다.
카셀의 입장에서 평범한 약제사한테 대뜸 드레이크를 유인하거나 공격하라 할 수 없는 노릇이니까.
해독 포션을 만들라고 시킨 것은 내 위치에 걸맞은 합당한 명령이었다.
“다만…….”
“…….”
“제가 여기에 있는 이유를 잘 모르겠어서요.”
“이유?”
“제 입으로 말씀드리기 좀 그렇지만, 솔직히 크게 도움 되는 존재는 아니잖아요.”
그게 문제였다.
전투를 할 수 없고, 만들어둔 해독 포션도 결국 쓸모가 없어졌다.
그렇다면 나는 대체 여기에 왜 있는 것이란 말인가.
내가 없어도 카셀은 능히 퀘스트를 해치워 나갔다.
멀리 동떨어진 채 그것을 지켜보면서, 나는 처음으로 게임 플레이를 실패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에 있는 이유라…….”
카셀은 곰곰이 생각에 잠긴 듯 내 말을 두어 번 되풀이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가 후드 너머에 있는 내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낮게 읊조렸다.
“네가 여기에 있는 이유는.”
“…….”
“내가 그걸 원하기 때문이야.”
형형한 그의 눈빛에 나는 한순간 말을 잃었다.
내 의사 여부는 크게 상관없는지, 그가 통보하듯 뇌까렸다.
“앞으로도 오늘처럼만 해.”
“…….”
“괜히 위험한 일에 나설 생각 말고, 뒤에 있다가 적당히 포션이나 나눠주기만 하라고.”
“그렇지만…….”
“그러다 보면 금방 끝날 테니까.”
그 위치 때문에 기분이 싱숭생숭해진 건데, 카셀은 내게 계속해서 그 위치를 계속 고수하라고 명령하고 있다.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아는 남주는 쓸모없는 이를 굳이 달고 다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데, 원해서 나를 데리고 다닌다니.
한동안 낯선 눈으로 카셀을 살피던 나는, 조금 망설이다 물었다.
“……전하께서는 마룡을 없앨 특별한 계획이 따로 있으신 겁니까?”
“특별한 건진 모르겠군. 하지만 아직 시도해보지 않은 게 있긴 하지.”
그 계획에 따라 용사들의 수를 늘리고, 니세를 이용하여 드레이크 몇 마리를 조종하는 걸까.
확실히 최근 카셀의 행보는 유저들의 플레이로는 한 번도 보지 못한 새로운 방식이었다.
그의 대답을 곰곰이 되새겨 보는 사이,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어둠의 숲에서 네가 내게 말했잖아.”
“…….”
“얼마 남지 않았으니, 곧 끝날 거라고.”
그의 말에 나는 그때를 떠올렸다.
“아무런 꿈도 꾸지 않고 깊게 잠들고 싶군.”
“……곧 그렇게 될 겁니다.”
바로 어저께 일인데도 까마득하게 느껴졌다.
심각한 얼굴로 그때를 회상하는 나와 달리 카셀은 제법 누그러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 말대로, 이번에는 반드시 끝낼 수 있을 거란 예감이 드는군.”
그 말을 내뱉는 그의 얼굴이, 눈빛이.
꼭 선물을 고대하는 아이처럼 들떠 보인다면 착각일까.
그토록 생생히 빛나는 카셀의 눈동자는 처음 보는 것이었다.
살기가 맴돌 때 아니면, 언제나 버석하게 메말라 있었는데.
“……네. 당연히 그렇게 될 겁니다.”
나는 마음 한편에 피어오르는 두려움을 애써 숨긴 채 그렇게 대꾸했다.
그의 꿈을 이뤄주고 싶다는 마음과 그러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 충돌했다.
어느덧 실패하면 게임에 영영 갇히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뒷전으로 밀렸다는 것을, 나는 미처 의식하지 못했다.
마음이 몹시도 복잡했다.
그 상태로 아침이 밝았다.
드디어 최종 보스와 싸워 엔딩을 볼 때가 당도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