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이번이 등장하는 시점부터 마룡의 공격은 한층 더 격렬하고 집요해진다.
드래곤 브레스 쿨타임이 줄어드는 것은 물론, 쿨타임이 도는 와중에도 드문드문 불을 내뿜는다.
그 와중에 와이번 떼까지 상대해야 하니, 그야말로 대환장 파티다.
다행히도 이 또한 대비책을 세워둔 건지, 카셀과 아담을 필두로 용사들이 기다렸다는 듯 반으로 나뉘었다.
한쪽은 여전히 용을 공격하고, 한쪽은 와이번 떼를 상대하려는 듯했다.
“날개를 공격해서 떨어뜨리기만 해라! 굳이 죽일 필요까지 없다!”
아담이 저를 따르는 용사들을 향해 거칠게 소리쳤다.
“끼루루루룩―!”
그와 동시에 와이번 떼가 시커멓게 분화구 주변을 에워쌌다.
여전히 니세에게 잡혀 있던 나는 애가 달았다.
지금 내가 나서면, 와이번 떼 정도는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나 남았어.’
마법사들에게 몽땅 나눠주고, 마지막 남은 마력 증폭 포션.
그것을 마시고 스턴을 갈기면 보다 수월하게 해결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이, 이제 제 차례예요, 샤리.”
내 허리춤을 강하게 끌어안고 있던 팔이 스르륵 풀렸다.
굽혔던 몸을 바로 한 니세가 나를 보며 말갛게 웃었다.
“교, 교황이 되고 열심히 수련할 때마다 샤, 샤리한테 보여주고 싶었어요.”
“……니세.”
“저, 저는…… 제, 제 힘은 저주받지 않았다는 것을요.”
니세의 말에 나는 눈을 크게 떴다.
나는 단 한 번도 그를 그런 식으로 생각해 본 적 없었다. 오히려.
“니세. 너는 저주받은 게 아니라 오히려 특별한 힘을 가진 거…….”
“알아요.”
내 말을 끊은 니세가 단단한 눈빛으로 말했다.
“아, 악령들을 뚫고 저를 구하러 온 샤리가 먼저 알려줬잖아요.”
“…….”
“그러니까…… 이제는 저도 보답하고 싶어요.”
그토록 유약했던 니세마저, 이 상황을 대비하고 앞으로 할 일에 대한 결연함을 내비쳤다.
오히려 흔들리는 건 나였다.
여기서 이도 저도 못 한 채 하염없이 방황하는 것도 나뿐이었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나와 한동안 눈을 맞추던 니세는 이내 휙 뒤를 돌아 달려갔다.
나는 그런 그의 뒷모습을 불안한 눈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내가 강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보답하고 싶다는 니세를 차마 막을 수 없었다.
대신 까딱하면, 곧장 스킬을 영창할 생각으로 초조하게 지켜보는 와중.
떨어지는 와이번과 인간이 뒤섞여 싸우고 있는 아수라장에 다다른 니세가 인형을 든 손을 위로 번쩍 쳐들고 소리쳤다.
“여신이시여, 미천한 종에게 힘을 내려주소서!”
고오오오오…….
니세의 주변으로 은빛을 발하는 작은 회오리가 모여들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그와 함께 니세의 몸이 점점 허공으로 떠올랐다.
그의 주변으로 몰려들던 빛은 원형으로 뭉쳐서 점점 커졌다.
그리고 마침내 농구공만큼 커졌을 때.
화아아아아악!
빛으로 이루어진 구체가 폭발하듯 터졌다.
수십 갈래로 갈라진 채 화살처럼 쏘아져 나간 그것들은 허공과 땅에 있는 모든 와이번들에게 꽂혔다.
“께룩!”
“끄르르륵!”
마치 시간이 멈추기라고 한 것처럼, 와이번 수십 마리가 한순간에 움직임을 멈추었다.
기괴하고 소름이 끼치는 광경이었다. 그리고 실로 경이로웠다.
‘멀쩡히 살아 있는 마물들까지 조종할 수 있다고?’
기존에 그는 다 죽어가는 마물들 혹은 죽은 마물들을 되살려 조종했다.
드레이크 네 마리 또한 그랬다.
그런데 이제 멀쩡한 마물도 통제할 수 있다니.
대체 아무도 알아보지 못한 니세의 잠재력의 끝은 어디까지란 말인가.
한층 더 발전한 니세의 능력을 보니 등골에 오싹함이 몰려왔다.
그리고 그 순간.
“크워어어어어―!”
여전히 용사들과 치열하게 싸우던 마룡이 괴성을 울부짖으며 입을 쩍 벌렸다.
후우우우욱―
예상대로 쿨타임 시간이 이전보다 짧아졌다.
게다가 놈이 불꽃을 끌어 올리는 속도마저 훨씬 빨라졌다.
순식간에 놈의 입에 맺힌 불덩어리를 보고 몸에 바짝 힘이 들어가던 찰나.
“끼루우우우욱!”
얼어붙은 듯 멈춰 있던 와이번 떼가 일제히 마룡을 향해 날아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쩍 벌어져 있는 놈의 아가리 속으로 하나, 둘 제 몸을 쑤셔 넣었다.
“끼루우우우욱!”
맺혀 있는 불꽃에 몸뚱이가 타들어 가도 개의치 않았다.
처음 한두 마리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듯했으나, 뒤이어 우르르 날아드는 와이번이 마룡의 커다란 주둥이 속을 온통 점령했다.
꼭 불을 향해 날아드는 부나방 떼처럼.
“컥! 크워어어어억!”
쿵, 쿵.
갑작스러운 와이번 떼의 공격으로 인해 마룡이 일순 균형을 잃고 뒷걸음질 쳤다.
눈으로 보고 있음에도 좀처럼 믿기지 않는 상황에 입을 떡 벌리고 있을 때.
슈우우욱!
수많은 와이번 떼를 뚫고 시뻘건 광선처럼 불꽃이 새어 나왔다.
드레곤 브레스가 내뿜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몸을 숙이고 용의 몸뚱이 가까이 붙어라!”
용사들을 향해 거침없이 외치는 카셀의 모습이 보였다.
그의 명령은 현명했다.
안면으로 날아드는 와이번들 때문에 고개가 뒤로 젖혀진 마룡이 용사들이 있는 땅이 아닌 허공을 향해 불을 내뿜었기 때문이다.
콰아아아아악―!
“끼에에에엑!”
끝도 없이 날아드는 성가신 것들을 제거하려는 요량인지, 불길이 반원을 그리며 허공을 휩쓸었다.
카셀과 용사들은 몸을 숙여 그것을 피할 뿐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총력을 기울이는 것처럼 용사들은 하나같이 이를 악물고 달려들었다.
와이번을 상대하던 아담 쪽의 용사들마저 달려와 가세하기 시작하자, 놀랍게도 마룡의 피통이 빠른 속도로 줄어들었다.
[HP 545 / 990]
카셀은 집요하게 마룡의 목 부근만을 베어냈다.
그의 눈에도 심장이 보이는 걸까.
루미에카르가 아니어서 그런지 검이 깊게 박히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그의 수고는 헛되지 않았다.
두껍고 단단한 외피가 조금씩 속살을 내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마룡의 목이 잘려 나가고 있었다.
‘저게…… 된다고?’
나는 넋을 놓은 채 그런 그와 용사들을 바라보았다.
“우와아악!”
외피가 잘리고, 그곳에서 피가 흐르자 희망이 보인 건지.
모든 용사들이 이를 악물고 미친 듯이 무기를 휘둘렀다.
[HP 526 / 990]
[HP 518 / 990]
[HP 502 / 990]
빠르게 줄어드는 게이지.
콰아아악!
그리고 마침내, 허공을 향해 내뿜던 드래곤 브레스가 멈췄을 무렵.
마룡의 목은 절반 이상이 썰려진 상태였다.
“크워어어어…….”
그제야 제 상태를 알아차린 마룡이 괴로운 신음을 내뱉었다.
그런데 왜인지, 놈은 벌건 눈으로 제 몸통에 달라붙어 있는 인간들을 가만히 내려다볼 뿐 더는 공격하지 않았다.
그 순간, 푸욱!
카셀이 쐐기를 박듯 마지막 일격을 휘둘렀다.
한 줄기의 피가 솟아올라 그의 얼굴을 적시고.
마룡의 목이 천천히 기울었다.
몸뚱이에서 조금씩 흘러내리던 그것은 끝내 완전히 분리되어 바닥으로 추락했다.
쿠우웅――!
이어서 목이 사라진 몸뚱이 또한 쓰러졌다.
압도적인 크기 탓인지, 한차례 뿌연 흙먼지가 몰아쳤다.
“……해냈다.”
누군가의 얼떨떨한 속삭임을 시작으로, 용사들이 하나, 둘 들고 있던 무기를 내려놓았다.
“우리가, 우리가 해냈어!”
“마룡을 죽였다!”
“황태자 전하 만세!”
그들은 서로를 얼싸안으며 기쁨에 겨운 환호성을 내질렀다.
먼지 때문에 선두에 있는 카셀은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헹가래를 당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들의 뒤로 쓰러진 마룡의 거대한 형체가 희미하게 보였다.
흙먼지가 가시면서, 그것은 점점 선명해졌다.
완벽히 분리된 최종 보스의 목과 몸뚱이.
하지만 내 눈은 죽은 마룡의 사체가 아닌, 다른 곳에 못 박혀 있었다.
“이게…… 말이 돼?”
[HP 497 / 990]
잘려진 마룡의 대가리 위.
여러 번 다시 확인해 봐도 남아 있는 HP 게이지가 내 눈을 의심하게 했다.
“아직 절반이 넘게 남았는데…… 죽을 수가 있다고?”
믿을 수 없었다. 들어 본 적도 없었다.
아직 HP가 남았는데 죽은 마물이 있다는 소리는.
게다가 최종 보스를 해치운 거면, 엔딩 크레딧이 떠야 할 것 아닌가?
조금도 변함이 없는 주변을 둘러보던 나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안 되겠어.’
당장 제작자 놈들에게 물어보기 위해 채팅창을 켜려던 순간이었다.
“샤리!”
“읏!”
눈 깜짝할 새 달려온 누군가가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우, 우리가 해냈어요! 해, 해냈다구요……!”
나를 끌어안고 환희에 찬 목소리를 내는 건 다름 아닌 니세였다.
“아…….”
그의 등 너머로 채팅창을 켜기 위해 허공에 어정쩡하게 멈춰 있는 내 두 손이 보였다.
잠시 당황하던 나는 이내 두 손을 니세의 등에 살포시 내려놓았다.
내 사정이 어떻든, 그들의 승리는 정당하고 축하받아 마땅했다.
“맞아요. 교황님과 용사님들이 해내셨어요.”
나는 그가 말한 ‘우리’라는 단어를 슬쩍 정정하며 덧붙였다.
“고생 많으셨어요, 교황님.”
“치…… 왜, 왜 또 모르는 사람처럼 그래요.”
니세가 서운하다는 듯 투덜댔다.
반사적으로 시선이 허공을 향한 나는 약간 의아해졌다.
왜인지 이럴 때 꼭 따라붙었던 시스템 창이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고생 많았어, 니세. 제법 내 공범답던걸?”
나는 니세만 들리도록 작게 속삭였다. 그러자 그가 키득거리며 웃었다.
어쨌든 그가 대단한 능력치로 마룡을 해치우는 데 엄청난 기여를 한 건 사실이었다.
기여도 0인 주제에, 말 한마디 해주는 게 뭐 어렵다고.
“어, 어디 다친 데는 없어요?”
내게서 원하는 말을 들은 니세는 만족한 듯 그제야 나를 끌어안은 팔을 풀었다.
“당연히 없죠. 그보다 교황님께서는 괜찮으십니까?”
조금 전에 했던 반말이 무색하게 짐짓 예의를 차리자, 왜인지 니세의 볼이 발갛게 물들었다.
“저, 저도 괜찮아요.”
그 말대로 니세는 많이 지쳐 보이는 것 빼고는 괜찮아 보였다.
단시간 무리하게 성력을 퍼부었으니, 당연히 지칠 만도 했다.
“체력 포션이라도 드릴…….”
안쓰러움에 곧장 주머니를 뒤지려던 찰나.
“샤리 아즈라엘.”
서슬 퍼런 음성이 나를 불렀다.
흠칫, 고개를 들자 살벌한 기운을 내뿜으며 이쪽으로 빠르게 걸어오는 남자가 보였다.
“당장 떨어져.”
카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