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1화 (201/212)

지금껏 꾹꾹 눌러 참아왔던 막막함, 두려움이 일시에 터져 나왔다.

“……이제야 이해가 가는군요.”

그런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아리가 문득 입을 열었다.

“샤리가 지금까지의 이방인들과는 달랐던 점이요.”

나는 우느라 정신없는 와중에도 아리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사실 나도 궁금했다.

어째서 ‘불황따’와 같은 헤비 유저가 아니라 내가 엔딩을 보는 것에 성공할 수 있었는지.

물론 NPC 버프 덕도 있지만, 예상치 못하게 일이 잘 풀렸던 상황도 분명히 존재했다.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가장 큰 힘은 바로.”

“…….”

“삶에 대한 샤리의 애착과 집념 때문이었어요.”

아리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고대했던 답이 전혀 아니었기에 나는 황당해졌다.

“아니, 주꼬 시펐다니까요? 뭔 애소리…… 크헝!”

코맹맹이 소리로 따지던 나는, 또 한 번 몰려오는 서러움에 말을 잇지 못했다.

따지고 보면, 죽지 못했던 것도 다 저놈들 때문이 아닐까?

‘퀘스트 지역 이탈’이랍시고 튕긴 것도 놈들이 내 탈출을 막기 위해 조작한 걸지도 모른다.

씨근덕대며 고대 영웅들을 노려보는데.

마치 그런 내 머릿속을 읽은 듯 세라가 고요히 말했다.

“후배여, 그건 무의식중에 비롯된 그대의 의지라네. 우리 또한 처음 봤을 때 무척 감탄했지.”

“무의식?”

‘지역 이탈’로 죽지 못하게 만든 게 내 의지라고?

고개를 갸웃대던 나는, 이윽고 험악하게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또, 또 내 탓 하지! 제가 그럴 힘이 어디 있어요!”

“그대도 이제 알겠지. 이 세계는 두 개의 땅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화를 내는 내 모습에도 세라는 태연히 답했다.

“삶과 죽음의 땅. 그대가 있었던 삶의 땅에서 생명이 일생을 마치고 죽으면, 이곳 죽음의 땅에서 다시 태어나지.”

“삶의 땅 인간들 말로는, 뭐 천국, 극락 같은 거라고 부르던데?”

지누가 삐딱한 음성으로 덧붙였다.

“여기가…… 천국이라고?”

나는 일순 멍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멸망을 앞둔 채, 다 무너져 가던 이곳이 천국이고 극락이라니.

어안이 벙벙한 채로 눈을 끔뻑이고 있자, 세라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곳에서 일생을 마치고 죽으면, 다시 그대가 있던 땅으로 돌아가 새로이 태어나는 걸세.”

“…….”

“한마디로 이곳에선 그대의 땅이 바로 천국인 것이지.”

“아…….”

나는 짧게 감탄했다.

끝없는 윤회.

그리고 그 간극을 메우는 망각.

그것이 바로 ‘삶’이 인간들에게 주고 싶었던 진정한 선물인 것이다.

새로운 깨달음에 눈을 부릅뜰 때쯤, 지누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 두 세계를 모두 넘나들 수 있는 존재들.”

“…….”

“삶과 죽음의 경계에 있는 그대와 같은 존재들은 특별한 힘을 지니고 있다.”

“특별한 힘……?”

나는 얼떨떨한 얼굴로 내 몸을 훑어보았다.

꼭 만화 영화에 나올 법한 변신 마법 소녀 같은 샤랄라한 착장이 바로 보였다.

비록 마법봉이 아닌 기괴한 생김새의 검을 들고 있어서 그렇지, 실제로도 마법을 팡팡 쏴 젖히고 다녔으니 특별한 힘을 가진 건 맞을지도…….

“샤리와 같은 이방인들은 대부분 이곳이 현실이 아닌 꿈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많은 것을 실현시킬 수 있습니다.”

아리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꿈속에선 모두가 전지전능한 신과 같잖아요?”

“꿈…….”

“샤리 님이 이곳을 게임 속이라고 자각한 후에 바로 스킬을 쓸 수 있게 된 것처럼요. 무의식중에 상상하던 잠재력을 십분 발휘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아리는 분명 내가 힘을 쓸 수 있었던 이유를 설명하는 것이겠지만, 나는 문득 수치스러워졌다.

게임이 아니라는 것이 확실해지자, 내 꼴이 그다지 정상적이지 않다는 자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오, 망할.’

은밀한 취향이 모조리 까발려진 것 같은 기분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검으로 쭈뼛쭈뼛 치마를 가리자, 지누가 코웃음을 쳤다.

“취향 한번…….”

“후배여. 참으로 보기 좋건만, 왜 자꾸 가리는 것인가? 사실 그 착장은 내 취향과 몹시 일치했다네. 그래서 그대가 자꾸 로브로 가릴 때마다 아쉬웠…….”

“……닥치세요.”

세라가 위로랍시고 건네는 말에 나는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부끄럽기도 했지만, 조금 혼란스럽기도 했다.

그럼 대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내 무의식이 반영된 건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저흰 이제껏 두 세계를 넘나들 수 있는 샤리 님과 같은 존재들을 찾아, 죽음이 날뛰는 이 땅의 멸망을 막고자 했습니다.”

아리가 차분히 설명했다.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어요. 카셀과 끝내 친해지지 못한 사람들, 세상을 구하길 거부하는 사람들, 어느 순간 현실임을 자각하고 힘을 잃는 사람들…….”

“…….”

“카셀에게 걸린 저주 덕분에 매번 다시 시작할 기회가 매번 주어졌지만, 그 기회는 무한하지 않았습니다.”

아리가 나지막한 한숨을 쉬며 안타까운 눈빛으로 지누를 바라보았다.

“……회귀를 반복할 때마다, 그의 영혼이 점점 부서지고 있었거든요.”

나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덩달아 지누를 돌아보았다.

‘그러고 보니…….’

리르의 서재에서 본 책은 카셀이 지누의 환생임을 알려 주었다.

그러니 카셀의 영혼은 결국 지누의 영혼과도 같다고 볼 수 있었다.

‘어쩐지 둘 다 싸가지가 저세상 급이더라.’

속으로 이죽거리면서도, 안타까운 마음이 삐죽 솟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부서지는 자신의 영혼을 지켜봐야 하는 기분은, 심정은 어떨까.

말로 형용할 수 없을 만큼 두렵고 무섭지 않았을까.

“초월적인 존재들이 주고받은 저주는 애초에 인간들의 영혼 따위가 감당할 수 없음.”

아리의 안타까운 눈빛에도 지누는 눈 하나 까딱하지 않고 말했다.

하지만 그 무덤덤한 말투와 표정이, 왜인지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

앳된 지누의 얼굴 위로 그와 닮은 누군가의 얼굴이 겹쳐졌다.

다시 회귀를 반복하고 싶지 않다고, 날 잃고 싶지 않다고 덤덤하게 중얼거리던 남자.

그의 표정이 절박하게 느껴졌던 건 어쩌면 내 착각일지도 모른다.

다시 되새겨 보니, 카셀의 얼굴은 평소와 같이 무뚝뚝했다.

하지만.

얼굴을 가리고 있던 손끝이, 쉴 새 없이 바르르 떨리고 있다는 것만은.

그것만은 분명 착각이 아니었다.

“회귀할 때마다 우리는 점점 더 꾀를 낼 수밖에 없었어요.”

회상에 잠겨 있는 사이, 아리가 지누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고요히 내뱉었다.

“신인 척도 해봤고, 때론 책 속, 때론 영화나 드라마 촬영인 척도 했었지요.”

“매번 설정에 맞추느라 고생 좀 했지.”

세라가 껄껄 웃으며 덧붙였다.

“그러고 보니…… 게임이라고 유도하기 시작한 것도, 다 후배 덕분이로군.”

“제 덕분이요?”

어리둥절한 채로 되묻자 아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봤을 때부터 저희를 바로 게임 관리자로 취급하셨잖아요?”

“뻔히 GM이라고 쓰여 있는데, 어떻게 제작자라고 생각 안 해요.”

나는 어처구니없다는 듯한 음성으로 말했다.

하이라이트 영상도 그렇고, 버그를 신고할 수 있는 시스템도 그렇고.

게임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환경을 모조리 조성해놨으면서, 이제 와 내가 그런 취급을 했다니.

연신 헛웃음을 터뜨리던 나는, 불쑥 든 의문을 캐물었다.

“그러고 보니, 제 기억은 다 어떻게 한 거예요?”

“기억이요?”

“커뮤니티에 대한 기억이요. 여기가 진짜 게임 속이 아니라면, 제가 어떻게 그렇게 남의 플레이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냐고요.”

다시 생각해보니, 이 점만은 이상했다.

다른 것들은 다 저 제작자 놈들, 아니, 고대 영웅들이 조작했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내 기억은?

퀘스트 공략부터 시작해서 ‘불황따’와 같은 헤비 유저들의 플레이 영상까지.

그것들을 다 본 기억이 있는 건 말이 안 되지 않은가.

아무리 전지전능하다 할지라도 그 많은 기억을 내 머릿속에 게임 에피소드로 심는다는 게…….

“떠올려 보세요, 샤리 님.”

“뭘…….”

“이곳에 온 게 정말로 이번이 처음인지.”

그러나 아리는 묘한 웃음을 지을 뿐, 쉽사리 답해주지 않았다.

덕분에 나는 또다시 큰 혼돈에 휩싸여야 했다.

“처음이 아니면? 제가 또 언제 이 빌어먹을 곳에 왔는데요?”

아무리 떠올려 봐도, 머릿속은 오리무중이었다.

게다가 만약 이 망할 곳에 이미 와본 전적이 있다면, 퀘스트마다 그토록 고전했을 리 없다.

직접 해본 경험 없이, 남의 공략과 영상을 본 기억만으로 플레이했으니 그토록 개고생을 한 것이 아니겠는가.

기존에 알고 있던 게임의 에피소드와는 달리, 쉴 틈 없이 발생하던 돌발 상황.

난감하고 막막하던 그 순간들을 떠올리며 얼굴을 찡그리고 있을 무렵.

“직접 플레이하기 전 게임 속에 그저 갇혀 있을 때.”

“…….”

“그때 넌 뭘 하고 있었지?”

마치 힌트를 주듯 지누가 의뭉스러운 말을 던졌다.

“플레이하기 전……?”

나는 자연히 그때를 회상했다.

이곳이 게임임을 자각하기 전, 약 2년간 게임에 갇힌 채 진짜 NPC 노릇을 하던 그때.

온종일 소처럼 밭을 갈고, 약초를 캐고, 포션을 만들고.

그렇게 힘겹게 만든 포션을 마을 용사들에게 매번 강탈당하던 그 호구 같은 삶.

그러다 문득, 이곳이 게임 속이라는 깨달았을 때 얼마나 소름이 끼쳤던가.

그런데.

“쭉 갇혀 있던 게…… 아니라고?”

머릿속이 한순간에 뒤죽박죽됐다.

나는 여태껏 내가 계속 게임 속에 갇혀 있는 줄 알았다.

그래서 게임을 하는 내내 너무나도 초조했다.

2년, 그러니까 현실 시간으로는 하루를 허송세월하며 허비했으니, 굶어 죽지 않으려면 빠르게 엔딩을 봐야 했으니까.

‘그런데 내내 갇혀 있던 게 아니라…… 이전에 왔었던 기억을 갖고 있는 거라면?’

번뜩 뇌리를 스치는 생각에 머리끝이 쭈뼛 섰다.

그 말도 안 되는 생각을 방증하듯, 세라가 읊조렸다.

“후배여, 그대는 이전에 이곳에서 살았던 짧은 시간 동안, 수많은 용사들과 이방인들을 보았다네.”

“무슨…….”

“저희는 그 기억을 자연스럽게 게임으로 받아들이도록 살짝 이어 붙인 게 전부랍니다.”

아리가 쐐기를 박았다.

“마, 말도 안 돼…….”

나는 흔들리는 눈으로 고개를 저었다.

‘내가 이 망할 곳에 두 번이나 온 거라고?’

좀처럼 믿기지 않았다. 나는 다급히 되물었다.

“그럼! 그럼 그전에는, 그전에는 왜 제게 이 망할 곳을 구하라고 안 시켰는데요?”

“…….”

“그때 시켰으면 좀 더 빨리 구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잖아요!”

“그건…….”

아리가 내 물음에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말해도 되는지 망설이는 듯한 그녀를 대신하여 세라가 내게 다가왔다.

나보다 훨씬 몸집이 큰 중년 사내는 허리를 숙인 채 시선을 맞췄다.

그리고 짐짓 내 어깨를 다독이며 말했다.

“……그대가 이 무거운 짐을 감당하기엔, 너무 어린 소녀였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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