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2화 (202/212)

왤까.

떨어져 있을 땐 그렇게 커 보이지 않았는데.

그 순간엔 세라가 까마득한 어른처럼 커다랗게 느껴졌다.

나는 일순 부모를 잃은 아이처럼 작아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게 무슨…….”

입을 벙긋대며 되물으려던 찰나, 세라는 빙그레 웃으며 내게서 물러섰다.

“그래도 그 당시에 그대가 호송되던 카셀에게 던진 포션은 획기적인 아이디어이긴 했다네.”

“…….”

“그 후로부터, 이방인들이 카셀과 친해지도록 필수 코스로 집어넣었으니 말일세!”

그 말에 나는 더더욱 혼란에 빠졌다.

“대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기억 조작인데요?”

“조작이라니!”

내 말에 세라가 펄쩍 뛰었다.

“우린 그런 힘까진 없네. 다 잊혀 가는 늙은이들이 뭔 힘이 있다고!”

“저흰 전지전능한 신이 아니에요, 샤리 님.”

여신의 모습을 한 아리가 예의 그 ‘ㅠㅠ’ 표정을 하고 뒤이어 말했다.

“모든 건 다 샤리 님의 기억 속에 있습니다.”

그 말에 막막함과 화가 치솟았다.

‘그 기억이 안 나는데, 대체 나보고 어쩌라고!’

하지만 떼를 써도 그들은 기억에 관해서는 영영 함구하려는 눈치였다.

“그럼…… 당신들은 대체 뭔데요?”

“…….”

“난, 난…… 당신들이 신 같은 건 줄 알았지. 신도 아니라면 대체…….”

“우린 역사 속으로 사라질 존재임.”

이번에 내 물음에 답한 건 지누였다.

“사라진다고……?”

나는 그 대답에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왜요? 왜 사라지는데요?”

“우리의 존재와 힘은 이 땅을 지키고, 삶을 이어가고자 하는 인간들의 기억과 투지로부터 유지됨. 아니, 유지됐다.”

“…….”

“그런데 드디어 오랜 어둠을 물리치고 평화가 찾아왔으니, 새로운 영웅들의 역사가 쓰이겠지. 이제 후대의 인간들은 그것을 기억할 테고.”

지누의 말은 모두 다 알아듣기 어려웠다.

하지만 사람들의 기억이 흐려질수록 그들의 존재가 사라진다는 의미라는 것만은 이해할 수 있었다.

그가 말하는 새로운 영웅이 카셀을 비롯한 메인 캐릭터들이라는 것도.

“그럼…… 다시 못 만나요?”

미운 정도 정이라고.

나를 인정사정없이 굴린 망할 놈들이지만, 막상 다시는 못 본다고 생각하니 아쉬움이 샘솟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아, K신파 극혐.”

“후배여, 그대가 우리를 이렇게까지 생각할 줄은…… 크흑.”

“꺼지세요.”

줄줄 돌아오는 반응에 잠시 든 아쉬움은 거짓말처럼 짜게 식었다.

그런 우리를 돌아보며 아리가 훈훈한 미소를 지었다.

“샤리 님이 저희를 기억하고 계신 이상 언젠간 다시 볼 수 있지 않을까요?”

“됐거든요. 저 빨리 돌려놓기나 하세요.”

“네, 알겠습니다.”

그나마 말이 통하는 아리가 마침내 마무리를 지었다.

“마지막으로 샤리 님께 드릴 보상이 있습니다.”

“보상?”

“고대 마룡 버그 때문에 보상해 드리기로 한 거, 기억 안 나세요?”

“아.”

그게 있었지.

하지만 이제 와 보상은 딱히 필요치 않았다.

그래도 어디 한 번 들어나 보자는 심정으로 바라보자, 아리가 말했다.

“저희가 드릴 보상은…….”

“…….”

“이곳에 남겨질 기회입니다.”

“뭐, 뭐라고요?”

나는 기가 막혀 되물었다.

‘이 망할 놈들이 끝까지 나를 엿 먹이네?’

내가 뭐 때문에 그 수많은 고생을 사서 하며 여기까지 왔는데.

무슨 놈의 남겨질 기회?

‘기회가 아니라 호구 잡겠단 소리겠지!’

“무슨 보상이 그따위야?! 차라리 여기서 번 돈이라도 가지고 갈 수 있게 해주든지!”

“아, 안타깝게도 그건…….”

버럭 소리치자, 아리가 또 다시 낭패스러운 표정으로 웃었다.

“그딴 보상, 필요 없어요.”

“일단 들어보게, 후배여.”

이를 갈며 말하자, 세라가 황급히 끼어들었다.

“안타깝게도 이곳에 오는 이방인들이 모두 다 좋은 추억만 가지고 오는 것은 아니라네.”

“…….”

“때로는 각박한 현실에서 벗어나고자 극단적인 선택을 한 자들도 있기 마련이지.”

일리 있는 말이었다.

이곳이 ‘천국’ 같은 개념이라니까, 온갖 죽은 사람들이 다 오겠지.

그렇지만 나와는 무관한 일이었다.

“그게 저랑 뭔 상관인데요.”

“그대는 아직 기억하지 못하는 듯하지만, 그대 또한 이곳에 오게 된 나름의 이유가 있지 않겠는가?”

돌아온 세라의 말에 불현듯 묘한 감상이 찾아왔다.

‘그럼…… 현실에서 나도 죽은 건가?’

이곳이 천국이라면, 나도 죽었으니 여기까지 오게 된 건가.

그렇게 생각하니 새삼 큰 충격이 들이닥쳤다.

‘현실에서도 회사의 노예로 살다가 죽고, 여기 와서도 남 따까리나 하다가 뒤진 거잖아.’

뭐 이런 개 같은 인생이 다 있지?

분해서 눈시울이 다 시큰거렸다.

“하, X발…….”

또 눈물이 나올 것 같아, 고개를 쳐드는 순간.

“님 아직 안 죽음.”

경박스러운 말투가 찬물을 끼얹었다.

“엥? 아직 안 죽었다고요?”

다시 고개를 내리고 묻자, 지누가 성의 없이 고개를 까딱였다.

“그렇지만 원한다면 현실 몸을 살려둔 채 이곳에서 살아갈 기회를 준다는 거임. 아니, 거다.”

아직 원래 말투 패치가 작동이 안 됐는지 놈은 연신 말투가 왔다 갔다 했다.

하지만 그따위 것은 조금도 신경 쓰이지 않았다.

놈들이 말하는 보상이…… 제법 혹했기 때문이다.

‘현실 몸을 살려둔 채, 이곳에 남겨질 기회.’

그간은 퀘스트 하랴, 카셀 및 메인 캐릭터들을 상대하랴.

너무 정신없고 힘든 나날들이었다.

그렇기에 오로지 돌아갈 생각에만 매몰되어 있었다.

하지만 모든 것을 해치운 지금의 이곳.

퀘스트도, 해치워야 할 마물도 없는 곳이라면, 솔직히 나쁘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제 제법 메인 캐릭터들과의 사이도 돈독해졌고, 돈도 있고, 힘도 있다.

어쩌면 현실의 직장에 찌든 삶보다 나을 수도 있다.

게다가…….

‘한마디라도 해주고 오는 건데.’

그 남자가 걸렸다.

손을 바들바들 떨며, 내가 만든 불구덩이 속으로 지체 없이 뛰어들려던 남자, 카셀이.

다시 만날 거라 했으니, 분명 나를 기다릴지도 모른다.

다른 메인 캐릭터들에게는 그래도 그간 못 했던 말을 한마디 해주고 왔는데, 유독 그에게만 바보 같은 소리만 되뇌고 온 게 마음에 걸렸다.

‘그래도…… 사후 세계에서 사는 게 말이 되나?’

나는 꽤 오랫동안 고민했다.

그런 나를 고대 영웅들은 재촉하지 않고 묵묵히 기다려주었다.

한참 후, 한없이 갈팡질팡하던 나는 마침내 마음을 정했다.

“결정했어요.”

나는 조금 결연한 목소리로 내뱉었다.

“……저 돌아갈래요.”

“…….”

“제가 원래 살던 곳으로요.”

돌이켜보면, 분명 이곳에서의 좋은 추억도 많았다.

차차 변해가던 사람들과의 관계.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얻은 감정들은, 현실로 돌아가도 얻기 힘든 값진 경험이리라.

하지만…… 그만큼 힘들고, 괴로운 기억도 많았다.

매번 죽을 고비를 넘길 때마다.

거대한 마물을 마주할 때와 NPC 버프로 간신히 죽지 않고 살아날 때마다, 무너지지 않도록.

포기하지 않도록 끊임없이 나를 채찍질해야 했다.

이곳에 남겨진다면, 또다시 그런 일이 벌어질까 봐 두려웠다.

그리고 언젠가 현실로 돌아가지 못했다고, 두고두고 후회할지도 모른다.

이곳이 다른 세계라는 것을 알고 있는 이상 여긴 내 집, 내 뿌리가 될 수는 없을 테니까.

‘……그럴 바에 차라리 여기서 끝내는 게 맞아.’

나는 이곳에서의 할 일을 모두 끝내고 죽었다.

그렇기에 아쉬울지언정, 후회는 남지 않았다.

“그만 집으로 돌아갈래요, 저.”

나는 내 결정을 또 한 번 반복해서 말했다.

“흐윽.”

아쉽지 않다고 했으면서, 왜 눈물이 뚝뚝 턱을 타고 흘러내리는 건지.

나조차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런 나를 보며 고대 영웅들은 아무 말도 보태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간 고생 많으셨습니다, 샤리 님.”

“후배여, 나 세피트라온이 그대를 진정한 용사로 인정하노라.”

“빠이.”

이제는 너무나도 익숙한 어투들을 흘려들으며, 나는 찬찬히 입을 열었다.

“……아담 헤일리 밴 해제.”

게임이 아닌 건 아닌 거고, 저질러 놓은 일은 해결하고 가야 하니까.

내 중얼거림에 고대 영웅들은 잠시 놀란 눈빛을 하다가,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22대 교황 니세 밴 해제.”

“일레인 그리셀다 밴 해제.”

그 외에 모든 용사들의 이름을 부르며 나는 하나씩 차단을 해제했다.

목록 하나 없이 사람들의 이름을 줄줄 외우는 내 모습에 나조차도 놀랐다.

몰랐는데, 이 망할 게임 속 캐릭터. 아니, 인간들에게 제법 정을 준 모양이었다.

“마지막으로…….”

생각 없이 ‘밴 해제’를 외치다 보니, 어느덧 마지막 차례가 훌쩍 다가왔다.

“카셀 루크비히.”

“…….”

“밴 해제.”

이것으로 카셀이 완전히 저주에서 벗어나서 행복하게 살아가길.

그에게 미처 말해주지 못했던 말을 속으로 되뇌던 나는, 이윽고 고대 영웅들을 돌아보며 심술궂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GM 놈들, 내 인생에서 다 밴!”

인사 같지 않은 인사를 끝으로, 환한 빛이 눈앞을 점멸했다.

* * *

“으…….”

“……님!”

빛 때문에 눈을 찡그리는데, 누군가가 나를 불렀다.

“……리 님!”

“아…….”

“송사리 님!”

명료한 부름에 나는 번쩍 눈을 떴다.

낯선 천장이 나를 반겼다.

간호사로 보이는 듯한 복장을 한 여자가 걱정 어린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여, 여기 어디…….”

“병원이에요.”

“병원……?”

그 순간, 번뜩 잊고 있던 기억이 떠올랐다.

게임에 갇히기 전에 뭘 했는지.

나는 퇴근 후에 근처 포장마차에서 얼큰하게 술 한잔 걸치고 집으로 걸어가다가…….

“네. 이틀 전에 한강에서 투신 시도하셨던 거, 기억 안 나세요?”

강물로 뛰어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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