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꺼풀 사이로 드러난 새빨간 홍채.
그 안에 또렷이 담겨있는 내가 보였다.
그러자 막혔던 숨통이 확 트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하…….”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가만히 울고만 있자, 카셀이 이맛살을 좁혔다.
“왜…… 울고 있지?”
그 기막힌 울음에, 나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걸, 몰라서 물어요?”
“…….”
진짜 모르는 건지, 모른 척하는 건지.
놈은 그저 인상을 찌푸린 채 나를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
‘네가 미친 짓을 했잖아.’
용암처럼 뜨거운 덩어리가 울컥 목 끝까지 차올랐다.
네가 나를 쫓아온답시고, ‘죽음’과 정신을 동화하는 미친 짓을 해서.
내가 여기로 영영 돌아오지 않았더라면, 처참하게 죽어갔을 네 꼴을 조금 전에 내 눈으로 똑똑히 봐서.
그 모든 말들을 뒤로한 채, 나는 허망한 목소리로 물었다.
“……여기서 뭐 해요.”
“…….”
“여기서, 이 꼴로 대체 뭐 하고 있냐고요.”
“…….”
“왜 검은 액체에 삼켜져 있던 건데요, 왜……!”
그러지 말라고 밴까지 해줬잖아.
마지막엔 거의 새된 비명 같은 소리가 튀어나왔다.
나는 정말로, 이런 것을 원한 적이 없었다.
내 생명이고, 마나고, 모든 것을 다 쏟아부어서 마룡을 죽였을 때조차 아쉽거나 슬프지 않았다.
오히려 그렇게라도 그의 회귀를 막을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기뻤다.
그가, 소중한 사람들을 잃는 절망을 또 한 번 겪지 않고 엔딩을 지을 수 있어서.
그런데…….
“너야말로 여기 어떻게…… 원래 살던 곳에 있던 게 아니었나?”
그는 내가 여기 있는 게 이해가 가지 않는 듯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말을 듣자, 더욱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내 진짜 모습을 보고도 전혀 놀라지 않는 꼴을 보니…….
이로써 그가 현실 세계까지 쫓아 와 마물들로 나를 찾아낸 게 확실시되었다.
마물의 핵에서 쏟아져 나오던 리저드와 라이칸, 그리고 고대 마룡.
그것들이 모두 카셀이었던 것이다.
그 기막힌 사실을 깨달은 나는, 헛웃음을 터뜨리듯 흐느꼈다.
“하, 하…… 이 미친놈아. 할 짓이 없어서 그런 위험한 짓을…….”
“울지 마.”
그때였다.
불현듯 한쪽 볼 위에 미지근한 온기가 닿았다.
“그렇게 울지 않아도, 다 알려줄 테니까.”
흐르는지도 몰랐던 내 눈물을, 제 손에 문지르듯 닦아 내며 남자가 덤덤히 말했다.
“내게 저주를 건 놈과 거래를 했다.”
“…….”
“알고 보니, 놈은 다른 차원으로 넘어갈 방법을 모르더군. 이곳을 몇 번이나 멸망시켜도 그곳에 도달할 수 없었다고 했지.”
“…….”
“우습지 않나? 그토록 탐내던 땅이었는데, 애초에 밟을 수조차 없는 존재였다는 게…….”
그 말에 내가 정말로 웃길 바라는 건지, 카셀이 어설프게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하나도 웃기지 않았다.
“그래서요.”
냉정히 되묻자, 그가 조금 시무룩해진 얼굴로 덧붙였다.
“그래서…….”
“…….”
“그 땅을 구경시켜줄 테니, 놈의 힘을 내게 넘기라 했지.”
나는 그 말에 질끈 눈을 감았다.
설마 했던 가정들이, 모두 들어맞았기에.
“그리고 너를 찾기 위해 그곳으로 넘어갔다.”
“…….”
“너와 같은 이방인들이 이곳에 왔던 것처럼.”
굳이 듣지 않아도 그 과정이 훤히 보이는 듯했다.
그는 기어이 불면 포션을 마시고, 혼수상태에 빠졌을 것이다.
그리고 나와 같이 영혼 상태로 차원을 넘어 내가 사는 지구로 넘어왔겠지.
다만 ‘죽음’과 거래했기에 온전한 모습으로 나타날 수는 없었으리라.
그는 그토록 두려워하고 혐오하던 재앙, 그 자체가 되었다.
오로지 나 때문에. 나를 찾기 위해서…….
“……왜요?”
모든 게 밝혀진 후에도, 나는 좀처럼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다 끝나면, 잘 살기로 했잖아요.”
“…….”
“아무런 꿈도 꾸지 않고 깊게 잠들고 싶다면서요. 그런데 왜 그런 바보 같은 짓을 했어요.”
눈물이 멎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내 볼을 감싸 쥔 채 눈물을 닦아내고 있는 손 위에 내 손을 겹쳤다.
그만 떼어내려 한 건데,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할 말이 있었어.”
그가 왜인지 다급하게 내뱉으며, 상체를 일으켰다.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어서, 기어이 내가 사는 세상까지 쫓아온 것이란 말인가.
궁금했지만, 한편으로는 듣고 싶지 않았다.
무서웠다.
쓸모없는 기대를 품고, 좌절하고 상처받는 일 따위는 처음부터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평범한 사람들처럼 그런 것을 서슴없이 하기에는, 나는 너무 나약하고 빈곤한 인간이었기에.
“……깨어나셨으면, 그만 돌아가요.”
나는 결국 카셀의 시선을 피하며 몸을 일으키려 했다.
“가지 마.”
그러나 채 다리에 힘을 주기도 전에, 그가 나머지 한 손으로 내 어깨를 와락 움켜쥐었다.
“모든 게 끝나도 내 곁에 있어 줘, 샤리 아즈라엘.”
“…….”
“마지막에 그 말을 하지 못해서…… 윽.”
조금 전 무리해서 움직인 건지, 그가 갑자기 이를 악물고 몸을 굳혔다.
반사적으로 그를 부축하려던 나는 멈칫 뻗으려던 손을 멈췄다.
“지금, 무슨…….”
조금 전에 들은 말이 뒤늦게 머릿속에 입력됐다.
그런데 좀처럼 믿기지 않아서.
내가 지금 무슨 말을 들은 건지…….
“나한테…… 나한테, 왜 이래요.”
한동안 넋을 놓고 카셀을 응시하던 나는 쥐어짜듯 목소리를 내어 물었다.
“그냥 일개 약재상일 뿐이라면서요.”
“…….”
“마지막까지 전투에서 배제하고 신경도 안 썼잖아요.”
나는, 나는 그래서, 그래서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는데, 왜.
왜 이제 와서…….
내 물음에 신음을 삼키던 카셀이 불쑥 고개를 들었다.
그가 어쩐지 원망이 담긴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그러는 너야말로 나한테 왜 그랬는데.”
“뭐를…….”
“왜 압송되던 내게 돌 대신 포션을 던지도록 이방인들을 유도했지?”
그 말에 나는 스르륵 입을 벌렸다.
그가 그것까지 알고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기에.
카셀은 그것에 그치지 않고 계속해서 내 과거 행적을 파헤쳤다.
“왜 비밀 서고에서 나를 위해 희생했는데.”
“그건…….”
“일부러 작전에서 제외했다는 것을 알았으면서, 왜 굳이 나서서 마룡과 함께 죽어버린 거지?”
그건.
‘당신이 아프지 않길 바라서. 당신이 행복해졌으면 해서.’
어느 순간부터였을까.
스치듯 카셀이 안타깝다는 생각을 하게 됐을 무렵부터였던가.
게임 엔딩은 점점 뒷전이 되고, 어느새 그의 안위를 바라며 움직이는 나를 발견할 때가 종종 있었다.
외면한 적은 많았어도, 끝내 부정하지 못했다.
잠든 얼굴을 보고 가슴이 두근거리던 그 순간.
처참한 그의 과거를 마주할 때마다 느끼던 고통과 저주로부터 반드시 벗어나게 해주겠다는 무수한 다짐들.
떨림, 설렘.
꼭꼭 숨겨왔던 마음 한 자락을.
“…….”
그러나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할 수 없는 것에 가까웠다.
그때였다.
“네가 매번 눈 뒤집고 널 뒤쫓을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잖아.”
“…….”
“네가 내게 죽음이 아닌 미래를 꿈꾸게 했잖아, 네가!”
“…….”
“……나를 미친놈처럼 굴게 만들어 놓고, 인제 와서 내가 마지막까지 널 배제하고 신경도 쓰지 않았다고?”
내 어깨를 쥔 채 무섭게 나를 몰아붙이던 카셀이, 갑자기 얼굴을 절박하게 일그러뜨렸다.
“제기랄, 그럼 어떤 등신 새끼가 마음에 담은 여자를 죽을 자리로 앞세우는데.”
갑작스레 쏟아져 나오는 말에 나는 일순 정신이 혼몽해졌다.
“네……? 방금 뭐라고 하신…….”
멍청한 얼굴 되묻자, 그가 깊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어린아이에게 일러주듯, 한 자, 한 자 짓씹듯 되뇌었다.
“내가 널.”
“…….”
“널 마음에 담았다고, 샤리 아즈라엘.”
“…….”
“사랑하고 있다는 소리야.”
이렇게나 또렷이 말해주고 있는데.
내 머릿속은 여전히 새하얗기만 했다.
우리가 이렇게 적나라한 고백을 주고받을 수 있을 거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한 적 없었는데…….
그런데 사람 마음이라는 게 참 간사해서.
사랑한다는 소리를 듣자마자, 얼굴이 벌게지고 숨이 차올랐다.
지금 이럴 상황 아닌 거 아는데도, 가슴이 속절없이 떨렸다.
그런 나를 보며 카셀이 조금 절박한 표정으로 또 한 번 읊조렸다.
“그러니까, 제발 이제 도망가지 말고 내 곁에 있어.”
마룡을 죽이기 직전에 봤던 예의 그 얼굴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좋으니까…….”
“…….”
“왜 그런 표정이지?”
말을 잇던 그가 고요한 나를 의아하다는 듯 돌아보았다.
내내 얼이 빠져 있던 나는, 그제야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저 이런 고백 받아본 적 처음이에요.”
“뭐?”
열렬한 고백에 이런 대답이 돌아올 줄은 몰랐는지, 카셀이 일순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곧 헛웃음을 터뜨리며 대꾸했다.
“나도 처음이야, 이런 고백 한 거.”
“게임 캐릭터를 좋아하게 된 것도요…….”
나는 카셀의 눈치를 보며 기어가는 목소리로 덧붙였다.
내 딴엔 용기 내어 그의 고백에 답을 준 것이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카셀이 또 한 번 실소했다.
“그래서, 그 게임 캐릭터 중 하나가 된 기분은 어떤데.”
“그건…….”
생각보다 좋지 않았다.
왜냐하면, 예전만큼 스탯(Stats)이 영 높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더 이상 눈물을 닦아준 카셀의 손을 떼어내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큼지막한 손등을 매달리듯 부여잡고, 힘겹게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저요……. 이제 예전 같은 능력이 없을지도 몰라요.”
그래도 이런 나를 버리지 말라고.
그런 내게, 남자가 답했다.
“괜찮아. 예전에도 그렇게 도움이 된 건 아니었어. 사고만 치고 다녔지.”
“뭐라고요?”
“농담이다.”
내가 좋아하는 남자는, 전혀 농담하는 것 같지 않은 얼굴로 농담을 지껄이는 재주를 가졌다.
“그리고…… 이제 한 푼도 없는 빈털터리고요.”
“그건 걱정하지 마. 300번 넘게 회귀하는 동안 알아둔 광맥들이 있다. 수도로 돌아가면 몇 개 넘겨주지.”
“오, 그건 좀 혹하는데.”
그리고 이 세계에서 가장 돈 많은 재력가이기도 했다.
“아, 이게 아니라.”
한순간 금전에 혹한 나는 가까스로 도리질을 치며 본래의 주제로 돌아왔다.
“저 생각보다 어리광도 잘 부려요.”
“…….”
“눈물도 많고, 이 나이 먹도록 철도 안 들었어요.”
“그런데.”
“그래도…… 그래도 괜찮으면…….”
옆에 있겠다고.
그렇게 말하려던 순간.
“으읍!”
뜨거운 숨결이 입술을 덮쳤다.
거침없이 혀를 타고 넘어와 내 호흡과 생각, 영혼마저 모조리 빨아들이는 듯한 카셀의 입맞춤에.
나는 결국 눈을 감고 그의 목을 와락 끌어안았다.