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헉!”
나는 번쩍 눈을 떴다.
익숙한 천장과 좁은 원룸 풍경이 나를 반겼다.
아직 새벽녘인지, 방 안은 어두컴컴했다.
“하…….”
거칠게 헐떡이던 나는, 이윽고 깊은숨을 내쉬며 얼굴을 쓸어내렸다.
조금 전까지 생생하게 나를 옭아매던 라이칸, 검은 액체, 고대 마룡…….
모두 꿈이었다.
“왜 이딴 개꿈을…….”
기력이 쇠해지기라도 한 걸까.
아침에 일어나면 밥이라도 든든히 먹어야겠다.
그제야 나는 퇴원 후 한 끼도 먹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한동안 침대에 우두커니 앉아 숨을 고르던 나는, 이내 이불을 뒤집어쓰려 했다.
아직 아침이 되려면 멀었으므로, 다시 잠이나 잘 요량이었다.
그런데 막 누우려던 찰나.
“아.”
손목에서 느껴지는 저릿한 감각에 나는 흠칫 놀라 시선을 내렸다.
매트리스를 짚은 왼쪽 손목 위로 벌건 자국이 나 있는 게 보였다.
나는 반사적으로 숨을 멈췄다.
꿈속에서 라이칸에게, 검은 액체에게 붙잡혔던 곳이었기에.
* * *
잠결에 본 환영이었던 걸까.
다음 날 아침이 되자, 손목에 있던 벌건 자국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하지만 나는 주말 내내 싱숭생숭한 마음을 감출 길이 없었다.
어디 나가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무언가를 하는 것도 아닌 채 집 안에만 처박혀 있다 보니, 쏜살같이 월요일이 찾아왔다.
또 악몽을 꿀까 봐 꼬박 밤을 지새운 나는 대충 씻고 주섬주섬 옷을 갈아입었다.
출근해야 했기 때문이다.
막 현관을 나서려는 차, 불행히도 커다란 쇼핑백이 눈에 띄었다.
“아오, 저걸 왜 집까지 가져와서…….”
병원에서 돌아온 후 현관 앞에 대충 내팽개친 채 까맣게 잊고 있었다.
나는 꺼림칙한 표정으로 쇼핑백 안에 든 물건을 떠올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루미에카르가 왜 나와 같이 이 세상으로 오게 된 건지 알 수 없었다.
물론 마지막까지 내 손에 들려 있었던 것은 맞지만…….
“망할 GM 놈들, 이게 보상이라고 한 적은 없잖아.”
그리고 아무리 대단한 무기라 한들, 이런 건 여기서는 필요 없다고.
쇼핑백을 노려보며 불만을 중얼거리던 나는, 이내 거칠게 손잡이를 잡아챘다.
검을 얻은 과정을 생각하면 아깝긴 했지만, 그렇다고 계속 가지고 있는 것도 웃겼다.
비싼 값에 되팔 수도 없고, 어쩌다가 누가 보기라도 하면 분명 이상한 사람 취급할 게 뻔한데…….
‘그리고 뭐 기념할 거라고 가지고 있어.’
안 그래도 지난밤에 꾼 꿈 때문에 내심 찝찝하던 차였다.
이제 정신 차리고 현생을 살아야 하는데, 계속 그때의 기억을 되새겨봤자 좋을 게 뭐 있겠는가.
그렇기에 나는 그냥 검을 버리기로 결심했다.
‘그래. 처치 곤란으로 계속 가지고 있는 것보다 그게 나아.’
쇼핑백을 들고 건물 밖을 나온 나는, 공용 분리수거장으로 향했다.
그러나 막상 버리려니 난감해졌다.
“위험하니까 테이프로 둘둘 싸서 버려야 하나? 아니면…….”
폐기물 스티커를 붙여서 버려야 하는지, 고민하던 때였다.
끼이익!
얼마 떨어지지 않은 버스정류장이 시끌시끌해졌다.
“어……!”
무심결에 고개를 돌린 나는, 때마침 멈춰 선 버스 번호를 보고 눈을 부릅떴다.
회사로 가는 버스였기 때문이다.
세 정거장이면 도착하는 짧은 거리였지만, 출근 시간대라 놓치면 20분 넘게 기다려야 했다.
“아씨, 모르겠다!”
쇼핑백을 든 채 갈팡질팡 서 있던 나는 일단 정거장으로 달렸다.
이틀간 무단결근한 것도 눈치 보이는데, 복귀 날에도 지각하면 상부에 찍힐 게 분명했다.
앞으로도 직장 생활을 해야 하는 나로서는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이따 퇴근하고 버리면 돼.’
나는 허겁지겁 버스 위에 몸을 실으며 생각했다.
그런데 왤까.
누가 볼세라 구겨 안은 쇼핑백을 보자니, 왜인지 오늘 하루도 재수 없어질 것만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 * *
“몸은 좀 괜찮아요, 샤리 님?”
“갑자기 출근 안 해서 깜짝 놀랐어요.”
직장 동료들과 상투적인 인사를 나눈 나는 어렵지 않게 업무에 복귀했다.
다행히 상부 쪽에서 비밀로 해준 덕분에 다른 사람들은 내가 그저 병가를 쓴 것으로 알았기 때문이다.
‘강물에 뛰어들어서 이틀간 혼수상태였다는 걸 알면 얼마나 미친년 보듯 볼까.’
그나마 안정을 찾았던 직장에서조차 배척당했을 걸 상상하니, 눈앞이 아찔해졌다.
‘나중에 팀장한테 커피라도 갖다 바쳐야지.’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오랜만에 VR기기를 머리에 썼다.
얼마나 야근에 시달렸으면, 그곳에서도 자연스럽게 일을 하다 갇힌 거라고 받아들였을까.
그때를 회상하니,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잠시 동안의 로딩 화면이 지나고.
웅장한 BGM과 함께 게임 오프닝 창이 떠올랐다.
셀 수 없이 많이 본 게임 제목인데, 어쩐지 기분이 이상해졌다.
한없이 낯설기도 하고, 두렵기도 한 기분.
‘이대로 또 그 세계로 끌려가면 어쩌지……?’
멍하니 게임 로고를 응시하던 나는, 이내 떨리는 마음으로 서버에 접속했다.
이윽고 눈앞에 생생하게 펼쳐지는 게임 배경에 나는 일순 당황했다.
끝없는 평야, 그리고 인벤토리 창에 가득 차 있는 농기구들.
그렇다.
내가 다니는 회사가 개발하고 있는 게임은, 용사들이 모험을 하고 치열하게 전투를 벌이는 게임이 전혀 아니었다.
아무것도 없는 땅을 농사짓고 가꿔서 점점 영토를 넓혀가는 농장형 소셜 게임이었던 것이다.
― [유저 내꿈은토지왕] : 영자님. 강 반대편 땅 왜 안 열려요.
― [유저 무테크존버는승리한다] : 무로도 체력 포션 만들 수 있게 해주셈.
― [유저 참외맨] : 접속 지연 보상 왜 안 주죠?
“참…….”
쏟아지는 채팅을 보며 나는 허탈하게 웃었다.
그걸 착각하게 만든 제작자, 아니 고대 영웅 놈들의 능력이 대단하고, 내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져서였다.
‘멸망에서 세계 구하기가 아니라, 땅따먹기였냐고…… 어떻게 이걸 착각할 수가 있지?’
이렇게나 장르가 다른데 말이다.
그리고 조금 울었다.
이제 두 번 다시 그 세상과 접촉할 길이 없다는 걸.
이제야 절실하게 실감했기에.
* * *
쏟아지는 업무를 정신없이 처리하던 나는 다행히도 정시에 퇴근했다.
아직 몸이 성치 않으니 일찍 들어 가보라는 상사의 배려였다.
지친 몸을 이끌고 터덜터덜 회사를 나오니, 벌써 밖이 컴컴했다.
정류장으로 향하던 나는 멈칫 걸음을 멈췄다.
이미 나와 같이 퇴근한 사람들로 정류장 주변이 북적였다.
저러면 제때 버스가 와도 못 탈 확률이 높았다.
‘그냥 걸어가자.’
잠시간 고민하던 나는 이내 발길을 돌렸다.
얼마쯤 걸었을까.
“맞다. 쇼핑백……!”
회사가 보이지 않을 때쯤에서야 나는 번뜩 사무실에 놓고 온 게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오, 이 멍청아. 왜 그걸 까먹냐고.”
나는 울상을 지으며 자책했다.
‘오늘 버리기로 했는데…….’
그나마 개인 캐비닛에 넣어놔서, 검을 발견할 사람이 없다는 게 다행일까.
나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푹 쉬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이미 집까지 절반 가까이 걸어온 상태라, 다시 돌아가서 가져오기도 뭐 했다.
내일 퇴근하면서 버리는 수밖에.
‘내일도 잊어버리면 넌 붕어 대가리. 아니, 진짜 송사리 대가리야.’
스스로에게 면박을 퍼부으며 걷던 중이었다.
문득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사람들이 잔뜩 몰려 있는 게 보였다.
“……뭐지?”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쪽으로 향했다.
이유를 알고 싶어서가 아니라, 집으로 가려면 반드시 지나쳐야 하는 구간이었기 때문이다.
“어? 여기…….”
몰려 있는 인파 가까이에 다다라서야 나는 내가 입원했던 병원 근처라는 걸 깨달았다.
슬쩍 본 병원 입구에는 폴리스 라인이 쳐져 있었다.
그 주변을 잔뜩 둘러싼 경찰들과 공무원들.
‘사고라도 난 건가?’
대수롭지 않게 지나치려던 나는 우뚝 걸음을 멈췄다.
인파 사이로 언뜻 보이는 새까만 조형물 때문이었다.
“……마물의 핵?”
눈을 의심하던 그때.
병원 건물 쪽에서 건장한 체격의 남자들이 우르르 나와서 구경하는 사람들에게 소리쳤다.
“몰려 있지 마세요! 이러면 구급차 진입이 어렵습니다! 몰려 있지 마세요!”
더 자세히 보고 싶었지만, 병원 관계자들이 사람들을 쫓아내며 시야를 가린 탓에 더 서 있을 수 없었다.
나는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애써 돌렸다.
‘그럴 리 없겠지.’
이곳에 [어둠의 숲]에 있던 마물의 핵이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게다가 그 핵마저도 카셀이 파괴했다.
병원 앞에 설치 중인 조형물을 보고 착각한 게 분명했다.
그렇게 술렁이는 가슴을 진정시키자 자괴감이 몰려왔다.
‘송사리, 너 대체 어쩌려고 이래. 제발 잊어. 잊으라고!’
나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집으로 가는 걸음을 재촉했다.
아무래도 편의점에 들러 술을 사는 편이 좋겠다.
그렇지 않으면 오늘 밤도 꼬박 지새울 게 뻔했다.
* * *
삐비비빅! 삐비비빅!
“으으…….”
힘차게 울리는 알람 소리에, 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들고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딱 맥주 한 잔만 마시고 자려 했는데, 너무 많이 마셔버렸다.
빨리 정신 차리고 일상을 되찾아야 하는데.
퇴원하고 난 후에 점점 엉망진창이 되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
“후…….”
한숨을 푹 쉰 나는 더 늦기 전에 출근 준비를 시작했다.
전날과 딱히 다를 바 없는 하루였다.
정신없이 업무를 하고, 유저들한테 시달리다 보니 어느덧 퇴근 시간이었다.
“들어가 보겠습니다.”
나는 이번에도 정시 퇴근했다.
동료들은 슬슬 내가 같이 야근했으면 하는 눈치였지만, 아직까진 몸이 좋지 않다는 방패를 써먹을 작정이었다.
루미에카르가 담긴 쇼핑백도 잊지 않고 챙겨 나온 나는, 다소 가벼운 걸음으로 집으로 향했다.
어젯밤 미리 칼 버리는 방법을 검색해서 신문지도 구해 놓은 상태였다.
이대로 집으로 가서, 망할 검을 버리고.
그리고 딱 일주일만 더 야근 없이 쉬자.
그러고 나면 내 원래의 삶을 완벽하게 되찾을 수 있을 것 같은, 밑도 끝도 없는 희망이 부풀어 올랐다.
그렇게 부지런히 걷다 보니, 얼마 안 있어 병원이 보였다.
의식하지 말자고 수없이 다짐해놓고, 병원 건물을 보니 다시금 가슴이 술렁였다.
나는 고개를 푹 숙였다.
‘보지 말자. 그냥 무시해. 그리고 집까지 뛰어가는 거야.’
그렇게 되뇌며 눈을 질끈 감고 달리려던 그 순간이었다.
콰아아아앙――!
갑자기 거대한 폭음이 지축을 뒤흔들었다.
“읏!”
발밑을 울리는 진동에 깜짝 놀라 눈을 뜬 순간.
“꺄아아아악!”
“괴, 괴물이야……!”
“도, 도망쳐!”
병원 입구를 지나치던 사람들이 괴성을 지르며 이쪽으로 뛰어오기 시작했다.
나는 멍하니 그들의 뒤편을 바라보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거대한 무언가가 여봐란듯이 허공으로 두둥실 떠올랐기에.
“……미친.”
원석의 결정처럼 생긴 새까만 색의 거대한 돌덩이.
그리고 그곳에서부터 수많은 리저드 떼가 지상으로 뛰어내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