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밴!”
다행히 카셀은 병이 입에 닿기 직전 가까스로 움직임을 멈췄다.
나는 잔뜩 숨죽인 채로 그를 지켜보았다.
솔직히 이게 가능할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아무리 내가 NPC로서니, 남주를 해당 지역에서 영구 차단하는 게 될까?
제작자도 아닌 나에게 그럴 능력이 있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이런 것으로나마 시간을 끌 수 있다면.
“밴! 밴! 카셀 루크비히 영구 차단!”
“영구 차단?”
연달아 들리는 내 외침에 카셀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아무래도 제 이름까지 들먹이며 불길한 소리를 내뱉는 내가 석연치 않아서일까.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화악!
놀랍게도 그의 몸에서 환한 빛이 새어 나오기 시작한 것은.
“무슨…….”
카셀이 당황한 얼굴로 제 몸을 내려다보았다.
검은 액체가 나를 좀먹어 가는 것처럼, 그 하얀 빛은 순식간에 카셀의 온몸 전체로 퍼져나갔다.
“아.”
그것을 멍하니 응시하던 나는, 문득 깨달았다.
조금 느리게 발동됐을 뿐, 지금 카셀의 모습은 그간 내게 ‘밴’ 당했던 캐릭터들과 영락없이 같다는 것을.
“이게 되네…….”
바보처럼 그렇게 중얼거리고 있을 무렵.
자신의 상태가 심상치 않음을 감지한 카셀이 살벌한 얼굴로 버럭 윽박질렀다.
“샤리 아즈라엘, 대체……!”
파앗!
그러나 그는 채 말을 끝맺을 수 없었다
찰나, 하늘로 솟은 듯 그의 존재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기에.
「[황태자 카셀 루크비히]를 해당 지역에서 영구 차단합니다.」
곧이어 떠오른 시스템 창에 나는 안도하는 한편, 알 수 없는 허망함을 느꼈다.
지금 이 순간만 모면한 후 차단을 해제하고 다시 만나면 되지만, 왠지.
왠지…….
이게 영영 끝인 것 같다는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마법 스킬을 쓸 수 있는 것을 넘어, 게임의 관리자라는 것까지 모조리 들켜서일까.
‘……인사라도 제대로 할걸.’
뒤늦게 후회가 되었다.
‘이게 되네.’ 같은 멍청한 소리를 할 틈에.
더는 아프지 말고.
자학과 자해 같은 것도 하지 말고, 괴로운 과거도 더 이상 곱씹지 말고.
당신이 앞으로 행복하길 바란다는 말이라도 좀 해줄걸.
그때였다.
“샤리!”
“누나!”
“천사님!”
타오르는 불 너머로 용사들을 포함한 메인 캐릭터들이 하나둘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이게 대체…….”
마침내 내가 만들어 놓은 불의 장벽 앞까지 도달한 그들은, 검은 액체에 거의 다 집어삼켜진 내 모습을 보고 하나같이 경악했다.
“누나, 잠깐 기다려요! 제가 금방 갈 테니까.”
제일 먼저 정신을 차린 일레인이 품에서 양파 조각을 한 무더기 꺼냈다.
그런데 한가득 꺼낸 게 무색하게도, 발발 떠는 손 때문에 절반 넘게 바닥에 흘렸다.
“내게 방어 아티팩트가 남았다. 이걸 이용해서 빠르게 불을 뛰어넘지.”
“자, 잠시만요! 제가 성력으로 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담도, 니세도.
이미 내 정체를 알고 있던 그들은, 침착하게 나를 구할 방법을 논의했다.
웃기게도, 사라진 황태자를 찾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평소라면 그런 그들의 행동이 당황스럽고, 부담스럽게 느껴졌을 것이다.
그리고 의식적으로 내가 아닌, 카셀과 본인들부터 챙기라고 되뇌었겠지.
왜냐하면 나는, 나는 너무 바보 같고 멍청해서…….
소중한 것이 생기면 잃어버릴까 두려웠다.
그래서 무의식중에도 내내 그들을 멀리해왔다.
‘아…….’
잊고 있던 기억들이 파도처럼 몰려오면서, 그간 모든 인물에게 애써 세워뒀던 철옹성 같은 벽들이 한순간에 허물어졌다.
친밀도 따윈 필요 없다고.
어차피 난 엔딩만 보면 미련 없이 떠날 거라고.
염불처럼 되뇌던 것들은 모두 핑계에 지나지 않았다.
난 그냥, 상처받기 싫었다.
‘소중히 여겼다가, 나를 한낱 동료로도 취급 안 해주면 어떡해.’
카셀을 비롯한 메인 캐릭터들은 아무리 내가 날뛴다 해도 어찌할 수 없는, 이 세계의 주연들이 아닌가.
그에 비해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완전한 유저도, 그렇다고 게임을 온전히 파악하고 있는 제작자도 아니었다.
괜히 나댔다가 추후에 배척당하는 것보다, 내가 먼저 배척하는 편이 마음 편했다.
이토록 나약한 나는 그저 외면해오기만 했다.
카셀이 내게 보이는 호감.
아담과 니세, 일레인, 그 밖에 이 세계의 모든 인물이 내게 보이는 호의들.
그리고 그런 것에 자꾸만 동하는 내 마음까지.
철저히 이 모든 걸 외면한 채 로브 속에 꼭꼭 숨어 있던 졸렬한 인간이 바로, 나였다.
“……모두 고마워.”
나는 심각한 얼굴로 내 구출을 논의하는 사람들을 보며 말했다.
내 목소리에 일레인과 아담, 니세가 흠칫하며 나를 돌아보았다.
“나도 같은 동료 취급해줘서.”
그렇게 배척했는데도, 내게 마음을 열어줘서.
내 느닷없는 말에 일레인이 눈살을 찌푸렸다.
“뭔 소리예요, 누나! 내가 뭐 때문에 이 개고생을 사서 하고 있는데!”
“처, 천사님. 마, 많이 아프세요?”
“기다려라. 해결책이 나왔으니 곧 구출해주겠다.”
차례대로 말을 내뱉는 메인 캐릭터들 이외에도, 나를 응원하는 목소리들이 연이어 들려 왔다.
“조금만 참으십쇼, 약제사님!”
“힘내세요!”
나는 그들을 쭈욱 한번 둘러본 후, 다시 일레인에게 시선을 못 박았다.
“일레인, 천둥이 잘 돌봐주고. 나 때문에 좀 다쳤어. 그리고 도버 마을의 내 땅들은 다 엘레나 명의로 돌려놨으니까, 걱정할 것 없어.”
“무슨…….”
“니세. 너는 항상 네 힘을 과소평가하고 나를 은인 취급하지만, 여기까지 온 건 온전히 네 눈부신 노력과 의지가 있어서야.”
나는 다음으로 니세를 돌아보며 말했다.
“왜냐하면, 나는 너를 내내…….”
여주라고 생각했거든.
“……강하다고 생각했거든.”
“처, 천사님…….”
차마 그렇게 말할 수 없어 얼버무리자, 니세가 그렁그렁한 눈으로 나를 보았다.
하지만 시간이 그리 많지 않기에, 나는 바로 다음으로 넘어갔다.
“그리고, 백작님.”
아담에게는 카셀 다음으로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매번 도와주려 하신 마음, 무시해서 죄송해요.”
그러나 막상 나오는 말은 그것뿐이었다.
비록 시스템 창에선 매번 ‘의심’이니 ‘괘씸함’이니 하고 떴었지만…….
만약 일찍이 내 정체를 알았더라도, 그는 나를 모른 척해줬거나 오히려 도와줬을 수도 있다.
정체를 숨긴 것보다, 본인을 신뢰하지 않는 내 말에 서운함을 느끼던 것만 봐도 그랬다.
비단 최근 그와의 대화를 통해 깨달은 것만은 아니었다.
아담은 ‘어먹지’를 잡을 때 내가 둘러댔던 말도 안 되는 변명을 듣고도 아무렇지 않게 넘어가 줬었다.
기가 지네의 아이템들을 깡그리 가져간 것도 용서해주었고, 세이렌 던전에서 내가 저지른 만행도 모두 눈감아줬다.
그는 어쩌면 내내 나를 도우려 한 걸지도 모른다.
시스템 창에 떠오른 단편적인 단어만 보고, 아담을 경계하고 의심하며 벽을 세운 건 오히려 나였다.
“너…….”
내 사과에 아담의 푸른 눈이 한없이 흔들렸다.
“무슨 짓을…… 하려는 거냐, 샤리 아즈라엘.”
무언가 심상치 않음을 눈치챈 걸까.
그가 서둘러 방어 아티팩트를 발동하려는 순간.
나는 나지막이 읊조렸다.
“지역 전체 밴.”
“무슨……!”
이번에는 카셀이 사라질 때보다 좀 더 빨랐다.
「[용사 안토니오 갈라고스]를 해당 지역에서 영구 차단합니다.」
「[용사 디아나 테일러]를 해당 지역에서 영구 차단합니다.」
「[용사 검은 부엉이]를…….」
팟! 팟, 파앗!
여기저기서 환한 빛과 함께 사라지는 사람들을, 나는 마지막까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일레인 그리셀다]를 해당 지역에서 영구 차단합니다.」
「[22대 교황 니세]를 해당 지역에서 영구 차단합니다.」
「[아담 헤일리]를 해당 지역에서 영구 차단합니다.」
마지막으로 창백한 낯빛의 메인 캐릭터들까지 사라지자, 산꼭대기에는 순식간에 정적이 찾아왔다.
이로써 검은 액체가 용사들을 미끼 삼아 마지막 발악을 할 기회마저 완전히 차단했다.
“어리석은 계집…….”
아래에서 기운이 한풀 꺾인 둔중한 울림이 느껴졌다.
‘뭐야. 아직도 주둥이 움직일 힘이 남았나?’
그렇게 높은 곳에서 떨어졌음에도 여전히 살아 있는 마룡을 나는 짜증스럽게 내려다보았다.
[HP 181 / 990]
그래도 내가 한 게 모두 헛된 짓거리만은 아니었는지, 놈의 HP 게이지가 훅 줄어 있었다.
몇 번만 더 공격한다면, 완전히 죽일 수 있을 만큼.
‘아쉽다…….’
내 딴엔 최선을 다했는데도, 역시 최종 보스는 만만치 않았다.
그 난리를 피우고도 아직 살아 있다니.
‘불황따’와 같은 헤비 유저들이 왜 그렇게 난리를 쳤는지 알 만했다.
“너는 두렵지 않아?”
얼마 남지 않은 피통을 바라보며 연신 입맛을 다시는데, 갑자기 놈이 물었다.
득의양양하던 아까와는 달리 퍽 기운 없는 목소리였다.
별로 말 섞기 싫었지만, 고요해진 주위가 낯설게 느껴져서 나는 시큰둥하게 되물었다,
“뭐가?”
“이번에는…… 다시 살아나지 못 할 수도 있잖아.”
뭔 소린가 했더니. 아까 내가 했던 말을 꼬집는 것 같았다.
“네가 뭘 모르는 것 같아서 특별히 알려주는데.”
“나도 안 죽는 건 마찬가지거든.”
죽지 않는 NPC 버프가 발동되지 않아, 완전히 죽어버리면 어쩔 거냐는 질문 같은데.
나는 그저 어깨를 으쓱였다.
“그럼 죽지 뭐.”
“뭐? 허.”
마룡, 아니, ‘죽음’이라는 존재는 그런 내 대답에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하지만 이대로 죽으면 오히려 내게는 이득이었다.
게임 오버로, 이 빌어먹을 게임에서 드디어 탈출할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게다가 다시 회귀할 카셀에게도 나쁘지만은 않은 일이었다.
어쨌든 마룡을 죽일 수 있다는 희망을 보았지 않은가?
비록 이번 생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그라면 분명 방법을 찾아낼 것이다.
내가 그를 다시 만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잠시 어두워진 얼굴로 카셀을 떠올리던 나는, 그것을 밀어내듯 새로이 솟아난 생각에 마룡을 내려다보았다.
“넌 두렵구나. 이번에 죽으면, 다시 못 돌아갈까 봐.”
무심히 중얼거리자 놈의 쭉 찢어진 눈깔이 일순 부릅떠졌다.
“어떻게…….”
“정신이 동화되는 것 같다더니, 뭐 언젠간 정말로 카셀에게 통제될 것 같나 보지?”
카셀의 말이 떠올라 한번 찔러본 것인데, 정말이었는지 놈이 입을 다물었다.
그 어떤 마물보다 강대한 힘을 가진 채 세계가 멸망하길 원하는 놈은, 카셀의 회귀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점점 저주를 넘어 재앙을 일으키는 힘마저 그에게 동화되고 있는 것 같았다.
“넌 그런 생각 해본 적 없어?”
한동안 침묵하던 마룡이 되물었다.
“여기서 죽으면 네 원래 몸으로 못 돌아간 채 끝이라는 생각 말이야.”
왜 안 해봤겠는가?
나는 수시로 내 원래 몸이 굶어 죽어 있는 것을 상상했다.
그리고 한없이 두려워했다.
하지만 지금 와서 보니, 뭐가 그렇게 두려웠는지 알 수 없었다.
게임에 중독돼서 VR기기를 뒤집어쓰고 굶어 죽은 ‘씹타쿠’가 되길 두려워했던가…….
“그래도 별수 없지.”
나는 다소 심드렁하게 읊조렸다.
현실의 내가 그 꼴로 죽는다 해도, 여기서 내가 얻은 것들이 무의미해지는 것은 아니니까.
비록 게임일지라도, 나는 여기서 갖은 경험과 감정을 보고 느꼈다.
그것들을 현실로 돌아가서도 느낄 수 있을까.
생각해보면 답은 아니었다.
“나는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했을 뿐이야.”
그 결과가 비록 죽음과 관련되어 있을지라도.
“할 수 있는 일?”
“그래.”
황태자이자 지휘관으로서 용사들을 통괄한 카셀처럼.
가장 선두에 서서 마물을 베어내던 아담, 양파로 눈을 혹사시키며 쉴 새 없이 투명화하던 일레인, 성력을 있는 대로 끌어 쓰던 니세처럼.
이 세계를 지키기 위해 온 생명을 다 바친 모든 용사들처럼.
나도 내가 이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한 것이다.
나는 덤덤하게 덧붙였다.
“어쨌든 죽으면, 난 이 망할 곳에서 벗어날 수 있으니까.”
“…….”
“하지만 카셀은 또 동료들을 잃은 채로 회귀해야 하잖아.”
“…….”
“그러니까 굳이 따지자면, 여기서 나 하나만 죽는 게 가장 합리적이란 소리야.”
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게 내가 나머지 용사들도 모조리 밴 한 이유였다.
“놀라워.”
그때였다. 가만히 내 말을 듣고 있던 마룡이 지껄였다.
“너의 그 맹목적이고 무식한 믿음이.”
“뭐?”
“꼭 인간들에게 영원을 주려던 삶과 같잖아.”
“이 새끼가 누구보고 무식하다는…….”
그 순간이었다.
두근!
검은 액체에 뒤덮인 채 아무런 감각도 느껴지지 않던 검을 쥔 손에서, 별안간 한차례 박동하는 감각이 느껴지는 것은.
「[Lv.999 루미에카르]가 당신의 용기와 맹목적인 투지에 공명합니다.」
두근. 두근. 두근.
처음엔 착각인 줄 알았던 박동이 점차 커졌다.
그와 동시에 떠오른 시스템 창.
「[Lv.999 루미에카르]의 고유 스킬 [진정한 희생과 헌신]이 준비되었습니다.」
「스킬 발동엔 대가가 필요합니다. 발동을 원하면 기본 스킬 [필격]을 외치십시오.」
갑작스럽게 떠오른 시스템 창에 머릿속이 하얗게 물들었다.
‘X발, 진정한 희생과 헌신이…… 스킬 이름이었어?’
대체 무슨 조건으로 발동되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어쨌든 간에, 이건 내게 기회였다.
마룡을 죽일 수 있는 마지막 기회.
비록 그 대가가 뭐든.
“자, 잠깐……!”
“필격!”
‘HP –969’
[HP 0 / 999]
‘MP –2’
[MP 0 / 999]
영창과 동시에 남은 내 HP와 MP가 모조리 소진됐다.
순식간에 텅 빈 게이지 창을 놀란 눈으로 응시하는 순간.
“마, 말도 안 돼!”
마룡이 당황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화아아아아악!
그리고, 검은 액체를 뚫고 두 손에 쥐고 있던 검으로부터 폭발적인 빛이 터져 나왔다.
끄아아아아아악!
얼핏 누군가의 끔찍한 비명이 들렸다.
[HP 0 / 990]
나와 마찬가지로 순식간에 줄어든 마룡의 HP창을 끝으로, 암전이 찾아왔다.
「당신은 동료들을 위하여
희생과 헌신한 채로 죽었습니다.」
「~GAME CLEA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