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8화 (208/212)

「보상을 사용하시겠습니까?

YES / NO」

나는 갑작스레 떠오른 시스템 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아직까지 GM과 시스템의 영향력이 잔재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 세계가 결국 게임이 아닌 것을 완전히 깨우쳤음에도 불구하고.

‘하긴…… 이곳에서도 스킬을 쓸 수 있다는 게 말이 안 되긴 했지.’

오랫동안 ‘죽음’이 내린 저주 속에서 살다가 결국 그 힘과 정신마저 동화되었다는 카셀처럼.

나 또한 너무 오랫동안 그 세계에 있어서, 그곳에 동화되기라도 한 걸까.

나는 투명한 네모 창 너머, 넘실거리는 강물을 내려다보았다.

‘……어쩌면 나는 그 세계로 다시 돌아가고 싶은 걸까.’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경찰들을 피해 무작정 달렸다지만.

어쩌면 무의식중에 이곳으로 와야 한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이 대교에서 뛰어내려 그 세계에 처음 갇혔을 때처럼.

다시 이곳으로 오면, 이번에도 현실에서 도망칠 수 있을 거라 여겼을지도.

“아니, 여기가 처음은 아닌가…….”

실없이 웃으며 혼잣말을 내뱉을 때였다.

끼이이이익―!

뒤편에서 차가 급제동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송사리!”

누군가 우악스럽게 내 이름을 불렀다.

귀에 익은 목소리에 나는 놀란 눈으로 뒤를 돌았다.

여러 대의 경찰차 중 한 대에서 중년의 사내가 헐레벌떡 내려서고 있었다.

“정신 차리고 회사 잘 다니는 것 같아서 가만 놔뒀더니, 대체 이게…….”

“…….”

“이게 뭐 하는 짓이야!”

남자가 시뻘게진 얼굴로 내게 버럭 화를 냈다.

나는 허망한 음성으로 그를 불렀다.

“큰아버지…….”

대체 언제 큰아버지까지 불러낸 걸까.

협상가도 모자라 친인척까지 불러낸 걸 보니, 진짜 무슨 범죄자를 회유하는 영화 속에서나 나올 법한 장면이 연출됐다.

어처구니가 없는데, 그 와중에도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라고 조금 반갑기도 했다.

솔직히 몇 번 온 연락을 철저히 씹은 후로 다시는 못 볼 줄 알았다.

“사리, 너 있는 곳이라 해서 투자하는 셈 치고 반값도 안 되는 돈으로 우리 회사 물건도 납품하고 있구만……!”

“…….”

“너 이렇게 큰아버지 얼굴에 먹칠할 거야?! 어?”

큰아버지는 일그러진 얼굴로 내게 계속해서 호통쳤다.

전혀 몰랐던 사실이기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집에서 나온 후로 나는 아예 연을 끊고 산다고 생각했는데.

대체 언제 그런 것에까지 손을 썼단 말인가.

“빨리 이리 내려와!”

난간에 매달려 있는 나를 보며 큰아버지가 크게 손짓했다.

“일단 서로 같이 가서, 변호사고 뭐고 붙여주면 되는 일 아니야!”

나도 이제 머리가 굵어서, 잘 알고 있다.

아버지의 사업을 훔쳐 간 큰아버지가, 그렇게 나쁜 사람만은 아니라는 것을.

말은 못되게 해도 그가 아버지의 장례비는 물론 내 병원비와 학비, 생활비를 책임져 준 것만은 부정할 수 없었다.

“……큰아버지.”

나는 손을 허우적거리는 큰아버지에게 뒤늦은 인사를 건넸다.

“저 거둬주셔서 감사했어요.”

그럼에도 그들을 받아들일 수 없는 건.

내가 남들처럼 평범해지지 못하고, 끝내 강으로 뛰어내린 건.

“……그런데요. 저는 여기서 어울려서 살 수 없었나 봐요.”

얕은 물에서 사는 송사리의 수명은 기껏해야 1~2년, 길어 봤자 5년이다.

이것도 깨끗한 급수와 알맞은 환경이 조성되었다는 전제하에 말이다.

하지만 내 현실은.

그토록 돌아가길 고대하던, 내가 살아갈 세상은 그렇지 못했다.

어릴 때 당한 사고의 후유증으로 드문드문 공백이 있는 삶, 이제는 천성이 된 우울증.

좋았던 추억보다 힘들었던 기억이 더 많은 것을 보면, 나는 애초에 맞지 않는 물에서 살고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오히려 좋았던 기억을 꼽자면…….’

문득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이들이 있었다.

이쪽 세상에서는 한 명도 가질 수 없었던, 내가 유일하게 ‘동료’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들과의 추억이.

“각자 맞는 물이 따로 있었나 봐요.”

나는 큰아버지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강물을 바라보며 씁쓸히 중얼거렸다.

“사리야, 그게 대체 무슨 소리……!”

“송사리 씨! 일단 진정하시고, 난간에서 떨어지십시오!”

내 한탄 같은 말에 큰아버지에 이어 확성기를 든 경찰들이 다급히 외쳤다.

어차피 초능력 같은 이상한 힘을 쓰는 것을 들킨 이상, 여기서 평범하게 살아가기는 글렀다.

나는 조금 홀가분해진 마음으로 마침내 최후의 선택을 끝마쳤다.

“저도 이제 그만 평범해지러 가볼게요.”

손을 들어 인사하는 것과 동시에, 몸이 아래로 기울었다.

「보상을 사용합니다.」

바뀐 시스템 창에 이어 눈앞이 새하얗게 점멸했다.

* * *

다시 눈을 떴을 때.

나는 한적한 골목길 한복판에 서 있었다.

익숙한 담벼락. 층고는 낮으나 오밀조밀 자리한 정겨운 건물들.

중세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의복을 입고 다니는 사람들과 저 멀리 보이는 화려한 흰색 궁전까지.

‘돌아왔다.’

제니스의 수도로.

그것을 깨달은 나는, 허겁지겁 내 몸뚱이부터 확인했다.

그리고 곧장 패닉 상태에 빠졌다.

“이, 이게 무슨…….”

놀랍게도 나는 그대로였다.

로브를 뒤집어쓰고 다니는 분홍 머리의 마법 소녀 캐릭터, 샤리 아즈라엘이 아닌.

검은 머리의 평범한 20대 여자, 송사리의 모습 그대로라는 소리다.

흰 블라우스와 검은색 슬랙스를 입은 채 들고 있는 루미에카르가, 지독히도 이질적이었다.

“아니, 돌려줄 거면 모습도 같이 돌려놔야 할 거 아니야!”

나는 기가 막혀서 발을 구르며 허공에 소리 질렀다.

힘은 그대로 쓸 수 있게 해줬으면서, 외양은 또 바꿔주지 않는다니.

페널티도 아니고, 이 무슨 장난 같은 짓이란 말인가.

그러나 아무리 소리쳐도 시스템 창은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 실시간 채팅창은 더더욱.

HP창, MP창, 언제나 꽉 차 있던 인벤토리와 코인 창도.

아니, 아예 시야에서 게임 인터페이스 자체가 사라졌다.

이 세계가 게임 속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으니 당연한 일이겠지만.

나는 전과는 퍽 달라진 상황에 급속도로 움츠러들었다.

‘……이 모습으로 대체 어떻게 만나.’

돌아오면 곧장 그리운 얼굴들부터 볼 생각이었는데.

이렇게 다른 모습으로 ‘샤리 아즈라엘’이라고 우기면 그 의심병 말기 환자 놈들이 퍽이나 믿어주겠다.

‘오히려 어디서 검을 훔쳤냐고 죽이려 들지나 않으면 다행인데…….’

쭈그러드는 자신감에 한숨을 푹 내쉴 무렵이었다.

“저기 온다!”

“와아아아아―!”

별안간 커다란 함성이 온 동네에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나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골목 밖이 수많은 인파로 북적이고 있는 것이 보였다.

‘무슨 일이지?’

황궁과 신전, 귀족들의 대저택이 포진해 있기에 수도의 대로는 시끄러울 일이 별로 없었다.

이렇게 인파들이 몰릴 이유는 기껏해야 축제나, 큰 행사가 있을 때뿐인데…….

‘혹시…… 토벌단이 지금 돌아온 건가?’

그러나 현실과 이곳의 시간은 크게 차이 나는 편이었다.

그렇기에 토벌단이 지금 돌아왔다는 건 시기적으로 맞지 않았다.

현실에서 4일 남짓 있다 왔으니, 이곳은 이미 3, 4년 정도가 지나 있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나는 미미하게 솟구치는 희망을 놓지 못하고 서둘러 골목 밖으로 뛰어나갔다.

“잠시만요! 죄송해요! 잠깐 확인만……!”

이미 잔뜩 몰려 있는 구경꾼들 사이를 마구 비집고 앞으로 나아가자, 몇몇 사람들이 내게 짜증을 냈다.

“이봐! 거 우리도 기다려서 자리 잡은 건데 그렇게 끼어들면…….”

하지만 말없이 검을 들어 보이자, 다들 조용히 길을 터줬다.

그렇게 힘겹게 맨 앞까지 당도했지만, 이미 구경거리는 지나간 후였다.

아는 얼굴들은 보이지 않고, 처음 보는 기사들의 행렬만 줄지어 서 있던 것이다.

“아…….”

나는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있는 힘껏 까치발을 들어 앞을 바라보려 했지만, 인파들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어?”

그러던 중, 일렬종대로 행진하는 기사들이 입고 있는 갑옷이 눈에 들어왔다.

‘저건…… 헤일리 문양이잖아.’

기사들의 갑옷에 새겨진 가문의 인장이 모두 헤일리 백작저에서 본 것과 같았다.

‘왜 아담의 기사들이…….’

혼란만 남긴 채로 행진은 끝나 버렸다.

황궁 쪽으로 사라지는 기사들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에잉, 뭐야. 이번에도 공쳤대?”

“벌써 몇 년짼지…… 영웅들이라고 환대해주는 것도 한두 번이지, 슬슬 지겹구먼.”

“얼마 전에 황제 폐하께서 새 후계자를 공표한 후부턴 거의 매달 갔다 오는 것 같지 않수?”

그 순간 귀에 들어오는 숙덕거림에 나는 휙 시선을 돌렸다.

구경꾼들 몇이 구석에 모여 조금 전의 행진에 대해 떠들고 있는 게 보였다.

“아무래도 그럴 수밖에 없겠지. 제아무리 토벌 영웅들이라도, 황태자 전하가 없으면 다들 닭 쫓던 개 신세나 다름없어질 텐데. ”

“닭 쫓던 개 신세는 무슨! 그때 뭐, 이종족 노예 출신 놈도 귀족 작위 얻고 출세했다더만! 나라면 그것만으로도 가문의 영광으로 알고 살 거……”

“저기요. 그게 무슨 소리예요?”

“으억!”

그들에게 다가가 불쑥 묻자, 대화를 나누던 남자들이 화들짝 놀라 나를 돌아보았다.

“저, 저흰 아무 말도 안 했습니다!”

누군가 반사적으로 변명했다.

아무래도 조금 전 지나간 기사들 앞에서는 대놓고 할 수 없는 얘기였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들은 곧 내가 기사가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고 눈살을 찌푸렸다.

“뭐야. 아가씨 누구요?”

“방금 한 얘기요. 궁금해서요.”

“알 거 없수!”

말해주지 않을 작정인지, 남자들이 홱 등을 돌리며 황급히 자리를 뜨려 했다.

나는 ‘이종족 노예 출신 놈’을 언급했던 남자를 얼른 붙들었다.

제일 잘 알고 있을 것 같아서였다.

“뭐, 뭐야?!”

“제가 지금 제정신이 아니라서요. 좋은 말로 할 때 좀 알려주세요.”

“허, 참! 보아하니 타국 사람인 것 같은데, 남의 나라 일에 신경 쓰지 말고 가던 길이나……!”

“온슬럿.”

잠시 후.

나는 얼굴이 푸르뎅뎅해진 남자들에게서 모든 이야기의 전말을 들을 수 있었다.

좀처럼 믿을 수 없는 얘기였다.

‘카셀이…… 실종 상태라고?’

토벌단을 꾸려 마물 토벌을 떠났던 황태자는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

그를 제외한 나머지 토벌 대원들은 모두 돌아와 영웅으로 추앙받게 됐는데, 오로지 황태자만.

카셀 하나만 감쪽같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아담을 필두로 한 토벌 영웅들이 매년 대대적인 수색에 나섰지만, 실종된 황태자의 시신조차 찾지 못했다.

한동안 숨죽이고 있던 황제는 황태자의 실종이 길어질수록 슬슬 다시 고개를 쳐들기 시작했고.

급기야 어디선가 사생아를 데리고 와 새 후계자로 내세웠다.

그리고 이 모든 사태가 벌어지기까지…….

3년 6개월이란 시간이 흘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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