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쿠워어어어!”
이른 새벽.
우리는 드레이크 4마리에 둘러싸인 채 [태초의 고원]을 가로질렀다.
새삼 이것을 가능하게 만든 니세가 대단하게 느껴졌다.
그는 원활한 조종을 위해 리브 인형을 꼭 껴안고 선두에 있는 드레이크 위에 올라타 있는 상태였다.
‘교황으로 전직시킨 건 백 번, 천 번 잘한 일이야.’
나는 니세의 뒷모습을 응시하며 생각했다.
성녀에서 교황으로 호칭이 바뀐 것뿐인데, 이토록 능력치가 렙업 할 줄 그 누가 알았을까.
사실 유저들 사이에서 니세는 인지도도 낮고 최약체로 통했다.
다들 그가 긁지 않은 복권이라는 것을 알았더라면, 헬 난이도 퀘스트들이 좀 더 수월했을지도…….
‘그러고 보니, 일레인도 많이 성장했어.’
나는 니세에게서 시선을 옮겨 초록 머리를 찾았다.
일레인은 그새 친해진 용사들과 시시덕거리고 있었다.
햇병아리처럼 내 뒤만 졸졸 쫓아다니며, 이것저것 캐묻던 게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굳이 신경 쓰지 않아도 될 만큼 일레인은 전투에 능해졌다.
‘벨리세르의 눈동자’를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것은 물론, 새로운 사람을 사귀는 것에 있어도 거리낌 없었다.
‘그만큼 상처가 많이 아물었다는 소리겠지.’
제국인들에 대한 증오와 원망 또한 많이 옅어진 것 같았다.
딱히 그런 일레인에게 섭섭하거나 하진 않았다.
이게 바로 내가 바라던 그림이었으니까.
나는 처음부터 나를 제외한 토벌 파티원들의 사이가 돈독해져서, 한마음 한뜻으로 엔딩을 깨길 원했다.
비록 그 파티원들의 수가, 몇 배로 불어나긴 했지만…….
“멈춰라.”
그때였다.
니세와 마찬가지로 드레이크 위에 올라타 있던 카셀이 손을 들어 일행을 멈춰 세웠다.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던 사이, 어느덧 산 아래에 도달한 것이다.
쩍쩍 갈라진 땅 사이로 시뻘건 용암이 비치는 화산은 곧 터지기 일보 직전 같았다.
저 멀리 산꼭대기에서 간헐적으로 불꽃이 치솟는 모습은 없던 불길함도 자아내게끔 했다.
“여기서부턴 온도가 급격히 높아지니, 모두 갑옷과 장비를 정비하도록.”
카셀이 좌중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러자 용사들은 고원을 빠르게 가로지르기 위해 벗어뒀던 갑옷과 가지고 온 장비들을 바삐 꺼냈다.
나는 당연히 아무것도 없기에 멀뚱멀뚱 산등성이나 바라보았다.
카셀의 말마따나 땅 밑에 흐르는 용암 때문인지, 입구부터 풀 한 포기 보이지 않았다.
‘길 찾긴 쉽겠네…….’
그저 위로 하염없이 오르기만 하면 되니 그나마 다행인 걸까.
마룡의 레어가 있는 까마득한 산 정상을 흐린 눈으로 바라볼 무렵이었다.
“샤리 아즈라엘.”
갑자기 카셀이 나를 호명했다.
그리고 제 쪽으로 오라는 듯 고개를 까딱이는 게 아닌가.
가기 싫었다. 하지만 보는 눈이 많은 관계로 나는 이내 고분고분 걸어갔다.
“무슨 일이시죠?”
“타.”
그가 등이 빈 드레이크를 가리켰다.
상급자인 카셀과 니세, 아담을 차례대로 태우고 남은 한 마리였다.
그러니 그의 말에 내가 입을 떡 벌리는 것도 당연했다.
“저…… 말씀이십니까?”
“여기서 그따위 옷차림을 한 사람이 너 말고 더 있나?”
‘내 옷차림이 뭐 어때서!’
나는 울컥했다.
여기 있는 놈들이 가진 아이템을 다 통틀어도 내 로브 방어력이 제일 높을 게 뻔했다.
그러나 그걸 곧이곧대로 말할 수는 없기에, 적당히 에둘러 답했다.
“제가 어떻게 감히…….”
“그럼 그 꼴로 걸어 올라가다가 타 죽을 건가?”
내 거절에 카셀이 미간을 찌푸렸다.
아무래도 그는 이 허름한 로브가 용암의 열기를 버티지 못하리라 생각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타란다고 넙죽 타는 것도 염치없지 않은가.
다른 사람들은 다 고생하며 걸어갈 텐데.
하물며 황태자나 교황, 백작과 같은 고위 인사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건 좀…….
‘차라리 내가 아니라 일레인이 타야 하는 거 아닌가?’
그는 메인 캐릭터에다가 토너먼트 1위를 차지한 용사였다.
그러니 일레인이 상급자가 되더라도 반발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 생각으로 더듬더듬 초록 머리 쪽을 곁눈질하는데.
“그냥 타요, 누나. 누나 걷기 싫어서 10분 거리도 이동 스크롤 쓰잖아요.”
별안간 놈이 먼저 나서서 초를 쳐버렸다.
“마, 맞아요, 약제사님. 야, 약제사님의 발은 소, 소중하니까.”
니세 또한 한마디 거들었다.
내 정체를 알고 있기에 반대할 것 같았던 아담은 왜인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약제사님, 부자셨던 겁니까?”
“그러고 보니, 최상급 포션을 물 뿌리듯이 뿌린 것도…….”
“평민 출신 약제사, 알고 보니 포션 계의 대부호?!”
일레인이 까발린 내 일면에 용사들이 눈을 빛내며 나를 돌아보았다.
카셀 놈이 비죽 웃었다.
“그렇게 걷는 게 싫었으면 미리 말을 하지 그랬나. 우리 대부호 약제사를 처음부터 극진하게 모셨을 텐데.”
“그런 거 아닙…… 하, 그냥 타겠습니다.”
나는 결국 떠밀리다시피 드레이크 위에 올라탔다.
“이제 올라가지.”
카셀의 명령과 함께 잠시 멈췄던 일행이 다시 움직였다.
「[죽음이 잠든 곳]에 입장했습니다.」
그와 동시에 떠오른 시스템 창이, 드디어 게임의 최종 단계에 진입했음을 일깨웠다.
“쿠워어어어!”
거절한 게 무색하게도, 드레이크의 등 위는 무척 편안했다.
가파른 경사를 걸어 오르는 용사들을 보니 타길 잘했다는 이기적인 마음도 슬쩍 고개를 들었다.
우려한 것에 비해, 이 특별 대우에 대해 반발하거나 시기하는 사람들은 의외로 나오지 않았다.
‘다들 어지간히도 나를 최약체라 여기나 본데…….’
몸은 편하지만, 마음은 묘하게 불편한, 그런 복잡한 기분이 드는 것은 왜일까.
그 상태로 반나절을 더 산에 올랐다.
다행히도 용사들은 쉽게 지치지 않았다.
간혹 가다 내가 준 체력 포션을 마시며 고맙다고 인사를 전하는 이도 있었다.
홧김에 뿌린 거지만, 잘했다는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산의 정상에 가까워질수록 나는 점점 불안해졌다.
‘이 많은 사람이 모두 살아남을 수 있을까.’
솔직히 엔딩만 볼 수 있다면, 엑스트라 몇이 죽든 상관없었다.
문제는 카셀이 이 새로운 파티를 얼마나 소중히 여기냐였다.
그가 기존의 메인 캐릭터들만큼 나머지 용사들을 동료로 인식하고 있다면, 그들의 죽음에 폭주하거나 자살할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었다.
‘대체 무슨 생각인지…….’
앞서가는 그의 뒤통수를 막막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가팔랐던 경사가 급격히 완만해지면서, 일행의 걸음이 차차 느려졌다.
어쩐지 느껴지는 열기가 후끈하다 싶더니,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거대한 구덩이가 보였다.
산 정상의 분화구였다.
“도착했다!”
누군가 소리쳤다. 그 순간.
「[고대 마룡의 레어]에 입장했습니다.」
나는 떠오른 시스템 창에 일순 숨을 멈췄다.
‘드디어.’
드디어 최종 보스가 있는 곳에 도착한 것이다.
그때였다.
“끼루욱! 끼루루룩!”
멀리서 기러기 우는 소리와 함께 별안간 분화구에서 수십 마리의 무언가가 푸다닥 솟아올랐다.
하늘을 시커멓게 메우는 것들은 당연하게도 마물 떼였다.
[Lv.400 와이번]
“와이번 떼다!”
“모두 전투태세!”
마물을 확인한 용사들이 저마다 검을 빼 들었다.
그리고 4, 5명씩 빠르게 뭉쳐 그룹을 형성했다.
와이번은 무리 지어 하나의 사냥감을 공격하기 때문에 소수보다는 다수로 싸우는 게 유리했다.
‘저것도 카셀이 세운 작전 중 하나인 건가?’
놀란 눈으로 용사들의 움직임을 지켜보고 있을 적.
“물러서 있어.”
문득 카셀이 드레이크를 끌고 내 쪽으로 다가왔다.
“처, 천사…… 야, 약제사님!”
그 뒤를 니세가 따랐다. 그 옆에 등이 빈 드레이크 한 마리도 있었다.
깜짝 놀라 주변을 두리번거리자, 저만치서 와이번 한 마리를 베어내고 있는 아담이 보였다.
‘대체 어느 틈에 뛰어내린 거지?’
그 옆에 일레인이 있었다. 같은 그룹인 듯했다.
그토록 둘이 같은 토너먼트 파티로 묶이길 원했는데, 지금에서야 두 사람이 붙어 있는 꼴을 보다니…….
기분이 몹시 이상해졌다.
“야, 약제사님. 위, 위험하니까 지금부터는 무, 무조건 제 곁에 붙어 있어야 해요. 아, 아시겠죠?”
한달음에 곁으로 다가온 니세가 내게 신신당부하듯 말했다.
그러더니 손짓으로 내가 타고 있는 드레이크를 조종해 뒤로 물렸다.
그에 나는 더욱더 기묘한 기분에 휩싸여야 했다.
‘얘는 내 본 모습도 봤으면서 왜 이러는 걸까.’
눈치껏 모른 척해주는 니세가 고마우면서도, 한편으론 이해 가지 않았다.
일전에 눈깔 괴물과 싸우는 모습을 봤으니, 내 한 몸 지킬 정도는 된다는 걸 잘 알 텐데.
“교황의 말을 새겨듣도록 해.”
그때 반대편에서 또 다른 목소리가 나를 닦달했다.
“어제 내가 했던 명령, 잊지 않았겠지.”
나와 같이 후방으로 물러선 카셀이 새빨간 눈을 번뜩이며 경고하듯 말했다.
“앞으로도 오늘처럼만 해.”
“괜히 위험한 일에 나설 생각 말고, 뒤에 있다가 적당히 포션이나 나눠주기만 하라고.”
반사적으로 어젯밤 그와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어제는 내가 쓸모없는 존재인 것 같아 좀 속상하기도 했는데, 다시 생각해보니 나름 타당한 말이었다.
어쨌든 이만한 수의 용사들이 전투를 지속하게 하려면, 많은 양의 포션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 포션을 공급해야 할 약제사가 싸움에 휘말려 죽게 되면 난감할 테니, 나를 후방에 두는 것은 당연했다.
비록 이렇게까지 과잉보호 받을 거라고는 생각 못 했지만.
“네, 뭐…….”
나는 방어 아티팩트를 꺼내며 떨떠름하게 답했다.
‘와이번 정도는 괜찮겠지.’
카셀 또한 굳이 나서지 않는 것을 보면 용사들 선에서 정리가 가능한 것 같았다.
최종 보스의 등장 전, 불안감 조성용으로 등장하는 와이번 떼는 그렇게 강한 편은 아니었다.
다만 공중에서 매우 빠른 편이라 붙잡기가 다소 어렵다.
그 대신 날개가 치명적인 약점이다.
한 번 땅으로 떨어지면, 놈들은 물 밖을 나온 생선처럼 영 쪽을 못 쓰기 때문이다.
탕, 탕! 휘익! 피슉!
이미 와이번 사냥에 대비한 듯, 격돌지에는 원거리 무기가 난무했다.
카셀의 전략대로 와이번의 수는 순조롭게 줄어들었다.
그룹별로 흩어졌던 용사들이 한데 모여 이제 얼마 남지 않은 놈들을 수월히 해치워 나갈 때였다.
콰아아아아앙―!
별안간 천지가 개벽하는 듯한 굉음이 울려 퍼지면서, 분화구에서 시뻘건 불꽃이 치솟았다.
“으아아악! 피해!”
“방어 아티팩트 발동!”
“모두 후퇴해!”
분화구 가까이 있던 용사들이 비명을 지르며 도망쳤다.
치이이이익―
새어 나온 용암이 공기와 맞닿으면서 시커먼 연기를 뿜어냈다.
펄럭!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와이번과는 사뭇 다른 육중한 무언가의 날갯짓이 느껴졌다.
거센 돌풍이 몰아치면서, 검은 연기가 조금씩 가셨다.
그리고 드러난 압도적인 형체.
[Lv.990 고대 마룡]
최종 보스의 등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