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룡도, 화산 꼭대기였던 게임 배경도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컴컴한 어둠.
그 한가운데에 하얗게 빛나는 글씨를 나는 멀거니 바라보았다.
“게임 클리어…….”
게임 오버가 아니라, 게임 클리어.
나는 그 말을 여러 번 곱씹었다.
좀처럼 믿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진짜로. 마침내 엔딩을 보았다는 사실이.
“뭐야.”
한참 동안 글씨들과 눈싸움을 하고 있던 나는, 그제야 주변을 돌아보았다.
나는 여전히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이었다.
“게임 클리어라면서, 왜 안 내보내 주는데?”
나는 시스템 창이 떠 있는 허공을 노려보며, 벌컥 소리쳤다.
“엔딩 보면 보내준다며! 엔딩 봤잖아! 당장 내보내 줘! 보내 달라고!”
그때였다.
“축하드려요, 샤리 님! 정말로 성공하셨군요! 너무 대단하세요!”
어디선가 낭랑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그대의 승리를 진심으로 감축하는 바이네, 후배여.”
“추카추카추.”
근엄한 목소리에 이어, 변성기 직후 소년의 것처럼 다소 허스키한 목소리까지.
나는 그 목소리의 출처를 찾아 고개를 휙휙 돌렸다.
하지만 어딜 봐도 캄캄한 어둠뿐.
그들을 찾는 듯한 내 모습을 알아차린 건지, 낭랑한 목소리가 말을 이었다.
“게임이 끝났으므로, 아쉽게도 더 이상 실시간 채팅이 어렵습니다.”
“당신들 누구…….”
반사적으로 되묻던 나는 흠칫 말을 멈췄다.
저 묘하게 기이한 말투와 물씬 드는 기시감.
“……설마, 아리?”
“하핫! 목소리만으로 알아차리시다니, 역시 샤리 님은 대단하세요!”
“허.”
나는 돌아오는 답에 어처구니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실시간 채팅도 모자라, 이젠 직접 대화할 수 있다니.
“대체 이게…… 이게 뭔데요?”
기가 막혀 허공을 향해 묻자, 근엄한 목소리로부터 답이 돌아왔다.
“후배여. 그대가 세상을 구하기 위해 사력을 다하는 사이, 우리 또한 놀고 있지만은 않았네. 보이스 채팅이라는 신기술을 도입하여…….”
“다들 이제 그만 하셈.”
그때였다.
근엄한 목소리에 비하면 퍽 앳된 목소리가 말을 끊고 불쑥 끼어든 것은.
“……이 아니라, 그만들 하지.”
“큼, 흠.”
“언제까지 이 우습지도 않은 연극에 어울릴 건가.”
경박스러운 인터넷 말투를 고친 남자애의 목소리를 끝으로, 시스템 창 밑에 동그란 빛 하나가 생겨났다.
그것은 점점 커져서 사람 형체를 갖추더니, 마침내 빛이 사라지고 익숙한 모습으로 화했다.
“……카셀?”
흑요석처럼 새까만 머리칼과 피처럼 붉은 눈동자.
카셀을 꼭 닮은 소년의 모습에, 나는 눈을 크게 떴다.
그리움을 닮은, 알 수 없는 감정이 일순 울컥 치솟았다.
하지만 그것은 찰나였다.
“그놈은 마룡 하나 제 손으로 못 죽이는 찐따죠? 구분도 못 하죠?”
“…….”
“……아니, 그 모자란 놈과 나를 헷갈리다니. 무엄하다.”
새침하게 쏘아붙이는 소년의 모습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그사이 두 개의 빛이 더 생겨났다.
“허허. 후배여, 이렇게 마주하니 조금 부끄러운지고.”
“안녕하세요, 샤리 님. 처음 뵙겠습니다.”
금발과 푸른 눈을 가진, 어딘지 모르게 아담과 닮은 듯 다른 중년의 사내.
그리고 신전에서 내가 타고 오른 여신상의 모습과 똑 닮은 여자까지.
나는 갑자기 우르르 튀어나온 GM들의 모습에 그저 어안이 벙벙했다.
그리고 놀라움과 당황스러움은 곧 분노로 뒤바뀌었다.
“이 XXXX들…….”
마침내 내 눈으로 마주한 이 빌어먹을 게임의 제작자들 모습에, 눈이 뒤집히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이…… 이 사기꾼 같은 놈들아! 사람을 어떻게 이렇게 개고생을 시킬 수가 있어? 어떻게 그렇게 무책임하게 공략법조차 안 알려 주고 나 몰라라 하냐고―!”
나는 괴성을 지르며 놈들에게 달려갔다.
까딱했으면 진짜로 죽을 뻔하지 않았는가.
HP와 MP 창이 0으로 텅 빈 것을 목격했던 순간의 그 심정이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것이다.
한달음에 제작자들에게 당도한 나는 곧장 손을 뻗어 닥치는 대로 놈들의 멱살을 쥐려 했다.
그러나 내 손은 그들의 몸을 훅 통과하여 허우적거렸다.
“이 XX, XXX! 이건 왜 잡히지도 않아?!”
멱살을 쥐는 것을 포기한 나는 이어서 광인처럼 허공에 주먹질을 해댔다.
그렇게 하면 조금이라도 놈들에게 타격을 입힐 수 있을 것처럼 말이다.
그런 나를 약 올리기라도 하듯, 아리가 다급히 외쳤다.
“지, 진정하세요, 샤리 님! 그렇게 하셔도 저희를 때릴 수는 없습니다!”
“왜?!”
“저희는 그저…… 지나간 역사 속에 남겨진 기억일 뿐인걸요.”
여신의 형상을 한 여자가 울상을 지은 채로 어색하게 웃었다.
그 모습에서 꼭 ‘ㅠㅠ’가 보이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후배여, 그대가 누누이 우리를 타박했지 않은가. 엔딩도 모르는 놈들이라고.”
마치 그런 여자를 거들 듯 옆에 있던 중년의 사내가 말했다.
“그 말이 맞다네. 우리도 모르는 엔딩을 그대에게 대체 어찌 알려주겠는가.”
“하, 지금 그걸 말이라고……!”
무책임한 말에 다시금 분노가 치솟을 때였다.
“어쨌든 잘 끝냈으니 된 거 아님? 아니, 아닌가?”
옆에 우두커니 서 있던 카셀을 닮은 소년, 지누가 불쑥 입을 열었다.
“무슨…….”
“게임은 끝났고, 너는 엔딩을 보는 것에 성공했다.”
“…….”
“강대해진 ‘죽음’을 잠재우고 세상을 멸망으로부터 구했지. 이제 돌아가는 일만 남았을 텐데, 그렇게 화를 내는 이유를 모르겠군.”
쪼그만 게, 그렇게 말하니 또 할 말이 없었다.
맞는 말이다. 결국, 해피 엔딩이니까 그나마 다행이긴 한데.
거기까지 이르는 과정이라는 게 있지 않은가.
‘아니, 애초에 네놈들이 원인 제공만 안 했더라도 내가 이렇게 개고생하고 화낼 일도 없었잖아!’
울컥하여 한마디 쏘아붙이려던 순간이었다.
문득 뇌리를 스치는 위화감에, 나는 조금 전 지누의 말을 곱씹어 보았다.
“……잠재웠다고? 죽인 게 아니라?”
고대 마룡은 최종 보스가 아니었다.
결국, 마룡 안에 깃들어 있던 그 정체불명의 검은 액체.
‘죽음’이라는 존재가 실질적인 최종 보스였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하지만 죽인 게 아닌, 고작 잠재운 것뿐이라니. 그리고 그게 엔딩이라니.
이렇게 황당한 일이 어디 있단 말인가.
“……그럼 언젠간 또 이런 일이 반복될 수도 있다는 거잖아.”
넋이 나간 채 중얼거리자, 지누가 고개를 까딱였다.
“애석하게도 그건 소멸과 같은 개념이 적용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그저, 균형을 맞추기 위한 절대 이치와 같은 것이지.”
나는 그 말에 혼란스러운 얼굴로 되물었다.
“그게 뭔데.”
“생각해 봐라. 죽음이 없다면 세계는 결국 고인 채로 썩게 될 뿐이야.”
“…….”
“반대로 새로운 탄생이 없다면, 그것대로 문제가 생기겠지. 기껏 일궈놓은 땅이 순식간에 폐허로 돌아갈 테니까.”
“…….”
“죽음과 탄생의 균형이야말로 세상을 움직이게 하는 근원이다. 그것을 위하여 ‘삶’은 망각이라는 축복을 내리고 ‘죽음’을 이 땅에 잠재운 것이지.”
지누는 씁쓸한 얼굴로 덧붙였다.
“놈이 ‘삶’의 땅을 넘보는 허황된 욕심만 부리지 않았어도, 문제없이 균형이 유지되었을 텐데.”
뭐라 길고 장황하게 설명해줬지만, 도무지 뭔 소린지 모르겠다.
어쨌든 ‘죽음’이라는 존재의 힘이 강해져서 균형이 깨지면, 또 언제고 이 세계가 멸망할 위기에 놓일 수 있다는 말 같았다.
“……그럼 저주는.”
한동안 침묵하던 나는 이윽고 물었다.
“카셀의 저주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건데?”
“의외군.”
내 말에 지누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네가 그런 것까지 신경 쓰다니.”
“큼흠! 그럼 당연히 신경 쓰겠지요! 아직 어리셔서 그런지, 내내 같이 보고도 그걸 모르…… 헙.”
그럼 본인은 뭔갈 아는 건지.
묘하게 신이 난 얼굴로 지누에게 젠체하던 세라는 지누의 찌릿한 눈초리에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샤리 님!”
다행히 아리가 다소 어색해진 분위기를 환기했다.
“‘죽음’이 잠들었으니, 저주도 발현되지 않을 겁니다.”
그 대답에 나는 그제야 한시름 놓았다.
뭐든 간에, 카셀이 더는 회귀하지 않길 바라는 것은 진심이었다.
앞으로 아무런 악몽도 꾸지 않은 채 푹 잘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 또한.
비록 ‘죽음’이라는 존재를 완전히 해치우지 못했다는 건 좀 찝찝하지만…….
[태초의 고원]에 들어섰을 때부터 반쯤은 그를 위해 엔딩을 내고 싶다는 생각을 종종 했으니, 어느 정도는 성공한 셈이다.
그렇게 애써 자위하며 스스로를 다독일 무렵이었다.
문득 아리가 묘한 얼굴로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런데…… 샤리 님께선 별로 놀라지 않으시네요.”
“뭘…….”
“저희 모습이요.”
그 말에 나는 다시금 GM들의 캐릭터를 돌아보았다.
각각 제국의 초대 황제와 헤일리 가문의 선조, 그리고 여신의 외양을 딴 그들의 모습을.
리르의 서재에서 보았던 책 속의 ‘고대 영웅’들과 소름 끼칠 만큼 일치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리의 말처럼 생각보다 덤덤했다.
“언제부터 알아챘지?”
그런 내게 지누가 날카롭게 물었다.
“이곳이 게임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하.”
그 직접적인 말에 나는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그간 악착같이 붙들고 있던 가느다란 끈이 툭 하고 끊어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장난해?”
나는 놈들을 노려보며 바득바득 이를 갈았다.
“밤새가며 게임 하는 애들이 수두룩한데, 베타 버전 주제에 언제 버그가 발생할 줄 알고 상담 시간을 정해놔?”
이렇게 게임에 갇힌 나처럼, 로그아웃이 안 되기라도 하는 버그가 생기면 어쩌려고.
이상함을 감지한 것은 그때였다.
처음 게임에 갇힌 것을 알고, 버그 신고를 하러 갔을 때.
― 죄송합니다. 현재 실시간 채팅 상담 시간이 아닙니다. 상담 시간은 평일 09:00 ~ 19:00로…….
버그가 수시로 발생하는 베타 버전에서는 신고 접수를 위해 상담을 24시간 풀로 가동하고는 했다.
물론 안 그러는 곳도 있겠지만, 적어도 내가 일하던 회사는.
“……나는! 2교대였다고!”
희미하게 떠오른 기억에 눈시울이 점차 뜨거워졌다.
“그리고 X발, 속일 거면 닉네임이라도 좀 성의 있게 짓든가!”
결정적으로 확신했던 건, ‘어먹지’를 잡겠답시고 세라에게 X같은 시동어를 전달받았을 때였다.
“나 세피트라온 헤일리, 별이 되어서도 영원토록 그곳을 지키리.”
세피트라온의 세라.
니세아리브의 아리.
자이눅스의 지누.
벨리세르의 리르.
“하나같이 못 알아채는 게 이상할 정도로 성의 없이 지어놨으면서, 놀라지 않긴 뭘 놀라지 않아?!”
“그건…….”
내 우렁찬 외침에 오히려 흠칫 놀란 쪽은 제작자…….
아니, 고대 영웅들이었다.
“상담 시간은…… 미처 몰랐네요.”
아리가 낭패스러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들은 서로의 눈치를 보며 한참을 우왕좌왕했다.
이윽고 세라가 놈들을 대표하여 조심스레 내게 물었다.
“그럼…… 그대는 왜 지금껏 순순히 우리의 말을 따른 거지?‘
“그럼 어떡해요.”
이곳이 게임이 아니라는 것을 조금씩 깨달을 때마다, 필사적으로 외면하던 과거가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이곳은 게임 세상이라고.
빠르게 엔딩을 보면, 언젠간 여기서 탈출할 수 있을 거라고.
쉴 틈 없이 자신을 세뇌했다.
그 당시엔,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도저히…….
“엔딩까지 버틸 자신이 없는데.”
“…….”
“그전에 죽고 싶어질 것 같은데, 죽을 수도 없고. 그럼 어떡하냐구요!”
그 말을 끝으로 나는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