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컥, 커흑!”
마룡이 뿜어대던 불길은 다행히도 얼마 안 가 그쳤다.
날갯짓 또한 멈춘 놈의 몸뚱이는 그대로 고꾸라져 속절없이 추락하기 시작했다.
후욱―!
빠지지 않는 검도, 심장 틈새에서 스멀스멀 새어 나와 내 손을 덮은 축축한 검은 액체도.
모든 게 수도 때의 상황과 똑같았다.
“멍청한 계집.”
킬킬거리며 나를 비웃는 마룡 또한.
“말했잖아, 너는 실패했다고.”
“…….”
“이런 검 나부랭이로 아무리 찔러 봤자, 나는 죽지 않아.”
내가 그 사실에 절망하기를 바라기라도 하는 걸까.
애석하게도, 나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팔을 타고 오르는 검은 액체도 더는 무섭지 않았다.
“상관없어.”
그렇기에 심드렁하게 대꾸하자, 일순 마룡의 말문이 막힌 듯했다.
“뭐……?”
“네가 뭘 모르는 것 같아서 특별히 알려주는데.”
나는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는 놈에게 이를 드러내고 씩 웃었다
“나도 안 죽는 건 마찬가지거든.”
“무슨…….”
“X발, 좀 아깝긴 하지만…… 소환당했다가 다시 오면 되지, 뭐.”
[HP 399 / 990]
어느새 얼마 남지 않은 놈의 HP창을 보며 아쉬움에 입맛을 다실 때였다.
별안간 놈이 혼란스러운 목소리로 외쳤다.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죽지 않는다니? 착각하지 마! 넌 이대로……!”
그러나 놈의 발악 같은 외침은 오래가지 못했다.
쿠우우우웅―!
놈이 바닥에 떨어지며 엄청난 충격이 우리를 뒤흔들었기 때문이다.
‘HP -30’
[HP 969]
다행히도 놈이 내 밑에 깔려 먼저 떨어진 덕분에, 내게 큰 타격은 없었다.
“콜록, 콜록!”
다만 먼지 때문에 숨쉬기가 어려울 뿐.
그사이 새어 나온 검은 액체가 어깨까지 잠식했다.
그것은 느리지만 꾸준히 내 몸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이미 한참 전에 뒤덮인 손과 팔에서는 아무런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다.
왜인지, 그 순간 벼락같은 깨달음이 찾아왔다.
‘이게…… 죽음이구나.’
마룡이 본체가 어쩌고 지껄이더니.
이 시커먼 슬라임 같은 게 바로, 리르의 서재에서 본 신화 속 ‘죽음’이란 존재였던 것이다.
‘죽으면 이렇게 되는 걸까.’
나는 멍하니 내 몸을 뒤덮은 징그러운 검은 액체를 바라보았다.
온도도, 고통도, 촉각도.
아무런 감각이 느껴지지 않으니,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샤리 아즈라엘!”
그때였다.
추락한 마룡과 내게 가장 빠르게 도달한 이가 있었다.
뿌연 먼지 구덩이 속에서 누군지 채 알아보기도 전에 나는 재빨리 입을 열었다.
“섬멸.”
화르륵!
‘MP –50’
[MP 52]
마룡의 주변에 다시금 불꽃 결계가 피어올랐다.
“제기랄!”
그리고 그와 거의 동시에 도착한 카셀이 거칠게 칼을 휘둘렀다.
하지만 검에 의해 잠시 갈라진 것이 무색하게도, 불꽃은 빠르게 다시 엉겨 붙었다.
스킬 지속 시간이 끝날 때까지 한동안은 접근하기 힘들 터.
‘그 전에 내가 먼저 이 슬라임한테 먹히는 게 빠르겠지.’
어느덧 검은 액체가 슬금슬금 가슴께로 내려오고 있었다.
나는 내심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철컥, 철컥.
검을 휘두르던 카셀 놈이 별안간 무거운 갑옷과 장비를 벗어던지고, 불 속으로 뛰어들기 전까지는.
“윽!”
“저, 전하!”
나지막이 신음하는 카셀에 내 심장이 덜컹거렸다.
‘미친놈아……!’
기본 스킬이라지만, 무려 레벨 999짜리다.
마룡의 드래곤 브레스를 정면으로 맞을 때처럼, 방어 아이템들이 그다지 소용이 없다는 걸 분명 알 텐데.
“아, 아니 잠깐만요! 오지 마시라니…… 섬멸!”
그럼에도 기어이 고통을 참으며 내게로 다가오기 시작하는 카셀의 모습에, 나는 당황해서 또 한 번 불을 지폈다.
‘MP –50’
[MP 2]
화르륵!
간신히 불의 장벽 하나를 건넌 그의 앞에, 더 높은 장벽이 세워졌다.
방어 아티팩트를 다 쓰기라도 한 건지, 그제야 카셀이 걸음을 우뚝 멈췄다.
일렁이는 불길 사이로, 그가 나를 매섭게 노려보는 게 보였다.
“……샤리 아즈라엘.”
그가 짓씹듯 으르렁거리며 나를 불렀다.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위험하니까 다가오지 마세요.”
“위험?”
그가 일순 시뻘건 눈을 번뜩였다.
“내 명령을 어기고 네가 지금 행한 모든 짓거리들은 위험하지 않아서 그 지경이 된 건가?”
그건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두 손 놓고 가만히 있을 순 없지 않은가.
이 지경이 되었는데도 타박만 하는 놈에게 서운해서 아랫입술을 삐죽 내밀 때였다.
“하……. 당장 스킬 해제해.”
놈이 조금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스킬 해제도 아세요?”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게임 캐릭터가 ‘스킬’ 같은 단어를 알다니. 이건 너무 설정 붕괴 아닌가.
당황하는 사이 카셀의 얼굴에 점점 살기가 감돌았다.
나는 재빨리 입을 열었다.
“전하, 이런 말 좀 황당하게 들리실지 모르겠는데…….”
“…….”
“저 안 죽어요.”
내가 그에게 소중한 동료인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를 안심시키고 싶었다.
괜히 빡 돌아서 자살이라도 해버리면 큰일이기도 했고…….
그는 너무 많은 이별과 상실을 겪었으니까.
나 하나쯤은 죽지 않는다는 것을 알려줘도 되지 않을까 해서였는데.
“알아.”
놀랍게도 그에게서 예상치 못한 답이 돌아왔다.
“높은 곳에 뛰어내리고, 칼로 배를 쑤셔도 다음 날 거짓말처럼 로브를 뒤집어쓰고 나타났으면서.”
“…….”
“내 앞에서 매번 죽은 척하는 것도 너무 성의 없지 않나, 사리 송?”
나는 그의 말에 스르륵 입을 벌렸다.
“어, 언제부터……”
“글쎄. 언제부터일까.”
그가 고개를 모로 기울이며 삐딱하게 읊조렸다.
그 순간이었다.
스르륵, 가슴께를 덮었던 검은 액체가 아래로 흘러내려 허리를 뒤덮었다.
이제 내 상반신 전체가 놈에게 먹힌 상태가 되었다.
‘온몸을 석고 뜨고 있는 것 같네.’
꼼짝도 하지 못한 채, 불꽃 장벽을 앞두고 카셀과 대화를 나누는 내 모습이 조금 우습게 느껴졌다.
그러나 그런 나와 달리 카셀의 얼굴은 무섭도록 굳어 있었다.
“이 정도 했으면 네 연극에 충분히 어울려 줬잖아.”
“…….”
“네가 바라던 대로 아는 척하지 않고, 따로 흔적을 뒤쫓지도 않았는데 대체 왜……!”
이를 악문 듯 그의 턱이 잔뜩 불거졌다.
그의 말에 반사적으로 리르의 서재에 둘이 남겨져 있던 때가 떠올랐다.
그를 내보내기 위해 죽었을 때, 내 손으로 배에 단검을 꽂은 일이 그에겐 충격으로 남았던 건가.
“당장 이 빌어먹을 스킬 해제해.”
그렇지 않으면 맨몸으로 불길 속에 뛰어들 기세로, 그가 내게 연신 종용했다.
하지만 그가 내게 다가오더라도, 뚜렷한 해결 방안은 없었다.
날붙이로 자를 수도 없는 이 망할 슬라임이 오히려 카셀을 집어삼켜 버리면, 그것만큼 황당한 일이 없으리라.
“곧 다시 만날 거예요, 전하.”
나는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다시 힘을 합쳐서 이걸 제거할 방법을 찾아보면 되죠.”
그 순간, 카셀이 험악하게 표정을 굳혔다.
“너와 같은 이방인들은 하나같이 내게 그런 말을 하더군.”
“무슨…….”
“죽어도 죽은 게 아니니, 곧 다시 돌아오겠다고.”
뜬금없는 그의 말에 눈을 휘둥그레 뜨던 나는 이내 그것을 수긍했다.
게임에 미친 헤비 유저들이라면 그런 말을 많이 했을 것이다.
그것들을 카셀이 모두 기억하리라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한 채.
“그 말대로 다시 돌아온 자들이 꽤 있었다. 그리고 그 중에선 너처럼 힘을 모아 마룡을 함께 상대한 자도 있었지.”
“……전하.”
“하지만.”
담담히 지난 과거를 읊조리던 카셀이 갑자기 말을 멈췄다.
이윽고 그는 고통스러운 사람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한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하지만 그자들 중, 검은 액체에 삼켜진 자들은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
쿵.
그 말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카셀은 되새기고 싶지 않은 괴로운 기억을 힘겹게 토해냈다.
“이 땅에서 나고 자란 다른 자들은 멀쩡히 되살아나는데, 꼭 너와 같은 이방인들만 돌아오지 않더군.”
“…….”
“그리고, 그 기억은 결국 내게만 화인처럼 남겨지게 됐지.”
그가 얼굴을 가린 손을 내렸다.
아까 천둥이를 탈 때 얼핏 본 것처럼.
어느덧 절박함으로 물든 얼굴을 한 채, 카셀이 애원하듯 내게 중얼거렸다.
“나는, 그걸 또 반복하고 싶지 않아.”
“…….”
“널 잃고 싶지 않다는 소리야. 아니, 너만은.”
“…….”
“제발, 샤리 아즈라엘…….”
다소 처절하기까지 해 보이는 그의 모습에,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일순 머릿속이 새하얘졌기 때문이다.
‘왜…….’
왜 하필, 지금 상황에서 이런 소리를 하는 것이란 말인가.
다른 때도 아닌, 죽음을 앞둔 지금.
“너무…….”
“…….”
“너무 늦었어요, 전하.”
나는 목소리를 쥐어짜내듯 가까스로 답했다.
그를 나무라는 게 아니었다.
사실이었다. 너무 늦었지 않은가.
이미 검은 액체는 내 하체까지 삼켜 나가고 있는데.
“늦지 않았어.”
그러나 그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내가 놈에게 죽임당해서, 다시 시작하면 돼.”
“그, 그건 안 돼요!”
놈의 말에 나는 화들짝 놀라 빽 고함을 질렀다.
“왜지?”
카셀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이유야 많았다.
그가 여기서 회귀하게 되면, 나는 꼼짝없이 4년간 이 빌어먹을 게임에 갇히게 된다.
‘그럼 내 현실 몸은?’
최악을 가정해서 게임 탈출 전에 굶어 죽기라도 한다면 영영 돌아오지 못한다.
가까스로 현실 몸이 죽지 않았다 해도, 멸망을 앞둔 게임 세상에서 4년간 외로이 버텨야 할지도 모른다.
게다가 극적으로 게임에서 탈출한 후, 카셀을 구하기 위해 다시 게임을 시작하더라도 그가 나를 기억하리란 보장이 없었다.
그사이 버그 수정이 된다면, 얄팍한 데이터 쪼가리는 당연히…….
수십 가지의 이유가 머릿속을 어지러이 휩쓸었다.
하지만 정작 내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저, 전하를 잃고 싶지 않은 건 저도 마찬가진데요…….”
이따위 말뿐이었다.
‘X발.’
몰려오는 쪽팔림에 그의 시선을 휙 피할 무렵.
“그렇군.”
의외로 카셀은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내가 놈에게 종종 설렘 비슷한 감정을 느낀 것을 모두 알고 있는 사람처럼.
“그럼 방법은 하나뿐이다.”
“네? 방법……?”
“아직 시도해보지 않은 게 하나 있다고 했잖아.”
나는 어리둥절 해졌다.
‘그거, 용사 머릿수 늘리기와 마물 조종하기 아니었어?’
아직도 쓰지 않은 방법이 또 있는 건가 싶어서 멍하니 카셀을 바라볼 때였다.
그가 불현듯 품속에서 보라색 액체가 담긴 작은 유리병 하나를 꺼냈다.
[불면 유발 각성 포션]
그것을 알아본 나는 순간 눈을 부릅떴다.
“지,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설마 먹으려는 것은 아니겠지?
하지만 그 설마가 맞는 듯, ‘뽁!’ 하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카셀이 유리병의 마개를 뽑았다.
“전하!”
나는 경악한 채 그를 불렀다.
그의 포션 중독은 아직 완치 상태가 아니었다.
다른 포션도 잘 먹지 못해 희석해서 먹거나 약재로 대체하고 있는 마당에, 포션 중독의 근원을 먹으려 들다니.
“드시지 마세요. 대체 왜 그러시는데요!”
“이해 못 하겠지만, 어느 순간 내게 저주를 건 존재와 정신이 동화될 때가 있었다.”
카셀은 내 비명과도 같은 만류에 무뚝뚝하게 응수했다.
처음 듣는 얘기였다. 정신이 동화된다니.
“그게 무슨…….”
“잠들면 재앙이 일어나는 거라 생각해서, 필사적으로 잠들지 않으려 했는데…….”
“…….”
“점점 내 저주가 재앙인지, 내 존재 자체가 재앙인 건지 알 수가 없더군.”
제 입으로 말하면서도 혼란스러운 건 마찬가지인지 카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하지만 놈과 정신이 동화된다는 건, 다시 말해서 통제할 수도 있다는 소리겠지.”
그러나 그것은 찰나였다.
카셀은 다시 단단해진 눈으로 나를 마주 보았다.
“내가 성공해서, 풀려난다면.”
“…….”
“포션 중독은 그대가 치료해주도록 해.”
“잠깐, 전하. 잠깐만요……!”
그 말을 끝으로 그가 망설임 없이 포션을 삼키려 들었다.
아무래도, 그는 상태 이상이 되어 강제로 악몽을 꾸려는 것 같았다.
검은 액체에 온몸이 휘감긴 채 꿈쩍도 못 하는 상태에서, 그를 막을 수 없었다.
“아담! 저 미친놈 좀 막아봐요! 니세! 일레인!”
아직 도착하지 않은 건지, 보이지 않는 메인 캐들을 고래고래 부르던 나는.
카셀의 입술에 유리병이 닿은 순간, 눈을 질끈 감고 외쳤다.
“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